로마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은혜가 왕이 되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립니다.」
그런데 몇 문장도 지나지 않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고난도 자랑합니다.」 평화를 얻었다면서 왜 여전히 고난을 겪을까요?
바울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도 고난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연약하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졌고,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는 근거가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이 확신을 설명하다가 독자를 아주 먼 옛날로 데려갑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때입니다.
왜 갑자기 아담일까요?
바울은 예수님의 구원을 개인이 죄를 용서받는 사건에만 한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인간 전체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 주려 합니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한 분 예수님을 통해 은혜와 생명이 넘쳐흐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은 아담이 무너뜨린 것을 겨우 원상태로 되돌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은 이 넘치는 은혜를 따라갑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지나, 마침내 은혜가 왕으로 다스리는 세상에 이릅니다.
의롭게 된 사람은 이제 어디에 서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립니다.로마서 5:1 · 두루새김
바울이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평화」입니다.
우리는 흔히 평화를 걱정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줄어드는 마음속의 안정감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화해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서로 맞서던 사람이 이제 그분과 화해한 관계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이 평화는 인간이 충분히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평온해야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안과 슬픔 속에서 흔들리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감정과 구별됩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평화를 말하면서도 곧바로 고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상태를 2절에서는 다른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또 그분을 통해 믿음으로 이 은혜에 나아갈 길을 얻었고, 그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희망을 자랑합니다.로마서 5:2 · 두루새김
은혜에 나아갈 길이 열렸고, 이제 그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나아갈 길」은 은혜를 받을 가능성보다 풍부한 말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관계가 열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은혜를 잠깐 경험하고 바깥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룬 일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은혜를 발판으로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까요? 바울은 아직 기다려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희망을 자랑합니다.」
로마서 3:23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영광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희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영광을 향한 희망이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재는 이미 은혜 안에 서 있으면서,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이에서 고난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에는 중요한 사본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원문은 한 글자 차이로 「평화를 가집니다」로도, 「평화를 가집시다」로도 사본에 나타납니다. 하나는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그 평화를 누리도록 권하는데, 양쪽 모두 오래된 사본의 지지를 받습니다. 두루새김은 「평화를 누립니다」로 옮겨,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새로운 상태를 선언하는 것으로 읽습니다.
왜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하는가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고난도 자랑합니다. 고난이 참고 견디는 힘을 길러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고 견디는 힘은 시련을 견뎌 낸 사람됨을, 그런 사람됨은 희망을 길러 줍니다.로마서 5:3–4 · 두루새김
로마서 3:27에서 바울은 인간의 자랑이 설 자리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모순일까요? 자랑의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주장하는 자랑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희망을 자랑하고, 「고난도 자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희망을 품은 사람은 아직 그 영광이 완성되지 않은 세상에서 고난을 겪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고난이 희망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며,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희망이 깊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2절에서 이미 희망을 말한 바울은, 고난과 참고 견디는 힘을 지나 4절에서 다시 희망으로 돌아옵니다. 희망이 고난을 통과하면서 시험받고 단련된다는 뜻입니다. 희망이 있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고난을 겪을 때 그 희망이 무엇을 근거로 서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시련을 견뎌 낸 사람됨」은 시험을 거쳐 참됨이 확인된 상태나 성품을 가리킵니다. 금속을 시험하여 그 성질을 확인하듯이, 고난 속에서 믿음과 희망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고통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고난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더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 간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설명은 고난 자체가 선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에게 고난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이유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5 · 두루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신뢰가 헛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희망을 확실하게 만들어 줄까요? 인간의 강한 의지나 고난을 견뎌 낸 경험보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은 하늘에 있는 진리로만 소개되지 않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요엘 2:28–29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선물과 부어 주신다는 이미지는 주제 면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두 측면에서 설명할 준비를 합니다. 하나는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랑입니다. 성령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실제 사건에 근거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님의 사랑」은 문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인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인지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뒤 8절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고 말하므로,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이 중심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일으킨다는 의미까지 제외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졌을 때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알맞은 때에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6 · 두루새김
바울은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 설명하면서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인간이 먼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뒤가 아니라, 아직 힘이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인간 사회의 경험을 끌어옵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좀처럼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군가 죽을 용기를 낼지도 모릅니다.로마서 5:7 · 두루새김
어떤 해석은 의로운 사람을 법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으로, 선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두 표현을 조금씩 달리 쓰며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를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사람은 존경하거나 사랑할 만한 사람을 위해서라야 희생할 수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가능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대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로마서 5:8 · 두루새김
인간이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했을 때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모두 바로잡았을 때도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좋은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 근거를 죄인 자신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을 입증하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이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은 죄인에게 분노만 품고 계셨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마지못해 사랑하게 되신 것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기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로 행동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랑을 과거의 아름다운 사건으로 돌아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원수였을 때 화해시켜 주셨다면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분노에서 구원받을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서 5:9 · 두루새김
이미 일어난 일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확신하는 방식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하게 된 우리가 그 아들의 생명으로 구원받을 것은 더욱 분명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10 · 두루새김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화해하게 된 우리를 마지막까지 구원하시는 일은 얼마나 더 확실하겠습니까? 바울이 두 번 말하는 「더욱 분명」은 감정적 확신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동을 근거로 미래를 바라보는 설명입니다.
왜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 아들의 생명」을 말할까요? 이 표현을 예수님께서 땅에서 사신 삶과 가르침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뜻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문맥에서는 죽음과 대비되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예수님의 생명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죽으신 예수님에 관한 과거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금 살아 계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졌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1절의 평화는 서로 맞서던 관계가 끝난 상태에 그치지 않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화해는 법정의 판결 이미지보다,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측면을 더 드러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지막에 또다시 「자랑」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었습니다.로마서 5:11 · 두루새김
2절에서는 장차 누릴 영광에 대한 희망을, 3절에서는 그 희망을 시험하는 고난을 자랑했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의 근거이신 하나님 자신을 자랑합니다. 바울의 자랑은 인간 자신의 위대함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화해를 베푸신 하나님께 이릅니다.
왜 인간에게 이런 화해가 필요했을까요? 바울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담을 등장시킵니다.
죽음은 언제부터 임금 노릇을 했는가
그러므로 이렇게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로마서 5:12 · 두루새김
바울은 갑자기 창세기 3장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죄는 세상에 들어오고,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퍼집니다. 잠시 뒤에는 죽음이 「왕처럼 다스렸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죄와 죽음을 개인의 행동이나 몸의 현상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세상을 지배하는 힘처럼 그립니다. 아담 한 사람의 잘못이 낳은 결과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원문에서 12절은 「~듯이」(ὥσπερ)라는 비교를 여는 말로 시작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시작을 「그러므로 이렇게 비교해 보겠습니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비교를 바로 완성하지 않습니다. 13–14절에서 율법 이전의 죄와 죽음을 설명하고, 15–17절에서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를 강조한 뒤, 18절에 이르러 비교를 다시 정리합니다. 아담과 예수님을 같은 크기의 두 사건처럼 곧바로 나란히 놓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의 어려움
12절은 오래전부터 해석이 갈려 온 구절입니다. 한 읽기는 모든 사람이 각자 실제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퍼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곧이어 아담 한 사람의 잘못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므로, 문제는 그보다 복잡해집니다.
여기서는 두 문제를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왜 죄를 짓고 죽는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12절의 짧은 표현 하나만으로 물려받은 죄의 책임과 실제로 짓는 죄, 죽음이 퍼지는 일 사이의 모든 관계를 확정하기는 어렵고, 이 구절에서 원죄에 관한 특정한 신학 체계의 모든 세부 사항을 곧바로 끌어내는 데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은 서로 끊어진 개인적 사건들의 모음이 아니라, 아담에게서 시작된 하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없었는데도 죽음이 다스렸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세상에는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으면 죄가 장부에 기록되지는 않습니다.로마서 5:13 · 두루새김
죄가 「장부에 기록되지는 않습니다」라는 말은 율법 이전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 생각을 막습니다.
그런데도 아담부터 모세까지 죽음이 왕처럼 다스렸습니다. 아담이 명령을 어긴 것과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 다스렸습니다. 아담은 뒤에 오실 분을 미리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로마서 5:14 · 두루새김
아담은 하나님께 직접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어겼고,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전달했습니다. 그 사이에 살았던 사람들은 직접 주어진 명령을 어긴 것도, 모세의 율법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었습니다.
죽음의 현실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행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율법이 죄를 처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지배가 율법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담을 「뒤에 오실 분을 미리 보여 주는 인물」이라고 부릅니다. 아담은 순종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셨습니다. 아담을 통해 죽음이 퍼졌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정반대의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12절의 「~때문에」로 옮긴 원문 에프 호를 두고 해석 전통이 갈립니다. 서방 교회에서는 이를 「그 사람 안에서 모두가 죄를 지었다」로 읽는 흐름이 강해,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행동했고 그의 죄가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습니다. 동방 교회의 여러 전통은 아담을 통해 죽음이 들어왔고 그 죽음의 조건 아래에서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었다고 설명해 왔으며, 그리스어 표현을 라틴어 해석과 곧바로 같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됩니다. 또 12절을 끝맺지 않은 비교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8절이 그 비교를 문법적으로 직접 완성하는지, 앞선 논의를 새롭게 요약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사람의 잘못보다 훨씬 더 큰 한 분의 은혜
아담과 예수님은 한 사람의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서로 대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두 사람이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15–17절에서 그는 그 영향의 성격과 크기가 어떻게 다른지 세 차례 설명합니다.
첫 번째 차이: 죽음보다 더 넘치는 은혜
그러나 은혜의 선물은 그 잘못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훨씬 더 넘쳐났습니다.로마서 5:15 · 두루새김
바울은 아담이 가져온 죽음과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은혜가 정확히 같은 크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넘쳐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아담이 일으킨 문제에 겨우 맞먹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죄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은혜라는 수학적 비교만이 아니며, 바울은 다음 절에서 무엇이 다른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두 번째 차이: 하나의 잘못과 수많은 잘못
또한 그 선물의 결과는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생긴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잘못에서 시작된 심판은 죄가 있다는 판결로 이어졌지만, 은혜의 선물은 많은 잘못이 있는데도 의롭다는 판결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16 · 두루새김
심판은 「한 잘못」에서 시작되었지만, 은혜의 선물은 「많은 잘못이 있는데도」 의롭다는 판결을 가져왔습니다. 아담의 잘못 이후 인간의 역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잘못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담의 첫 잘못 하나만을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후 인간이 저질러 온 많은 잘못까지 다룹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의롭다는 판결은 인류를 아담이 죄짓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미 죄로 가득해진 인간의 역사 속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와 새로운 판결을 가져옵니다.
세 번째 차이: 죽음이 왕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생명 안에서 다스린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죽음이 그 한 사람을 통해 왕처럼 다스렸다면,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왕처럼 다스릴 것은 더욱 분명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17 · 두루새김
아담을 통해 죽음이 왕처럼 다스렸다면, 예수님을 통해서는 생명이 다스릴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생명 안에서 왕처럼 다스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담 아래에서는 죽음이 인간을 다스리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생명 안에서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땅과 그 안의 생물들을 돌보고 다스리는 책임을 맡기신 창세기 1:26–28을 떠올리게 합니다. 죽음이 인간 위에서 왕처럼 다스리던 관계를 예수님의 은혜가 뒤집습니다. 다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권력이나 정치적 권한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죽음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과 지위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사람들은 먼저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다스리는 근거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과 한 분의 순종
그러므로 한 잘못이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는 판결을 가져왔듯이, 한 의로운 행동은 모든 사람에게 의롭다는 판결을 가져옵니다. 이 판결은 생명을 줍니다.로마서 5:18 · 두루새김
바울은 12절에서 시작했던 비교를 가장 간결한 형태로 다시 펼칩니다. 한쪽에는 한 사람의 잘못과 죄가 있다는 판결이, 다른 쪽에는 한 분의 의로운 행동과 생명을 주는 의롭다는 판결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듯이, 한 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19 · 두루새김
바울은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를 「순종하지 않아」와 「순종」으로 설명합니다. 아담의 잘못은 금지된 열매를 먹은 행동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일이었고, 예수님의 의로운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연결됩니다.
그 순종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한 해석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행동을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로마서 5장 앞부분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빌립보서 2:8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해석은 십자가를 그 순종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자리로 보면서, 예수님의 삶 전체에 나타난 한결같은 순종으로 이해합니다. 19절의 「순종」이 오직 십자가의 순간만을 가리키는지, 삶 전체를 포함하는지는 본문이 뚜렷하게 가르지 않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렀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가?
18절에는 「모든 사람」이 두 번 등장합니다. 아담의 잘못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예수님의 의로운 행동도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마지막에 구원한다는 뜻일까요?
해석은 크게 갈립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읽기, 모든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길이 열렸다는 읽기,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 실제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읽기 등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18절의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말과 로마서에서 되풀이되는 믿음의 중요성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것인가에서 생깁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모든 사람의 마지막 운명을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논쟁 때문에 바울이 강조하는 넓은 범위를 좁혀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구원을 소수의 특정 민족에게만 주어진 제한적인 사건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과 견줄 만큼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의미를 갖고, 그 은혜는 아담의 잘못보다 훨씬 더 넘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예수님 사이에 주어진 율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조금 더 깊이
첫째 견해는 두 「모든 사람」을 말 그대로 인류 전체로 보아, 예수님의 구원 행동이 아담의 죄만큼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읽습니다. 이 견해도 로마서의 다른 구절들과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둘째 견해는 17절의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을 향한 5장 첫머리를 근거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는 것과 모든 개인이 믿음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구별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 전체나, 구원이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읽습니다. 셋째 접근은 바울이 두 대표적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강조할 뿐, 그 구원이 각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이 구절에서 직접 다루지 않는다고 봅니다.
죄가 많아진 곳에서 은혜는 넘치고도 넘쳤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잘못이 많아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곳에 은혜가 넘치고도 넘쳤습니다.로마서 5:20 · 두루새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사람들이 더욱 죄를 짓게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율법이 완전하여 사람을 새롭게 하고 지혜롭게 한다고 노래하고, 신명기도 율법을 생명의 길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이미 율법이 죄를 처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자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행동은 명령을 어기는 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한편 바울이 죄를 더 잘 알게 된 것을 넘어, 율법이 주어진 상황에서 실제로 죄를 짓는 일이 늘어나는 현상까지 말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에서 바울은 율법 자체를 죄악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주어져도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힐 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원문은 죄가 많아진다는 표현보다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표현을 한층 강하게 쓰고, 「넘치고도 넘쳤습니다」(ὑπερπερισσεύω)는 그 강조를 드러냅니다.
죄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보다 훨씬 더 넘쳤습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은혜를 위해 죄를 더 지어도 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이 장에서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서 은혜가 넘친다는 것은 죄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가 얼마나 강력한 현실인지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은혜가 그 지배보다 훨씬 더 크다는 뜻입니다.
이는 죄가 죽음 안에서 왕처럼 다스렸듯이, 은혜도 의를 통해 왕처럼 다스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5:21 · 두루새김
앞에서는 죽음이 왕처럼 다스렸습니다. 이제는 은혜가 왕처럼 다스립니다.
은혜는 의를 통해 다스리고, 그 목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죄를 용서하는 힘이 아닙니다. 앞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말했듯이,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은 그분의 의로움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이 무너뜨린 것을 되돌리기만 하셨는가
바울은 예수님을 아담의 실패를 수습하는 사람으로만 소개하지 않습니다.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들어왔지만 예수님을 통해 의롭다는 판결과 생명이 주어지고, 한 잘못으로 심판이 이르렀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많은 잘못을 마주하면서도 의롭다는 판결을 가져옵니다. 죽음이 왕처럼 다스리던 자리에서 이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생명 안에서 다스리게 됩니다. 바울이 아담을 불러낸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한 개인의 용서를 넘어 인간을 지배하던 힘 자체를 바꾸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여전히 고난을 겪고, 몸이 약하고, 죽음의 현실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이 없을 때, 원수였을 때 하나님은 이미 행동하셨습니다. 그 희망은 막연히 잘될 것이라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일과, 성령을 통해 지금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고난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이 예수님 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은 이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장은 같은 이름으로 끝납니다. 은혜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5장은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죽음이 왕처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가 왕처럼 다스립니다.
그리고 그 다스림의 중심에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