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은혜가 왕이 되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에게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가집니다」(1절).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몇 문장도 지나지 않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합니다」(3절). 평화를 얻었다면서 왜 여전히 환난을 겪을까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고난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바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도 환난을 겪습니다. 여전히 연약하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졌고,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는 근거가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이 확신을 설명하다가 독자를 아주 먼 옛날로 데려갑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때입니다.

왜 갑자기 아담일까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바울은 왜 인간의 첫 불순종과 죽음의 시작을 설명할까요?

그 이유는 바울이 예수님의 구원을 개인이 죄를 용서받는 사건에만 한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인간 전체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 주려 합니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한 분 예수님을 통해 은혜와 생명이 넘쳐흐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영향력은 단순히 서로 반대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은 아담이 무너뜨린 것을 겨우 원상태로 되돌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아담의 잘못보다 예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큽니다.

로마서 5장은 이 넘치는 은혜를 따라갑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지나, 마침내 은혜가 왕으로 다스리는 세상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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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된 사람은 이제 어디에 서 있는가

로마서 5:1–2 본문 →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가집니다.로마서 5:1 · 본디새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의롭게 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울이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입니다.

우리는 흔히 평화를 걱정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줄어드는 마음속의 안정감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10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화해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1절의 평화는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이 이제 그분과 화해한 관계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이 평화는 인간이 충분히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평온해야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안을 느끼고 슬픔을 겪으며 고난 속에서 흔들리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감정과 구별됩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평화를 말하면서도 곧바로 환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새로운 상태를 2절에서 다른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믿음으로 이 은혜에 나아갈 길을 지니게 되었고, 그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자랑합니다.로마서 5:2 · 본디새김

먼저 은혜에 나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나아갈 길」은 은혜를 받을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보다 풍부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관계가 열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자가 은혜를 잠깐 경험하고 다시 은혜 바깥으로 나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은혜 안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자신의 성취를 발판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까요? 바울은 곧바로 아직 기다려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자랑합니다.」

로마서 3:23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죄 아래 있던 인간이 이르지 못했던 그 영광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된 사람에게는 소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직 그 영광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영광을 향한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재는 두 가지 사실을 함께 지닙니다. 이미 은혜 안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이에서 환난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에는 중요한 사본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평화를 가집니다」와 「평화를 가집시다」가 서로 다른 사본에 나타납니다. 두 형태는 글자로는 한 글자 차이지만, 하나는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진술하고 다른 하나는 그 평화를 누리도록 권면합니다. 양쪽 모두 고대 사본의 지지를 받으며, 어느 독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문장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평화를 가집니다」를 따르면 바울은 의롭게 된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새로운 상태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하는가

로마서 5:3–5 본문 →

그뿐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합니다. 환난이 견딤을 빚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견딤은 단련된 됨됨이를, 단련된 됨됨이는 소망을 빚어냅니다.로마서 5:3–4 · 본디새김

「자랑」이라는 말은 앞선 논증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7에서 바울은 인간의 자랑이 배제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모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랑의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주장하는 자랑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자랑하고,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사람은 아직 그 영광이 완성되지 않은 세상에서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고난이 소망을 무너뜨리는 최종적인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환난 가운데서 소망이 깊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환난에서 견딤이, 견딤에서 단련된 됨됨이가, 그 됨됨이에서 소망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2절에서 소망을 말했습니다. 소망으로 시작했는데, 환난과 견딤을 지나 다시 소망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처음의 소망과 마지막의 소망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지만, 소망이 환난을 통과하면서 시험받고 단련된다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한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환난을 겪을 때, 그 소망이 무엇을 근거로 서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단련된 됨됨이」는 시험을 거쳐 검증된 상태나 성품을 가리킵니다.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서 마음이 강해졌다는 뜻보다 깊습니다. 금속을 시험하여 그 성질을 확인하듯이, 환난 속에서 믿음과 소망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다만 바울이 모든 고통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 고통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고난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더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 간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논증은 환난 자체가 선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에게 환난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최종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이유

그리고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영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5 · 본디새김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신뢰가 헛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어 줄까요? 인간의 강한 의지일까요, 고난을 견뎌 낸 경험일까요? 바울은 그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은 하늘에 있는 진리로만 소개되지 않고, 거룩한 영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두 차원에서 설명할 준비를 합니다. 하나는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랑입니다. 이 둘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실제 사건에 근거합니다.

바울은 이제 그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부어 주심」이라는 표현은 요엘 2:28–29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말씀의 본래 문맥은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백성에게 영을 주시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바울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선물과 「부어 주심」이라는 이미지는 깊은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인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인지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뒤의 8절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다고 말하므로,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이 중심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일으킨다는 의미까지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졌을 때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로마서 5:6–8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아직 힘없을 때에 그리스도가 때맞추어 경건하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로마서 5:6 · 본디새김

「아직 힘없을 때에.」 그리고 「경건하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바울은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 설명하면서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뒤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인간 사회의 경험을 끌어옵니다.

사실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죽는 이는 좀처럼 없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군가 죽을 용기를 낼지도 모릅니다.로마서 5:7 · 본디새김

의로운 사람과 선한 사람을 엄격하게 다른 두 부류로 보든, 같은 뜻을 변주한 말로 보든 핵심은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존경하거나 사랑할 만한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훌륭한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을 용기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가능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대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드러내 보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로마서 5:8 · 본디새김

바울은 그 사랑이 드러난 시점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했을 때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모두 바로잡았을 때도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좋은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 근거를 죄인 자신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을 입증하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기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죄인에게 진노만 품고 계셨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마지못해 사랑하게 되신 것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드러내 보이십니다」라는 말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로 행동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랑을 과거의 사건으로 회상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사건이 우리의 미래를 얼마나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의로운 사람과 선한 사람에 대해, 어떤 해석은 의로운 사람을 법과 정의에 충실한 사람으로, 선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두 표현을 수사적으로 변주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를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원수였을 때 화해시켜 주셨다면

로마서 5:9–11 본문 →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진노에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훨씬 더 확실합니다.로마서 5:9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은 이미 일어난 일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확신하는 방식으로 논증합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곧바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면, 화해된 우리가 그 아들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훨씬 더 확실합니다.로마서 5:10 · 본디새김

이전에는 원수였고, 이제는 화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화해되었고,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수였던 우리를 화해시키셨다면, 이미 화해된 우리를 마지막까지 구원하시는 일은 얼마나 더 확실하겠습니까?

바울은 「훨씬 더 확실합니다」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합니다. 단순한 감정적 확신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동을 근거로 미래를 바라보는 논증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 아들의 생명」을 말할까요? 이 표현을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가르침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뜻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문맥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대비되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생명이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죽으신 예수님에 관한 과거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금 살아 계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졌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은 1절의 평화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적대 관계가 끝났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해는 법정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는 이미지보다 더 인격적인 차원, 곧 단절되었던 관계의 회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지막에 또다시 「자랑」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를 얻었습니다.로마서 5:11 · 본디새김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자랑했습니다.

3절에서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했습니다.

이제 11절에서는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처음에는 장차 누릴 영광에 대한 소망, 다음에는 그 소망을 시험하는 환난,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의 근거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바울의 자랑은 인간 자신의 위대함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화해를 베푸신 하나님께 이릅니다.

이제 바울은 이 변화를 더 큰 이야기 안에 놓습니다. 왜 인간에게 이런 화해가 필요했을까요? 왜 예수님의 죽음과 생명이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질까요?

바울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담을 등장시킵니다.

죽음은 언제부터 임금 노릇을 했는가

로마서 5:12–14 본문 →

이런 까닭에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으며,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듯이—로마서 5:12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은 갑자기 창세기 3장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죄는 세상에 들어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퍼집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죽음이 「임금 노릇을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죄와 죽음을 개인의 행동이나 생물학적 현상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처럼 묘사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 후반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바울은 아담 한 사람의 잘못과 그 결과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12절의 문장은 「~듯이」로 끝납니다. 독자는 그다음에 「그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라는 비교가 이어지기를 기대하지만, 바울은 그 문장을 바로 완성하지 않습니다. 13–14절에서 율법 이전의 죄와 죽음을 설명하고, 15–17절에서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를 강조한 뒤, 18절에 이르러 비교를 다시 정리합니다.

이 구조 자체가 의미 있습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님을 같은 크기의 두 사건처럼 곧바로 나란히 놓지 않습니다. 먼저 죄와 죽음의 현실을 설명하고, 그다음에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더 큰지를 말합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의 어려움

12절은 오래전부터 해석이 갈려 온 구절입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로 옮긴 원문의 에프 호는 문맥에서 「~때문에」로 읽을 수 있고, 여기 제시된 본문은 이 읽기를 따릅니다.

읽기는 크게 갈립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실제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퍼졌다는 읽기, 서방 교회 전통처럼 「그 사람 안에서 모두가 죄를 지었다」고 보아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강조하는 읽기, 동방 교회의 여러 전통처럼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죽음의 조건 아래에서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었다고 보는 읽기입니다. 이 차이는 모든 사람이 왜 죄를 짓고 죽는가 하는 문제와,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12절의 짧은 표현 하나만으로 유전된 죄책과 인간의 실제 죄, 죽음의 확산 사이의 모든 관계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원죄에 관한 특정한 신학 체계의 모든 세부 사항을 곧바로 도출하는 데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은 서로 단절된 개인적 사건들의 모음이 아니라, 아담에게서 시작된 하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없었는데도 죽음이 다스렸다

율법 이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으면 죄를 장부에 달지 않습니다.로마서 5:13 · 본디새김

이 구절만 읽으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죄를 지었더라도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그 생각을 막습니다.

그런데도 아담부터 모세까지 죽음이 임금 노릇을 했습니다. 아담의 어김과 같은 방식으로 죄짓지 않은 이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아담은 오실 분을 미리 보여 주는 본입니다.로마서 5:14 · 본디새김

아담은 하나님께 직접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을 어겼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전달한 사람입니다. 그 사이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담처럼 직접 주어진 특정한 명령을 어긴 것도 아니고, 아직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었습니다.

인간이 처한 죽음의 현실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행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죄를 처음 만들어 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는 율법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갑자기 아담을 「오실 분을 미리 보여 주는 본」이라고 부릅니다. 아담은 불순종했고,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셨습니다. 아담을 통해 죽음이 퍼졌고, 예수님을 통해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정반대의 행동을 한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바로 그 차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에서 18절로 이어지는 문장 구조를 미완결 비교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18절이 12절의 비교를 문법적으로 직접 완성하는지, 앞선 논의를 새롭게 요약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에 대해서는, 각자의 죄를 강조하는 읽기가 인간 각자가 실제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붙들지만, 바울이 곧이어 아담 한 사람의 잘못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제가 그보다 복잡해집니다. 서방 교회의 읽기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행동했으며 그의 죄가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동방 교회 쪽에서는 그리스어 표현 자체를 라틴어 해석과 곧바로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됩니다.

한 사람의 잘못보다 훨씬 더 큰 한 분의 은혜

로마서 5:15–17 본문 →

바울은 아담을 예수님의 본이라고 소개했지만, 곧바로 두 사람이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서로 대응하지만, 그 영향력의 성격과 크기는 같지 않습니다. 바울은 15–17절에서 이것을 세 차례 설명합니다.

첫 번째 차이: 죽음보다 더 넘치는 은혜

그러나 은혜의 선물은 잘못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많은 이가 죽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진 그 선물은 많은 이에게 훨씬 더 넘쳤습니다.로마서 5:15 · 본디새김

바울은 아담이 가져온 죽음의 영향력과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은혜의 영향력이 같은 크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넘쳤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아담이 일으킨 문제에 겨우 맞먹는 정도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죄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은혜가 공급되었다는 수학적 비교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다음 절에서 무엇이 다른지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두 번째 차이: 하나의 잘못과 수많은 잘못

그리고 그 선물의 결과는 죄지은 한 사람을 통한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심판은 한 잘못에서 나와 유죄 판결에 이르렀고, 은혜의 선물은 많은 잘못에서 나와 의롭다는 판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16 · 본디새김

심판은 「한 잘못」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선물은 「많은 잘못」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이 아담의 한 죄와 예수님의 한 의로운 행동만 비교하려 했다면, 두 경우 모두 하나의 행동만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아담의 잘못 이후 인간의 역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담에게서 시작된 죄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잘못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많은 잘못이 쌓인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의롭다는 판결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의롭다 하심은 인류를 아담이 죄짓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미 죄로 가득해진 인간의 역사 속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와 새로운 판결을 가져옵니다.

세 번째 차이: 죽음이 왕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생명 안에서 다스린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죽음이 그 한 사람을 통해 임금 노릇을 했다면,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의의 선물을 받는 이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임금 노릇 하리라는 것은 훨씬 더 확실합니다.로마서 5:17 · 본디새김

아담을 통해 죽음이 임금 노릇을 했다면, 예수님을 통해서는 생명이 임금 노릇을 하리라고 예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의의 선물을 받는 이들이 ... 생명 안에서 임금 노릇」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담 아래에서는 죽음이 인간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생명 안에서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땅과 그 안의 생물들을 돌보고 다스리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창세기 1:26–28). 그런데 로마서 5장에서는 죽음이 인간 위에서 왕 노릇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그 관계를 뒤집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권력자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정치적 지배권을 얻는 일이 아니라, 죽음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과 지위가 주어지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인간이 쟁취한 성취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사람들은 먼저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의의 선물을 받는 이들」이며, 그들이 다스리는 근거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 대조를 가장 간결한 형태로 정리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과 한 분의 순종

로마서 5:18–19 본문 →

그러므로 한 잘못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유죄 판결이 이르렀듯이, 그렇게 한 의로운 행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오는 의롭게 하심이 이르렀습니다.로마서 5:18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은 12절에서 시작했던 비교를 다시 펼칩니다. 한쪽에는 한 사람의 잘못과 유죄 판결이, 다른 한쪽에는 한 분의 의로운 행위와 생명을 가져오는 의롭게 하심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해 많은 이가 죄인으로 세워졌듯이, 그렇게 한 분의 순종을 통해 많은 이가 의인으로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19 · 본디새김

아담의 잘못은 금지된 열매를 먹었다는 행동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순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한 해석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행동을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로마서 5장 앞부분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말하고, 빌립보서 2:8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해석은 예수님의 순종을 삶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순종으로 이해합니다. 십자가는 그 순종의 절정이지만, 예수님의 전 생애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특별히 강조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19절의 「순종」이 오직 십자가의 순간만을 가리키는지, 전 생애를 포함하는지는 본문이 명시적으로 가르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아담의 불순종과 다른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렀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 많은 이가 의인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가?

18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두 번 등장합니다. 아담의 잘못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도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최종적으로 구원한다는 뜻일까요?

해석은 셋으로 갈립니다. 두 「모든 사람」을 문자 그대로 인류 전체로 보아 결국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미친다고 읽는 견해,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 전체나 구원이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읽는 견해, 그리고 이 구절이 아담과 예수님의 대표적 행동이 미치는 보편적 효력을 말할 뿐 그 구원이 각 사람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직접적인 논점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차이는 18절의 보편적 언어와 로마서에서 반복되는 믿음의 중요성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것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모든 사람의 최종적 운명을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논쟁 때문에 바울이 강조하는 보편성을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구원을 소수의 특정 민족에게만 주어진 제한적인 사건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과 견줄 만큼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예수님의 은혜는 아담의 잘못보다 훨씬 더 넘칩니다.

아담 안에서는 불순종을 통해 죄와 죽음의 현실이 펼쳐집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순종을 통해 의롭다 하심과 생명의 현실이 펼쳐집니다. 인간의 삶이 어떤 역사에 속해 있는가, 누구의 행동이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예수님 사이에 주어진 율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바울은 장의 마지막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견해에서는 예수님의 구원 행동이 아담의 죄만큼 보편적이라고 보며, 실제로 로마서 5:18–19를 보편적 구원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다만 이 견해도 로마서의 다른 구절들과의 긴장을 인정합니다. 둘째 견해는 문맥에서 은혜를 받는 이들이 누구인지 이미 밝혀졌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17절에는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의의 선물을 받는 이들」이 등장하고, 5장 첫머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한 의롭게 하심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과, 모든 개인이 믿음과 관계없이 자동으로 최종적인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편적 구원, 보편적 의롭게 하심의 가능성,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의롭게 하심 등 서로 다른 설명들이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곳에서 은혜는 넘치고도 넘쳤다

로마서 5:20–21 본문 →

율법이 끼어든 것은 잘못이 많아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곳에 은혜가 넘치고도 넘쳤습니다.로마서 5:20 · 본디새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들이 더욱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구약성경이 말하는 율법의 선한 성격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편 19편은 여호와야훼의 율법이 완전하여 사람을 새롭게 하고 지혜롭게 한다고 노래하고, 신명기에서도 율법은 이스라엘이 생명의 길을 걷도록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개됩니다.

이 긴장은 앞선 논증에서 풀립니다. 바울은 이미 율법이 죄를 처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행동은 더욱 분명한 위반의 형태를 갖게 되었고,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명령이 주어졌을 때 그 명령을 어기는 새로운 상황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율법이 잘못을 증가시킨다는 말에는 적어도 죄가 명령 위반으로 구체화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바울이 죄에 대한 인식이 늘어났다는 것 이상으로, 율법이 주어진 상황에서 실제 범죄가 증가하는 현상까지 말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읽기의 강조점은 다르지만, 바울이 율법 자체를 죄악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율법이 주어져도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논증을 끝내지 않습니다.

죄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보다 훨씬 더 넘쳤습니다. 원문은 죄가 증가한다는 표현보다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표현을 한층 강하게 사용하고, 「넘치고도 넘쳤습니다」는 그 강조를 잘 드러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진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질문이 생깁니다. 죄가 많아질수록 은혜가 더 넘친다면, 더 많은 은혜를 위해 죄를 더 지어도 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이 장에서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의 논증에서 은혜가 넘친다는 것은 죄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가 얼마나 강력한 현실인지 인정하면서도,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은혜가 그 지배보다 훨씬 더 크다는 뜻입니다.

이는 죄가 죽음 안에서 임금 노릇을 했듯이, 그렇게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임금 노릇을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5:21 · 본디새김

여기서 로마서 5장의 마지막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왕입니다.

앞에서는 죽음이 임금 노릇을 했습니다. 이제는 은혜가 임금 노릇을 합니다.

은혜가 다스립니다. 그 다스림은 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죄를 용서하는 힘이 아닙니다. 이 말은 바울이 앞에서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었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선언한 사실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은 그분의 의로움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담과 예수님의 가장 깊은 대조입니다. 아담의 잘못을 통해 시작된 죄의 지배는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드러난 은혜의 다스림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주신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을 지배하던 권세 자체를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모든 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밝힙니다. 로마서 5장은 이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장은 같은 이름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도, 환난 가운데 있는 소망도, 하나님의 사랑도,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은혜도,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도 모두 예수님께 기대고 있습니다.

은혜가 다스리는 세상

로마서 5:1–21 본문 →

바울은 예수님을 아담의 실패를 수습하는 사람으로만 소개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가져온 결과와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여러 번 대조하지만, 언제나 예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방향으로 논증을 이끕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는 같은 무게의 두 힘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은혜는 넘쳤습니다.

더욱 넘쳤습니다.

마침내 넘치고도 넘쳤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도 여전히 환난을 겪고, 몸은 연약하며, 죽음의 현실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좋은 조건을 갖추기를 기다리신 뒤 행동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힘없고 죄인이며 원수였을 때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화해된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구원하실 것이라는 바울의 확신은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일에 근거한 소망입니다.

한때 죽음이 다스리던 세상이 있었습니다. 아담부터 모세까지 그랬고, 율법이 주어졌다고 해서 죽음의 권세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고,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다스리며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끕니다.

로마서 5장은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끝납니다.

죽음이 임금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가 임금 노릇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스림의 중심에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