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죄에서 해방된 사람의 소속
자유를 얻은 사람에게 다시는 예전 주인에게 복종하지 말라고 명령할 필요가 있을까요?
정말 해방되었다면, 이미 그 주인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바로 그렇게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아직도 죄 안에서 살겠습니까?」(2절)라고 선언하고는, 조금 뒤에 다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임금 노릇 하여 여러분이 그 몸의 욕망에 순종하게 두지 마십시오」(12절)라고 명령합니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는데, 왜 여전히 죄가 다스리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할까요?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단순한 비유나 미래의 희망으로만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결정적으로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믿는 사람의 소속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소속에 들어간 사람은 이제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강렬한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먼저 무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묻힌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노예입니다. 한 주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른 주인에게 속하게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얼핏 보면 서로 다른 두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두 이미지는 같은 질문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면, 그 해방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바꾸나요?
로마서 6장은 죄를 짓지 말라는 명령을 서둘러 내리지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을 이루셨는지 살피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건에서 새로운 삶의 이유를 찾아냅니다.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에 머물러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은혜가 많아지도록 죄에 머물러 있을까요?로마서 6:1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앞 장 마지막 선언에서 나옵니다.
죄가 많아진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도 넘쳤다면, 죄가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죄를 버리는 것보다 죄에 계속 머무는 편이 은혜를 더욱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요? 바울은 이 논리를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복음을 잘못 이해하면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아직도 죄 안에서 살겠습니까?로마서 6:2 · 본디새김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이 의외입니다.
바울은 죄가 나쁜 행동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그만두어야 한다는 이유를 먼저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죄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단순히 새로운 규칙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죄와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절의 「죄에 머물러 있을까요?」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계속 머물다, 지속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바울은 사람이 한 번이라도 죄를 지을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죄 안에 계속 머물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죄를 짓는 개별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죄를 삶의 자리로 삼는 태도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라면, 뒤이어 죄의 지배를 거부하라는 명령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죄의 권세에 속해 있던 이전 관계가 결정적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기 위해 세례를 꺼냅니다.
세례는 왜 무덤으로 들어가는 일인가
아니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모릅니까?로마서 6:3 · 본디새김
바울은 여기서 로마의 신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려 하지 않습니다. 「모릅니까?」라고 물으며, 이미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 공동체에 등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분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원문은 두 표현에서 어떤 대상이나 영역을 향해 들어간다는 방향성을 지닌 같은 전치사를 사용합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을 위해 이루어진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그 죽음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바깥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인 동시에, 예수님께 속한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죽음 안으로 받은 세례를 통해 그와 함께 묻혔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듯이, 그렇게 우리도 새로운 생명 안에서 걷기 위한 것입니다.로마서 6:4 · 본디새김
죽음에서 매장으로, 매장에서 부활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죽음과 매장은 서로 다릅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생명이 끝났다는 사실이지만, 그를 장사 지낸다는 것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전의 삶이 끝났음을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묻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의 옛 삶이 끝났다는 사실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에 들어가고 나오는 세례의 모습도 죽음과 매장, 새로운 생명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세례는 과거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바울은 함께 묻힌 목적을 설명하면서, 먼저 미래에 하늘에서 누릴 생명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걷다」는 본래 걷는다는 뜻이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나타낼 때도 사용됩니다. 새로운 생명은 단순히 언젠가 받게 될 선물이 아니라, 지금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새로운 삶이 단순한 인간의 결심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도 새로운 생명 안에서 걸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삶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사람은 결심을 통해 습관을 바꾸거나 행동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생명은 자기계발이나 도덕적 개선보다 근본적인 사건에 근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도 그 죽음과 부활에 참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바로 그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만으로 초기 교회의 모든 세례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시행되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세례가 예수님과의 연합을 실제로 이루는 은혜의 수단인지, 믿음을 통해 주어진 연합을 드러내고 확증하는 표지인지에 대해서도 교회 전통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본문 자체에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세례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이며, 로마서 6:3–4의 세례를 예수님과의 연합 및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맥락에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 붙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분의 죽음의 모양과 함께 자라 붙었다면, 그분의 부활과도 함께 자라 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5 · 본디새김
「함께 자라 붙었다」는 함께 자라거나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식물이 함께 자라 붙는 모습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낱말이 반드시 식물의 접붙임만을 가리킨다고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 표현으로 예수님과 믿는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모방 이상의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니 우리도 죽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결합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과도 연결됩니다.
동사의 시간도 다릅니다. 죽음에 관해서는 이미 함께 자라 붙은 상태를 말하고, 부활에 관해서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5절의 부활을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몸의 부활로 읽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의 4절에서는 이미 새로운 생명 안에서 걷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현재의 새로운 삶과 장차 완성될 부활의 생명을 서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현재의 삶을 바꾸며, 동시에 미래의 부활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우리는 압니다. 죄의 몸이 무력해져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 노릇 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6:6 · 본디새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죄의 몸이 무력해졌고, 그래서 더 이상 죄의 노예 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순서를 따라가면 바울이 말하는 죽음의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옛사람은 나쁜 성격을 가진 내 안의 또 다른 사람일까
우리는 「옛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잘 내는 성격, 탐욕스러운 마음, 이기적인 생각 같은 자신의 나쁜 습관이나 성격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옛사람은 단순히 인간 안에 숨어 있는 나쁜 성격의 집합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문맥에서 옛사람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 죄가 주인 노릇 하던 삶에 속한 인간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우리가 스스로 옛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죽음은 과거의 기억이나 습관을 완전히 지워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던 이전의 삶이 예수님과 함께 결정적으로 끝났다는 뜻입니다.
「죄의 몸」이 무력해졌다는 말
「죄의 몸」을 육체 자체가 악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바울의 논증을 오해하게 됩니다. 그는 뒤에서 같은 몸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죄의 몸」은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인간의 몸, 또는 죄의 권세와 연결된 인간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력해져」는 효력을 없애거나 무력하게 만든다는 뜻을 지닙니다. 몸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죄가 인간을 지배하던 권세가 무력화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적절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버리고 영혼만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몸을 통해 죄를 섬기던 사람이 이제 몸을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7 · 본디새김
여기서 「의롭게 되었다」(δικαιόω)는 바울이 앞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을 설명할 때 사용한 바로 그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죄에서 해방되었다」라는 뜻으로도 이해됩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이 죄의 노예 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이전 주인의 권세에서 벗어납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이 구절은 법정적인 「의롭게 되었다」로 읽는 쪽과 「해방되었다」로 읽는 쪽, 그리고 둘을 함께 담는다고 보는 쪽으로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앞에서 말한 의롭다 하심을 이제 인간의 실제 삶과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의롭게 인정받는 일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은 서로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실제로 죽기만 하면 모든 죄책에서 자동으로 해방된다는 일반적인 원칙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한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자신의 정당한 주인으로 인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단순히 이전 삶을 끝내는 데서 멈춘다면,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무엇이 될까요?
조금 더 깊이
「의롭게 되었다」의 원문 데디카이오타이는 동사 디카이오오의 완료 수동형입니다. 이 구절을 죄의 권세에서 풀려났다는 의미로 읽는 해석이 있고, 바울이 의롭다 하심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법정적 판결과 죄로부터의 해방을 연결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으며, 이 표현이 법정적 의미를 완전히 잃지 않으면서도 죄의 지배로부터 분리되는 변화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주인 노릇 하지 못하는 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서 6:8 · 본디새김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미래의 생명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특별한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셨으니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죽음이 다시는 그분에게 주인 노릇 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로마서 6:9 · 본디새김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무덤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죽었던 사람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온 사건이 아닙니다.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마치 통치 권세를 가진 주인처럼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 주인의 권세가 예수님께는 더 이상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잠시 피하신 분이 아닙니다. 죽음의 지배 자체를 넘어서신 분입니다.
그분이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사시는 것입니다.로마서 6:10 · 본디새김
예수님의 죽음은 반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말을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으시다가 죽음을 통해 거기서 벗어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죄인이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현실을 다루시는 죽음을 단번에 겪으셨고, 이제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생명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이로,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이로 헤아리십시오.로마서 6:11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은 처음으로 직접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헤아리십시오」(λογίζομαι)는 계산하다, 어떤 것으로 여기다, 인정하다는 뜻을 지니며,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헤아려졌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 같은 낱말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헤아리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지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일을 자기 자신에게도 참된 것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 변화도 없는데 자신이 달라졌다고 상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설명한 뒤 그 사건을 근거로 명령합니다.
바울은 죄를 이기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그 인정이 몸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죽을 몸을 의의 무기로 드리라는 명령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임금 노릇 하여 여러분이 그 몸의 욕망에 순종하게 두지 마십시오.로마서 6:12 · 본디새김
여기서 다시 처음의 역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 인간 안에서 죄의 모든 흔적을 완전히 제거했다면, 이런 명령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직 우리에게 「죽을 몸」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만,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아직 몸의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상태에 있고, 그 몸에는 여전히 욕망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과 죄의 유혹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더 이상 죄의 권세에 속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 안에서 살아가도록 명령받는 일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몸의 욕망 자체를 모두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죄가 그 욕망을 이용해 인간을 다시 지배하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몸을 악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몸이 누구에게 쓰이는가를 묻습니다.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도 마십시오. 도리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처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로마서 6:13 · 본디새김
여기서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무기입니다. 「무기」라는 표현은 죄와 의의 대립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지체는 손과 발, 입과 눈,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행동하는 데 사용하는 몸입니다. 이 몸은 거짓말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탐욕을 채우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몸이 다른 사람을 돕고, 진실을 말하고, 자비를 베푸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몸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명령의 순서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라고 말한 다음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 먼저 나오고, 그렇기 때문에 몸의 여러 부분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행동 지침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소속을 하나님께 두고 그 소속이 실제 몸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처럼」이라는 표현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죽을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미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아직 육체의 죽음을 완전히 넘어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 안에서 이미 새로운 생명에 참여한 사람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뜻
그도 그럴 것이, 죄가 여러분에게 주인 노릇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14 · 본디새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바울의 바로 앞 명령을 보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죄에 복종하지 말고,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요구했습니다.
핵심은 「아래」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은혜를 두 종류의 종교적 가르침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지배 관계에 속해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지만, 그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가 인간 자신의 율법 준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뜻입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죄를 지어도 괜찮은 자리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죄가 더 이상 정당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는 자리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죄에 대한 허가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의 지배를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선언 때문에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무기」(호플라)는 무기나 전투 장비를 뜻할 수 있고, 더 넓게는 도구나 장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서 군사적 이미지가 강조된다고 읽는 견해와 일반적인 도구의 의미가 더 적절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또 14절의 「율법 아래」를 정확히 어떻게 규정할지도 논쟁이 있습니다. 한 해석은 율법이 죄인을 정죄하는 권세 아래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른 해석은 모세의 율법이 규정하던 옛 질서에서 예수님을 통한 은혜의 새 질서로 옮겨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율법 자체가 폐지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하는지도 논의되며, 이러한 차이는 로마서 7장의 율법 논증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자유로워졌는데 왜 다시 노예가 되는가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을까요?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로마서 6:15 · 본디새김
1절에서는 은혜가 많아지도록 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를 물었고, 15절에서는 은혜 아래 있다는 이유로 죄를 지어도 되는지를 묻습니다. 바울은 이번에는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 대신 노예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여러분이 순종하려고 자기 자신을 누구에게 노예로 내주면, 그에게 순종하는 노예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죄의 노예이든 의에 이르는 순종의 노예이든 그렇습니다.로마서 6:1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현대 독자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상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노예라는 말을 사용할까요?
로마 제국의 노예 제도에서 노예는 주인의 권세 아래 놓인 사람이었고, 그 법적 지위와 삶의 조건은 자유인과 달랐습니다. 바울의 독자들에게 노예는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회에서 알려진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사용하여 죄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무런 주인도 없는 완전한 독립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죄에 자신을 내주면 죄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의로움과 연결됩니다. 죄와 순종은 단순한 행동의 이름을 넘어, 인간이 자신을 누구에게 내어 주고 누구의 뜻을 따르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노예 제도 자체가 좋은 제도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 익숙한 사회적 관계를 빌려오고 있으며, 그래서 19절에서 사람들 사이의 일을 빗대어 말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죄의 노예와 하나님의 노예를 모든 면에서 같은 종류의 강제적 종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침이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르침에 넘겨졌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죄의 노예였으나, 여러분이 넘겨진 그 가르침의 본에 마음에서 우러나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17 · 본디새김
우리는 보통 사람이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선생이 학생에게 가르침을 전달하고,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그 내용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이 가르침의 본에 넘겨졌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가르침의 틀 안으로 넘겨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복음의 가르침을 새로운 삶의 규범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사람의 삶을 형성하는 틀에 들어가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복음은 머릿속에 저장해 두는 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의 삶을 형성합니다.
바울은 순종을 말하면서 마음을 강조합니다. 노예의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외적인 강제에 굴복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응답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의 신자들이 순종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들이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 변화가 하나님의 은혜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응답은 실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변화 전체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순종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죄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새로운 관계를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죄에서 자유롭게 되어 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로마서 6:18 · 본디새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유의 의미를 부정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어느 주인에게서 해방되었으며, 이제 누구에게 속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고, 이제 의로운 삶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소속이 바뀌었기 때문에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로마서 6장의 노예 비유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통뿐 아니라 그리스·로마 사회의 실제 노예 제도에 관한 관념도 반영되어 있다는 해석이 있고, 이 두 배경이 함께 작용한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17절의 원문 에이스 혼 파레도테테 튀폰 디다케스는 사람이 가르침의 본 안으로 넘겨졌다는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르침의 본」이 구체적으로 어떤 고정된 교리문답이나 교육 과정이었는지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은 예레미야 31:33과 에스겔 36:26–27의 약속, 곧 하나님이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나타나게 하겠다는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이 이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순종이 마음의 변화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분명한 주제적 관련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왜 노예의 비유에 한계를 두는가
여러분의 육이 약하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 사이의 일을 빗대어 말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노예로 내주어 불법에 이르렀듯이, 그렇게 이제는 거룩함에 이르도록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노예로 내주십시오.로마서 6: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바울이 지금까지 사용한 노예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사람들 사이의 일을 빗대어」 말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인간 사회에서 익숙한 관계를 사용하여 영적인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육이 약하기 때문에」라는 표현은 독자의 인간적인 한계와 관련됩니다. 이 말은 인간 사회의 노예 제도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의 지배는 인간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하는 일은 인간을 거룩함과 생명으로 이끕니다. 이 차이가 비유의 중심입니다.
바울은 죄를 섬기는 삶의 결과를 「불법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죄를 섬기면 하나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고, 그 잘못이 더 큰 불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에 자신을 내주는 삶은 거룩함에 이르는 방향을 갖습니다. 반복해서 어떤 것에 자신을 내어 주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단순히 더 많은 규칙을 지키는 일일까요? 바울의 논증에서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이 실제로 하나님을 향해 형성되는 일입니다. 죄에서 해방된 사람은 아무 방향 없이 떠도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두 삶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비교합니다.
한때 자랑하던 삶을 이제 부끄러워한다면
여러분이 죄의 노예였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20 · 본디새김
자유는 언제나 좋은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자유라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의로운 삶에 매여 있지 않았지만, 그 자유는 참된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의로움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무엇을 향해 자유로운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는 부끄러워하는 그런 일들에서 그때 무슨 열매를 지니고 있었습니까? 그것들의 끝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21 · 본디새김
바울은 과거의 행동을 단순히 잘못이라고 평가하지 않고, 그 행동이 무엇을 남겼는지 묻습니다. 당시에는 유익해 보였던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갔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삶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죽음입니다.
「이제는 부끄러워하는」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일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행동의 결과만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행동을 평가하는 사람 자신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로운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과거의 삶을 이전과 같은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명은 단순히 행동 목록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며, 어떤 열매를 소망하는지가 달라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께 노예가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여러분의 열매를, 또 그 열매의 끝으로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로마서 6:22 · 본디새김
과거에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열매는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그 끝으로 영원한 생명을 바라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지금의 삶과 관련되고, 영원한 생명은 그 삶의 궁극적인 끝으로 제시됩니다. 그렇다고 거룩한 삶을 충분히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임금처럼 벌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삯을 주고, 하나님은 선물을 주신다
죄가 주는 삯은 죽음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23 · 본디새김
로마서 6장의 마지막 절은 매우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앞의 논증과 분리하여 죄인이 벌을 받고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읽으면, 바울이 의도한 대조의 깊이를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주인을 비교합니다. 한쪽에는 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두 주인은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것을 줍니다.
죄는 삯을 줍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선물을 주십니다.
왜 죄가 주는 것은 삯인가
「삯」은 본래 군인에게 지급하는 식량이나 급료와 관련된 말이었으며, 넓게는 일을 하고 받는 급여를 뜻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죄를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노예의 이미지로 설명한 것과 잘 어울립니다. 죄는 자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결국 죽음을 지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해서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삯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벌어들인 임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장 전체에서 믿는 사람이 거룩함을 향해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끝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함은 선물을 받기 위해 지불하는 값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은혜가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새로운 순종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바울은 그 선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하게 밝힙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선물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처럼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보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었다는 선언과 죄가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 사이에서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다면 왜 다시 죄가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할까요?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미 완성된 상태로만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아직 죽을 몸을 가지고 살아가며, 죄의 유혹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따라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죄 없는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몸을 누구에게 내어 줄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절망적인 싸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이루신 해방에 근거하여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반복해서 경험할 때, 자신은 여전히 죄의 노예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면, 죄를 가볍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두 방향을 모두 거부합니다. 죄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이지만, 죄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의 정당한 주인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자유는 단순히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하게 된 상태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명령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구원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셨기 때문에 선한 삶으로 부름받았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믿는 사람도 새로운 생명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오늘 얼마나 많은 잘못을 피했는가가 아니라, 오늘 누구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자신의 욕망을 다루는 방식, 몸과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로마서 6장의 처음에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묻힌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도 새로운 생명 안에서 걷게 되었습니다.
한때 죄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자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삯을 지급하고, 그 삯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물을 주십니다. 바울은 이 장을 인간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포로 끝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의 중심에는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이 더 이상 주인 노릇 하지 못하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