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옳은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 뜻이 옳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심지어 그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행동은 그 바람을 거스릅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일을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같은 일을 저지릅니다. 바울은 이 사람의 입을 빌려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미워하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15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한 사람의 고백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더 깊은 문제를 드러내는 말일까요?

더욱 이상한 것은 바울이 이 고백을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설명 속에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만난 사람에게서 오히려 죄가 살아나고, 탐욕이 일어나고, 죽음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선한 것을 주셨는데 어떻게 죽음이라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율법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합니다. 문제는 율법을 받은 인간 안에 있습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죄가 선한 율법을 이용하여 인간을 지배한다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 7장은 바로 이 역설을 풀어 갑니다.

바울은 먼저 죽음이 한 사람을 이전의 법적 관계에서 어떻게 풀어 주는지 설명합니다. 이어서 선한 계명이 어떻게 죄의 도구가 되는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서로 갈라진 사람의 절규를 들려줍니다. 그 절규는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라는 한 가지 질문으로 모입니다. 바울은 「무엇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는 「누가」라고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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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이전의 관계를 끝낸다

로마서 7:1–4 본문 →

아니면 형제 여러분, 나는 율법을 아는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율법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만 그 사람에게 주인 노릇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로마서 7:1 · 본디새김

우리는 보통 율법을 지켜야 할 명령이나 규칙들의 모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이 ... 주인 노릇 한다」고 말하며, 율법을 사람에게 권한을 행사하는 법적 질서로 묘사합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결혼 관계를 예로 듭니다.

결혼한 여자는 살아 있는 남편에게 율법으로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는 남편에게 매어 두던 율법에서 풀려납니다.로마서 7:2 · 본디새김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그 혼인 관계를 규정하던 법적 구속에서 풀려나, 다른 남자와 새로운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고대의 혼인법 전체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며, 이것을 모든 시대의 이혼과 재혼 문제에 관한 완결된 규정으로 삼는 것도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기존의 법적 관계를 끝낸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이어지는 4절에 적용하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2–3절에서는 남편이 죽고, 여자는 살아남아 다른 남자에게 속합니다. 그러나 4절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열매를 맺도록, 여러분이 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신 분에게 속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7:4 · 본디새김

이번에는 율법이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비유에서는 남편이 죽었는데, 적용에서는 결혼 관계에 매여 있던 사람, 곧 독자들 자신의 죽음이 등장하는 셈입니다. 바울이 비유를 잘못 사용한 것일까요?

어떤 해석은 비유의 세부 사항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려 해서는 안 되며, 죽음이 이전의 법적 구속을 끝낸다는 원리만을 취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이전 관계의 종결과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새로운 결합까지 함께 고려해야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율법 자체의 죽음을 선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으신 사건을 가리키며, 믿는 사람들이 그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이전에 자신을 구속하던 관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선언은 율법이 본래 악했으므로 폐기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맺던 이전의 관계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죽음의 목적은 「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신 분에게 속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단순히 이전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데 있지 않고,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율법에서 풀려난 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전 관계를 끝내고,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바울이 굳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신 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에는 새로운 열매가 있다

4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매를 맺도록」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결혼 관계의 이미지를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삶이 낳는 결과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에서 나타나는 의로운 행동과 순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더욱 철저하게 자신을 훈련하여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열매는 새로운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전의 관계에서는 어떤 열매가 맺혔을까요?

같은 몸에서 죽음의 열매와 하나님의 열매가 맺힌다

로마서 7:5–6 본문 →

우리가 육에 속해 있었을 때에는 율법을 통해 오는 죄의 정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일하여 죽음에게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5 · 본디새김

4절에서는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5절에서는 죽음에게 열매를 맺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열매의 이미지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우리에게 죄의 정욕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율법을 통해 오는 죄의 정욕」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선한 말씀인데, 어떻게 그 율법을 통해 죄의 정욕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아직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율법과 죄의 관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문제를 여기서 처음 제시합니다.

「육에 속해 있었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몸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4절에서 새로운 관계 안에 들어간 사람도 여전히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연약하고 죄에 종속된 인간의 존재 방식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가 강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해 있던 삶과 새로운 삶의 차이는 몸을 가지고 있는가의 차이가 아닙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는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해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붙들려 있던 것에 대하여 죽어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문자의 낡음이 아니라 영의 새로움으로 노예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7:6 · 본디새김

「그런데 이제는」이라는 말로 바울은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 사이에 실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율법과 죄의 관계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지만, 이제는 율법에서 풀려나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 섬기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문자의 낡음」이 아니라 「영의 새로움」입니다.

문자가 낡았다는 것은 성경이 낡았다는 뜻일까

이 구절은 잘못 읽으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 낡고 무가치해졌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바울의 논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자는 기록된 글자나 문서를 뜻하는 말이며, 이 문맥에서는 기록된 율법과 연결됩니다. 영은 인간의 내적인 마음가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성령으로 읽는 견해에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로움은 낡은 규칙을 버리고 더 세련된 규칙을 받아들였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와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기록된 명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영을 통해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구별됩니다.

물론 바울은 기록된 율법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곧이어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다고 강하게 변호합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을 새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관계가 열렸고,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을 통한 새로운 섬김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율법이 선하다면서, 왜 율법을 통해 죄의 정욕이 일어났다고 말할까요? 바울은 이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를 이제 정면으로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문자」와 「영」의 대조는 바울이 새 언약의 일꾼에 관해 말하는 고린도후서 3:6과도 연결되며, 그 배경에는 예레미야 31:31–34와 에스겔 36:26–27의 약속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실 것이라고 예언했고, 에스겔은 하나님이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어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게 하실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 예언들의 본래 문맥은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며, 바울은 그 약속과 연결되는 언어를 사용하여 예수님께 속한 사람의 새로운 섬김을 설명합니다.

「탐내지 마라」는 명령이 왜 탐욕을 일으키는가

로마서 7:7–8 본문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도리어 나는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법이 「탐내지 마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욕도 알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로마서 7:7 · 본디새김

율법이 죄의 정욕을 일으키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 율법 자체가 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울은 그 결론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율법이 선하다는 선언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고, 먼저 자신이 죄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여러분」과 「우리」를 향해 말했는데, 이제 「나는」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나」는 장의 마지막까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조금 뒤에서 살펴보고, 먼저 그가 만난 계명을 봅시다.

「탐내지 마라」는 출애굽기 20:17과 신명기 5:21에 나오는 열 계명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나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인과 도둑질은 밖으로 드러나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인 반면, 탐욕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어도, 마음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계명을 선택한 것은 율법이 단순히 외적인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까지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이 죄인지 알려 주기 때문에, 이 계명을 알게 되면서 탐욕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문제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죄가 계명을 통해 틈을 잡아 내 안에서 온갖 탐욕을 빚어냈습니다. 율법 없이는 죄가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8 · 본디새김

이제 율법은 단순히 죄를 알려 주는 역할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을 때 오히려 그 일에 강하게 끌리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설명을 이런 인간 심리의 한 현상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죄」를 행동하는 주체처럼 묘사합니다.

죄가 틈을 잡습니다.

죄가 탐욕을 빚어냅니다.

죄가 나중에는 사람을 속이고 죽입니다.

바울은 죄를 단순한 잘못된 행동의 목록보다 큰 권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틈」은 기회나 출발점, 어떤 행동의 발판을 뜻하는 말로, 죄가 계명을 자신의 활동에 이용할 기회를 붙잡았다는 뜻입니다.

계명이 악해서 탐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선한 계명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이 보여 주는 죄의 교묘함입니다. 죄는 반드시 선한 것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선한 것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죄가 인간을 지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잘못을 몰라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죄를 짓는 경우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무엇이 금지되었는지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그 금지를 어기려는 욕망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뜻을 아는 인간이 어떤 권세 아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생명을 위한 계명이 어떻게 죽음의 도구가 되었는가

로마서 7:9–13 본문 →

나는 한때 율법 없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명이 오자 죄는 되살아났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생명에 이르는 바로 그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로마서 7:9–10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얼핏 읽으면 한 개인의 자서전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은 유대 사람으로 태어나 율법의 가르침 속에서 자랐습니다. 빌립보서 3:5–6에서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율법 없이 살았던 것일까요? 이 질문은 로마서 7장의 「나」가 누구인가 하는 해석 문제로 이어집니다.

먼저 본문의 움직임을 보면, 바울은 죄를 마치 잠들어 있던 존재처럼 묘사합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죽어 있었지만, 계명이 오자 죄가 살아났고, 그 결과 「나」는 죽었습니다. 죄와 인간의 생사가 서로 뒤바뀝니다.

죄가 죽어 있을 때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죄가 살아나자 사람은 죽습니다.

「율법 없이는 죄가 죽어 있다」는 말을 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죄가 율법 이전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미 말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계명이 주어졌을 때 죄가 그 계명을 이용해 새로운 기회를 얻고, 인간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사실입니다.

죄가 사람을 속이는 장면

죄가 계명을 통해 틈을 잡아 나를 속였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1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는 창세기 3장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의 나무들 가운데 하나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그 명령을 어겨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사람을 유혹합니다. 창세기 3:13에서 여자는 뱀이 자신을 속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고, 속임이 일어나고, 죽음이 찾아온다는 흐름은 두 본문에서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작용하지 않고, 그 명령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위해 주신 명령을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도구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속임의 핵심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계명이 죽음에 이르렀다

10절의 「생명에 이르는 바로 그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는 레위기 18:5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말씀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본래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주어졌는데, 바울은 바로 그 계명이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라는 설명을 이제 포기해야 할까요?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로마서 7:12 · 본디새김

바울은 율법과 죄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죄가 율법을 이용했다고 해서 율법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표현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과도 연결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의 뜻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선한 말씀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을 만났을 때, 죄는 그 말씀을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는 기회로 이용합니다.

그러면 선한 것이 나에게 죽음이 되었습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도리어 죄가 나에게 죽음이 되었습니다. 죄가 선한 것을 통해 나에게 죽음을 빚어내어 죄로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었고, 계명을 통해 죄가 더없이 죄스러운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서 7:13 · 본디새김

바울은 원인을 정확히 구별합니다. 죽음을 가져온 것은 선한 율법 자체가 아니라 죄입니다. 그러나 죄는 그 선한 율법을 이용했습니다.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과, 율법을 통해 죄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율법의 성격이 아니라 죄의 작용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죄의 작용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바울은 이제 한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에서 바울이 쓰는 「속였다」는 동사는 창세기 3장에서 사용되는 속임의 표현과 같은 어근을 지니므로, 에덴동산의 유혹과 불순종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적 연결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창세기 3장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 않으며 그 장면을 그대로 다시 서술하지도 않으므로, 이것을 직접적인 인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 7:7–25의 「나」가 아담보다 하와의 역할을 반영하는 비극적 독백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는 가능한 문학적 해석이지, 본문의 화자가 하와라는 사실이 확정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 — 바울의 고백인가, 인간의 비극인가

로마서 7:14–25 본문 →

로마서 7장을 읽을 때 가장 많이 논의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14절부터 등장하는 「나」의 정체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영적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으로 된 사람이고 죄 아래 팔려 있습니다.로마서 7:14 · 본디새김

「우리는」 율법이 영적임을 알지만, 「나는」 육으로 된 사람이며 죄 아래 팔려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자신에게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조금 남아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노예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나」를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피하고 곧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내면적 갈등에 관한 본문이라고 설명하면 중요한 논쟁을 놓치게 됩니다. 반대로 이 구절은 오직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인간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해도 문제가 남습니다. 이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선한 일을 바라며, 자신이 저지르는 악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 주요한 읽기

이 「나」에 대한 읽기는 크게 넷으로 갈립니다. 바울 자신의 신앙생활에 관한 고백, 예수님을 믿기 이전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표하는 목소리, 아담 또는 하와를 비롯한 인간의 원형적 경험을 재현하는 수사적 독백입니다. 이 읽기들을 서로 완전히 배타적인 것으로만 취급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해석을 하나로 합쳐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나」가 구원받은 신자의 현재 상태를 직접 설명하는가, 아니면 예수님 밖에서 율법과 죄의 관계를 경험하는 사람을 대표하는가 하는 차이는 실제로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결정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만 어느 관점을 따르더라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같지 않다는 문제를 매우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본문을 따라가면, 「나」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도 바울이 보여 주려는 인간의 곤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바울 자신의 신앙생활에 관한 고백으로 읽는 해석은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된 뒤에도 죄와 계속 싸우는 자신의 경험을 표현한다고 봅니다. 14절부터 동사가 현재 시제로 바뀐다는 사실과, 22절에서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표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교회의 여러 해석 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기 이전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로 읽는 해석은 「죄 아래 팔려 있습니다」와 「죄의 법 아래 나를 사로잡아 둡니다」라는 표현이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앞선 선언과 강하게 충돌한다고 봅니다. 이 경우 현재 시제는 과거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문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표하는 목소리로 읽는 해석은 바울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음에도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역사를 한 사람의 목소리로 표현한다고 봅니다. 7–13절의 계명과 속임, 죽음이 아담과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14–25절의 노예 상태와 포로의 언어가 이스라엘의 유배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사야 49–50장에 나타나는 죄와 포로 상태, 회복의 약속과 연결합니다. 넷째, 수사적 독백으로 읽는 해석은 고대 문학에서 작가가 어떤 인물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어, 바울도 이 방식으로 계명을 받고 죄에 속고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경험을 표현했다고 보며, 창세기 3장과의 연결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바울 자신의 경험이 이스라엘의 역사나 인간의 보편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을 한다

로마서 7:14–20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가 빚어내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미워하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15 · 본디새김

이 문장을 읽으면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저지르고,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다시 같은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곤경은 단순히 결심이 약하다는 사실보다 깊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알지 못합니다」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미워하는지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의지와 실제 행동 사이의 모순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그것을 한다면, 나는 율법이 좋다는 데 동의합니다.로마서 7:16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사실에서 율법이 선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자신이 행하는 악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악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율법이 잘못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율법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은 그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의 내면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이 곧 순종을 이루어 내지는 못합니다.

내 안에 사는 죄

그런데 이제 그것을 빚어내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는 죄입니다.로마서 7:17 · 본디새김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가 저질렀다고 말하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논증과 맞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 죄를 자신 안에 거주하는 권세처럼 묘사합니다. 죄는 단순히 밖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활동하며, 사람이 옳은 것을 알고 원하는데도 그 바람을 거스르는 행동을 일으킵니다. 바울이 죄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정의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죄가 인간을 얼마나 깊이 지배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인격화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 표현으로 바울은 인간의 의지와 죄의 권세를 구별합니다. 선한 일을 바라는 의지가 있어도, 그 의지만으로 죄의 지배를 이겨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한 것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은 나에게 있으나 좋은 것을 빚어내는 것은 나에게 없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18 · 본디새김

「내 안에」 뒤에 「곧 내 육 안에」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바울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어떤 선한 것도 전혀 없다고 무차별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는 영역을 「내 육」이라고 구체화합니다. 바로 뒤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육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연약한 존재 방식과 연결됩니다.

바라는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이루어 내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 단락에서 가장 아픈 지점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선한 의지가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한 의지가 있어도 그것을 이루어 낼 힘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선한 것을 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바라지 않는 악한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19 · 본디새김

15절에서 이미 비슷한 말을 했는데도 다시 반복하는 것은, 반복 자체가 이 사람의 곤경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같은 자리로 돌아옵니다.

선을 원합니다. 그러나 악을 행합니다.

다시 선을 원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악을 행합니다.

논증이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이 사람의 삶은 같은 모순에 붙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그것을 바라기도 하지만, 그 앎과 바람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전혀 없다는 철학적 선언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직접 다루는 문제는 죄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온전히 행하지 못한다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능력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해결책도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얻는 데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데 죄의 법에 사로잡힌 사람

로마서 7:21–23 본문 →

그러므로 나는 이런 법을 발견합니다. 좋은 것을 하려 하는 나에게 악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로마서 7:21 · 본디새김

여기서 「법」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지만, 바울은 이제 모세의 율법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하려 하는 나에게 악한 것이 있다」는 현실을 하나의 법처럼 표현합니다. 이 구절의 「법」(노모스)을 모세의 율법 자체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논의가 있지만, 바로 뒤에 나오는 여러 「법」과 함께 읽으면 인간의 삶에서 작용하는 원리나 지배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로마서 7:22 · 본디새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즐거워합니다. 이 표현은 시편 1:2와 119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그 율법을 되새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즐거움은 그의 행동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지체 안에서 다른 법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지체 안에서 다른 법을 봅니다. 그 법은 내 생각의 법과 맞서 싸우며,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 아래 나를 사로잡아 둡니다.로마서 7:23 · 본디새김

바울의 언어가 갑자기 전쟁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사로잡아 둡니다」는 포로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죄의 지배를 단순히 좋지 않은 습관의 힘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죄의 법에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대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섬기고 싶은 왕과 자신을 실제로 지배하는 권세가 서로 다른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율법을 향합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을 서로 무관한 정신과 육체로 나누고, 정신은 선하며 육체는 악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내면의 바람과 죄의 권세에 끌려가는 실제 행동 사이, 한 인간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깊은 모순을 묘사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왜 잘못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 지식이 그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이제 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설명이나 분석이 나오지 않습니다. 절규가 터져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 때문에 많은 해석자들은 이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신앙 안에서 매우 긍정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경건한 유대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할 수 있었고, 바울 자신도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2절은 「나」의 정체를 판단할 때 중요한 근거이지만, 그 하나만으로 논쟁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또 23절의 포로 이미지는 구약성경의 유배 이야기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사야 50:1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 때문에 팔렸다고 말씀하시고, 이사야 49:24–25에서는 포로가 강한 자의 손에서 구출될 수 있는지 묻고 여호와야훼께서 친히 포로를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14절의 「죄 아래 팔려 있습니다」와 23절의 「사로잡아 둡니다」가 이 유배와 구원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직접적인 인용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논증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가능성이며, 이를 고려하면 23절의 모습은 더욱 비극적으로 보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로마서 7:24 본문 →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로마서 7:24 · 본디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분석했습니다. 율법은 선하지만 죄는 율법을 이용하고, 인간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 분석은 한 사람의 절규가 됩니다.

「비참한」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가 비참한 것은 옳은 것을 알고도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 괴롭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미워하면서도, 그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방법을 묻지 않습니다. 어떤 명령을 더 배워야 하는지, 자신이 얼마나 더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하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누가」라고 묻습니다.

이 사람에게 부족했던 것은 율법의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율법을 즐거워했지만, 그 지식이 죄의 포로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죄를 드러내고,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을 고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권세 아래 사로잡힌 인간을 그 지배에서 건져 내는 일은 율법 자체가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나은 규칙이 아닙니다.

구원자입니다.

「이 죽음의 몸」이라는 표현을 육체라는 물질 자체가 악하므로 몸에서 영혼을 해방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며, 앞 장에서도 인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죽음의 몸」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곤경을 말할 때 「몸」을 언급한다는 사실에는 뜻이 있습니다. 죄의 문제는 머릿속의 잘못된 생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실제 행동과 삶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인간 전체가 죽음의 지배에서 건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절규 뒤에 찾아온 감사

로마서 7:25 본문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육으로는 죄의 법에 노예 노릇을 합니다.로마서 7:25 · 본디새김

바울은 죄와 율법의 관계를 길게 설명했고,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모순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마침내 누가 건져 낼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문장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건져 낼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7장의 첫머리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고,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25절의 감사는 갑자기 등장한 감상적인 고백이 아니라, 7장 앞부분에서 선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합니다.

장 전체를 감싸는 이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지력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올바른 삶의 비결을 발견했다거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충분한 율법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자기 구원 능력을 보충해 주시는 조력자로만 등장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건져 내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한 뒤에도 갈등은 남아 있다

방금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 바울은, 이어서 「나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육으로는 죄의 법에 노예 노릇을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바울은 감사의 선언 뒤에 다시 이전의 갈등으로 돌아올까요?

한 해석은 25절 앞부분의 감사가 실제 구원을 가리키고, 뒷부분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여전히 존재하는 죄와의 갈등을 설명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재 삶이 완전히 죄 없는 상태는 아니며,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육의 연약함과 싸우는 현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25절 뒷부분이 지금까지 설명한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곤경을 마지막으로 요약한다고 봅니다. 이 경우 앞부분의 감사는 그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선포하며, 뒷부분은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를 다시 정리하는 문장입니다.

감사가 있다는 이유로 뒤의 갈등을 지워 버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뒤의 갈등이 있다는 이유로 앞의 감사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두 문장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율법이 선한데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

로마서 7:1–25 본문 →

로마서 7장 전체를 돌아보면 바울의 논증은 하나의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데, 왜 그 율법을 받은 인간은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율법의 결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문제는 죄가 그 율법을 이용한다는 데 있고,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하면서도 죄의 법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성경을 더 많이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지식 자체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왜 스스로 그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는지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서로 적대적인 두 종교로 나누어 설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율법이 선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왜 필요한지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율법은 무엇이 선한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의 지배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는 분이십니다. 율법을 그리스도처럼 인간을 구원하는 분으로 만들 수도 없고, 예수님을 단순히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로마서 7장의 처음에는 한 여자가 등장했습니다. 그 여자는 살아 있는 남편과의 혼인 관계에 법으로 매여 있었지만, 죽음이 그 관계를 끝내자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장면을 통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그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심지어 그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율법을 향하지만, 그의 몸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외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바울은 그 질문 앞에 새로운 계명을 내놓지 않습니다. 더 강한 결심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의 말 뒤에 인간의 갈등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생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고 육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을 남겨 놓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은 편안한 승리의 선언처럼 들리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곤경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곤경의 한가운데에서 바울은 이미 한 분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자신이 미워하는 악을 행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절규 속에 그 이름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울려 나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