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신음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로마서 8장은 놀라운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지어진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확신으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성령의 생명,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 장차 받을 영광, 온 창조세계의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확신에 찬 장에서 바울은 고난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세계가 신음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신음하며, 심지어 성령도 신음으로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다는데 왜 여전히 죽을 몸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데 왜 아직도 자녀가 될 날을 기다립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신다는데 왜 그분의 백성이 도살당할 양처럼 헤아려집니까?

바울은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을 피해 가지 않습니다.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고, 마침내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로마서 8장은 고난을 잊게 만드는 위로가 아니라, 고난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무엇이 이미 결정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98장 본문 읽기 →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죄였다

로마서 8:1–4 본문 →

첫 문장의 「그러므로 이제」는 앞에서 이어진 논증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면서도, 죄에 사로잡힌 인간이 그 율법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현실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 막다른 자리에서 하나님의 판결이 선포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유죄 판결이 없습니다.로마서 8:1 · 본디새김

하나님이 죄를 눈감아 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곧이어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설명합니다.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약해져 할 수 없던 그 일을 두고 하나님이 죄를 다루시려고 자기 아들을 죄의 육과 같은 모양으로 보내시어, 육 안에서 죄를 유죄로 판결하셨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3 · 본디새김

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이 없다고 했는데, 3절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유죄로 판결하셨다고 합니다.

판결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판결의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죄 자체를 심판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죄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개별적인 잘못을 넘어, 인간을 지배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세력처럼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은 이 일을 할 수 없었을까요? 바울은 율법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율법의 선함이 아니라 「육으로 말미암아」 생긴 무력함입니다. 여기서 「육」은 단순히 신체가 아니라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존재 방식입니다. 율법이 아무리 올바른 길을 가리켜도, 그 길을 걸어야 할 인간이 죄에 매여 있다면 율법만으로는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율법을 더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죄의 육과 같은 모양」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인간처럼 보이기만 하셨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죄인이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분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과 같은 육의 조건 속으로 오셨고, 죄가 지배하던 바로 그 인간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32절의 「그 아들을 내주신 분」과 34절의 「그리스도는 죽으신 분」이 보여 주듯,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의 지배를 결정적으로 다루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는 육을 따라 걷지 않고 영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서 8:4 · 본디새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무죄라는 법적 신분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죄의 지배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현실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이루어지게」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요구를 자기 힘으로 완벽하게 성취해야 한다는 명령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결과로 그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일이 일어나는 삶의 방식이 「영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따라서 1절의 선언과 4절의 목적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판결이 인간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기 시작하고,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목적을 설명하는 표현(페리 하마르티아스)은 일반적으로 「죄에 관하여」라는 뜻이지만,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속죄제와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죄를 다루시려는 하나님의 행위로 읽을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상 근거가 있으며, 희생제사라는 의미를 유일한 해석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죄가 살던 자리에 하나님의 영이 사신다

로마서 8:5–11 본문 →

바울은 이제 육을 따르는 삶과 영을 따르는 삶을 대조합니다.

육을 따르는 이들은 육에 속한 것에 생각을 기울이고, 영을 따르는 이들은 영에 속한 것에 생각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5 · 본디새김

「생각을 기울인다」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에 마음을 두며 어떤 방향으로 삶을 판단하는지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육의 사고방식과 영의 사고방식은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의 목록이 아니라, 삶 전체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는가의 문제입니다.

육의 사고방식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며, 바울은 더 나아가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의지 부족을 넘어서는 무능력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은 스스로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문장의 방향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참으로 여러분 안에 사신다면 말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분의 사람이 아닙니다.로마서 8:9 · 본디새김

일반적인 설명이 끝나고, 바울은 이제 로마의 성도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먼저 영을 따르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계시다면 그들은 이미 영 안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사람이 영 안에 있고, 영이 사람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관계를 외적 지배나 일시적인 감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의 삶 안에 거하시며, 그 사람은 성령이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삶의 영역 안에 있게 됩니다.

「사신다면」(οἰκέω)에 쓰인 동사는 거주하다, 살다는 뜻입니다. 앞서 7장에서 「내 안에 사는 죄」를 말할 때 바로 이 동사를 사용했습니다(7:17, 20).

전에 내 안에 사는 것으로 묘사되던 것은 죄였습니다.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마음속에 좋은 영향을 주는 존재가 하나 더 생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을 지배하던 세력과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또 바울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면」을 이어 씁니다. 성령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별도의 영적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은 더 이상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생명입니다.로마서 8:10 · 본디새김

구원은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죽음의 지배를 경험합니다. 여기서 「영」을 인간의 영으로 이해하여 몸의 죽음과 영의 생명을 대조하는 해석이 있고, 성령으로 이해하여 죽을 몸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대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후자는 앞뒤에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사실이 반복되는 문맥을 중시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의 결론은 11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신다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여러분 안에 사시는 자기 영을 통하여 살리실 것입니다.로마서 8:11 · 본디새김

하나님은 육체를 버리고 영혼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앞의 「육」과 「영」의 대조는 육체와 영혼의 단순한 대립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몸이 악하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마침내 몸 자체를 죽음에서 구원하려 하십니다.

바울의 관심은 죽어도 남는 인간의 어떤 부분이 아닙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전체를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종의 두려움에서 자녀의 부르짖음으로

로마서 8:12–17 본문 →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신다면 그들의 현재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빚진 사람입니다. 육을 따라 살아야 할 빚을 육에게 진 것은 아닙니다.로마서 8:12 · 본디새김

바울은 육을 마치 인간에게 끊임없이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의 지배를 깨뜨리셨으므로, 이제 육의 요구를 따라 살아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육을 따라 살면 죽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몸의 행위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마서 8:13 · 본디새김

바울은 성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몸의 행위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인간의 독립적인 결심이 아니라 「영으로」 오며, 죽여야 하는 것은 몸 자체가 아니라 죄의 지배에 따른 「몸의 행위들」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인간의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고, 죄의 요구에 맞서 살아갈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윤리적 설명을 길게 이어 가지 않습니다. 갑자기 가족의 언어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께 이끌리는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14 · 본디새김

바울에게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올바른 행동을 선택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것은 다시 두려움에 이르게 하는 종살이의 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아들의 자리를 주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 영으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로마서 8:15 · 본디새김

「아들의 자리를 주는」은 양자 삼음, 곧 아들로 받아들여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종살이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이들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종들의 주인으로만 남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한마디의 부르짖음으로 나타납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고난을 피하실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동시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마가복음 14:36).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 부르짖음은 고난이 없는 평온한 자리에서만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도 받도록 그분과 함께 고난받는다면 말입니다.로마서 8:17 · 본디새김

바울은 영광 앞에 고난을 놓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개인적인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영광을 얻기 위한 대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받아들이시는 근거는 그들의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거쳐 영광에 이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에게, 현재의 고난은 그분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왜 이토록 광범위합니까? 인간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가득한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선을 인간 바깥으로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로마 사회에서 입양은 새로운 가족에 소속되어 법적인 자녀가 되고, 가문의 이름과 상속권에 참여하게 되는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가까운 친족이나 지인의 자녀를 양자로 삼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미 정당한 상속자가 있는 집안에서 종을 양자로 삼는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또 「아바」가 특별히 유아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호칭에서 중요한 것은 유아적인 친밀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관계입니다.

온 창조세계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로마서 8:18–25 본문 →

지금 이때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드러날 그 영광과 견줄 만하지 않다고 나는 헤아리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18 · 본디새김

바울은 고난이 작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현재의 고난이 마지막 결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와 미래를 헤아려 판단합니다. 고난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의 막연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뜻밖의 대상이 등장합니다.

지어진 것 전체가 목을 빼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19 · 본디새김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지어진 것 전체」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이 「그뿐 아니라 … 우리 자신도」라고 구분하므로, 여기서는 인간을 제외한 피조세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창조세계를 목을 길게 빼고 먼 곳을 바라보는 존재처럼 의인화하여, 그 간절하고 집중된 기다림을 그립니다.

창조세계가 기다리는 것은 자기 회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드러나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받는 일과 피조세계가 회복되는 일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어진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복종하게 하신 분 때문에, 다음과 같은 소망 가운데 헛됨에 복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0 · 본디새김

여기서 「헛됨」은 무가치함이나 존재 자체의 악함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허무함과 좌절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누가 창조세계를 헛됨에 복종하게 했을까요? 바울은 「복종하게 하신 분」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보는 해석은 「소망 가운데」 복종하게 되었다는 표현을 중시하여, 하나님이 심판 가운데서도 회복의 소망을 남겨 두셨다고 봅니다. 아담을 중심에 놓는 해석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은 사건에 주목합니다. 다만 본문은 그 이름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어느 해석이든 본문에 없는 이름을 직접 대입하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약속입니다.

곧 지어진 것 자체도 썩음의 종살이에서 자유로워져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속한 자유에 이르리라는 것입니다.로마서 8:21 · 본디새김

앞서 인간이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되었듯, 이제 창조세계도 「썩음의 종살이」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다스리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피조세계 자체가 썩음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어진 것 모두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2 · 본디새김

해산의 고통은 단순한 죽음의 고통과 다릅니다. 새로운 생명의 출현이라는 방향이 있습니다. 바울은 피조세계의 고통을 무너져 가는 세계의 마지막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고통으로 묘사합니다. 두 동사 모두에 붙은 「함께」는 온 피조세계가 서로 연결된 운명을 겪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 고통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영을 첫 열매로 지닌 우리 자신도 아들의 자리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속으로 신음합니다.로마서 8:23 · 본디새김

15절에서는 우리가 이미 아들의 자리를 주는 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아들의 자리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열쇠는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는 수확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이지만, 곧 수확 전체는 아닙니다. 성도들은 성령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그 신분이 몸의 부활과 영광 속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일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그 완성을 「우리 몸의 속량」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은 몸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죽을 몸이 구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신음합니다.

이 신음은 성령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사람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며 경험하는 기다림입니다. 바울은 24–25절에서 그것을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소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므로 반드시 인내가 따라오며, 그 인내는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태도가 아니라 신음하면서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아직 이루실 일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헛됨」(ματαιότης)에 해당하는 낱말은 전도서의 「헛됨」을 떠올리게 합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수고와 지혜가 죽음과 시간의 제약 아래서 얼마나 덧없어지는지를 보여 주는데, 로마서에서는 이 단어가 창조세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1:21에서도 인간의 생각이 헛되게 되었다는 표현에 같은 어근이 사용됩니다. 두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죄와 세상의 헛됨이 로마서의 논증에서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좋은 세계였고, 3장에서는 인간의 죄로 땅이 저주를 받아 노동과 생존이 고통과 결부됩니다. 바울이 창세기 3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주제적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로마서 8:26–27 본문 →

창조세계가 신음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신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 세 번째 신음을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영도 우리의 약함을 거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 영이 친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로마서 8:26 · 본디새김

생명을 주시고, 죄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하시며, 마침내 죽을 몸을 살리실 바로 그 성령이 우리의 약함을 거들어 주십니다. 「거들어 주십니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짐을 맡아 돕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성령은 인간의 약함을 멀리서 평가하는 분이 아니라, 그 약함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가 어려운 이유를 말이 부족하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설명은 더 근본적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자체를 모릅니다.

고난이 끝나기를 기도해야 할까요? 고난 속에서 견딜 힘을 구해야 할까요? 인간은 자기 삶의 전체 그림을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무지를 꾸짖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음」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본문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령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구로 이해할 수도 있고, 성도들의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서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특별한 기도 언어나 특정한 영적 현상으로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한편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영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 영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아뢰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7 · 본디새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여기서 기도는 인간이 적절한 말을 찾아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성령께서 그 뜻에 따라 간구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말을 찾지 못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멈추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는 말의 참뜻

로마서 8:28–30 본문 →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일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마서 8:28 · 본디새김

로마서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앞의 신음과 고난에서 떼어 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자신에게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약속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그는 온 창조세계가 썩음의 종살이 가운데 있고, 성도들이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조차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과 고통이 실제로 악과 고통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주어도 사본에 따라 「모든 것이 함께 일한다」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함께 일하게 하신다」로 갈리지만,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이어지는 29–30절은 그 선한 목적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이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다음 절에서 그 내용을 직접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이들을 또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이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로마서 8:29 · 본디새김

하나님의 목적은 성도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1:23에서 인간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과 짐승들의 형상과 바꾸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간을 아들의 형상에 맞게 새롭게 하십니다.

그 목적은 훌륭한 인격을 지닌 개인들을 만들어 내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많은 형제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맏이」는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난 이들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가족 가운데 예수님께서 가지시는 으뜸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모습」이라는 말은 빌립보서 3:21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실 것이라는 약속에도 쓰입니다. 따라서 아들의 형상을 닮는 일에는 현재의 삶이 변화되는 것뿐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우리 몸의 속량」, 곧 몸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28절의 선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일, 예수님을 닮은 자녀들이 예수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고난이 눈에 보이는 보상으로 바뀐다거나 모든 사건의 이유가 결국 우리에게 설명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로마서 8:30 · 본디새김

앞서 바울은 영광이 장차 드러날 것이고 몸의 속량도 아직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미래의 영광이 이미 모두 실현되었다는 뜻이라면 18–25절과 모순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의 목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확고한 행위로 서술하며, 아직 기다리는 영광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말할 만큼 그 약속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인간의 믿음 및 자유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는 오랫동안 서로 다르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어떤 해석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다른 해석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정하신 구원의 목적과 그 목적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운명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문단 자체의 초점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범위를 판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29절에서 이미 밝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시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형상」은 창세기 1:26–27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에게 이루어질 새로운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직접적인 창세기 인용이라기보다 창조와 구원이 연결되는 신학적 발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

로마서 8:31–34 본문 →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셨고, 장차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31절부터는 설명의 형식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일들을 두고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에게 맞서겠습니까?로마서 8:31 · 본디새김

누가 우리에게 맞서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

누가 유죄로 판결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이 질문들은 앞에서 전개한 논증의 결론을 하나씩 확인합니다. 첫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대적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35절에서 바울은 박해와 위험과 칼을 열거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면, 누가 그 뜻을 궁극적으로 좌절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도리어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 아들을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서 8:32 · 본디새김

「아끼지 않으시고」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마지막에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고, 로마서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 아들을 내주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한 자기 아들까지 내주셨다면, 그 아들과 함께 주시기로 하신 구원의 선물을 끝내 거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재산이나 편안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상속받을 영광과 약속된 구원의 완성입니다.

바울은 이제 법정의 언어로 돌아옵니다.

누가 하나님이 뽑으신 이들을 고발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로마서 8:33 · 본디새김

고발할 사람이 있어도, 그 고발이 하나님의 의롭다는 판결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의롭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유죄로 판결하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죽으신 분, 아니 오히려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아뢰기도 하십니다.로마서 8:34 · 본디새김

「아니 오히려」는 죽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과 분리할 수 없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높아지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아뢰기도 하십니다.」

앞에서는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간구하신다고 했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과 하나님 오른편의 지위에 근거하여 아뢰신다고 합니다. 두 간구가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바울이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과거의 십자가 사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유죄 판결이 없습니다」라는 첫 선언은 과거 어느 시점에 받은 판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의 살아 있는 사역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22:12, 16의 그리스어 구약성경에도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이 사건을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언어적·주제적 연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표현은 시편 110:1의 왕적 권위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오른편에 앉으라고 하시는 대상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왕적 인물이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의 언어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설명했습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헤아려지지만

로마서 8:35–39 본문 →

바울은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서 8:35 · 본디새김

앞에서는 누가 고발하고 유죄로 판결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제는 무엇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법정의 문제가 관계의 문제로 옮겨간 것입니다.

환난과 곤경,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마지막의 「칼」은 죽음의 위협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교훈을 말하지 않고,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당신 때문에 온종일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헤아려졌다」고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로마서 8:36 · 본디새김

시편 44:22의 인용입니다. 시편의 화자들은 큰 패배와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처럼 보인다고 호소하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았고 언약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시편 44:17–21).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시편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실하려 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하나님께 깨어나 도와 달라고 간청하며 끝납니다(44:23–26).

이것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박해받는다는 예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시편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도이며, 바울은 그 탄식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의 현실에 적용합니다. 바울은 신실한 사람이 고난받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은 채, 시편의 탄식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그 질문의 무게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분께 힘입어 넉넉히 이깁니다.로마서 8:37 · 본디새김

바울은 이 모든 일이 사라지고 나서 이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환난이 끝나고, 박해가 멈추고, 위험이 물러간 뒤에 비로소 승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모든 일에서」 이긴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성도들의 자유를 빼앗고, 생계를 위협하고,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이루신 구원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승리의 근거를 성도들의 용기나 인내에 두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강하게 붙잡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승리의 근거입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권세도, 지금 있는 것도 앞으로 올 것도, 세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지어진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38–39 · 본디새김

이 마지막 선언은 단순한 감정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어 죄를 심판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성령은 성도들 안에 거하시며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바울은 그 모든 일을 생각한 뒤에 「나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확신의 범위에는 삶과 죽음, 현재와 미래, 눈에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권세까지 포함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밖의 어떤 지어진 것도」가 나옵니다. 19절에서 썩음의 종살이 아래 신음하며 기다리던 「지어진 것 전체」를 가리키던 언어가 마지막 확신에 다시 나타납니다. 창조세계는 신음하지만, 그 안에 있는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높음」과 「깊음」은 공간적인 극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으며, 고대의 천체 및 우주적 권세와 관련된 언어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이 알거나 알지 못하는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취지는 분명합니다.

구원은 어디까지 이르는가

로마서 8:1–39 본문 →

로마서 8장의 처음과 마지막이 여기서 만납니다. 처음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 때문에 유죄 판결이 없다고 했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성도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바울에게 구원은 죄의 형벌을 면제받는 것보다 훨씬 큰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이루시고, 그 가족을 통해 창조세계의 회복까지 바라보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자녀가 여전히 신음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헤아려집니까? 바울은 성도가 고난받지 않는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는 기준이 고난의 유무라면 이 장의 약속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대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주셨고, 그 아들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아뢰신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이 주는 확신은 자신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과 다릅니다.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아는 데서 오는 확신입니다.

온 창조세계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 안에서 신음하며 기다리고, 성령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 신음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눈앞에는 여전히 환난과 곤경과 박해와 굶주림과 칼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온 창조세계의 신음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가운데, 바울은 그 모든 것보다 더 확고한 사실 하나를 선언합니다.

그 무엇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