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9–11장 · 이스라엘과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했는가
로마서 9장은 뜻밖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그치지 않는 아픔이 있습니다.로마서 9:2 · 본디새김
바울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받는 것까지 바라겠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셨으며, 율법을 주시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마침내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언약 밖에 있었던 이방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신 분이시라면, 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에서, 모세와 파라오의 이야기를 차례로 불러오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남긴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어떻게 자기 백성을 세우셨는지 살펴보면, 지금 벌어지는 뜻밖의 일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 속의 하나님은 인간의 예상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장자가 아니라 아우를 선택하시고, 자격을 갖추기 전에 약속하시며,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마침내 자기 백성이 아니었던 이들까지 자기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로마서 9장의 중심에는 단순히 누가 선택받고 누가 버림받는가의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인간의 혈통과 자격과 기대를 넘어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 그리고 그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가.
바울은 이 질문을 붙잡고 자신의 가장 깊은 슬픔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기를 바랄 만큼
바울은 먼저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세 번에 걸쳐 강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합니다.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이 거룩한 영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는 것입니다.로마서 9:1 · 본디새김
슬픔을 말하려고 이토록 엄숙하게 시작하는 이유는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할 수만 있다면 나 자신이 내 형제들, 곧 육으로 나와 한 겨레인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받기를 바라겠습니다.로마서 9:3 · 본디새김
「저주받기」는 단순히 불행해지거나 벌을 받는다는 뜻보다 강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저주 아래 놓이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실현 가능한 구원의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을 향한 고통스러운 소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에서는 구약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겼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며, 용서하시지 않으려면 자신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 달라고 말했습니다(출애굽기 32:31–32). 바울이 모세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자신까지 내놓겠다는 중보자의 모습이 두 장면을 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멀리서 비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의 형제이고 혈육이며, 바울 역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이 그에게는 깊은 슬픔입니다.
그런데 4–5절을 보면 그 슬픔의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들의 자리와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주심과 예배와 약속들이 그들의 것이며, 조상들도 그들에게 속하고, 육으로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찬송받으시는 분입니다. 아멘.로마서 9:4–5 · 본디새김
이 목록은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 성막과 성전,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아들의 자리」는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부르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 안으로 부름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목록의 마지막에는 그 모든 특권보다 더 결정적인 사실이 등장합니다. 육으로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무관하게 나타나신 구원자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그 역사를 통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통은 더욱 깊습니다. 약속받은 백성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가 나셨는데, 정작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슬픔은 이스라엘의 실패만을 바라보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위대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생겨나는 아픔입니다.
5절의 마지막 문장은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 부르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독립적인 찬송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이스라엘의 모든 특권을 열거한 끝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풍성한 약속을 주셨는데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한 것입니까?
조금 더 깊이
이 해설의 본문은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찬송받으시는 분입니다」라고 옮겨, 「계신 분」이 바로 앞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읽었습니다. 문법적인 연결과 찬송문의 어순을 근거로 삼는 해석입니다. 반면 「육으로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에서 문장을 끝내고, 뒤의 표현을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독립적인 문장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원문에는 오늘날의 문장부호가 없기 때문에 두 해석이 가능하며, 문맥과 바울의 표현 습관을 근거로 판단하게 됩니다. 채택한 해석은 충분한 문법적 근거를 지니지만, 다른 읽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효력을 잃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9:6 · 본디새김
이 문장이 로마서 9장의 논증을 움직이는 출발점입니다.
같은 이름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앞의 이스라엘은 야곱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민족이고, 뒤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과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는 이스라엘입니다. 바울은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서 그들의 특권을 길게 열거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일이 혈통만으로 자동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모두 자녀인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이삭에게서 난 이들이 네 씨라 불릴 것이다」 하셨습니다.로마서 9:7 · 본디새김
이스마엘도 분명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언약의 계보를 이어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1:12).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언약을 이어 갈 계보를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곧 육의 자녀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아니며, 약속의 자녀가 씨로 헤아려진다는 말입니다.로마서 9:8 · 본디새김
여기서 「육의 자녀」는 앞 장에서처럼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뜻하지 않고, 문맥상 자연적인 혈통을 따라 태어난 자녀를 가리킵니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그 지위를 얻은 자녀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생식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섰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맘때에 내가 올 것이고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로마서 9:9 · 본디새김
창세기 18:10, 14의 이 약속이 주어질 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녀를 얻는 일은 인간적인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이나 조건을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취할 수 없었던 미래를 약속하시고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논증에서 약속은 단순한 예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써 새로운 현실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삭과 이스마엘은 어머니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선택하신 것은 사라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이 가능성마저 제거하기 위해 리브가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를 불러옵니다.
아이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고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하지도 않았을 때에, 뽑으심을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서도록, 곧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근거하여 서도록, 리브가에게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다」라는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서 9:11–12 · 본디새김
이번에는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은 두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무엇을 하기도 전에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25:23에서 하나님은 리브가의 태 안에 「두 나라」가 있고 「두 백성」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개인의 미래만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나올 두 민족의 역사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예언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장자 상속의 질서나 인간의 선행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13절의 인용은 한층 더 날카롭습니다.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를 미워했다」고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로마서 9:1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창세기가 아니라 말라기 1:2–3에서 왔습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이 오랜 역사를 겪은 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씀하시며 두 민족의 서로 다른 역사를 증거로 가리키시는 문맥입니다. 따라서 「사랑했다」와 「미워했다」는 심리적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의 역사를 누구를 통해 이어 가셨는가 하는 선택과 에돔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렇다고 「미워했다」를 무조건 「조금 덜 사랑했다」로 약화시켜서도 안 됩니다. 말라기의 문맥에는 에돔에 대한 실제 심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말라기 1:3–4).
바울은 태어나기 전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를 오랜 역사 속에서 해석한 말라기의 말씀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자격이나 행위에 대한 사후 평가로 시작된 것이 아님을 두 본문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은 이 사례를 하나님이 개개인의 궁극적인 구원을 주권적으로 결정하신다는 원리의 증거로 이해하며, 태어나기 전의 선택과 행위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른 해석은 창세기와 말라기의 민족적·역사적 문맥을 중시하여, 하나님이 구원의 약속을 이어 갈 백성과 계보를 자유롭게 선택하셨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야곱의 선택을 곧 에서 개인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판결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개인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민족과 언약의 역사를 논하고 있으므로, 어느 한쪽만을 남기면 본문의 일부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처음부터 모든 혈통적 후손이 같은 방식으로 약속을 계승하는 역사가 아니었고, 그 차이를 만들어 낸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심각한 반론이 제기됩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한쪽을 선택하신다면, 그것이 과연 공정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 금송아지와 파라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설마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로마서 9:14 · 본디새김
바울은 인간에게 공정한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비를 베푸는 이가 누구이든 그에게 자비를 베풀고, 내가 불쌍히 여기는 이가 누구이든 그를 불쌍히 여기겠다.」로마서 9:15 · 본디새김
출애굽기 33:19의 이 말씀은 금송아지 사건 직후에 주어졌습니다.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출애굽기 32장).
언약을 받은 백성이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모세는 백성을 위해 간구했으며, 이어지는 대화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격에 따라서만 자기 백성을 대하셨다면,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은 이미 언약을 잃어버렸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죄를 지은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하나님은 누구든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일반론 이상입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지금의 이스라엘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역사를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이 자격 없는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지 물을 수 있지만, 이스라엘 자신도 자비로 보존된 백성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비를 죄를 묵인하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심판과 자비가 함께 등장하고, 바울 역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자비의 근원이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이에게 달린 것도 아니고 달음질하는 이에게 달린 것도 아니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달렸습니다.로마서 9:16 · 본디새김
「원하는 이」와 「달음질하는 이」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인간의 선택이 의미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그는 믿음과 행위의 차이를 분명하게 논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거나 열심히 달렸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자비를 자신의 권리처럼 요구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비의 사례와 나란히 전혀 다른 사례를 제시합니다. 파라오입니다.
성경이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내가 너를 일으켜 세웠다. 너를 통하여 내 힘을 드러내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해지게 하려는 것이다.」로마서 9:17 · 본디새김
출애굽기 9:16의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리며 그들을 보내라는 명령에 저항했고, 하나님은 여러 재앙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파라오의 완고함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파라오 자신이 마음을 완고하게 하기도 하고(출애굽기 8:15, 32),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기도 합니다(출애굽기 9:12; 10:1).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파라오를 악하게 만드셨다는 식으로도, 하나님이 파라오의 결정을 뒤늦게 승인하셨을 뿐이라는 식으로도 단순화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 복잡한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게 부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원하시는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원하시는 이를 완고하게 하십니다.로마서 9:18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파라오를 완고하게 하셨습니다. 두 사건 모두 출애굽의 역사에 속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로 이루어졌고, 파라오의 저항과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은 온 땅에 알려졌습니다. 이 대조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모든 질문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자격에 종속되지도 않고, 인간의 저항 때문에 무너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비를 베푸시고 사람을 완고하게 하신다면, 그분은 왜 여전히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 질문을 그대로 꺼내 놓습니다.
토기장이에게 진흙이 물을 수 없는 것
그러면 그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찌하여 아직도 탓하십니까? 누가 그분의 뜻에 맞서 왔습니까?」로마서 9:19 · 본디새김
14절에서는 하나님이 불공정하신 것 아니냐고 물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면 인간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바울의 논증을 따라오던 독자라면 실제로 제기할 수 있는 의문입니다.
아니, 사람이여, 하나님께 말대답하는 그대는 누구입니까? 빚어진 것이 빚은 이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하겠습니까?로마서 9:20 · 본디새김
이 대답은 하나님께 질문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방금 하나님의 불의와 인간의 책임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핵심은 「말대답하는」 태도, 곧 피조물이 창조주를 자기와 동등한 심판대에 세우고 하나님이 자신의 기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태도입니다.
아니면 토기장이가 진흙을 두고 같은 덩이에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으로 만들 권한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로마서 9:21 · 본디새김
두 그릇은 「같은 덩이」에서 만들어집니다.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의 차이는 서로 다른 재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무것도 하기 전에 선택이 말씀된 야곱과 에서처럼, 이 비유도 특별한 자격이나 우월한 출신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구약의 배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사야 29:16과 45:9에서는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혜를 문제 삼는 모습이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예레미야 18:1–10에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망가진 그릇으로 다른 그릇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심판하겠다고 하신 민족이라도 악에서 돌아서면 심판을 거두시고, 복을 약속하신 민족이라도 악을 행하면 그 복을 거두실 수 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레미야에서 토기장이의 권한은 모든 운명이 고정되어 있다는 설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가 인간의 예상이나 요구에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바울이 예레미야 18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배경을 보면 비유를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만들고 버리시는 분이라는 그림으로 축소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22–23절에서는 비유가 더욱 심각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진노를 드러내 보이고 자신의 힘을 알리려 하시면서도, 멸망하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매우 오래 참으시며 견디시고, 그리고 영광에 이르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로마서 9:22–23 · 본디새김
자비의 그릇들을 미리 마련하신 분은 명백히 하나님이지만, 진노의 그릇들이 「멸망하게 되어 있다」는 표현은 누가 그렇게 준비했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개인의 영원한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과,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집단들을 심판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게 선언하지만, 진노의 그릇이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그들의 최종적인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논쟁에만 집중하면 본문이 강조하는 동사를 놓치기 쉽습니다.
「매우 오래 참으시며 견디시고.」
바울이 하나님의 권한을 이야기하다가 강조하는 것은 무제한적인 힘의 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해야 할 대상들을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파라오를 오래 견디신 하나님의 모습과도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곧 그분이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부르신 우리에게 자기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시려고 그리하셨다면 어떻습니까 —로마서 9:24 · 본디새김
오랫동안 전개된 논증이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자비의 그릇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부르심을 받은 「우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을 통해 역사 속에 나타났지만, 이스라엘의 혈통 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방인들까지 자기 백성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제 예언자들의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멸망하게 되어 있는」은 그리스어 수동태로 해석할 수 있는 형태입니다. 문법적으로 중간태의 가능성을 논하는 해석도 있으나, 수동태로 이해하는 견해가 강합니다. 이 차이가 의도적인 것인지, 진노의 그릇들에 대한 하나님의 작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개인의 운명을 강조하는 해석은 토기장이의 권한과 하나님의 선택, 진노와 자비의 대비를 하나의 일관된 논증으로 읽고, 역사적 도구를 강조하는 해석은 파라오의 역사적 역할과 뒤이어 등장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부르심에 주목합니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불렸던 이들
호세아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내 백성이 아닌 이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이를 사랑받은 이라 부르겠다.」로마서 9:25 · 본디새김
호세아가 말한 「내 백성이 아닌 이들」은 본래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북이스라엘 시대에, 하나님은 호세아의 자녀에게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의 이름을 주게 하셨습니다(호세아 1:9). 이름 자체가 심판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2:23에서 하나님은 버림받았던 이스라엘을 다시 자기 백성이라 부르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호세아의 원래 메시지는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회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말씀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을 설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바울은 호세아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발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불렸던 이들의 신분을 바꾸는 결정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을 부르시는 일에도 같은 자비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만 호세아의 원래 문맥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사실은 지워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적용이 호세아의 직접적인 예언 성취인지, 이스라엘 회복의 약속을 이방인에게 확장한 것인지, 아브라함 언약과 새로운 출애굽이라는 더 넓은 문맥에서 읽은 것인지는 학문적으로도 논의됩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논증에서 그 의미는 선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리는 인간이 스스로 획득하여 요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받아들이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말이 전해진 바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로마서 9:26 · 본디새김
버림받았다는 선언이 주어졌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 이름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람들의 신분과 관계가 새롭게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부름받는 동안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바울은 곧이어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들이 구원받을 것이다.」로마서 9:27 · 본디새김
이사야 10:22–23은 아시리아의 위협과 심판 속에서, 심판이 끝이 아니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창세기 22:17), 이사야는 그처럼 많아도 남은 자들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숫자가 심판을 면제해 주지는 않지만,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미리 말한 그대로입니다.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소돔같이 되었을 것이고 고모라와 같게 되었을 것이다.」로마서 9:29 · 본디새김
이사야 1:9는 하나님이 유다에 남은 자들을 보존하지 않으셨다면 그들도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한 파멸을 겪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은 자들이 보존된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의로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남겨 두셨기 때문에 그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불렸던 이들이 다시 받아들여지고, 이사야에서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보존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 경계를 넘어 새로운 사람들을 부르시고, 심판의 자리에서는 자기 백성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서 처음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약속이 혈통이나 민족 전체의 자동적인 자격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남은 자들에 대한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아직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고 사람들을 부르신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까?
의를 쫓던 사람들이 걸림돌에 부딪치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의를 뒤쫓지 않던 이방 사람들이 의를 붙잡았습니다. 곧 믿음에서 비롯된 의입니다.로마서 9:30 · 본디새김
바울은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을 제시합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과 율법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어떤 도덕적 삶도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삶이 더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뒤쫓았지만 거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에서가 아니라 행위에서 의가 비롯되는 것처럼 뒤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부딪쳤습니다.로마서 9:32 · 본디새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이야기하던 바울이 이제 인간의 믿음과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앞의 논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비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사람들이 그 구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를 지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유대인들은 모두 자기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했고, 이방인들은 모두 은혜를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이 유대인이며, 앞서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를 말했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교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고 율법 준수만으로 구원을 획득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언약 전통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율법을 존중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 놓으신 의의 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율법의 행위에 근거한 것처럼 의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초점은 하나님이 누구를 부르시는가에서 사람들이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가로 옮겨갑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걸림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분을 믿는 이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로마서 9:3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의 두 본문을 결합한 것입니다. 이사야 8:14에서 여호와야훼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이스라엘 두 집안에 걸림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십니다. 이사야 28:16에서는 하나님이 시온에 견고한 기초가 되는 돌을 놓으시고, 그것을 믿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놓으신 돌입니다.
그 돌은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됩니다. 문제는 돌이 다르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습니다.
9:33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이어지는 논증에서 그리스도가 의와 구원의 중심이심을 밝히는 점을 고려하면, 걸림돌이 되시는 분을 그리스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종교적 기대와 다르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망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인간이 의를 추구하던 방식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기존의 종교적 삶에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이시라면, 사람은 그분을 중심으로 자기 삶과 의에 대한 이해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신의 의에 예수님의 도움을 보태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그분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추상적인 예정론을 설명하려고 이 장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민족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큰 슬픔을 토로했고, 그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과거에서 하나의 반복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장자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해 약속의 계보를 이어 가셨고, 금송아지를 섬긴 백성을 자비로 보존하셨으며, 심판의 때에도 남은 자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방인들이 부름받는 지금의 일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역사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일이 인간의 응답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장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믿음 가운데 어느 하나만 남기는 방식으로 읽으면 본문의 긴장을 잃게 됩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택의 구분을 자기 민족에게 차갑게 적용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자신이 저주받는 것까지 바라겠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는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감사할 근거입니다.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신들이 이스라엘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자신들 역시 자비를 통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9장은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한가를 판정하는 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약속에 신실하시면서도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 주는 장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에 돌 하나를 놓으셨습니다. 누구도 자기 능력으로 만든 것이 아니며, 누구도 자기 공로로 소유할 수 없는 돌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걸림돌에 관한 말씀 바로 뒤에 「그분을 믿는 이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사야의 약속을 이어 붙입니다.
로마서 9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그치지 않는 아픔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온에 놓으신 돌 앞에서 끝납니다.
그 돌이 있는 자리에서 인간의 혈통도, 장자의 권리도, 스스로 쌓아 올린 의도 마지막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돌을 믿는 사람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