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9–11장 · 이스라엘과 하나님

말씀은 이미 가까이에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장면이 나옵니다.

한쪽에서는 누군가 하늘에 올라가려 하고, 다른 누군가는 깊은 심연까지 내려가려 합니다. 무언가를 찾아야 하고, 누군가를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이 너에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8절)고 말합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장의 후반부에서는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움직이고,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져 나갑니다. 누군가 보내심을 받고, 선포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습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뒤에서는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이르기 위해 멀리까지 전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순종하지 않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내 두 손을 펴 내밀었다.」(21절)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사람들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말씀하셨고, 사람들을 보내셨으며, 끝내 자기 백성을 향해 두 손을 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백성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0장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모세의 율법을 다시 읽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며, 믿음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논증의 끝에서 자기 백성을 향해 여전히 두 손을 펴고 계신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10장 본문 읽기 →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다

로마서 10:1–4 본문 →

형제 여러분, 그들을 위한 내 마음의 바람과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는 구원을 향합니다.로마서 10:1 · 본디새김

바울은 먼저 자신의 바람을 밝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입니다. 이 말은 앞 장에서 드러난 자기 민족을 향한 슬픔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을 논쟁에서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진술은 뜻밖입니다.

나는 그들을 두고 이렇게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지니고 있으나 바른 앎을 따른 열심은 아닙니다.로마서 10:2 · 본디새김

바울은 그들의 열심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관심한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소중히 여겼고, 하나님을 섬기려 했으며, 그분의 뜻에 충실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러한 열심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13–14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할 만큼 조상의 전통에 열심이었다고 회고하고, 빌립보서 3:6에서도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종교적 열심은 멀리서 관찰한 다른 사람들의 특징이 아니라 자기 삶을 움직였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른 앎」은 단순히 정보가 많거나 적은 문제로 축소하기 어렵습니다.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올바르게 알아보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려 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애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3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과 그분이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구원 행위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에 비해 「자기 의」는 자신들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근거를 세우려는 시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당시 유대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고 자기 공로만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겨냥하는 문제는 더 깊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이루시는 방식이 나타났는데도, 자신들이 율법을 따라 의를 추구하던 방식을 계속 결정적인 기준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립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관점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지만,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시도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고 한 뒤, 곧바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어떤 교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시는 방식 앞에서 그분의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앎과 순종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한 문장으로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모든 이가 의에 이르도록 말입니다.로마서 10:4 · 본디새김

그리스어 텔로스(τέλος)는 어떤 것이 끝나는 종점뿐 아니라, 그것이 향하던 목적이나 도달점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율법이 의를 얻는 결정적인 길로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지향하던 목적이자 완성이시라는 뜻으로도 읽혀 왔습니다. 「끝」은 이 두 가능성을 모두 품을 수 있는 번역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은 율법의 끝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믿는 모든 이가 의에 이르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사람들이 의에 이르는 길이 어떻게 열렸는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이루셨다면, 이제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신분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자기 의」를 두고 전통적인 해석은 인간이 행위로 의를 획득하려는 시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 사이의 대립을 강조합니다. 반면 바울의 새 관점과 관련된 해석은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스라엘의 언약적 정체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열린 하나님의 의를 함께 고려합니다. 4절의 「끝」에 대해서도 두 의미를 반드시 완전히 분리해야 하는지가 논쟁의 대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적을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이 의를 얻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방식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

로마서 10:5–8 본문 →

모세가 율법에서 난 의에 관하여 「율법의 규정들을 행한 사람은 그 규정들로 살 것이다」라고 적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5 · 본디새김

바울이 인용하는 말씀은 레위기 18:5입니다.

레위기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뒤 주신 명령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8:5 자체를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라는 선언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율법에서 난 의」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여, 율법의 규정들을 행하는 것과 사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난 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마라.」 곧 그리스도를 데리고 내려온다는 뜻입니다.로마서 10:6 · 본디새김

믿음에서 난 의를 설명할 때도 바울은 모세의 글, 신명기 30:11–14를 인용합니다. 바울은 모세를 단순히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인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글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읽으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합니다.

신명기 30:1–1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겨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진 뒤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모으고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30:6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스라엘의 미래에는 그들의 의지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다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서도,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서도 가져와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자기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그 말씀은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어 듣고 행할 수 있습니다(신명기 30:11–14).

바울은 여기에 「곧 그리스도를 데리고 내려온다는 뜻입니다」라는 설명을 붙입니다. 모세에게는 하늘에 올라가 율법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데려오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또는 「『누가 심연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마라.」 곧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데리고 올라온다는 뜻입니다.로마서 10:7 · 본디새김

바울은 신명기의 「바다 건너편」 대신 「심연」을 사용합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곳을 뜻하는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죽음의 영역을 떠올리게 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에, 누구도 깊은 곳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에 올라가 그리스도를 데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심연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다시 데려올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은 인간이 성취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더 높이 올라가고 더 깊이 내려가 아직 얻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는 인간이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일입니다.

도리어 믿음에서 난 의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말씀이 너에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그 말씀은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로마서 10:8 · 본디새김

멀리서 찾아야 했던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나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죽으셨으며, 하나님이 그분을 일으키셨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먼 곳까지 도달하여 비밀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전해 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 말씀이 「입」과 「마음」에 있다고 말할까요? 그 답이 다음 절에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신명기 본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모세가 말한 율법의 가까움을 바울이 복음의 가까움에 적용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신명기 30장 전체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마음의 변화를 전망한다는 점에서, 바울이 그 약속의 궁극적인 실현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바울이 신명기의 문면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에 비추어 다시 적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로마서 10:9–13 본문 →

곧 그대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로마서 10:9 · 본디새김

바울은 신명기에서 가져온 「입」과 「마음」을 그대로 이어 갑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10절에서 바울은 두 표현을 다시 반복하되 순서를 바꿉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10 · 본디새김

9절의 입과 마음이 10절에서는 마음과 입이 됩니다. 이는 신명기에서 가져온 두 표현으로 믿음의 내적 확신과 외적 고백을 함께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충족해야 할 두 개의 독립된 구원 절차가 아닙니다. 믿음이 마음속에서 받아들여지고, 그 믿음이 입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믿음이나, 예수님께서 훌륭한 가르침을 남기신 선생이시라는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1:4에서 예수님께서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 가운데 드러나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단순히 존경받는 스승을 높여 부르는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주인이나 권위를 지닌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만,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를 나타내는 데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논증을 전개합니다.

먼저 이사야 28:16을 인용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로마서 10:11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의는 특정한 혈통에 속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약속에 참여합니다.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사이에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분이 모든 이의 주님이시고,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넉넉히 베푸십니다.로마서 10:12 · 본디새김

유대 사람에게는 한 분의 주님이 계시고, 그리스 사람에게는 다른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약속도 민족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13 · 본디새김

바울은 요엘 2:32를 인용합니다. 요엘서에서는 두렵고 큰 여호와야훼의 날이 다가오지만, 하나님은 자기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요엘 2:28–32). 요엘의 원래 말씀에서 「주의 이름」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12절에서는 같은 주님이 모든 이의 주님이시라고 말하며, 13절에서는 그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구원의 약속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믿음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는 인간 대리자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권위에 참여하시는 분으로 이 구약의 말씀을 통해 표현합니다.

물론 이 구절 하나만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9절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셨다고 분명히 구별하면서도, 여호와야훼를 향한 구원의 호소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이 두 진술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11절의 「누구나」, 12절의 「모든 이」, 13절의 「누구나」가 이어지며 논증을 한 방향으로 밀고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은 율법을 소유한 민족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한 분의 주님이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에 관해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그분을 부를 수 있습니까?

아름다운 발에서 시작되는 믿음

로마서 10:14–17 본문 →

바울은 이제 연속해서 네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그들이 믿지 않은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그분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선포하는 이 없이 어떻게 듣겠습니까? 보냄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선포하겠습니까? 「선한 것을 복음으로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로마서 10:14–15 · 본디새김

바울은 구원의 고백에서 출발하여, 그 고백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반대 방향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길이 보입니다.

누군가 보냄을 받습니다. 그가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람들이 듣습니다. 그 가운데 믿는 사람이 생기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기서 믿음은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종교적 감정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들을 말씀이 필요하고, 그 말씀은 누군가가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 낸 구원 방법을 소개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전하도록 보냄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의 시작점은 선포자의 열정이나 설득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과, 그 일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왜 갑자기 발이 아름답다고 할까요?

바울이 인용하는 이사야 52장은 시온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그때 산을 넘어 한 사람이 달려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이며, 그가 전하는 소식의 핵심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선언입니다(이사야 52:7). 전쟁이나 포로 생활의 불안 속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는, 그가 무엇을 전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발의 모양이 아름답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발이 가져오는 소식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시온의 회복과 하나님의 통치를 노래했다면, 바울은 그 약속의 의미를 부활하신 주님 예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앞서 바울은 예수님을 데려오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거나 심연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기 위해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길을 떠나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지만, 그 구원을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들려준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로마서 10:16 · 본디새김

이사야 53:1은 바로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52장과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52장에서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령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는데, 53장에서는 그 소식을 누가 믿었느냐는 탄식이 나옵니다. 더욱이 이사야 52:13–53:12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멸시받고 고난을 겪습니다. 사람들이 예상하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방식과 다르지만, 바로 그 고난과 낮아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처음의 문제가 다시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열심히 추구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은 그들의 기대와 일치하지 않았고, 그들은 그 소식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납니다.로마서 10:17 · 본디새김

그리스어 아코에(ἀκοή)는 듣는 행위와 들려오는 소식이라는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들음」은 앞 절의 「우리가 들려준 소식」과 연결되어, 전해지는 소식과 그것을 듣는 일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으로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에게 믿음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종교적 결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그분 안에서 이루신 일을 받아들이는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은 혹시 충분히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조금 더 깊이

「그리스도의 말씀」의 원문 레마토스 크리스투를 두고, 앞에서 예수님의 주되심과 부활이 선포의 내용이었으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라는 해석에 근거가 있습니다. 동시에 14절의 「그분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복음의 선포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린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두 의미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과 권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나갔다

로마서 10:18–20 본문 →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듣지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나갔고 그들의 말이 온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로마서 10:18 · 본디새김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의 믿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차례로 검토합니다. 첫 번째는 듣지 못했다는 가능성이고, 바울은 시편 19:4를 인용하여 이를 부정합니다.

시편 19편은 본래 복음 전도자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낮과 밤이 특별한 언어 없이도 그 증언을 온 땅에 미치게 하는, 창조세계의 말없는 증언을 노래합니다. 바울은 이 언어를 빌려 복음의 소식이 넓은 세계에 전파되는 현실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바울 시대에 지구상의 모든 개인이 실제로 복음을 들었다는 역사적 진술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로마서 15:20–21). 「온 땅」과 「온 세상 끝」은 복음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시편의 언어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는 현실을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 소식을 듣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6절에서 말했듯이, 듣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까지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습니까? 먼저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민족 아닌 이들로 너희를 시샘하게 하고, 미련한 민족으로 너희를 노엽게 하겠다.」로마서 10:19 · 본디새김

신명기 32:21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신으로 섬겨 하나님을 시샘하게 한 일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도 「민족 아닌 이들」 때문에 시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긴 행위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아닌 민족을 통해 그들을 시샘하게 하시는 일을 대응시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현실과 연결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모습이 이스라엘에게 시샘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민족 아닌 이들」, 「미련한 민족」이라고 표현되는 사람들이므로, 바울은 이방인의 우월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상 밖의 구원 행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대담하게 말합니다. 「나를 찾지 않던 이들 가운데서 내가 발견되었고, 나에게 묻지 않던 이들에게 내가 드러났다.」로마서 10:20 · 본디새김

10장 처음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발견되셨다고 말합니다.

찾던 사람들이 얻지 못했고, 찾지 않던 사람들이 발견했습니다.

차이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사람들이 그 드러내심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먼저 하나님을 찾아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사야 65장의 본래 문맥에서 65:1의 대상을 이방인으로 볼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지적하는 연속된 말씀으로 볼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자신을 찾지 않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현실에 적용하고, 다음 절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적용합니다.

모세는 이방인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시샘하게 될 일을 말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이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을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무너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이 이스라엘의 기대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마지막 구절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 줍니다.

온종일 두 손을 펴 내밀었다

로마서 10:21 본문 →

그러나 이스라엘을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순종하지 않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내 두 손을 펴 내밀었다.」로마서 10:21 · 본디새김

이 말씀도 이사야 65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두 손을 펴 내밀고 계셨습니다. 이 두 진술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향해 각각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거슬러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손을 펴 내미셨습니다.

그 손은 잠깐 내밀어졌다가 거두어진 손이 아니라 「온종일」 내밀어진 손입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인내와 계속된 호소를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물론 이사야 65장의 원래 문맥에서는 이 말씀 뒤에 우상숭배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손을 펴 내미신다는 표현을 하나님이 어떤 불순종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심판의 문맥 속에서도 하나님이 먼저 자기 백성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보면서도 거슬러 말했습니다.

가까이 온 말씀, 멀리까지 전해지는 복음

로마서 10:1–21 본문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온종일 두 손을 펴 내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지만,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 했고, 하나님이 보내시고 일으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가까이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셨고, 하나님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이 가까움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고, 그 가까운 말씀은 보냄받은 이들의 선포를 통해 멀리까지 전해집니다. 그러나 선포가 반드시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바울은 그 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서 경멸하거나, 자신들은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태도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크기가 아니라, 그 열심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가입니다.

바울이 처음에 품었던 자기 민족의 구원을 향한 간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는 환희의 장면으로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발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산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지나갔습니다. 그 소식은 멀리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소식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순종하지 않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내 두 손을 펴 내밀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