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9–11장 · 이스라엘과 하나님
말씀은 이미 가까이에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장면이 나옵니다.
한쪽에서는 누군가 하늘에 올라가려 하고, 다른 누군가는 끝없이 깊은 곳까지 내려가려 합니다. 무언가를 찾아야 하고, 누군가를 모셔 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이 네 가까이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장의 후반부에서는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움직이고,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져 나갑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뒤에서는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이르기 위해 멀리까지 전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않고 말로 맞서는 백성에게 온종일 두 손을 펼쳐 내밀었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사람들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말씀하셨고, 사람들을 보내셨으며, 끝내 자기 백성을 향해 두 손을 펼쳐 내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백성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0장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마음 깊이 바라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로마서 10:1 · 두루새김
바울이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입니다. 앞 장에서 드러난 자기 민족을 향한 슬픔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을 논쟁에서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뜻밖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다는 것을 나는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올바른 앎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로마서 10:2 · 두루새김
이 말에는 단순한 비난과 구별되는 인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관심한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소중히 여겼고, 하나님을 섬기려 했으며, 그분의 뜻에 충실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러한 열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13–14와 빌립보서 3:6에서 자신이 조상의 전통에 열심이었고, 그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했다고 돌아봅니다. 그에게 종교적 열심은 멀리서 지켜본 다른 사람들의 특징이 아니라 자기 삶을 움직였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은 「올바른 앎」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앎은 정보가 많거나 적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올바르게 알아보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려 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애쓰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3 · 두루새김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과 그분이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구원 행위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고, 「자기 의」는 자신들이 의롭다고 인정받을 근거를 세우려는 시도를 가리킵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고 자기 공로만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짚는 문제는 더 깊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이루시는 방식이 나타났는데도, 자신들이 율법을 따라 의를 추구하던 방식을 계속 결정적인 기준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고 한 뒤, 곧바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어떤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의롭게 하시는 방식 앞에서 그분의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앎과 순종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끝이셔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통해 의에 이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4 · 두루새김
「끝」으로 옮긴 그리스어 텔로스(τέλος)는 어떤 것이 끝나는 지점뿐 아니라, 그것이 향하던 목적이나 도달점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율법이 의를 얻는 결정적인 길로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향하던 목적이자 완성이시라는 뜻으로도 읽혀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적을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이 의를 얻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두 뜻을 함께 읽을 수도 있어, 두루새김도 「끝」으로 옮겨 두 가능성을 모두 품고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이 설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의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길은 「믿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신분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대조를 두고 전통적인 해석은 인간이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시도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고, 바울의 새 관점과 관련된 해석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열린 하나님의 의를 함께 살펴봅니다. 두 관점이 강조하는 측면은 다르지만,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시도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순종이었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
모세는 율법에서 오는 의를 두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율법의 규정들을 실천한 사람은 그 규정들로 살 것이다.」로마서 10:5 · 두루새김
바울이 인용하는 말씀은 레위기 18:5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뒤 주신 명령들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 구원받은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신 것이므로, 이 구절 자체를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으라는 선언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율법의 규정들을 실천하는 것과 사는 것이 연결된 「율법에서 오는 의」를 설명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오는 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라고 말하지 마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려온다는 뜻입니다.로마서 10:6 · 두루새김
믿음에서 오는 의를 설명할 때도 바울은 모세의 글, 신명기 30:11–14를 인용합니다. 바울은 모세를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인물로 만들지 않고, 모세의 글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읽습니다.
신명기 30:1–1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겨 흩어진 뒤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모으고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30:6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 다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 위나 바다 건너편에 있지 않고, 이미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어 듣고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신명기 30:11–14).
모세에게는 하늘에 올라가 율법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모셔 오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끝없이 깊은 곳에 내려가겠느냐?』라고 말하지 마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모셔 올라온다는 뜻입니다.로마서 10:7 · 두루새김
바울은 신명기의 「바다 건너편」 대신 「끝없이 깊은 곳」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곳으로, 문맥에 따라 죽음의 영역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누가 그곳까지 내려가 그리스도를 모셔 올라오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은 인간이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더 높이 올라가고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원의 근거는 인간이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서 오는 의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말씀이 네 가까이에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로마서 10: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죽으셨으며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셨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먼 곳까지 도달하여 비밀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전해 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 말씀이 「입」과 「마음」에 있다고 말할까요? 그 답이 다음 절에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신명기 본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모세가 말한 율법의 가까움을 바울이 복음의 가까움에 적용했다고 보는 해석이 있고, 신명기 30장 전체가 이스라엘의 회복과 마음의 변화를 내다본다는 점에서 바울이 그 약속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진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바울이 신명기의 문면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에 비추어 다시 적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곧 여러분이 입으로 예수께서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로마서 10:9 · 두루새김
바울은 신명기에서 가져온 「입」과 「마음」을 그대로 이어 가지만,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10 · 두루새김
9절의 입과 마음이 10절에서는 마음과 입의 순서로 바뀝니다. 이는 마음속의 확신과 겉으로 드러나는 고백을 함께 보여 주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 가지는 따로 채워야 할 독립된 구원 절차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인 믿음이 입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고백의 내용은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믿음이나, 예수님이 훌륭한 선생이시라는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1:4에서 예수님께서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 가운데 드러나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주님」으로 옮긴 그리스어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주인이나 권위를 지닌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만,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를 나타내는 데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이용해 설명을 이어 갑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로마서 10:11 · 두루새김
이사야 28:16을 인용한 이 구절에서 강조되는 말은 「누구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한 혈통에 속한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사이에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주님은 같은 분이시며,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넉넉히 베푸십니다.로마서 10:12 · 두루새김
같은 주님이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므로, 그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약속도 민족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13 · 두루새김
요엘서에서는 두렵고 큰 여호와야훼의 날이 다가오지만, 하나님은 자기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요엘 2:28–32). 그러므로 요엘의 원래 말씀에서 「주님의 이름」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12절에서는 같은 주님이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라고 말하며, 13절에서는 그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구원의 약속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믿음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 대리자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권위에 참여하시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 하나만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9절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분명히 구별하면서도, 여호와야훼를 향한 구원의 호소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이 두 진술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11절의 「누구나」, 12절의 「모든 사람」, 13절의 「누구나」가 이어지며 설명을 한 방향으로 밀고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은 율법을 소유한 민족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에 관해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그분을 부를 수 있습니까?
아름다운 발에서 시작되는 믿음
바울은 이제 연속해서 네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믿겠습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보냄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 10:14–15 · 두루새김
바울은 구원의 고백에서 출발하여 그 고백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반대 방향에서 보면, 누군가 보냄을 받고,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듣고, 그 가운데 믿는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믿음은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들을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슬의 처음에는 「보냄」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 낸 구원 방법을 소개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전하도록 보냄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의 시작점은 전하는 사람의 열정이나 설득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왜 발이 아름답다고 할까요?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52:7은 시온의 회복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산을 넘어 한 전령이 달려옵니다. 그가 전하는 소식의 핵심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선언입니다. 전쟁과 포로 생활의 불안 속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그 소식은 운명을 바꾸는 소식이었습니다.
발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발이 가져오는 소식이 아름답습니다. 바울은 이 장면을,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일에 적용합니다.
앞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셔 오려고 하늘에 올라가거나 깊은 곳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을 알리기 위해서는 여전히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로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전한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로마서 10:16 · 두루새김
이사야 53:1은 바로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52장과 이어지는 본문입니다. 52장에서는 전령의 발이 아름답다고 했는데, 53장에서는 그 소식을 누가 믿었느냐는 탄식이 나옵니다. 더욱이 이사야 52:13–53:12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멸시받고 고난을 겪는데, 그 모습은 사람들이 예상한 영광스러운 구원의 방식과 다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구원을 열심히 추구했지만,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소식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되고, 그 소식을 듣는 데서 믿음이 생깁니다.로마서 10:17 · 두루새김
「그 소식을 듣는 데서」는 귀로 소리를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16절의 「우리가 전한 소식」과 이어져 전해지는 소식과 그것을 듣는 일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에게 믿음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종교적 결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그분 안에서 이루신 일을 받아들이는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믿지 않은 것은 충분히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조금 더 깊이
16절의 「소식」과 17절의 「듣는 데서」에는 같은 그리스어 낱말이 쓰이는데, 이 말은 듣는 행위와 들려오는 소식을 모두 뜻할 수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으로도,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과 부활이 전해지는 내용이었다는 점은 앞의 읽기를, 14절의 「그분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은 복음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들린다는 뒤의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두 의미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에 퍼졌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듣지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에 퍼졌고, 그들의 말은 온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로마서 10:18 · 두루새김
바울은 이스라엘의 믿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차례로 검토합니다. 첫 번째는 듣지 못했다는 가능성인데, 바울은 시편 19:4를 인용하며 이를 부정합니다.
시편 19편은 본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늘과 낮과 밤이 특별한 언어 없이도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전한다는 노래입니다. 바울은 창조세계의 널리 퍼지는 증언을 묘사한 이 언어를 복음이 퍼져 나가는 일에 적용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는 현실을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16절에서 말했듯이, 듣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가능성이 남습니다. 혹시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까지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던 것 아닐까요?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습니까? 먼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민족도 아닌 이들을 통해 너희가 시샘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을 통해 너희를 화나게 하겠다.」로마서 10:19 · 두루새김
신명기 32:21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겨 하나님을 시샘하게 한 일을 책망하십니다. 그러고는 그들도 「민족도 아닌 이들」 때문에 시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긴 행위와, 이스라엘 아닌 민족을 통해 시샘하게 하시는 일이 서로 대응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현실과 연결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모습이 이스라엘에게 시샘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지혜롭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어리석은 민족」으로 불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이방인의 뛰어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상 밖의 구원 행위를 드러냅니다.
이사야는 대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를 찾지 않던 이들이 나를 발견했고, 나에게 묻지 않던 이들에게 내가 드러났다.」로마서 10:20 · 두루새김
10장 처음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찾던 사람들이 얻지 못했고, 찾지 않던 사람들이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차이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사람들이 그 드러내심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먼저 하나님을 찾아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모세는 이방인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시샘하게 될 일을, 이사야는 하나님을 찾지 않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무너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이 이스라엘의 기대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마지막 구절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온 땅」과 「온 세상 끝」을 바울 시대에 모든 개인이 실제로 복음을 들었다는 역사적 진술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로마서 15:20–21). 또 이사야 65장의 본래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일과 자기 백성의 반역적인 태도가 함께 나타나며, 65:1의 대상을 이방인으로 볼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지적하는 연속된 말씀으로 볼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바울은 65:1을 이방인에게, 다음 절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적용합니다.
온종일 두 손을 펼쳐 내밀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두고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순종하지 않고 말로 맞서는 백성에게 온종일 두 손을 펼쳐 내밀었다.」로마서 10:21 · 두루새김
이 말씀도 이사야 65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두 손을 펼쳐 내밀고 계셨습니다. 두 진술은 충돌하지 않고, 하나님이 두 쪽을 향해 각각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말로 맞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손을 펼쳐 내미셨습니다.
그 손은 잠깐 내밀어졌다가 거두어진 손이 아니라 「온종일」 내밀어진 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계속된 호소가 이 한 낱말에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사야 65장에서는 이 말씀 뒤에 우상숭배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을 하나님이 어떤 불순종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심판의 문맥 속에서도 하나님이 먼저 자기 백성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기 때문도, 손을 내밀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았고, 내미신 손을 보면서도 말로 맞섰습니다.
가까이 온 말씀, 멀리까지 전해지는 복음
10장의 시작과 끝 사이에는 하나의 긴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지니고 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온종일 두 손을 펼쳐 내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지만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 했고,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고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가까움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고, 그 가까운 말씀은 보냄받은 사람들의 발을 통해 멀리까지 전해집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크기가 아니라, 그 열심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가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서 경멸하거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고 자랑하는 태도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는 기쁨의 장면으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발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처음에 품었던 기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기에는 해결되지 않은 슬픔이 있습니다.
산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지나갔습니다. 그 소식은 멀리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소식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온종일 두 손을 펼쳐 내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