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9–11장 · 이스라엘과 하나님
꺾인 가지도 다시 접붙이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에는 이상한 나무 한 그루가 등장합니다.
오랫동안 자라 온 감람나무입니다. 본디 그 나무에서 자란 가지 몇 개가 꺾여 나가고, 다른 곳에서 자라던 돌감람나무의 가지가 그 자리에 접붙여졌습니다. 새로 들어온 가지는 이제 그 나무의 뿌리에서 양분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가지가 자신이 꺾여 나간 가지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그 가지에게 「그대가 뿌리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떠받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전에 선택하신 백성을 버리고 새로운 백성을 선택하신 것입니까?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는 이방인들에게 먼저 자신들이 어디서 생명을 얻고 있는지 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나무를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나무에 접붙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꺾여 나간 가지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미 꺾인 가지도 다시 접붙일 수 있다니,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자기 민족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을 설명하면서도, 그들의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아직 이루실 일이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장은 두 가지 성급한 결론을 모두 거부합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했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완전히 버리셨다는 결론, 그리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이제 자신들이 더 우월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결론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인간이 예상한 경계를 넘어가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비를 받은 사람은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다는 엘리야에게
바울은 아주 직접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나는 묻습니다. 설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밀어내셨습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으며 베냐민 지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바울이 그 물음에 가장 먼저 내놓는 증거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자신의 혈통과 지파까지 밝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다면, 이스라엘 사람인 바울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겠습니까? 그의 존재 자체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과 맺으신 관계를 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취소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엘리야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주님, 그들이 주의 예언자들을 죽였고 주의 제단들을 헐었습니다. 나만 홀로 남겨졌는데 그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로마서 11: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열왕기상 19:10, 14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맞서 여호와야훼께서 불로 응답하시는 사건을 경험했지만, 그 후 이세벨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자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 장면을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거슬러 하나님께 아뢰는」 장면이라고 설명합니다. 로마서 앞부분에서 바울은 자기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는데, 엘리야는 자기 민족을 거슬러 호소합니다. 그의 눈에는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무엇이라 합니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남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로마서 11:4 · 본디새김
엘리야가 칠천 명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겨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보는 현실을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이 사라졌다고 판단했지만, 하나님의 일은 엘리야가 볼 수 있는 범위보다 넓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배교가 심각하다는 엘리야의 판단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예언자들이 박해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결론까지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도 자기 백성을 남겨 두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현재에 적용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은혜에 따른 뽑으심으로 남은 이들이 있습니다.로마서 11:5 · 본디새김
엘리야 시대와 바울 시대의 상황은 다르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보존하시는 방식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바울 자신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남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은혜에 따른 뽑으심」이라고 말하고, 곧바로 덧붙입니다.
은혜로 된 것이라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로마서 11:6 · 본디새김
은혜는 받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지급되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자기 백성을 남겨 두셨다면, 그 남은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공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는 그 백성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은혜로 사람들을 남겨 두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남은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 현실을 피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나 백성을 아신다는 말은 단순히 그들의 존재를 미리 알고 계셨다는 의미보다 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셨다는 언약적 의미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 3:2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아셨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보지 못하는 눈과 올무가 된 밥상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자신이 찾는 그것을 얻지 못했고 뽑힌 이들이 얻었습니다. 나머지는 마음이 굳어졌습니다.로마서 11:7 · 본디새김
바울은 이스라엘의 믿지 않음을 단순히 정보가 부족하거나 설득이 충분하지 않았던 결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굳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분의 행위를 보면서도 의미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혼미한 영과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9:4와 이사야 29:10의 표현을 결합한 것입니다. 신명기 29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행위들을 목격했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고, 이사야 29장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는 백성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여기에는 쉽게 지나갈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굳어지게 하셨다면, 그들이 믿지 않은 책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은 이 문제를 논리적인 공식으로 완전히 풀어내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두 사실을 함께 놓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않았고, 동시에 그들의 굳어짐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직접 불신앙을 일으키신 것인지, 이미 진행된 불신앙을 심판으로 확고하게 하신 것인지, 또는 그 두 측면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바울은 이 굳어짐을 이스라엘 전체의 영구적인 운명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이미 남은 자들이 있다고 했고, 조금 뒤에는 굳어진 이들이 다시 접붙여질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7–10절을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언제나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와 덫과 걸림돌과 응보가 되기를.」로마서 11:9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69:22–23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시편 69편은 하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의로운 사람의 탄식이며,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바울은 그 시편의 심판 언어를 이스라엘의 굳어짐을 설명하는 데 적용합니다.
밥상은 원래 먹고 힘을 얻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밥상이 올무가 됩니다. 생명을 유지하도록 주어진 자리가 도리어 걸려 넘어지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밥상을 율법이나 이스라엘의 특권과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태도와 결합할 때 도리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앞선 논증과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율법 자체가 악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잘못되었을 때, 그 선물조차 자신을 넘어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드러내는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 말씀의 성취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자신들의 권리처럼 붙잡으려 할 때, 그 은혜가 가리키던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는 사실이, 그들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뜻입니까?
넘어졌지만, 그것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묻습니다. 설마 그들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 것입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도리어 그들의 잘못으로 이방 사람들에게 구원이 이르렀고, 그것은 그들을 시샘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1:11 · 본디새김
이 장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시는가의 문제였고, 두 번째 질문은 이스라엘의 실패가 최종적인 결과인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두 질문 모두에 부정적으로 대답하는데, 이번에는 뜻밖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이 이방인의 구원과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선포되었고, 유대인들의 믿음과 거부가 함께 나타나는 가운데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사도행전 13:44–48; 18:5–6).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 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른 일 자체가 다시 이스라엘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나님의 목적 안에 놓여 있다고 설명합니다.
시샘은 흔히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시샘을 하나님의 자비를 향해 다시 눈뜨게 하는 계기로 바라봅니다.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그 은혜가 다른 민족에게도 주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히려는 계획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다시 구원에 참여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바울은 이 가능성을 더욱 확대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잘못이 세상의 넉넉함이 되고 그들의 줄어듦이 이방 사람들의 넉넉함이 된다면, 그들의 수가 다 차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넉넉함이 되겠습니까?로마서 11:12 · 본디새김
바울은 어느 민족의 손실이 다른 민족의 이익으로 끝나는 구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이방인이 구원받았으니 이제 이스라엘은 필요 없다는 결론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구원에 참여하는 일이 더욱 큰 풍성함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수가 다 차는 것」은 25절의 이방인들의 수가 다 차는 것과 의미 있게 대응합니다. 원문에서 같은 낱말로, 충만함이나 완전한 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두 민족의 구원이 서로 경쟁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구원 계획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대는 바울 자신의 사역을 움직이는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방 사람들의 사도로서 「내가 맡은 섬김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라고 말하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혹시라도 내 살붙이들을 시샘하게 하여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1:14 · 본디새김
조금 뒤에는 이스라엘의 충만함과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지금 자신의 사역에서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믿으면서도, 눈앞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큰 약속이 현재의 구체적인 사역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약속 때문에 지금 복음을 전합니다.
15절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져올 결과를 한층 강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버려진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된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나오는 생명 말고 무엇이겠습니까?로마서 11:15 · 본디새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나오는 생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져올 놀라운 생명과 갱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스라엘의 구원과 장차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연결된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울이 평소 사용하는 부활의 언어와 이 표현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은 비유적 해석의 근거가 되고, 로마서 전체의 부활 소망은 종말론적인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다만 이 절만으로 이스라엘의 회복과 마지막 부활 사이의 구체적인 시간 순서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이스라엘의 회복은 단지 잃어버린 것을 원상복구하는 작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풍성하게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여기서 로마의 이방인 성도들을 향해 직접적인 경고를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서, 이방인들이 그 실패를 자랑할 권리를 얻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뿌리를 떠받치는 것이 아닙니다
첫 열매가 거룩하면 반죽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들도 그러합니다.로마서 11:16 · 본디새김
바울은 먼저 두 가지 짧은 비유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반죽입니다. 민수기 15:17–21에서 이스라엘은 반죽의 첫 부분을 여호와야훼께 예물로 드리도록 명령받았고, 이 행위는 그 반죽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둘째는 나무입니다. 뿌리가 거룩하다면 가지들도 그 뿌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첫 열매와 뿌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이스라엘의 조상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며, 이는 28절에서 이스라엘이 「조상들 때문에 사랑받는 이들」이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뿌리의 의미를 조상들 자체보다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적 약속, 또는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예수님과 연결하여 강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모든 가지가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곧이어 실제로 꺾여 나간 가지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함은 하나님이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에 특별한 관계와 목적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나무에 일어난 일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가지 몇이 꺾여 나가고 돌감람나무인 그대가 남은 가지들 사이에 접붙여져 감람나무의 기름진 뿌리를 함께 나누는 이가 되었다면,로마서 11:17 · 본디새김
나무는 두 그루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는 이스라엘의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의 나무라고 말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낡은 나무를 버리고 새 나무를 심으셨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나무의 일부 가지가 꺾여 나가고, 외부에서 온 가지들이 그 나무에 접붙여집니다. 새로 들어온 가지는 자기 뿌리를 새로 만들지 않고, 기존의 나무가 지닌 생명에 참여합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워 버린 채 시작되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 가신 구원의 역사에 이방인들이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이 접붙이기를 「본디를 거슬러」 일어난 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방인들은 자연스러운 권리에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라,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지위를 자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가지들보다 잘났다고 우쭐대지 마십시오. 우쭐댄다면, 그대가 뿌리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떠받칩니다.로마서 11:18 · 본디새김
바울은 단수 「그대」를 사용하여 이방인 독자들을 대표하는 한 사람을 앞에 세우고, 마치 그 가지가 입을 열어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가지들이 꺾여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게 하려는 것이었다.」로마서 11:19 · 본디새김
이 말에는 부분적으로 사실인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르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바울도 「맞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은 그 사실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 꺾여 나갔고 그대는 믿음으로 서 있습니다.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지 말고 두려워하십시오.로마서 11:20 · 본디새김
새로 접붙여진 사람이 그 자리에 선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혈통이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조차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면, 이미 그 믿음이 가리키는 은혜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애와 준엄함을 보십시오. 넘어진 이들에게는 준엄함이고, 그대에게는 하나님의 자애입니다 — 그대가 그 자애 안에 머물러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려 나갈 것입니다.로마서 11:22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불신앙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동시에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비를 베푸실 수 없는 분도 아닙니다.
「그대가 그 자애 안에 머물러 있다면」이라는 조건을 사람이 자기 공로를 쌓아 은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6절의 논증과 충돌합니다. 바울은 은혜와 행위를 구별했습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20절에서 믿음으로 서 있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은혜에 의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고는 이방인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꺾여 나간 가지들에게도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믿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접붙여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23 · 본디새김
조금 전에는 이방인들이 잘려 나갈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다시 접붙여질 수 있다는 약속의 가능성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현재 불신앙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만, 반드시 마지막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꺾인 가지를 복구하는 원예 기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죄와 불신앙 때문에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을 다시 자기 백성 안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접붙여지는 길은 23절에서 분명히 말하듯 믿지 않는 상태에 계속 머물지 않는 것,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한 나무에 참여하는 길은 믿음으로 열립니다.
그리고 바울은 본디 그 나무의 가지였던 이들이 자기 감람나무에 얼마나 더 접붙여지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방인들이 약속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의 본래 수신자였던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시작하신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은 일반적인 원예 관행과는 반대 방향으로 접붙이는 모습을 그립니다.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는 좋은 품종의 감람나무 가지를 적절한 대목에 접붙여 열매를 얻는 방식이 알려져 있었지만, 바울의 비유에서는 야생 감람나무의 가지가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여집니다. 실제 고대의 접붙이기 관행을 어떻게 복원하느냐에 관해서는 설명에 차이가 있지만, 바울 자신이 이 접붙이기를 「본디를 거슬러」 일어난 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모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슬기롭다 여기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에게 부분적인 굳어짐이 생겼으며, 이는 이방 사람들이 들어와 그 수가 다 찰 때까지라는 것입니다.로마서 11:25 · 본디새김
여기서 신비는 인간이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드러나는 구원의 계획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신비를 밝히는 목적은 「여러분이 스스로 슬기롭다 여기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쭐대지 말라고 한 경고와 이어집니다. 독자들이 더 많은 비밀을 안다고 자랑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굳어짐은 「부분적」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남은 자들이 있다고 말했고, 자기 자신을 그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또한 이 굳어짐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와 그 수가 다 찰 「때까지」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 이후의 모든 사건이 어떤 순서로 일어날지 세부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역사가 정확히 어떤 연대기적 단계로 전개될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큰 질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건져 내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시어 야곱에게서 불경건을 물리치실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로마서 11:26 · 본디새김
「온 이스라엘」이란 누구입니까?
이 구절은 오랫동안 크게 세 갈래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장래에 이루어질 광범위한 구원, 역사 전체에 걸쳐 구원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총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백성 전체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어느 범위를 가리키는지, 또 그 구원이 미래의 집단적인 사건인지 역사 전체에 걸친 구원의 총체인지가 논쟁의 핵심입니다. 「그렇게」라는 말을 「그 일이 끝난 다음에」라는 시간 순서로 읽을지, 「이러한 방식으로」로 읽을지도 이 차이와 맞물립니다.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바울의 논증에서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현재 불신앙을 하나님의 최종적인 포기로 이해하지 않고, 그들의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이방인들이 경험한 구원과 분리된 별도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비가 중심에 있습니다.
바울이 인용하는 말씀은 주로 이사야 59:20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사야 59장은 이스라엘 안에 정의가 무너지고 진실이 사라져, 사람들이 스스로 그 상황을 해결할 힘이 없는 현실을 묘사합니다. 그때 여호와야훼께서 구원할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시며(이사야 59:16–17), 이어 구속자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야곱에게서 불경건을 물리치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그들의 불신앙과 죄를 그대로 둔 채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불경건을 물리치시는 구원입니다. 27절에서는 그 구원의 내용을 언약과 죄의 제거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것이 그들과 맺는 나의 언약이다.」로마서 11:2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59:21의 언약 약속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면서 야곱의 죄를 제거하시는 이사야 27:9의 주제를 함께 반영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단순히 민족의 정치적 지위가 회복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불경건과 죄가 제거되는 일입니다.
바울은 건져 내시는 분을 예수님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하신다는 로마서의 복음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설명할 때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이 정확히 누구를 포함하는지에 관한 해석은 갈릴 수 있어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한 이 약속을 이스라엘 혈통을 지닌 모든 사람이 믿음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믿지 않는 상태에 머물지 않을 때 다시 접붙여질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이 계산할 수 있는 구원의 명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마지막 결론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온 이스라엘」의 세 해석에는 각각 근거가 있습니다. 민족적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는 바울이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 특히 25절에서도 둘을 구별했으므로 바로 다음 절의 이스라엘 역시 민족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구원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총체로 보는 견해는 이미 믿는 남은 자들과 앞으로 믿게 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온 이스라엘을 이룬다고 보며, 남은 자들의 존재와 꺾인 가지들이 다시 접붙여지는 일이 계속될 수 있다는 설명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 보는 견해는 한 감람나무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참여한다는 이미지에 주목하지만,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분명히 구별되는데 특별한 설명 없이 다음 절의 이스라엘을 두 집단 전체의 이름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는 문맥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게」에 해당하는 원문 후토스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또는 「이러한 방식으로」라는 뜻이어서,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시샘과 굳어진 가지들의 회복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앞 절의 「때까지」라는 시간 표현 때문에 미래의 특정한 전환을 강조하는 해석에도 근거가 있지만, 후토스 자체만으로 「그 후에」라는 뜻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이사야 59:20의 히브리어 본문은 구속자가 시온에 오시는 모습을, 그리스어 구약성경은 시온을 위하여 오신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바울은 「시온에서」 오신다고 인용합니다. 이 차이가 단순한 인용 방식의 변형인지, 시온에서 시작되어 여러 민족에게 이르는 구원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인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원수이면서 사랑받는 이들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을 한 문장 안에 두 방향에서 설명합니다.
복음으로 보면 그들은 여러분 때문에 원수이고, 뽑으심으로 보면 조상들 때문에 사랑받는 이들입니다.로마서 11:28 · 본디새김
복음과 관련해서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적대적인 위치에 있고, 그들의 불신앙과 복음에 대한 반대가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전해지는 과정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해서 보면, 이스라엘은 조상들 때문에 여전히 사랑받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그들의 후손과 연결되는 언약의 약속이었습니다.
바울은 두 사실 가운데 하나를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가지셨던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일의 중요성을 없앨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그 긴장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무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29 · 본디새김
「무르심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이 베푸신 은혜와 부르심을 후회하여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반응하여 심판을 내리시는 장면들이 성경에 있지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구원의 약속을 변덕스럽게 취소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사를 서로 마주 보게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다가 이제 그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자비를 입었듯이, 그렇게 그들도 이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입은 그 자비로 그들도 이제 자비를 입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1:30–3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이지만 불순종했고, 이방인은 그 언약 밖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자비를 입은 일이 다시 이스라엘의 구원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어느 민족을 영원히 우월한 자리에 세우지 않습니다.
두 민족의 역사는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이 논증을 한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이 모두를 순종하지 않음에 가두신 것은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1:32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바울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차례로 언급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스라엘도 불순종했습니다. 따라서 「모두」는 우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포함하는 인류 전체를 바라보는 표현이며, 하나님의 자비가 어느 한 민족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라는 말은 모든 개인이 예외 없이 궁극적인 구원에 이른다는 뜻일까요? 이 구절을 보편적 구원의 소망과 연결하는 해석은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데 있다는 표현을 강하게 받아들입니다. 반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은, 바울이 앞에서 믿음과 불신앙, 접붙여짐과 잘려 나감을 실제적인 차이로 설명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이 구절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을 확정하거나, 반대로 바울이 말하는 자비의 보편적인 범위를 지나치게 제한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자비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순종하지 않음에 가두신」이라는 표현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강요하셨다는 뜻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인간이 실제로 불순종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 불순종의 현실까지 자신의 구원 목적 안에서 다루신다는 사실을 함께 말합니다. 인간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자비를 끝내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를 설명하던 바울이 마침내 두 집단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순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자기 의로 구원을 요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결론을 내린 다음 더 긴 논증을 이어 가지 않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그분께 먼저 드려서 도로 받겠습니까?
오, 하나님의 부요함과 지혜와 지식의 깊음이여.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자취를 좇을 수 없는지요.로마서 11:33 · 본디새김
왜 갑자기 찬송이 나올까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모든 의문이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굳어짐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끝날 것인지,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완전히 조화되는지 바울은 모든 세부 사항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반론을 제기하고, 하나님의 선택과 심판과 자비를 깊이 논증했습니다. 그는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깊이 생각한 끝에 자신이 이해한 것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서 출발한 그가, 하나님이 인간의 실패 가운데서도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기 자비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로마서 11:3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40:13의 인용입니다.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은 포로 생활 속에서 잊힌 것처럼 느낄 수 있었던 자기 백성에게 위로를 선포하시고, 예언자는 여호와야훼께서 창조세계 전체를 다스리시는 분이며 그분의 지혜를 측량하거나 가르칠 조언자가 없음을 선포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자신의 논증 끝에 가져와,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의 계산보다 깊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다음 질문은 이 장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누가 그분께 먼저 드려서 도로 받겠느냐?」로마서 11:35 · 본디새김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진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율법과 언약을 주셨다는 사실을,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방인들이 언약에 참여할 권리를 얻기 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에게 진 빚을 갚으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먼저 은혜를 베푸시는 일입니다. 6절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은혜를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바꾸는 순간 은혜는 은혜가 아니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 문장으로 나아갑니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을 통해 존재하고 그분에게로 갑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히 있기를. 아멘.로마서 11:36 · 본디새김
이 마지막 찬송은 앞의 논증과 무관하게 붙어 있는 경건한 결말이 아니라, 바울이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의 근거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 자신의 능력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구원도 이방인 자신의 노력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로마서 11장의 어려운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바울이 무엇보다 경계하는 태도가 하나 드러납니다.
자랑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은혜로 남겨졌고, 이방인들은 돌감람나무의 가지처럼 은혜로 접붙여졌으며, 꺾여 나간 이스라엘의 가지들도 하나님이 다시 접붙이실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워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대신한 새 나무가 아니라 같은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들이며,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선물과 부르심에는 무르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성도들에게는 이스라엘을 향한 멸시나 우월감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안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에게 먼저 뿌리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대가 뿌리를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떠받칩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슬퍼했지만, 그들이 영원히 버림받았다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방인 선교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구원을 향한 관심을 잃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다는 이유로 그 자비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멸시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준엄함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가지들이 꺾여 나갔다는 사실은 그 심판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 역시 실제로 존재합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이 접붙여졌고, 꺾인 가지들도 다시 접붙여질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찾지 않던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분은 꺾여 나간 가지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지혜는 인간이 모든 길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은 처음의 질문과 전혀 다른 목소리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던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릴 수 없다고 찬송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어느 민족의 승리도, 어느 집단의 우월함도 아닌,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을 통해 존재하고 그분에게로 갑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