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2–15장 · 새로운 삶
하나님께 드린 몸의 삶
로마서 12장은 제물을 드리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제물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너의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하나님께 드려진 몸이 원수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이야기하면서 성전에서 일어나는 의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몸은 여전히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 몸으로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진 것을 나누며, 때로는 모욕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몸을 움직이는 원리가 달라집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할까요? 바울은 첫 문장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그동안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성령으로 생명을 주시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자비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에게 그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닙니다.
바울이 권하는 것은 그 자비에 합당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 이제 자신과 이웃과 원수를 다른 방식으로 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무엇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 시작됩니다.
죽지 않는 제물, 살아 있는 예배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리는 이치에 맞는 예배입니다.로마서 12:1 · 본디새김
바울은 「명령합니다」가 아니라 「권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에도 사도로서의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권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무엇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드리라고 권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에서는 동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제물은 죽임을 당하고 제단 위에서 불살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제물은 「살아 있는」 제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몸이 아니라, 계속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몸입니다.
바울은 마음이나 영혼만 드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몸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몸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일하고, 먹고, 말하며, 행동하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의도와 생각이 실제 행위로 나타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종교적인 순간에만 경건해지는 일이 아니라, 삶의 실제적인 활동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로마서 6:13에서 그는 몸의 지체들을 죄에게 내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했습니다. 거기서 「내주다」와 여기서 「드리다」(παρίστημι)는 같은 동사입니다. 6장에서는 몸의 지체를 누구의 지배 아래 둘 것인가가 문제였다면, 12장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몸 전체를 제물이라는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죄에게 자신을 내주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립니다.
그렇다고 자기 몸을 괴롭히거나 삶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죽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주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 드리는 응답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이치에 맞는 예배」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예배」는 로마서 9:4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배」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맡은 백성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삶을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공동체의 예배 모임이 무의미해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의식에만 머물 수 없고, 몸을 통해 살아가는 일상의 자리까지 확장된다는 뜻입니다.
「이치에 맞는」으로 옮긴 그리스어 로기코스(λογικός)는 이성이나 사유와 관련된 말로, 「합리적인」, 「영적인」, 「참된」 예배 등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예배는 생각 없는 열정도 아니고, 몸과 분리된 내면의 경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그 자비에 따라 자신의 삶을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곧이어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본을 따르지 마십시오. 도리어 생각이 새로워져 다른 모습으로 바뀌십시오. 하나님의 뜻, 곧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하고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 가려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12:2 · 본디새김
여기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본을 따르는 것과, 생각이 새로워져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바울이 살던 1세기의 문화 전체를 악하다고 규정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 현재 시대의 질서를 가리키는 종말론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본을 따르지 말라는 말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을 거부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세상의 판단 기준과 가치관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다」(μεταμορφόομαι)에 해당하는 동사는 마태복음 17:2와 마가복음 9:2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이고, 여기서는 성도의 생각과 삶이 변화되는 일이지만, 단순히 외적인 행동을 조금 고치는 것보다 깊은 변화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겉모습만 종교적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판단과 생각 자체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이 동사는 무엇을 시험하여 그 가치와 적합함을 판별한다는 뜻입니다. 1:28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모시기를 합당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거기에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2:18에서는 율법으로 가르침받는 사람이 중요한 것을 분별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올바르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들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써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정해진 행동 목록을 외워 모든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과 다릅니다. 현실 속에서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가려내야 합니다. 바울이 이어서 공동체와 이웃과 원수를 대하는 구체적인 태도를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로기코스를 단순히 물질적인 제사와 반대되는 비물질적인 예배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바울이 굳이 「몸」을 드리라고 말한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내면적이라는 의미보다 이성적 판단과 숙고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있으며, 다음 절에서 생각의 새로워짐과 분별을 말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원문의 「바뀌십시오」는 수동태 형태여서, 자기 의지로 스스로를 개조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절은 변화의 주체를 문법적으로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것만으로 성령의 작용 방식을 상세히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워진 생각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나에게 주어진 은혜로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는 모든 이에게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정도를 넘어 자신을 높이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별 있게 생각하십시오.로마서 12:3 · 본디새김
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첫 번째 문제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이 특별한 은혜를 받았거나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할 때, 그 은혜를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근거로 바꾸기 쉽습니다.
원문에서는 「생각하다」(φρονέω)라는 뜻을 지닌 말을 중심으로 관련 단어들을 반복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생각하지 말고, 마땅히 생각해야 할 만큼 생각하며, 절제되고 건전하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판단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비추어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이라는 표현은 해석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믿음의 정도를 주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이어서 다양한 은혜의 선물과 역할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근거가 있습니다. 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평가할 때 따라야 할 믿음이라는 공통의 기준으로 읽으면, 바울은 자신의 자격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권하는 셈입니다.
문맥상 첫 번째 해석이 자연스럽지만, 「믿음의 분량」을 신앙의 우열을 측정하는 점수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관심은 서열을 매기는 데 있지 않고, 각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올바르게 감당하는 데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지니지는 않듯이, 그렇게 우리는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고, 각 사람은 서로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2:4–5 · 본디새김
바울은 공동체의 일치를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지체들은 서로 다르게 생겼고 서로 다른 일을 하지만, 그 차이 때문에 몸이 나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체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몸이 온전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한 몸에 속해 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속한 지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을 개인적인 성공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잘 가르치는 능력을 받았다면 그것은 다른 지체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넉넉한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면 그것은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몸의 중심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는 근거는 공통의 취향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내주시고 죽음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은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은혜의 선물은 받은 것이지, 자기 능력으로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는 태도가 생겨납니다.
은혜의 선물은 왜 서로 다른가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따라 저마다 다른 은혜의 선물을 지니고 있으니, 예언이면 믿음에 비례하여,로마서 12:6 · 본디새김
「은혜의 선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카리스마(χάρισμα)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와 연결됩니다. 그 선물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동체를 위해 베푸신 선물입니다.
바울이 열거하는 것은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나누어 줌, 지도함, 자비를 베풂입니다. 예언과 가르침 옆에 나누어 주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서로 다른 차원의 활동으로 분리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설명합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능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을 지도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돌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각 선물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믿음에 비례하여」라는 표현은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하라는 뜻으로도, 공동체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에 일치하게 예언하라는 뜻으로도 해석되어 왔습니다. 3절에서 믿음의 분량을 말한 사실은 첫 번째 해석을 뒷받침하고, 예언의 내용을 신앙의 기준에 따라 분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두 번째 해석이 강조됩니다. 원문만으로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쪽이든 예언이 개인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나누어 주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하플로테스는 단순함과 진실함, 나아가 후하게 베푸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뜻과 인색하지 않게 후하게 베풀어야 한다는 뜻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지도하는 사람은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지도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특권이 아니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도움을 주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느끼게 하거나, 마지못해 선심을 베푸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비는 상대방을 굴욕스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베풀어져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제시한 것은 공동체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역할의 사례들이며, 모든 선물을 빠짐없이 열거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모든 선물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며,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갑자기 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사랑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몹시 미워하고 선한 것에 굳게 붙어 있으십시오.로마서 12:9 · 본디새김
바울은 은혜의 선물들을 열거한 뒤, 그 모든 활동의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거짓이 없다」는 위선이 없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척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왜 미워하라는 명령이 등장할까요? 바울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무조건 좋게 평가하는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못하는 사랑은 사람을 실제로 보호하거나 세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을 미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별은 장의 후반부에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바울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고, 원수가 굶주리면 먹이라고 할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보복하지 않는 것을 함께 붙드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특징입니다.
형제 사랑으로 서로 도탑게 대하고, 서로 존귀히 여기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로마서 12:10 · 본디새김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쟁의 방향을 바꿉니다. 자기가 더 존경받기 위해 앞서 나서지 말고,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일에 먼저 나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지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을 먼저 존귀하게 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에 속한 지체라면, 다른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일은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행동이 아닙니다.
한 몸을 세우는 행동입니다.
열심을 내는 데 게으르지 말고, 영으로 뜨거우며, 주님께 노예 노릇을 하십시오.로마서 12:11 · 본디새김
「주님께 노예 노릇을 하십시오」라는 표현은 다소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최종적인 주인으로 삼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서로의 지체라고 했고, 이제는 주님께 노예 노릇을 하라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일은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소망으로 기뻐하고, 환난 가운데 견디고, 기도에 끈기 있게 매달리십시오.로마서 12:12 · 본디새김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환난을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에 매달립니다.
기쁨의 근거는 환난이 아니라 소망에 있습니다. 그 소망은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대접하는 일을 뒤쫓으십시오.로마서 12:13 · 본디새김
여기서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것들이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함께 나누다」는 무엇인가에 참여하고 함께 나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은 여유 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조금 베풀라고 하지 않고 필요를 함께 나누라고 말합니다. 한 몸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다른 지체의 필요를 남의 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님 대접」은 친한 사람들을 집에 초대하는 일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이나 나그네를 사랑하고 맞아들이는 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 일을 「뒤쫓으십시오」, 곧 적극적으로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자신의 은혜를 자랑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자기 몫을 지키는 대신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눕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사랑의 범위를 더욱 넓힙니다. 이제 사랑해야 할 대상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오늘날처럼 별도의 교회 건물이 일반화된 환경에 있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6장에서는 집에서 모이는 공동체와 여러 성도가 함께하는 집단들이 언급됩니다. 서로 다른 가정과 사람들이 연결되는 이러한 환경에서 숙소와 음식과 돌봄을 제공하는 일은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박해하는 사람에게 왜 복을 빌어야 하는가
여러분을 박해하는 이들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복을 빌어 주십시오. 저주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2:14 · 본디새김
바울은 「복을 빌어 주십시오」를 한 번 말한 뒤 다시 말하고, 마지막에 「저주하지 마십시오」라고 덧붙입니다. 박해받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벌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이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반응이 저주로 나타나지 않도록 권합니다.
그가 행한 악이 악이 아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악한 것을 몹시 미워하라고 했고, 박해는 실제로 악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악을 겪는 사람이 자신도 똑같이 악을 행하는 사람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설명은 17–21절에서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두 개의 짧은 권면이 놓여 있습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서 12:15 · 본디새김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그 기쁨이 내가 얻지 못한 성공이나 인정과 관련되어 있다면 시기심이 생기기 쉽습니다. 반대로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멀리서 평가하거나, 빨리 해결책을 알려 주거나, 그 고통이 생긴 이유를 설명하려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설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감정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지체의 기쁨도 눈물도 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서로 한마음으로 생각하고, 높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낮은 처지의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 여기지 마십시오.로마서 12:16 · 본디새김
3절에서 사용했던 생각의 언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자신을 높이 생각하지 말라는 권면이 이제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구체화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는 신분과 재산, 자유인과 노예, 후원자와 피후원자 사이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낮은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명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관계를 형성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원문의 「낮은」은 문법상 낮은 처지의 사람들로도, 낮고 소박한 일들로도 읽을 수 있어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높은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는 태도를 버리라는 권면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 문단을 「스스로 슬기롭다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전에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듣기 전에 설명하기 쉽습니다. 생각이 새로워지는 일은 더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참여하고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으며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사랑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박해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마태복음 5:44), 누가복음 6:27–28에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빌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복음서의 해당 문장을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권하는 삶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원수 사랑과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지닙니다.
원수를 갚을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것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좋은 일을 하려고 미리 마음 쓰십시오.로마서 12:17 · 본디새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은 정의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악을 행한 사람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금지하는 것은 악에 대한 모든 판단이나 정당한 책임의 추궁이 아니라, 스스로 악을 악으로 되돌려 주는 보복입니다. 상대방이 상처를 주었으므로 자신도 같은 상처를 주는 것이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당한 사람이 똑같이 악을 행하면 악은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미리 마음 쓰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즉각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어떤 행동이 선한지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 이제 실제적인 상황에 적용됩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부당한 대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여러분에게 달린 데까지는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로마서 12:18 · 본디새김
「될 수 있으면.」 「여러분에게 달린 데까지는.」 바울은 모든 관계에서 반드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평화를 원해도 상대방이 계속 적대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화해를 시도해도 상대방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평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권하지만,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까지 책임지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악을 묵인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계속 해를 입도록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평화는 정의와 진실을 포기하고 겉으로 갈등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에 자리를 내주십시오. 「원수 갚는 일은 내 것이니 내가 갚겠다. 주께서 말씀하신다」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2:19 · 본디새김
「진노에 자리를 내주십시오」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자리를 남겨 두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심판을 내릴 궁극적인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보복하지 말라는 권면의 근거로 사용한 것은, 인간이 분노할 때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인 정의로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잘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보응을 내려야 하는지까지 모두 자신의 손에 쥐려 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삼기 쉽습니다.
바울은 그 권한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악을 그대로 방치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죄와 부당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책임을 묻는 일이 개인적인 보복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이 말씀을 피해자가 부당한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금지하는 것은 스스로 복수하는 행위이며, 그 금지는 하나님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악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가 우리 자신의 복수심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권면은 원수를 갚지 않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훨씬 더 어려운 행동을 요구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인용은 신명기 32:35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신명기 32장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하면서, 여호와야훼께서 역사를 다스리시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강력하게 복수하시는 분이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다는 것은
도리어 「너의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게 될 것이다.」로마서 12:20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잠언 25:21–22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잠언은 원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사람이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게 될 것이며, 여호와야훼께서 그에게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숯불은 원수에게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일으키는 것으로도, 회개하지 않는 원수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된 것으로도 읽혀 왔고, 그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따르든 바울이 실제로 명령하는 행동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굶주리면 먹입니다.
목마르면 마시게 합니다.
바울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굶주리는 원수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원수에게 물을 주라고 말합니다. 원수가 끼친 해악을 잊거나 그의 잘못을 선한 것으로 평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악을 행한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 역시 굶주리고 목마를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함께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로마서 12장의 처음과 마지막이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몸으로 원수에게 먹을 것을 건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몸을 움직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자신의 선행으로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들어 이기라는 전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친절을 베풀면서 실제로는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또 다른 방식의 보복이 되어, 바로 앞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한 문맥과 충돌합니다. 중심은 상대방의 반응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장을 한 문장으로 끝맺습니다.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21 · 본디새김
「이기다」는 승리와 패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갈등을 피하며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악과의 실제적인 싸움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누군가 모욕하면 모욕으로 갚습니다. 누군가 해를 끼치면 같은 해를 돌려주려 합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면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악을 당한 사람이 똑같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악에게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도록 내준 셈입니다.
악이 그 사람을 자기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반대로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악을 행했다는 사실이 자신도 악을 행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인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박해하는 사람에게 복을 빕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참여합니다.
될 수 있는 데까지 평화를 추구합니다.
원수가 굶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합니다.
이 선의 방식은 바울이 믿는 예수님에게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5:6–10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먼저 선을 행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인이었을 때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선을 행하라는 권면은 근거 없이 도달하기 어려운 도덕적 이상을 요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대할 때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대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의 모습
바울은 처음에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한 뒤, 곧이어 「한 몸」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몸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몸이 됩니다. 그 사이에서 바울이 거듭 경계한 것은 자신을 높이 생각하는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은혜를 받기 위해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 몸은 공동체 안에서 받은 은혜의 선물을 사용합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가진 것을 나누고, 낯선 사람을 맞아들이며, 우는 사람 곁에서 함께 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수 앞에 섭니다.
그 사람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목말라합니다. 원수이므로 외면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했으므로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자리에서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라고 권합니다.
이 장의 처음에서 하나님께 드려졌던 살아 있는 제물이 이제 그 자리에서 움직입니다. 악을 당했지만 악으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만났지만 원수에게 필요한 것을 건넵니다.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바울이 말한 살아 있는 예배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계속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