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2–15장 · 새로운 삶

하나님께 드린 몸의 삶

로마서 12장은 제물을 드리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제물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20절).

하나님께 드려진 몸이 원수에게 먹을 것을 건네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이야기하면서 성전에서 일어나는 의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몸은 여전히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 몸으로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진 것을 나누며, 때로는 모욕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몸을 움직이는 원리가 달라집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할까요? 바울은 첫 문장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에 힘입어.」

그동안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성령으로 생명을 주시며,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자비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닙니다.

바울이 권하는 것은 그 자비에 합당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 이제 자신과 이웃과 원수를 다른 방식으로 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무엇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서 시작됩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812장 본문 읽기 →

죽지 않는 제물, 살아 있는 예배

로마서 12:1–2 본문 →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서 12:1 · 두루새김

바울은 「명령합니다」가 아니라 「권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에도 사도로서의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내세우는 것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무엇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드리라고 권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제물은 죽임을 당하고 제단 위에서 불살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제물이 「살아 있고」 거룩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사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몸이 아닙니다. 계속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몸입니다.

바울은 마음이나 영혼만 드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몸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몸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일하고, 먹고, 말하며, 행동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종교적인 순간에만 경건해지는 일이 아닙니다. 삶에서 실제로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6:13에서 몸의 각 부분을 죄에게 내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했습니다. 6장에서는 몸을 누구의 지배 아래 둘 것인가가 문제였다면, 12장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몸 전체를 제물이라는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죄에게 자신을 내주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립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기 몸을 괴롭히거나 삶을 부정하는 일은 아닙니다. 제물은 「살아 있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죽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주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이 드리는 응답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합당한 예배」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맡았던 예배(9:4)를 가리키던 말로, 이제 바울은 몸을 드리는 삶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공동체의 예배 모임이 무의미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자리까지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합당한」으로 옮긴 그리스어 로기코스(λογικός)는 이성이나 생각과 관련된 말로, 「합리적인」, 「영적인」, 「참된」 예배 등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를 물질적인 제사와 반대되는 비물질적 예배로만 읽으면 바울이 굳이 「몸」을 드리라고 한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깊은 생각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있는데, 다음 절이 생각의 새로워짐과 분별을 말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생각 없는 열정도 아니고, 몸과 분리된 마음속의 경건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그 자비에 따라 자신의 삶을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방식을 따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생각이 새로워져 변화된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온전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로마서 12:2 · 두루새김

여기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시대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이 새로워져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1세기 문화 전체를 악하다고 규정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 현재 시대의 질서를 가리키며, 마지막 때에 대한 이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을 거부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세상의 판단 기준과 가치관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겉모습만 종교적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변화된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조금 고치는 것보다 깊은 변화를 나타냅니다. 판단과 생각 자체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분별하다」는 무엇을 시험하여 그 가치와 알맞음을 판단한다는 뜻으로, 로마서 앞부분에도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합당하게 인정하지 않았고(1:28), 율법으로 가르침받는 사람들은 중요한 것을 분별한다고 생각했지만(2:18)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들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써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정해진 행동 목록을 외워 모든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과 다릅니다. 현실 속에서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바울이 이어서 공동체와 이웃과 원수를 대하는 구체적인 태도를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6:13의 「내주다」와 12:1의 「드리다」는 원문에서 같은 동사입니다. 「변화된 사람이 되십시오」의 동사는 마태복음 17:2와 마가복음 9:2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지셨다고 할 때 쓰인 말입니다. 두 사건이 같은 변화는 아니어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사건이고 여기서는 성도의 생각과 삶이 변화되는 일입니다. 또 이 동사는 수동태여서 스스로를 고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절은 누가 변화를 일으키는지 문법적으로 밝히지 않으므로, 그것만으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자세히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워진 생각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로마서 12:3–5 본문 →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은혜에 힘입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신을 분별 있게 평가하십시오.로마서 12:3 · 두루새김

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첫 번째 문제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이 특별한 은혜를 받았거나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할 때, 그 은혜를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증거로 바꾸기 쉽습니다.

원문은 「생각하다」 계열의 낱말을 되풀이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생각하지 말고, 마땅히 생각해야 할 만큼, 절제되고 건전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권면을 「평가하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바울은 겸손하라는 교훈을 넘어, 사람이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비추어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의 분량」은 해석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믿음의 정도를 주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이어서 다양한 은혜의 선물과 역할을 설명한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평가할 때 따를 믿음이라는 공통의 기준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바울은 자격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기준으로 자신을 보라고 권하는 셈입니다.

문맥상 첫 번째 해석이 자연스럽지만, 「믿음의 분량」을 신앙의 우열을 측정하는 점수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관심은 서열을 매기는 데 있지 않고, 각 사람이 받은 것을 공로로 자랑하지 않고 맡겨진 역할을 올바르게 감당하는 데 있습니다.

한 몸에 여러 부분이 있어도 그 부분들이 모두 같은 일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 사람은 서로에게 속한 몸의 부분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2:4–5 · 두루새김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한 몸이지만 모든 부분이 같은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일치를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몸의 부분들은 서로 다르게 생겼고 서로 다른 일을 하지만, 그 차이 때문에 몸이 나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몸이 온전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한 몸에 속해 있다고만 말하지 않고, 「서로에게 속한 몸의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선물은 개인적인 성공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잘 가르치는 능력을 받았다면 그것은 몸의 다른 부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넉넉한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면 그것은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한 몸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는 근거는 공통의 취향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내주시고 죽음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은 자격을 증명하기보다 은혜를 따라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로 부름받았습니다.

은혜의 선물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는 태도가 생겨납니다.

은혜의 선물은 왜 서로 다른가

로마서 12:6–8 본문 →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따라 서로 다른 선물을 받았습니다. 예언하는 선물을 받았다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십시오.로마서 12:6 · 두루새김

여기서 「선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로,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와 연결됩니다. 그 선물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훈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동체를 위해 베푸신 선물입니다.

바울은 예언하는 일,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하고 격려하는 일, 나누어 주는 일, 이끄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을 열거합니다. 예언과 가르침 옆에 나누어 주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나란히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서로 다른 차원의 활동으로 나누지 않고,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설명합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능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을 이끄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돌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믿음에 맞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정도에 맞게 예언하라는 뜻으로도, 공동체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에 일치하게 예언하라는 뜻으로도 해석되어 왔습니다. 3절에서 믿음의 분량을 말한 사실은 첫 번째 해석을, 예언의 내용을 신앙의 기준으로 분별해야 한다는 관점은 두 번째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원문만으로 둘 가운데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쪽이든 예언이 개인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나누어 주는 사람은 「아낌없이」 나누어야 합니다. 이 말의 원어는 단순함과 진실함, 나아가 후하게 베푸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어서, 두루새김은 후하게 베푸는 뜻을 살려 옮겼습니다. 계산하거나 인색하게 굴지 말라는 뜻과 함께, 겉과 속이 다른 태도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도 생각하게 합니다.

이끄는 사람은 열심히 이끌어야 합니다. 이끄는 역할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특권이 아니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이 더 높다는 느낌을 주거나 마지못해 선심을 베푸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비는 상대방을 굴욕스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베풀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 목록은 모든 은혜의 선물을 빠짐없이 열거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역할의 사례들입니다. 그 모든 선물은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갑자기 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사랑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로마서 12:9–13 본문 →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몹시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드십시오.로마서 12:9 · 두루새김

여러 은혜의 선물을 열거한 바울은 이제 그 모든 활동의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는 위선이 없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척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첫 번째 특징을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왜 미워하라는 명령이 등장할까요?

바울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무조건 좋게 평가하는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못하는 사랑은 사람을 실제로 보호하거나 세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미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별은 장의 후반부에서 중요해집니다. 바울은 박해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고,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라고 할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보복하지 않는 것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특징입니다.

서로를 형제자매로 사랑하며 다정하게 대하십시오. 서로 존중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로마서 12:10 · 두루새김

사람들은 흔히 존경받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합니다. 높은 지위를 얻고, 인정받으며,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애씁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쟁의 방향을 바꿉니다.

자기가 더 존경받으려 앞서 나서지 말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에 먼저 나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몸의 다른 부분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을 먼저 존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에 속한 부분이라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일은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행동이 아닙니다.

한 몸을 세우는 행동입니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열심을 내십시오.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서 12:11 · 두루새김

「주님을 섬기십시오」(δουλεύω)의 원문은 주님께 노예로서 섬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최종적인 주인으로 삼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서로에게 속한 몸의 부분이라고 했고, 이제는 주님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일은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희망으로 기뻐하고, 고난을 참고 견디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로마서 12:12 · 두루새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꾸준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바라는 사람은 지금 고난을 겪으면서도 기뻐할 이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를 기뻐하라는 뜻이 아니라, 기쁨의 근거가 희망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고, 손님을 맞아 대접하는 일에 힘쓰십시오.로마서 12:13 · 두루새김

여기서 사랑은 막연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실제적인 것들에 닿습니다. 「나누어 주고」(κοινωνέω)에 해당하는 동사는 무엇인가에 참여하고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여유 있는 사람이 조금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한 몸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몸의 다른 부분에 필요한 것을 남의 일로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님을 맞아 대접하는 일」도 친한 사람들을 집에 초대하는 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원어는 낯선 사람이나 나그네를 사랑하고 맞아들이는 일을 가리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별도의 교회 건물이 없이 집에서 모였고(로마서 16장), 서로 다른 가정과 사람들이 연결되는 이 환경에서 숙소와 음식과 돌봄을 제공하는 일은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기회가 생기면 하라고 하지 않고 「힘쓰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원문은 뒤쫓는다는 뜻의 동사로, 적극적으로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자신의 은혜를 자랑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존중합니다.

자기 몫을 지키는 대신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눕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맞아들입니다.

이것이 거짓 없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사랑의 범위를 더욱 넓힙니다. 이제 사랑해야 할 대상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박해하는 사람에게 왜 복을 빌어야 하는가

로마서 12:14–16 본문 →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복을 빌어 주고, 저주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2:14 · 두루새김

바울은 복을 빌어 주라는 명령을 두 번 말하고, 「저주하지 마십시오」라고 덧붙입니다.

박해받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벌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이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반응이 저주로 나타나지 않도록 권합니다.

이 명령은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빌라(누가복음 6:27–28)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이 복음서의 문장을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주제 면에서 분명히 연결됩니다.

그런데 왜 박해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가 행한 악이 악이 아니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악한 것을 몹시 미워하라고 했고, 박해는 실제로 악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악을 겪는 사람이 자신도 똑같이 악을 행하는 사람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악을 행했다고 해서, 자신 역시 그 사람에게 악을 행할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설명은 17–21절에서 이어집니다. 그 사이에 두 개의 짧은 권면이 놓여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서 12:15 · 두루새김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그 기쁨이 내가 얻지 못한 성공이나 인정과 관련되어 있다면 시기심이 생기기 쉽습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멀리서 평가하거나, 빨리 해결책을 알려 주거나, 고통이 생긴 이유를 설명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설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감정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은 몸의 다른 부분에 일어난 일을 그 부분만의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의 기쁨이 나와 무관하지 않고, 그의 눈물도 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서로 한마음을 품으십시오. 높아지려 하지 말고, 낮은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로마서 12:16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3절의 생각의 언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 말라는 권면이 이제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는 신분과 재산, 자유인과 노예, 후원하는 사람과 후원받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고, 낮은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명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쉬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관계를 맺지 말라고 권합니다.

「낮은」에 해당하는 원어(ταπεινός)는 문법상 낮은 처지의 사람들로도, 낮고 소박한 일들로도 읽을 수 있어 해석이 갈립니다. 두루새김은 「낮은 처지의 사람들」로 옮겼지만, 어느 쪽이든 높은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는 태도를 버리라는 권면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 문단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로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전에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듣기 전에 설명하기 쉽습니다. 생각이 새로워지는 일은 지식을 자랑하는 데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참여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이제 바울은 사랑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원수를 갚을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것

로마서 12:17–19 본문 →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쓰십시오.로마서 12:17 · 두루새김

그렇다면 정의는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악을 행한 사람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금지하는 것은 악에 대한 판단이나 정당하게 책임을 묻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악을 악으로 되돌려 주는 보복입니다. 상대방이 상처를 주었으니 나도 같은 상처를 주어야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당한 사람이 똑같이 악을 행하면 악은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쓰십시오」(προνοέω)의 원문에는 미리 생각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상대방이 악을 행했을 때 즉각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어떤 행동이 선한지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이 이제 분노가 일어나는 실제 상황에 적용됩니다.

가능하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로마서 12:18 · 두루새김

「가능하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평화는 한쪽 사람의 의지만으로 언제나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화해를 시도해도 상대방이 거절하고 계속 적대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권하지만,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까지 책임지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악을 눈감아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계속 해를 입도록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평화는 정의와 진실을 포기하고 겉으로 갈등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분노로 심판하시도록 맡기십시오. 성경에서 주님께서 「복수는 내가 할 일이다. 내가 갚겠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2:19 · 두루새김

원문은 말 그대로 「진노에 자리를 주라」는 뜻입니다. 바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므로 하나님이 심판하실 자리를 남겨 두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고, 두루새김은 이 뜻을 풀어 옮겼습니다.

인용된 말씀은 신명기 32:35입니다. 신명기 32장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리시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보다 더 강력하게 복수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심판을 내릴 최종적인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분노할 때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인 정의로 여기기 쉽습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할 수 있지만, 그 잘못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까지 모두 자기 손에 쥐려 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삼기 쉽습니다. 바울은 그 권한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특히 이 말씀을 피해자가 부당한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요청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금지하는 것은 스스로 복수하는 행위이고, 책임을 묻는 일은 개인적인 보복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악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가 우리 자신의 복수심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권면은 원수를 갚지 않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원수의 머리 위에 타는 숯을 쌓는다는 것은

로마서 12:20–21 본문 →

성경은 스스로 복수하는 대신 이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 위에 타는 숯을 쌓게 될 것이다.」로마서 12:20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잠언 25:21–22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잠언은 원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사람이 그의 머리 위에 타는 숯을 쌓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이 그의 머리 위에 타는 숯을 쌓는 일이 될까요?

한 해석은 상대방에게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적대적인 반응을 예상한 원수가 오히려 친절을 경험하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고, 타는 숯은 그의 양심을 뜨겁게 하는 부끄러움의 이미지가 됩니다.

다른 해석은 타는 숯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합니다. 원수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가 받은 선한 대우가 오히려 그 악을 분명히 드러내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으로, 바로 앞에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다는 사실이 근거입니다. 잠언도 바울도 이 이미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로 명령하는 행동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입니다.

목말라하면 마시게 합니다.

바울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끼친 해를 잊거나 그의 잘못을 선하다고 평가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악을 행한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 역시 배고프고 목마를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함께 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몸으로 원수에게 먹을 것을 건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몸을 움직입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든 말입니다.

다만 이 명령이 선행으로 상대방을 부끄럽게 만들어 이기라는 전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친절을 베풀면서 실제로는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또 다른 보복이 되어,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바로 앞의 권면과 충돌합니다. 중심은 상대방의 반응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21 · 두루새김

「이기십시오」는 승리와 패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갈등을 피하며 조용하게 사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악과의 실제적인 싸움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누군가 모욕하면 모욕으로 갚습니다.

누군가 해를 끼치면 같은 해를 끼쳐 돌려주려 합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면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승리가 실제로는 패배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악을 당한 사람이 똑같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악에게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도록 내준 셈이기 때문입니다.

악이 그 사람을 자기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악을 행했다는 사실이 자신도 악을 행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인내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박해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고,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참여하고, 할 수 있는 한 평화를 추구하고,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입니다.

이 선의 방식은 바울이 믿는 예수님에게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5:6–10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먼저 선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죄인이었을 때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선을 행하라는 권면은 근거 없는 도덕적 이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대할 때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대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의 모습

로마서 12:1–21 본문 →

바울은 처음에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한 뒤, 곧이어 「한 몸」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몸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몸이 됩니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말고, 받은 선물을 자랑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는 일에 먼저 나서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라고 거듭 권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자신을 높이고 보복하려 하는지 알기에, 단순히 착하게 살라고 명령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몸은 공동체 안에서 은혜에 따라 받은 선물을 사용합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가진 것을 나누고, 손님을 맞아 대접하며, 우는 사람 곁에서 함께 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수 앞에 섭니다.

그 사람이 배고파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목말라합니다. 원수이므로 외면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했으므로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자리에서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라고 권합니다. 이 장의 처음에서 하나님께 드려졌던 살아 있는 제물이 이제 그 자리에서 움직입니다.

악을 당했지만 악으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만났지만 원수에게 필요한 것을 건넵니다.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바울이 말한 살아 있는 예배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계속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