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신음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로마서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있다는 판결이 없습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밖에 지어진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라는 확신으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성령의 생명,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 앞으로 받을 영광,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세상의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장을 자세히 읽으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토록 확신에 찬 장에서 바울은 고난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신음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신음하며, 심지어 성령도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합니다.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데 왜 여전히 죽을 몸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데 왜 아직도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일을 기다립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신다는데 왜 그분의 백성이 잡아 죽일 양처럼 여겨집니까?

바울은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을 피해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고, 마침내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로마서 8장은 고난을 잊게 만드는 위로가 아닙니다. 고난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무엇이 이미 결정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98장 본문 읽기 →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죄였다

로마서 8:1–4 본문 →

첫 문장의 「그러므로 이제」는 앞에서 이어진 설명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면서도, 죄에 사로잡힌 인간이 그 율법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현실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 막다른 자리에서 하나님의 판결이 선포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있다는 판결이 없습니다.로마서 8:1 · 두루새김

하나님이 죄를 눈감아 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곧이어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설명합니다.

율법이 육 때문에 힘을 잃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과 같은 모습으로 보내시고, 아들의 육 안에서 죄에 유죄 판결을 내리셨습니다.로마서 8:3 · 두루새김

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는 판결이 없다고 했는데, 3절에서는 하나님이 죄에 유죄 판결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판결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판결의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죄 자체를 심판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죄는 단순히 사람들이 저지르는 개별적인 잘못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세력처럼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은 이 일을 할 수 없었을까요?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줄 수 있지만, 죄에 사로잡힌 인간을 그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문제는 율법의 선함이 아니라 「육 때문에 힘을 잃어」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육」은 단순히 인간의 몸을 가리키지 않고,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삶을 가리킵니다. 율법이 아무리 올바른 길을 가리켜도, 그 길을 걸어야 할 인간이 죄에 매여 있다면 율법만으로는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율법을 더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죄 있는 육과 같은 모습」이라는 표현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인간처럼 보이기만 하셨다는 뜻도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죄인이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분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과 같은 육의 조건 속으로 오셨고, 죄가 지배하던 바로 그 인간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목적을 설명하는 원문의 표현은 페리 하마르티아스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죄에 관하여」라는 뜻이어서 죄를 다루시려는 하나님의 행위로 읽을 수 있고,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 죄를 씻는 제사와 관련하여 쓰이기도 하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상 근거가 있으며, 희생제사라는 의미를 유일한 해석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셨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의 지배를 결정적으로 다루셨다는 사실입니다(32, 34절).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는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8:4 · 두루새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단지 법적으로 죄가 없다는 신분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죄의 지배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현실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이루어지게」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요구를 자기 힘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야 한다는 명령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결과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일이 일어나는 삶의 방식이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1절의 선언과 4절의 목적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판결이 인간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죄가 살던 자리에 하나님의 영이 사신다

로마서 8:5–11 본문 →

바울은 이제 육을 따르는 삶과 성령을 따르는 삶을 대조합니다.

육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에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5 · 두루새김

「마음을 쓰기」(φρονέω)로 옮긴 동사는 단순히 머릿속으로 생각한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에 마음을 두며,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판단하는지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육을 따르는 생각과 성령을 따르는 생각은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의 목록이 아니라, 삶 전체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는가의 문제입니다.

육을 따르는 생각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바울은 더 나아가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의지가 부족한 것을 넘어서는 무능력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은 스스로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문장의 방향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육에 속하지 않고 성령께 속해 있습니다. 누구든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로마서 8:9 · 두루새김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설명이었지만, 이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먼저 성령을 따르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계시다면 그들은 이미 성령께 속해 있다고 선언합니다.

원문에서는 사람이 영 안에 있고, 영이 사람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관계를 밖에서 지배하거나 잠시 마음에 영향을 주는 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의 삶 안에 사시며, 그 사람은 성령이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삶의 영역 안에 있게 됩니다.

「살고 계신다면」(οἰκέω)에 쓰인 동사는 거주하다, 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7장에서 내 안에 사는 죄를 말할 때도 이 동사를 사용했습니다(7:17, 20).

그런데 이제 같은 자리에 전혀 다른 분이 등장합니다.

전에 내 안에 사는 것으로 묘사되던 것은 죄였습니다.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것은 마음속에 좋은 영향을 주는 존재가 하나 더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던 세력과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사시는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이라는 표현을 이어서 씁니다. 성령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별도의 영적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사시는 사람은 더 이상 죽지 않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때문에 죽어 있지만 성령께서는 의 때문에 생명을 주십니다.로마서 8:10 · 두루새김

이 문장은 구원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몸은 죄 때문에 죽어 있지만」은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죽음의 지배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몸과 대조되는 영을 인간의 영으로 이해하여 몸의 죽음과 영의 생명을 대조하는 해석이 있고, 성령으로 이해하여 죽을 몸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대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후자는 앞뒤에서 하나님의 영이 사신다는 사실이 반복되는 문맥을 중시하며, 두루새김은 「성령께서는 의 때문에 생명을 주십니다」로 옮겨 후자를 따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의 결론은 11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신다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신 그분의 영을 통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로마서 8:11 · 두루새김

하나님은 몸을 버리고 영혼만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과 「성령」의 대조는 몸과 영혼의 단순한 대립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벗어나도록 하시며, 마침내 몸 자체를 죽음에서 구원하려 하십니다.

바울의 관심은 죽어도 남는 인간의 어떤 부분이 아닙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전체를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종의 두려움에서 자녀의 부르짖음으로

로마서 8:12–17 본문 →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사신다면 그들의 현재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을 따라 살아야 할 빚을 육에게 진 것은 아닙니다.로마서 8:12 · 두루새김

바울은 육을 마치 인간에게 끊임없이 복종을 요구하는 주인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의 지배를 깨뜨리셨으므로, 이제 육의 요구를 따라 살아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육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악한 행동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로마서 8:13 · 두루새김

바울은 성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몸의 악한 행동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인간이 혼자 힘으로 내리는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있습니다. 또한 죽여야 하는 것은 몸 자체가 아니라, 죄의 지배에 따른 삶을 가리키는 「몸의 악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삶에 대한 설명을 길게 이어 가지 않고, 갑자기 가족의 언어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께 이끌리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14 · 두루새김

바울에게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올바른 행동을 선택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것은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노예의 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성령을 통해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로마서 8:15 · 두루새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휘오테시아(υἱοθεσία)입니다. 양자 삼음, 곧 아들로 받아들여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로마 사회에서 입양은 새로운 가족에 속하여 법적인 자녀가 되고, 가문의 이름과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얻는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당시에는 가까운 친족이나 지인의 자녀를 양자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노예를 양자로 삼는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노예의 삶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물려받을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노예들의 주인으로만 남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한마디의 부르짖음으로 나타납니다.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으며, 이 부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마가복음 14:36). 그때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피하실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동시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성도들의 같은 부르짖음도 고난이 없는 평온한 자리에서만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곧이어 바울은 자녀가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라면 물려받을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도 받기 위해 그분과 함께 고난을 겪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물려받을 사람입니다.로마서 8:17 · 두루새김

바울은 영광 앞에 고난을 놓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물려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개인적인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영광을 얻기 위한 대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받아들이시는 근거는 그들의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거쳐 영광에 이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에게, 현재의 고난은 그분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그 고난이 왜 이토록 널리 퍼져 있습니까? 인간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가득한 현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선을 인간 바깥으로 돌립니다.

온 창조세계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로마서 8:18–25 본문 →

왜냐하면 나는 지금의 고난이 앞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18 · 두루새김

바울은 고난이 작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드러날 영광과 비교할 때 현재의 고난이 마지막 결론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이 내놓는 막연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뜻밖의 대상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19 · 두루새김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이 「그뿐 아니라」, 「우리도」라고 구분하므로, 이 말은 문맥상 특별히 인간을 제외한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원문의 「간절히 기다리고」(ἀπεκδέχομαι)는 목을 길게 빼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간절하고 집중된 기다림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는 자기 자신의 회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러나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을 받는 일과 세계가 회복되는 일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의 운명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 때문에, 다음과 같은 희망 가운데 헛됨 아래 놓였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0 · 두루새김

「헛됨」은 무가치함이나 존재 자체의 악함을 뜻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허무함과 좌절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됨을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을 헛됨 아래 놓이게 했을까요? 바울은 「그렇게 하신 분」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보는 해석은 「희망 가운데」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여겨, 하나님이 심판 가운데서도 회복의 희망을 남겨 두셨다고 읽습니다. 아담을 중심에 놓는 해석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은 사건에 주목합니다. 다만 본문은 그 이름을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해석이든 본문에 없는 이름을 직접 넣어 읽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약속입니다.

지으신 것들 자체도 썩어 가는 상태에 매인 데서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로마서 8:21 · 두루새김

앞서 인간이 죄와 죽음에 매인 데서 자유롭게 되었듯이, 이제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도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자유는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다스리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썩어 가는 상태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통을 설명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아이를 낳는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22 · 두루새김

아이를 낳는 고통은 단순한 죽음의 고통과 다릅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생명의 출현이라는 방향이 있습니다. 바울은 세계의 고통을 무너져 가는 세계의 마지막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고통으로 묘사합니다.

두 동사에는 모두 「함께」라는 뜻의 접두사가 붙어 있습니다. 개별적인 고통의 단순한 합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세계가 서로 연결된 운명을 겪고 있다는 묘사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 고통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겠습니까? 바울은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우리도 속으로 신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일, 곧 우리 몸이 속량되는 일을 간절히 기다립니다.로마서 8:23 · 두루새김

15절에서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3절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일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이미 받았는데, 아직 기다린다니 무슨 뜻일까요?

열쇠는 「첫 열매」라는 표현입니다.

첫 열매는 수확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이지만, 수확 전체는 아닙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첫 열매이며, 성도들은 성령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자녀라는 신분이 몸의 부활과 영광 속에서 완전히 드러나는 일, 곧 「우리 몸이 속량되는 일」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몸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죽을 몸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도 신음합니다.

이 신음은 성령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사람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기다림입니다. 바울은 24–25절에서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므로 반드시 참고 견디는 일이 따라옵니다. 그 참고 견딤은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태도가 아니라, 신음하면서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아직 이루실 일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헛됨」과 같은 뿌리의 말이 로마서 1:21에서 인간의 생각이 헛되게 되었다는 표현에도 쓰입니다. 1장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생각이 헛되게 되었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이 헛됨 아래 놓였다고 합니다. 두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죄와 세상의 헛됨이 로마서의 설명에서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좋은 세계였고, 3장에서는 인간의 죄로 땅이 저주를 받아 일하고 살아가는 데 고통이 따릅니다. 바울이 창세기 3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죄와 세계의 고통을 연결하는 그 이야기와 주제를 같이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로마서 8:26–27 본문 →

창조세계가 신음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신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 세 번째 신음을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친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로마서 8:26 · 두루새김

생명을 주시고, 죄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마침내 죽을 몸을 살리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말이 부족하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설명은 더 근본적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자체를 모릅니다.

고난이 끝나기를 기도해야 할까요? 고난 속에서 견딜 힘을 구해야 할까요? 눈앞의 상황이 바뀌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상황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까요? 인간은 자기 삶의 전체 그림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최종 목적을 믿는다 해도 지금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언제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알지 못하는 것을 꾸짖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합니다. 「도와주십니다」(συναντιλαμβάνομαι)로 옮긴 말은 다른 사람과 함께 짐을 맡아 돕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성령은 인간의 연약함을 멀리서 지켜보거나 평가하는 분이 아니라, 그 연약함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령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도로 이해할 수도 있고, 성도들의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서 성령께서 일하신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특별한 기도 언어나 특정한 영적 현상으로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27 · 두루새김

여기서 기도는 인간이 알맞은 말을 찾아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 성령께서 그 뜻에 따라 기도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도가 하나님께 전달되지 못할 염려는 없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연약함을 구원의 바깥에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말을 찾지 못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는 말의 참뜻

로마서 8:28–30 본문 →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로마서 8:28 · 두루새김

로마서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앞의 신음과 고난에서 떼어 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국 자신에게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약속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바울은 온 창조세계가 썩어 가는 상태에 매여 있고, 성도들은 몸이 속량되는 일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한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과 고통이 실제로 악과 고통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이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다음 절에서 그 내용을 직접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닮도록 미리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아들께서 많은 형제자매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8:29 · 두루새김

하나님의 목적은 성도들이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습」에 해당하는 원문의 단어(εἰκών)는 ‘형상’을 뜻합니다. 1:23에서 사람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과 짐승들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인간을 아들의 모습에 맞게 새롭게 하십니다.

그 목적은 단지 훌륭한 인격을 지닌 개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많은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맏이라는 표현은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난 이들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가족 가운데 예수님께서 가지시는 으뜸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것은 예수님과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닮도록」(σύμμορφος)으로 옮긴 말은 빌립보서 3:21에서도 쓰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닮는 일에는 현재의 삶이 변화되는 것뿐 아니라, 장차 몸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바로 앞에서 기다린다고 한 「우리 몸이 속량되는 일」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28절의 선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일, 곧 예수님을 닮은 자녀들이 예수님과 함께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고난이 눈에 보이는 보상으로 바뀐다거나, 모든 사건의 이유가 결국 우리에게 설명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셨으며,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로마서 8:30 · 두루새김

앞서 바울은 영광이 앞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미래의 영광이 이미 모두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18–25절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목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확고한 행위로 서술합니다. 아직 기다리는 영광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말할 만큼, 그 약속을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는 일이 인간의 믿음 및 자유와 어떤 관계인지는 오랫동안 서로 다르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단 자체의 초점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범위를 판별하는 방법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28절의 주어는 원문상 갈립니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한다」는 읽기와, 일부 사본에 「하나님」이라는 주어가 분명하게 적혀 있는 데 근거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함께 작용하게 하신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읽기를 따랐지만, 어느 쪽이든 29–30절은 그 선한 목적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미리 정하심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은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선택하시는 일과 은혜가 먼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다른 해석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정하신 구원의 목적과 그 목적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운명을 강조합니다. 두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응답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또 형상이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26–27의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직접적인 인용이라기보다 창조와 구원을 연결하여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

로마서 8:31–34 본문 →

31절부터는 설명의 형식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에게 맞서겠습니까?로마서 8:31 · 두루새김

이제 바울은 연달아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우리에게 맞서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이 질문들은 앞에서 펼친 설명의 결론을 하나씩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첫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맞서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35절에서 바울은 박해와 위험과 칼을 차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면, 누가 그 뜻을 끝내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서 8:32 · 두루새김

「아끼지 않으시고」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의 창세기 22:12, 16에도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울이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말과 주제의 연결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 아들을 내주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가장 귀한 자기 아들까지 내주셨다면, 그 아들과 함께 주시기로 하신 구원의 선물을 끝내 거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원하는 모든 재산이나 편안한 삶을 보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맥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물려받을 영광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완성입니다.

바울은 이제 법정의 말로 돌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로마서 8:33 · 두루새김

고발할 사람이 있어도, 그 고발이 하나님의 의롭다는 판결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죄가 있다는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고, 더욱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로마서 8:34 · 두루새김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과 분리할 수 없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표현은 시편 110:1의 왕의 권위와 연결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의 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높아지심을 설명했습니다.

앞에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높아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두 기도가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지를 바울이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이 과거의 십자가 사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다는 판결이 없습니다」라는 첫 선언은 과거 어느 시점에 받은 판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잡아 죽일 양처럼 여겨지지만

로마서 8:35–39 본문 →

바울은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 고난이나 괴로움, 박해나 굶주림, 입을 옷이 없는 처지나 위험이나 칼이 그렇게 하겠습니까?로마서 8:35 · 두루새김

앞에서는 누가 고발하고 판결을 내릴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제는 무엇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법정의 문제가 관계의 문제로 옮겨간 것입니다.

박해와 굶주림과 입을 옷이 없는 처지는 신앙 때문에 겪는 현실적인 위험을 떠올리게 하고, 마지막의 「칼」은 죽음의 위협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 낼 수 있다는 일반적인 교훈 대신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는 온종일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잡아 죽일 양처럼 여겨졌습니다.」로마서 8:36 · 두루새김

시편 44:22의 인용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큰 패배와 고난을 겪었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처럼 보인다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았고 언약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시편 44:17–21).

이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시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충실하려 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드리는 탄식이며, 하나님께 깨어나 도와 달라고 간청하며 끝납니다(44:23–26). 바울은 바로 그 탄식의 한가운데서 한 구절을 가져옵니다.

이것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박해받는다는 예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시편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도이며, 바울은 그 탄식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의 현실에 적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왜 잡아 죽일 양처럼 여겨져야 하느냐는 질문을 바울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탄식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그 질문의 무게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분을 통해 넉넉히 이깁니다.로마서 8:37 · 두루새김

바울은 이 모든 일이 사라지고 나서 이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끝나고, 박해가 멈추고, 위험이 물러간 뒤에 비로소 승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모든 일 가운데서도」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 승리는 고난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성도들의 자유를 빼앗고, 생계를 위협하고,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들을 끊어 놓을 수 없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무효로 만들 수 없습니다. 승리의 근거는 성도들의 용기나 인내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다스리는 세력들도, 지금 있는 것도 앞으로 올 것도, 능력을 가진 세력들도, 높은 것도 깊은 것도, 그 밖에 지어진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38–39 · 두루새김

이 마지막 선언은 단순한 감정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어 죄를 심판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 살며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바울은 그 모든 일을 생각한 뒤에 「나는 확신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의 범위는 점점 넓어집니다.

죽음도 생명도.

지금 있는 것도 앞으로 올 것도.

높은 것도 깊은 것도.

그 밖에 지어진 어떤 것도.

삶과 죽음, 현재와 미래, 눈에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세력까지, 인간이 알거나 알지 못하는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밖에 지어진 어떤 것도」는 19절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다시 불러옵니다. 썩어 가는 상태에 매여 신음하던 그 창조세계가 마지막 확신에 다시 나타납니다. 창조세계는 신음하지만, 그 안에 지어진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로마서 8장의 처음과 마지막이 만납니다.

처음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 때문에 죄가 있다는 판결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지어진 어떤 것도 성도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첫 선언은 죄의 지배에 대한 것이었고, 마지막 선언은 창조세계 전체를 포함하는 확신으로 넓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높은 것」과 「깊은 것」은 공간의 양 끝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고, 고대의 천체 및 우주적 세력과 관련된 말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문장의 취지는 같습니다.

구원은 어디까지 이르는가

로마서 8:1–39 본문 →

로마서 8장에서 구원은 죄의 형벌을 면제받는 것보다 훨씬 큰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통해 죄의 지배를 무너뜨리시고, 성령을 보내어 사람들 안에 살게 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로 만드십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그들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그 자녀들이 영광 가운데 드러날 때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미 자녀이면서도 아직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잡아 죽일 양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는 기준이 고난이 있느냐 없느냐라면, 로마서 8장의 약속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내주셨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이 주는 확신은 자신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과 다릅니다.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며, 그분이 예수님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아는 데서 오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은 인간의 모든 질문에 즉각적인 해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바울 자신도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지 못하는 것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온 창조세계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 안에서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 신음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눈앞에는 여전히 고난과 괴로움과 박해와 굶주림과 칼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온 창조세계의 신음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가운데, 바울은 그 모든 것보다 더 확고한 사실 하나를 선언합니다.

그 무엇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