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믿음으로 의롭게
옳은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 뜻이 옳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심지어 그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행동은 그 바람을 거스릅니다.
그는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일을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같은 일을 저지릅니다. 바울은 이 사람의 입을 빌려 「내가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일을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한 사람의 고백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더 깊은 문제를 드러내는 말일까요?
더욱 이상한 것은 바울이 이 고백을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설명 속에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만난 사람에게서 오히려 죄가 살아나고, 탐내는 마음이 일어나고, 죽음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선한 것을 주셨는데 어떻게 죽음이라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로마서 7장은 바로 이 역설을 풀어 갑니다.
바울은 먼저 죽음이 한 사람을 이전의 법적 관계에서 어떻게 풀어 주는지 설명합니다. 이어서 선한 계명이 어떻게 죄의 도구가 되는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서로 갈라진 사람의 절규를 들려줍니다.
그 절규는 「누가 나를 죽음에 매인 이 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라는 한 가지 질문으로 모입니다. 바울은 「무엇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는 「누가」라고 묻습니다.
죽음은 이전의 관계를 끝낸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율법을 아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을 모릅니까?로마서 7:1 · 두루새김
우리는 보통 율법을 지켜야 할 명령이나 규칙들의 모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표현에서 바울은 율법을 사람에게 권한을 행사하는 법적 질서로 묘사합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결혼 관계를 예로 듭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율법에 따라 남편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에게 매어 두던 율법에서 풀려납니다.로마서 7:2 · 두루새김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새로운 결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고대의 결혼법 전체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며, 이것을 모든 시대의 이혼과 재혼 문제에 관한 완결된 규정으로 삼는 것도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기존의 법적 관계를 끝낸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이어지는 4절에 적용하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다른 분, 곧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께 속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서 7:4 · 두루새김
2–3절에서는 남편이 죽고 여자는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4절에서는 율법이 죽었다고 하지 않고, 독자들 자신이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비유를 잘못 사용한 것일까요?
어떤 해석은 비유의 세부 사항을 하나하나 맞추려 해서는 안 되며, 죽음이 이전의 법적 구속을 끝낸다는 원리만을 취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이전 관계의 끝남과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새로운 결합까지 함께 고려해야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바울이 율법 자체의 죽음을 선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으신 사건을 가리키며, 믿는 사람들은 그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이전에 자신을 붙잡고 있던 관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율법이 본래 악했으므로 버려졌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과 맺던 이전의 관계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은 단순히 이전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율법에서 풀려난 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살아 계셔야 합니다. 바울이 굳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전 관계를 끝내고,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새로운 관계에는 새로운 열매가 있다
4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로 끝납니다. 결혼 관계의 이미지를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삶이 낳는 결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에서 나타나는 의로운 행동과 순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더욱 철저하게 자신을 훈련하여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열매는 새로운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전의 관계에서는 어떤 열매가 맺혔을까요?
같은 몸에서 죽음의 열매와 하나님의 열매가 맺힌다
우리가 육에 속해 살 때에는, 율법을 통해 일어난 죄의 욕망이 우리 몸의 각 부분에서 작용하여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5 · 두루새김
4절에서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말했는데, 5절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말합니다. 같은 열매의 이미지가 정반대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우리에게 죄의 욕망이 있었다고 하지 않고, 「율법을 통해 일어난 죄의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선한 말씀인데, 어떻게 그 율법을 통해 죄의 욕망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아직 답하지 않고, 율법과 죄의 관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문제를 여기서 처음 꺼내 놓습니다.
「육에 속해 살 때에는」이라는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원문의 사르크스(σάρξ), 곧 「육」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연약하고 죄에 매인 인간의 삶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가 강합니다. 4절에서 새로운 관계 안에 들어간 사람도 여전히 몸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몸 자체가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육에 속해 살던 삶과 새로운 삶의 차이는 몸을 가지고 있는가의 차이가 아니라, 죄의 힘 아래 있는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해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를 붙잡고 있던 율법에 대해 죽어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율법을 따르는 낡은 방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로마서 7:6 · 두루새김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 바울은 이전의 삶과 지금의 삶 사이에 실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전에는 율법과 죄의 관계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지만, 이제는 율법에서 풀려나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섬기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문자가 낡았다는 것은 성경이 낡았다는 뜻일까
이 구절은 잘못 읽으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 낡고 가치가 없어졌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기록된 율법」으로 풀어 옮긴 말은 본래 기록된 글자나 문서를 뜻하며, 이 문맥에서 기록된 율법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성령」(πνεῦμα)으로 옮긴 말은 인간의 내적인 마음가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성령으로 읽는 견해에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 대조는 고린도후서 3:6에서 바울이 새 언약의 일꾼에 관해 말하며 「문자」와 「영」을 대조하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 배경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실 것이라는 예레미야 31:31–34의 예언과,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어 규례를 따르게 하실 것이라는 에스겔 36:26–27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예언들의 본래 문맥은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며, 바울은 그 약속과 연결되는 말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의 새로운 섬김을 설명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새로움은 낡은 규칙을 버리고 더 세련된 규칙을 받아들였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와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기록된 명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영을 통해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구별됩니다. 바울은 곧이어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다고 강하게 변호합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을 새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선하다면서, 왜 율법을 통해 죄의 욕망이 일어났다고 말할까요?
「탐내지 마라」는 명령이 왜 탐욕을 일으키는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아니었다면 나는 죄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마라」고 하지 않았다면, 탐내는 마음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로마서 7:7 · 두루새김
바울은 독자가 제기할 만한 반론을 스스로 꺼내고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여러분」과 「우리」를 향해 말했는데, 이제 「나는」이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나」는 장의 마지막까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탐내지 마라」는 출애굽기 20:17과 신명기 5:21에 나오는 열 계명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살인이나 도둑질을 금하는 계명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인과 도둑질은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인 반면, 탐내는 마음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마음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계명을 선택한 것은 율법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마음까지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율법이 무엇이 죄인지 알려 준다는 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문제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죄는 그 계명을 이용할 기회를 잡아 내 안에서 온갖 탐내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8 · 두루새김
이제 율법은 죄를 알려 주는 역할에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을 때 오히려 그 일에 강하게 끌리는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바울의 설명을 이런 인간 심리의 한 현상으로만 줄여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죄」를 행동하는 주체처럼 묘사합니다. 죄가 기회를 잡고, 탐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나중에는 사람을 속이고 죽입니다.
「기회」(ἀφορμή)로 옮긴 말은 어떤 행동의 발판이나 출발점을 뜻합니다. 죄가 계명을 자신의 활동에 이용할 발판으로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계명이 악해서 탐내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선한 계명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선한 것과 정면으로 맞서는 방식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죄가 인간을 지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잘못을 몰라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지만, 알고도 짓는 경우가 있고, 무엇이 금지되었는지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그 금지를 어기려는 욕망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뜻을 아는 인간이 어떤 힘의 지배 아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생명을 위한 계명이 어떻게 죽음의 도구가 되었는가
나는 한때 율법 없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오자 죄는 되살아났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생명에 이르게 할 바로 그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을 가져오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로마서 7:9–10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얼핏 읽으면 한 개인의 자서전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은 유대 사람으로 태어나 율법의 가르침 속에서 자랐고, 빌립보서 3:5–6에서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율법 없이 살았던 것일까요? 이 질문은 로마서 7장의 「나」가 누구인가 하는 해석 문제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죄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서로 뒤바뀝니다.
죄가 죽어 있을 때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죄가 살아나자 사람은 죽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어 있다」는 말은 죄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계명이 주어졌을 때 죄가 그 계명을 이용해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바로 그 계명」이라는 말은 레위기 18:5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말씀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은 본래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주어졌는데, 바로 그 계명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죄가 사람을 속이는 장면
죄가 그 계명을 이용할 기회를 잡아 나를 속이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11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는 창세기 3장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의 나무들 가운데 하나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뱀은 그 명령을 비틀어, 어겨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3:13에서 여자는 뱀이 자신을 속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고, 속임이 일어나고, 죽음이 찾아온다는 흐름이 두 본문에서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죄는 하나님이 생명을 위해 주신 명령을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도구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속임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라는 설명을 이제 포기해야 할까요?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로마서 7:12 · 두루새김
죄가 율법을 이용했다고 해서 율법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과도 연결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의 뜻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선한 말씀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을 만났을 때, 죄는 그 말씀을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는 기회로 이용합니다.
그렇다면 선한 것이 나를 죽였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죽인 것은 죄입니다. 죄는 선한 것을 통해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죄가 죄로 드러나고, 계명을 통해 죄가 더없이 악한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서 7:13 · 두루새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과, 율법을 통해 죄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율법의 성격이 아니라 죄의 작용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 그 죄의 작용에 맞설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제 한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나를 속이고」(ἐξαπατάω)라고 말할 때 사용하는 동사는 창세기 3장에서 사용되는 속임의 표현과 같은 어근을 지니므로, 로마서 7:11에는 에덴동산의 유혹과 불순종을 떠올리게 하는 말의 연결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창세기 3장을 분명하게 인용하지 않으며 그 장면을 그대로 다시 서술하지도 않으므로, 직접적인 인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 7:7–25의 「나」가 아담보다 하와의 역할을 반영하는 비극적 독백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는 가능한 문학적 해석이지,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이 하와라는 사실이 확정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 — 바울의 고백인가, 인간의 비극인가
로마서 7장을 읽을 때 가장 많이 논의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14절부터 등장하는 「나」의 정체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성령께 속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에 속한 사람이며, 죄 아래 노예로 팔려 있습니다.로마서 7:14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에게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조금 남아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노예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나」를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피하고 곧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내면적 갈등에 관한 본문이라고 설명하면 중요한 논쟁을 놓치게 됩니다. 반대로 오직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인간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해도 문제가 남습니다. 이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선한 일을 바라며, 자신이 저지르는 악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 주요한 읽기
읽기는 크게 넷으로 갈립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뒤에도 죄와 싸우는 신앙생활의 고백으로 읽는 해석, 예수님을 믿기 이전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로 읽는 해석,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표하는 목소리로 읽는 해석, 아담이나 하와를 비롯한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을 되살리는 문학적 독백으로 읽는 해석입니다.
이 읽기들을 서로 완전히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만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 자신의 경험이 이스라엘의 역사나 인간이 공통으로 겪는 현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해석을 하나로 합쳐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나」가 구원받은 신자의 현재 상태를 직접 설명하는가, 아니면 예수님 밖에서 율법과 죄의 관계를 경험하는 사람을 대표하는가 하는 차이는 실제로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결정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만 어느 관점을 따르더라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같지 않다는 문제를 매우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않으면 「나」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도 바울이 보여 주려는 인간의 어려운 처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14절부터 동사가 현재 시제로 바뀐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겨, 바울이 과거의 자신에서 현재의 자신으로 이야기를 전환했다고 봅니다. 또 22절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한다는 표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고 해석합니다. 이 읽기는 후대의 해석과 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 읽기는 「죄 아래 노예로 팔려 있습니다」와 「나를 사로잡아 내 몸의 각 부분에 있는 죄의 법 아래 둡니다」라는 표현이 죄에서 풀려났다는 앞선 선언과 강하게 충돌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현재 시제는 과거의 상황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문학적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셋째 읽기는 7–13절의 계명과 속임, 죽음이 아담과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14–25절의 노예 상태와 사로잡힘을 나타내는 말이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로 끌려간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사야 49–50장에 나타나는 죄와 포로 상태, 회복의 약속과 연결합니다. 넷째 읽기는 고대 문학에서 작가가 어떤 인물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창세기 3장과의 연결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내가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을 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일을 합니다.로마서 7:15 · 두루새김
이 문장을 읽으면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저지릅니다.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다시 같은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어려움은 단순히 결심이 약하다는 사실보다 깊습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미워하는지 설명하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 행동을 아예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와 실제 행동 사이의 모순을 이해하고 다스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한다면, 나는 율법이 선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로마서 7:16 · 두루새김
자신이 하는 악한 일을 미워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악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율법이 잘못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율법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은 그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이 곧 순종을 이루어 내지는 못합니다.
내 안에 사는 죄
그렇다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는 죄입니다.로마서 7:17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바울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내 안에 사는 죄」라는 말은 죄가 밖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사람 안에서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옳은 것을 알고 원하는데도, 죄는 그 바람을 거스르는 행동을 일으킵니다. 바울이 죄를 독립된 인격체로 설명한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그는 죄가 인간을 얼마나 깊이 지배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죄를 사람처럼 표현합니다.
이 표현으로 바울은 인간의 의지와 죄의 힘을 구별합니다. 선한 일을 바라는 의지가 있어도, 그 의지만으로 죄의 지배를 이겨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는 선한 것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일을 실천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18 · 두루새김
「내 안에」라는 표현 뒤에 「곧 내 육 안에는」이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바울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는 어떤 선한 것도 전혀 없다고 모든 면을 한데 묶어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는 영역을 「내 육」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바로 뒤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육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연약한 삶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문제는 언제나 선한 의지가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한 의지가 있어도 그것을 이루어 낼 힘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19 · 두루새김
15절에서 이미 비슷한 말을 했지만, 반복 자체가 이 사람의 어려움을 드러냅니다. 그는 같은 자리로 돌아옵니다.
선한 일을 원합니다. 그러나 악한 일을 합니다.
다시 선한 일을 원합니다. 그러나 또다시 악한 일을 합니다.
설명은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이 사람의 삶은 같은 모순에 붙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그것을 바라기도 하지만, 그 앎과 바람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전혀 없다는 철학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직접 다루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 놓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것을 온전히 행하지 못한다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모르는 데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그 때문에 해결책도 더 많은 지식을 얻는 데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데 죄의 법에 사로잡힌 사람
그러므로 나는 이런 법을 발견합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나에게 악도 있다는 것입니다.로마서 7:21 · 두루새김
「법」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지만, 이제 바울은 「선한 일을 하려는 나에게 악도 있다」는 현실을 하나의 법처럼 표현합니다. 원문의 노모스(νόμος)를 여기서도 모세의 율법 자체로 이해할 수 있다는 논의가 있지만, 바로 뒤에 나오는 여러 「법」과 함께 읽으면 인간의 삶에서 작용하는 원리나 지배하는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7:22 · 두루새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그 율법을 되새기듯,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신앙 안에서 매우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해석자들은 22절의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경건한 유대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할 수 있고, 바울 자신도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22절은 「나」가 누구인지 판단할 때 중요한 근거이지만, 그 하나만으로 논쟁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흐름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 사람의 기쁨이 그의 행동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몸의 각 부분에서는 다른 법이 작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 법은 내 생각이 따르는 법과 싸우며, 나를 사로잡아 내 몸의 각 부분에 있는 죄의 법 아래 둡니다.로마서 7:23 · 두루새김
바울의 언어가 갑자기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으로 바뀝니다. 「사로잡아」는 포로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죄의 지배를 좋지 않은 습관의 힘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대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고 싶은 왕과 자신을 실제로 지배하는 힘이 서로 다른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율법을 향하지만, 그의 몸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바울은 한 인간의 삶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는 마음속 바람과 죄의 힘에 끌려가는 실제 행동 사이의 깊은 모순을 묘사합니다.
이제 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설명이나 분석이 나오지 않습니다.
절규가 터져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포로로 사로잡히는 이 모습은 구약성경의 유배 이야기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사야 50:1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 때문에 팔렸다고 말씀하시고, 이사야 49:24–25에서는 포로가 강한 자의 손에서 구출될 수 있는지 묻고 여호와야훼께서 친히 포로를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로마서 7:14의 「죄 아래 노예로 팔려 있습니다」와 23절의 「나를 사로잡아」가 이 유배와 구원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직접적인 인용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설명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는 의미 있는 가능성입니다.
「누가 나를 죽음에 매인 이 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죽음에 매인 이 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로마서 7:24 · 두루새김
지금까지의 분석이 이제 한 사람의 절규가 됩니다. 바울은 이 사람의 상태를 조금 불편하거나 마음이 갈등하는 정도로 묘사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잘못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그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로 그 사실이 그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는 어떤 명령을 더 배워야 하는지, 얼마나 더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부족했던 것은 율법의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율법을 기뻐했지만, 그 지식이 죄의 포로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구원할 분을 찾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죄를 드러내고,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을 고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사로잡힌 인간을 그 지배에서 건져 내는 일은 율법 자체가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나은 규칙이 아닙니다.
구원자입니다.
「죽음에 매인 이 몸」을 육체라는 물질 자체가 악하므로 몸에서 영혼을 해방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며, 앞 장에서도 인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표현은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바울이 「몸」을 언급하는 것은, 죄의 문제가 머릿속의 잘못된 생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실제 행동과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도 생각을 바꾸거나 마음을 위로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 전체가 죽음의 지배에서 건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절규 뒤에 찾아온 감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고,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서 7:25 · 두루새김
바울은 죄와 율법의 관계를 길게 설명했고,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모순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마침내 자신을 비참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누가 건져 낼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문장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건져 낼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이 감사는 7장의 첫머리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사람이 되었고, 이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25절의 감사는 갑자기 등장한 감상적인 고백이 아니라, 7장 앞부분에서 선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지력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삶의 비결을 발견했다거나, 자신을 구원할 충분한 율법 지식을 얻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을 능력을 보충해 주시는 조력자로만 등장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건져 내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한 뒤에도 갈등은 남아 있다
방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 바울은, 그다음에 다시 생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고 육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왜 바울은 감사의 선언 뒤에 다시 이전의 갈등으로 돌아올까요?
한 해석은 25절 앞부분의 감사가 실제 구원을 가리키고, 뒷부분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여전히 존재하는 죄와의 갈등을 설명한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재 삶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면서도 여전히 육의 연약함과 싸우는 현실입니다. 다른 해석은 뒷부분이 지금까지 설명한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어려움을 마지막으로 요약하고, 앞부분의 감사는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길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선포한다고 봅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두 문장 가운데 하나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감사가 있다는 이유로 뒤의 갈등을 지워 버릴 수 없고, 반대로 뒤의 갈등이 있다는 이유로 앞의 감사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두 문장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율법이 선한데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유
로마서 7장은 하나의 질문을 중심으로 펼쳐졌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데, 왜 그 율법을 받은 인간은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율법의 결함이 아니라 그 율법을 이용하는 죄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율법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 심지어 기뻐하면서도 죄의 법에 사로잡힐 수 있으므로, 성경을 더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을 건져 내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바울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서로 적대적인 두 종교로 나누어 설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율법이 선하기 때문에 인간의 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왜 필요한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로마서 7장의 처음에는 한 여자가 등장했습니다. 그 여자는 살아 있는 남편과의 결혼 관계에 율법으로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 관계를 끝내자 새로운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심지어 그 율법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율법을 향하지만, 그의 몸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외칩니다.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죽음에 매인 이 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바울은 그 질문 앞에 새로운 계명을 내놓지 않습니다. 더 강한 결심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의 말 뒤에 인간의 갈등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생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고 육으로 죄의 법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을 남겨 놓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은 편안한 승리의 선언처럼 들리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어려움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의 한가운데에서 바울은 이미 한 분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자신이 미워하는 악한 일을 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절규 속에 그 이름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울려 나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