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모압에서 돌아온 길
빈손으로 돌아온 나오미 곁의 룻
룻기 1장에서 가장 뜻밖의 장면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타국에서 보낸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가득 찬 채 떠났는데, 여호와야훼께서 저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어요.」
나오미는 빈손이라고 말하지만, 그녀 곁에는 룻이 있습니다.
이 대조를 단순히 나오미가 자기에게 남은 복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교훈으로 읽으면 본문이 가진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나오미가 잃은 것은 실제로 컸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었고, 그들과 함께 기대할 수 있었던 미래도 사라졌습니다. 룻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 상실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룻기 1장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 사람을 떠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장은 세 번의 이동으로 전개됩니다. 한 가족이 기근을 피해 베들레헴을 떠납니다(1:1–5). 남편과 아들들을 잃은 나오미가 며느리들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오릅니다(1:6–18). 그리고 두 여자가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1:19–22).
이동할 때마다 함께하는 사람의 수가 달라지고, 돌아갈 곳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마침내 이야기는 한 가지 질문에 이릅니다. 돌아갈 집은 어디이며, 누구와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돌아감입니까?
빵의 집을 떠난 가족
먹을 것이 없어진 베들레헴
이야기는 「재판관들이 다스리던 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말합니다(사사기 21:25). 룻기는 바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쟁이나 우상숭배, 지도자들의 실패를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한 가정이 먹고살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재판관들이 다스리던 때,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한 남자가 모압 지방에 머물러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유다 베들레헴을 떠났다.룻기 1: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큰 역사가 한 가족의 생존 문제로 좁혀지는 순간입니다.
히브리어로 베들레헴(בֵּית לֶחֶם)은 ‘빵의 집’ 또는 ‘양식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사해 동쪽의 모압입니다.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는 오랜 역사적 긴장이 있었습니다. 민수기 22–25장에는 모압과 관련된 갈등이 나오며, 신명기 23:3–6은 모압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 줍니다.
그렇지만 룻기 1장은 이 가족이 모압으로 간 행동을 죄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곳으로 떠난 이유도 기근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족의 죽음을 이주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기근을 피해 일정 기간 머물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4절에 이르면 그들이 모압에서 지낸 시간이 「십 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어떤 계획을 세웠든, 낯선 땅에서 보낸 세월은 길어졌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을 중심으로 다시 쓰이는 가족 이야기
2절은 네 사람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엘리멜렉, 나오미, 말론, 길룐입니다.
그런데 3절부터 이름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았다.룻기 1:3 · 본디새김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맞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새로운 가정을 향해 나아가는 듯하지만, 5절에서 두 아들마저 죽습니다.
말론과 길룐, 그 둘도 죽었다. 그 여자는 두 자식과 남편을 잃은 채 남았다.룻기 1:5 · 본디새김
이 반복은 독자가 나오미의 상실을 단계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남아 있던 가족마저 사라집니다. 그리고 5절은 그녀를 이름 대신 「그 여자」라고 부릅니다.
나오미는 여전히 나오미이지만, 서술의 중심에는 이제 남편과 자녀를 잃고 남겨진 여자가 있습니다.
당시 가족은 정서적 관계일 뿐 아니라 생계와 상속, 사회적 보호의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기반도 크게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세 남자의 사망 원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두 며느리의 혼인 기간에 자녀가 없었던 이유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이유를 모른 채 세 여자의 처지 앞에 서게 됩니다.
룻기의 첫 번째 위기는 단순히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돌아가라는 말과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님이 주신 양식,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가족
6절은 앞부분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행동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오미는 여호와야훼가 그 백성을 돌보아 양식을 주었다는 소식을 모압 지방에서 들었다. 그래서 며느리들과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갈 길에 나섰다.룻기 1:6 · 본디새김
「돌보아」는 문맥에 따라 살피다, 찾아오다, 돌보다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단순히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관여하는 행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그 뜻이 드러납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4:31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야훼가 자신들을 돌보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두 이야기의 상황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이 사람들의 현실에 나타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땅은 회복되고 있는데 가족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오미는 일어납니다. 그녀의 귀향은 자신의 삶이 이미 회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가능성이 고향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왜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 하는가
돌아오는 길에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했다. 「각자 자기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이들과 나에게 친절을 베푼 것처럼, 여호와야훼께서도 너희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룻기 1:8 · 본디새김
나오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지만, 며느리들에게 유다는 낯선 땅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남편도 없는 외국인 여자들입니다. 나오미 자신도 그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마련해 줄 능력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반면 모압으로 돌아간다면 친정 가족과 자신들이 익숙한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나오미의 권유는 단순한 거절이 아닙니다. 그녀는 며느리들을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붙잡아 두지 않으려 합니다.
특히 「자기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따뜻합니다. 친정에서 다시 보호와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미는 그들이 「저마다 새 남편의 집에서 안식을 찾게」 되기를 빕니다(1:9).
이때 ‘안식’은 단순히 피로를 푸는 휴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리, 미래를 이어 갈 수 있는 가정을 가리킵니다.
흥미롭게도 나중에 나오미는 룻을 위해 다시 안식을 구하게 됩니다(룻기 3:1). 첫 장에서 며느리들을 보내면서 구했던 것이 이야기 안에서 계속 중요한 문제로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친절은 이미 사람들에게서 나타났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축복하면서 「친절」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먼저 두 며느리가 죽은 가족들과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친절을 구하는 기도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사람들이 이미 서로에게 베푼 친절입니다.
본문은 두 며느리가 이전에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말로 보아 그들이 남편들과 시어머니를 성실하게 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서 받은 선의를 기억하며, 그 선의가 하나님에게서도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빕니다.
나오미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한계
그러나 두 며느리는 돌아가기를 거부합니다.
나오미는 이번에는 더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나오미가 말했다. 「내 딸들아, 돌아가거라. 왜 나와 함께 가려 하느냐? 너희 남편이 될 아들들이 아직 내 배 속에 있겠느냐?」룻기 1:11 · 본디새김
오늘 밤 자신이 남편을 얻고 아들을 낳는다 해도, 며느리들이 그 아들들이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설명은 냉정할 만큼 현실적입니다. 그녀가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까닭은 두 여자가 자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기회를 잃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 끝에서 나오미 자신의 고통이 터져 나옵니다.
「너희가 그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기다리겠느냐? 그 아이들에게 매여 남편도 맞지 않고 지내겠느냐? 안 된다, 내 딸들아. 나는 너희보다 훨씬 더 쓰라린 고통을 겪고 있단다. 여호와야훼의 손이 나를 치러 뻗쳐 왔으니 말이다.」룻기 1:13 · 본디새김
6절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돌보아 양식을 주셨다는 것은 서술자가 전하는 소식입니다. 반면 13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치셨다는 것은 나오미 자신의 고백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하나님께 맞았다고 말하지만, 서술자는 그 이유를 설명하거나 그녀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았다고 판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미래는 모두 막혀 있습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 가운데 한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선택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5:5–10에는 아들이 없이 죽은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 가도록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에서도 다말이 남편의 동생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오미의 말은 이런 가족 중심의 혼인 관습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규정이 이 상황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아들이 모두 죽었고, 나오미에게는 살아 있는 다른 아들이 없습니다. 13절의 「너희보다」에 해당하는 미켐은 해석상 갈림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처럼 며느리들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이 크다는 비교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며느리들의 처지를 생각할수록 자신의 마음이 쓰라리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떠날 자유가 있는 사람이 떠나지 않다
두 번의 입맞춤, 그리고 한 사람의 결심
14절에서 세 여자는 다시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들은 다시 소리 높여 울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췄지만, 룻은 시어머니에게 꼭 붙어 있었다.룻기 1:14 · 본디새김
여기서 오르바를 믿음이 없거나 사랑이 부족한 인물로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돌아가라고 진심으로 권했습니다. 앞서 두 며느리 모두 나오미와 함께 가겠다고 말했고, 오르바도 헤어짐 앞에서 울었습니다. 나오미 자신도 두 여자가 모압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를 축복했습니다.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은 누가 더 나쁜 사람이냐는 평가가 아니라, 룻이 선택한 길의 특별함입니다.
룻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모압에 남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다시 살아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가능성을 뒤로하고 나오미와 함께 가기로 합니다.
룻은 나오미 곁에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나오미의 삶에 결합하려 합니다.
룻의 고백은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다
나오미는 마지막으로 룻을 설득합니다.
나오미가 말했다. 「보아라. 네 동서는 자기 백성과 자기 신에게 돌아갔다.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룻기 1:15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신앙과 공동체의 정체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룻이 나오미와 함께 유다로 간다는 것은 장소만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신앙의 방향도 바꾸는 일입니다.
이때 룻이 말합니다.
룻이 말했다. 「어머니를 떠나 되돌아가라고 제게 강요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니가 묵으시는 곳에서 저도 묵겠어요. 어머니의 백성이 제 백성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이에요.」룻기 1:16 · 본디새김
룻의 결심은 개인적인 동행에서 공동체와 신앙의 선택으로 깊어집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자기 백성과 신에게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앞으로 자신이 속할 백성과 섬길 하나님을 나오미의 백성과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이 고백에는 신앙적 의미가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룻이 이전에 어떤 종교적 경험을 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죽는 곳에서 묻히겠다는 약속
룻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죽으시는 곳에서 저도 죽고, 그곳에 묻히겠어요. 죽음 말고 다른 것이 저와 어머니를 갈라놓는다면, 여호와야훼께서 제게 벌을 내리시고 더한 벌도 내리시기를 빌어요.」룻기 1:17 · 본디새김
룻은 앞으로의 생활뿐 아니라 자신의 생애 마지막 자리까지 나오미와 연결합니다.
마지막에 그녀는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합니다. 여기서 룻은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그저 존중한다고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속을 지켜야 할 책임을 여호와야훼 앞에서 받아들입니다.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겠다는 뜻을 굳힌 것을 보고, 더는 룻을 설득하지 않았다.룻기 1:18 · 본디새김
나오미가 룻을 껴안았다거나 감격하여 감사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두 사람이 화해의 말을 나누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이 침묵은 중요한 장면 전환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룻은 나오미가 줄 수 있는 것 때문에 함께 가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차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룻의 선택을 쉽고 낭만적인 희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더 익숙하고 안정적일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택합니다. 나오미와 함께 유다에 간다고 해서 안전과 생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룻의 신실함은 어려움이 사라진 뒤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으로 함께 들어가는 데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의 「꼭 붙어 있었다」는 굳게 붙다, 밀착하다, 떠나지 않고 결합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창세기 2:24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한다고 할 때에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매장은 한 사람이 어느 가족과 공동체에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룻이 나오미가 묻힐 곳에 자신도 묻히겠다고 말하는 것은 일시적인 동행 이상의 결심입니다. 17절의 맹세를 두고는 죽음만이 둘을 갈라놓을 수 있다는 읽기와 죽음조차 그들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앞의 읽기를 택합니다. 어느 쪽이든 룻이 약속을 자신의 삶 전체에 걸친 것으로 여긴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10:18–19는 하나님이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는 분이며, 이스라엘 역시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룻기 1장에는 과부인 나오미와 외국인인 룻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 모두 돌봄이 필요한 처지에 있지만, 동시에 서로를 돌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신약의 마태복음 1:5가 예수의 계보에 룻을 기록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후대 정경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룻기 1장 자체의 중심은 아직 훗날의 계보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기 앞의 한 사람을 떠나지 않기로 선택한 룻과, 그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오미인가요?」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마침내 두 사람은 베들레헴에 이릅니다.
두 사람은 길을 걸어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들어서자 온 성읍이 그들 때문에 술렁였다. 여인들이 말했다. 「이 사람이 나오미인가요?」룻기 1:19 · 본디새김
그들이 왜 놀랐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인지, 나오미의 처지가 너무 달라져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나오미인데, 눈앞의 사람은 사람들이 기억하던 나오미와 달라 보입니다.
나오미 자신도 그렇게 느낍니다.
이름을 바꾸고 싶은 여자
나오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여인들에게 말했다. 「저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세요. 마라라 불러 주세요. 샤다이께서 저를 몹시 쓰라리게 하셨으니까요.」룻기 1:20 · 본디새김
히브리어 이름 나오미(נׇעֳמִי)는 즐거움과 기쁨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면 마라는 쓰라림을 뜻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설명하는 이름조차 바꾸고 싶을 만큼 이전의 삶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득 찬 채 떠났는데, 여호와야훼께서 저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어요. 여호와야훼께서 제게 불리한 증언을 하셨고 샤다이께서 제게 재앙을 내리셨는데, 왜 저를 나오미라 부르세요?」룻기 1:21 · 본디새김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기근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신이 「가득 찬 채」 떠났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가득 차 있었습니까? 문맥상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가족입니다. 나오미에게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양식이 부족했지만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베들레헴에 양식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함께 떠났던 남편과 두 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느끼는 풍요와 빈곤은 음식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의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조금 전 길 위에서 며느리들에게 여호와야훼의 친절을 빌었던 사람이 이제 여호와야훼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친절을 구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치는 것처럼 느낍니다.
나오미의 말은 그녀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 남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아닐 수 있습니다.
룻기의 서술자는 이 차이를 설교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지막 문장을 덧붙입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불리한 증언」이라는 말은 법정에서 누군가를 거슬러 증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맞서 계시는 것처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합니다. 그녀가 사용하는 「샤다이」는 여호와야훼와 다른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또 다른 호칭입니다. 흔히 ‘전능자’로 번역하지만 그 어원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탄식은 이런 긴장을 낯설게 여기지 않습니다. 시편 22:1–2에서 시인은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시편 88편에서도 고통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속에 그대로 남습니다.
보리 수확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룻기 1장의 마지막 절은 두 가지 사실을 나란히 놓습니다.
이렇게 나오미가 돌아왔고, 모압 여자인 며느리 룻도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두 사람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보리 수확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룻기 1:22 · 본디새김
이 마지막 문장은 아무런 감정도 직접 표현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기뻐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룻이 희망을 품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고 알려 줍니다.
처음에는 기근, 마지막에는 수확
1장의 첫머리에서 베들레헴은 기근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 가족이 고향을 떠났습니다. 6절에서 나오미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22절에서 마침내 그 양식이 자라나는 땅에 도착합니다.
보리 수확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나오미와 룻에게 당장 먹을 것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두 여자는 땅에 도착했지만, 자신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어떻게 얻을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풍성한 밭이 있다는 사실과 그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돌아온 사람과 함께 온 사람
나오미에게 베들레헴은 실제 고향입니다. 반면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룻이 이전에 베들레헴에서 살았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룻도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사람으로 서술됩니다.
룻에게는 처음 가는 곳이지만, 그녀가 함께하기로 선택한 나오미의 귀향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만으로 룻이 완전히 이스라엘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술자는 여전히 그녀를 「모압 여자」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나오미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했지만, 새로운 공동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 달라고 했는데도, 서술자는 마지막 절에서 계속 그녀를 ‘나오미’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그녀의 미래가 반드시 밝아진다는 암호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서술자가 나오미의 고통스러운 자기 이해를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쓰라림으로 규정하지만, 이야기 안에서 그녀의 이름은 아직 나오미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는 ‘돌아오다’에 해당하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문장 구조상 이것을 룻과 연결하는 읽기와 나오미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룻에게 연결하여 옮깁니다. 신명기 23:3–6의 모압에 대한 제한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 질문을 더욱 예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룻기는 그 긴장을 첫 장에서 법률적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한 이스라엘 과부의 곁을 지키는 모압 여자를 보여 줍니다. 레위기 19:9–10과 신명기 24:19–22는 추수할 때 남겨진 곡식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 과부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 그 규정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이 거둔 수확을 홀로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땅에서 난 양식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생존과도 연결되어야 합니다. 룻기 1장 끝에서 이 율법의 실제 시행 여부는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리 수확의 시작은 다음 이야기에서 두 여자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향해 독자의 시선을 돌립니다.
끝맺음 — 나오미는 혼자가 아니었다
룻기 1장은 상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지만, 상실의 이유를 밝혀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 이해를 교정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신실함은 고통을 설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고통을 겪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동 속에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오미에게 곧바로 위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룻은 그녀의 곁에 있었고, 두 여자는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서술자는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오미 곁에 서 있는 모압 여자 한 사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베들레헴의 들판에서는, 보리 수확이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