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성문에서 맺은 약속

이름을 잇는 사람들

룻기 4장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남자가 등장하면서 시작합니다.

보아스는 그를 「아무개 씨」라고 부릅니다. 그는 엘리멜렉 집안의 재산을 되찾을 우선권이 있는 친족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상속 재산이 손상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권리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그 자리에서 밝히는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등장하는 성문에서, 보아스는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이 주어집니다. 오벳입니다. 그 이름은 곧 이새와 다윗의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룻기 4장은 누가 더 많은 재산을 얻는가보다, 누구의 이름과 삶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성문에 앉은 보아스가 해결하려는 것은 먼 훗날의 왕조 문제가 아닙니다. 나오미의 가족에게 속했던 땅을 어떻게 할 것인지, 죽은 말론의 이름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지, 룻의 앞날을 누가 책임질 것인지가 그의 당면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아이가 태어나고, 마지막 족보에서 독자는 이 가족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역사와 어디에서 만나는지 알게 됩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4장 본문 읽기 →

성문에 앉은 보아스

룻기 4:1–2 본문 →

기다리지 않고 성문으로 간 사람

앞 장은 나오미의 말로 끝났습니다.

「그 사람은 오늘 이 일을 끝내기 전에는 쉬지 않을 테니 말이다.」(3:18)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 그곳에 앉았다. 마침 보아스가 말했던 되찾아 주는 친족이 지나가고 있었다. 보아스가 말했다. 「아무개 씨, 이리 와서 앉으시오.」 그 사람이 이쪽으로 와서 앉았다.룻기 4:1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장로들이 모이고,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며, 거래나 분쟁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장소였습니다. 신명기 21:18–21과 22:15–19에서도 성읍의 장로들과 성문이 중요한 법적 절차의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간 것은 룻에게 한 약속을 사적인 대화로만 남겨 두지 않겠다는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친족의 권리와 책임을 공동체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에서 처리하려 합니다.

서술자는 보아스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 사람을 미리 불러 놓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서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간 것처럼, 이제 보아스 앞에도 필요한 사람이 마침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주어졌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룻이 밭에 들어간 것만으로 양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아스가 그녀를 보호하고 곡식을 얻게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까운 친족이 지나간다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을 불러 세우고, 장로들을 모아 필요한 절차를 시작합니다.

이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우선권

그의 이름이 왜 생략되었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름을 잇는 책임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지워졌다는 식의 해석은 문학적인 역설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내리신 형벌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장에서 분명한 것은 이름이 없는 인물도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대우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보아스는 자신보다 우선권이 있는 그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장로 열 명을 불러 앉힌 다음, 그에게 먼저 선택할 기회를 줍니다. 자신이 룻과 함께할 뜻을 밝혔어도, 아직 다른 사람에게 먼저 주어져야 할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보아스의 신실함은 자신이 사랑하거나 보호하려는 사람을 위해 행동하는 데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정당한 권리도 존중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친족에게 엘리멜렉의 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땅은 되찾겠지만, 가족의 책임은?

룻기 4:3–6 본문 →

처음에는 땅에 관한 거래처럼 보입니다

보아스가 말합니다.

보아스가 그 친족에게 말했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친척 엘리멜렉에게 딸린 밭을 팔려고 내놓았소.」룻기 4:3 · 본디새김

앞선 장들에서는 나오미에게 이런 땅이 있다는 사실이 직접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오미와 룻은 이삭을 주워야 할 만큼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땅이 있었다면 왜 그렇게 가난했을까요?

본문은 그 땅을 누가 경작하고 있었는지, 나오미가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전에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동사는 완료형이지만, 이 장의 매입 협상과 9절의 매입 선언을 고려하면 본디새김처럼 나오미가 땅을 팔려고 내놓은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땅이 엘리멜렉 집안의 상속 재산과 관련된다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25:23은 땅이 궁극적으로 여호와야훼께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규정에서는 가족이 가난해져 땅을 팔았을 때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합니다(레위기 25:25). 가족에게 주어진 상속 재산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영구히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보아스는 그 친족이 자신보다 우선권이 있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친족은 곧바로 대답합니다.

「내가 되찾겠소.」

되찾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 땅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거래를 확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아직 말하지 않은 중요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룻의 이름이 등장하자 결정이 바뀝니다

보아스가 말했다. 「당신이 나오미에게서 그 밭을 사는 날에는, 죽은 사람의 아내인 모압 여자 룻에게서도 그 밭을 사들이는 것이오. 죽은 사람의 이름을 그의 상속 재산에 이어 가게 하려는 것이오.」룻기 4:5 · 본디새김

땅을 되찾는 문제는 죽은 남자의 아내 룻과 그의 이름을 이어 가는 문제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친족의 대답이 바뀝니다.

「내 상속 재산을 해칠까 염려되오」

그 친족이 말했다. 「내가 되찾아 가질 수는 없소. 내 상속 재산을 해칠까 염려되오. 당신이 내가 가진 되찾을 권리를 넘겨받아 되찾아 가지시오. 나는 되찾을 수 없소.」룻기 4:6 · 본디새김

본문은 그의 경제적인 염려를 기록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었다거나 그가 율법을 위반했다는 판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거절에 별도의 형벌을 부과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서술이 만들어 내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상속 재산이 손상되지 않기를 염려합니다.

보아스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 그 상속 재산에서 끊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의 상속 재산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판단의 중심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자신에게 이미 속한 재산을 보전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려움에 빠진 친족의 집안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지에 책임을 두려 합니다.

핵심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와 그 권리에 따르는 책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성경의 토지 규정은 가족의 땅을 지키는 일을 단순히 개인의 경제적 이익에만 맡기지 않습니다. 한 집안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가까운 친족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함께 묻습니다.

보아스는 그 책임을 맡을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가까운 친족은 자신의 권리를 그에게 넘깁니다.

이제 밤의 타작마당에서 이루어진 약속이 성문의 공적인 결정으로 옮겨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원문에는 「룻에게서」라는 뜻의 전치사 표현 우메에트 룻이 있습니다. 또한 ‘얻다’라는 동사에는 기록된 형태와 읽도록 전해진 형태의 차이가 있습니다. 기록된 형태는 ‘내가 얻었다’에 해당하고, 읽는 형태는 ‘네가 얻는다’에 해당합니다. 본디새김은 읽는 형태를 따르면서, 앞에 언급된 밭을 룻에게서도 취득한다는 뜻으로 연결합니다. 반면 룻을 아내로 얻는다는 의미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경우 땅을 되찾는 일에 혼인의 책임이 결부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두 읽기는 거래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룻의 권리와 혼인의 문제가 어느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해석할 때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4:10에서는 보아스가 룻을 자신의 아내로 얻었다고 공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5절을 해석할 때 뒤의 선언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6절에서 친족이 염려한 손상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그가 자신의 자원을 들여 땅을 되찾더라도, 죽은 남자의 이름을 이어 갈 후손이 생기면 그 땅의 권리와 관련하여 자신의 가족에게 기대했던 이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사람에게 자녀가 있었는지, 어떤 재산을 이미 가지고 있었는지, 정확히 얼마를 부담해야 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경제적 손실을 계산하거나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신발을 벗고, 이름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다

룻기 4:7–10 본문 →

왜 신발을 벗는가

친족이 권리를 포기하자 서술자는 갑자기 이야기의 진행을 멈추고 옛 관습을 설명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재산을 되찾거나 교환할 때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확정하려고 자기 신발을 벗어 상대에게 주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증거로 삼던 방식이었다.룻기 4:7 · 본디새김

중요한 것은 양쪽이 거래의 결과를 인정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친족은 보아스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사서 가지시오.」

그리고 자기 신발을 벗습니다.

그 순간 친족의 우선권 문제가 정리됩니다.

이제 보아스는 자신이 하려는 일을 장로들과 백성 앞에서 선언합니다.

재산을 얻는 목적이 이름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했다. 「내가 엘리멜렉의 모든 소유와 길룐과 말론의 모든 소유를 나오미에게서 샀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룻기 4:9 · 본디새김

재산 거래에서 그 이름들이 언급된 것은 단순히 이전 소유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에서 보아스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했는지 밝힙니다.

「또 말론의 아내인 모압 여자 룻을 내 아내로 얻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그의 상속 재산에 이어 가게 하여, 그 이름이 그의 친족들 사이에서나 그가 살던 곳의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그 증인입니다.」룻기 4:10 · 본디새김

1장에서는 말론과 길룐이 각각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고만 기록했습니다. 어느 아들이 룻과 혼인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룻과 말론의 관계가 공개적으로 확인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름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후손들이 죽은 사람을 기억한다는 뜻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가족의 지속성과 상속 재산, 공동체 안에서의 자리와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아들이 없고 그 집안의 상속 재산도 잃게 된다면, 그의 가족이 이어 온 삶의 흔적과 권리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단절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그 증인입니다」

보아스는 9절과 10절에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보아스와 룻이 밤중의 타작마당에서 나눈 약속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약속과 관련된 책임이 공동체 앞에 공개됩니다.

개인적인 약속이 공동체가 인정하고 기억할 수 있는 책임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이 장의 첫머리에 등장한 가까운 친족은 이름 없이 남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 이름이 공동체 안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문에 모인 사람들은 그 선언에 응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발을 땅을 밟고 소유하는 권리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정확한 상징적 기원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죽은 형제의 가문을 이어 줄 책임을 거절하는 남자의 신발을 여자가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 절차가 나옵니다. 그러나 룻기에서는 거절한 친족 자신이 신발을 벗습니다. 또한 서술자는 이 관습을 재산의 되찾음과 교환을 확정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침을 뱉거나 그를 공개적으로 수치스럽게 만드는 행동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본문에 신발이 등장한다고 해서 동일한 의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서술자가 「옛날 이스라엘에서는」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이 관습이 이야기를 듣는 독자에게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표현만으로 룻기의 정확한 저작 연대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후 태어나는 오벳은 마지막 족보에서 보아스의 아들로 기록됩니다(4:21). 따라서 룻기는 죽은 말론의 이름을 잇는다는 목적을 밝히면서도, 그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말론으로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잇는다’는 말이 반드시 그 사람을 출생 족보상의 직접적인 아버지로 기록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가족의 이름과 상속을 지키는 일은 출생 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넓은 친족의 책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압 여자를 라헬과 레아, 다말의 자리에서 축복하다

룻기 4:11–12 본문 →

「당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여자」

성문에 있던 사람들과 장로들이 말합니다.

성문에 있던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말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당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함께 이스라엘 집안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라다에서 번성하시고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십시오.」룻기 4:11 · 본디새김

룻은 이야기 내내 모압 여자라는 출신과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보아스의 공식적인 선언에서도 「모압 여자 룻」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성문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당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여자」라고 부르며 축복합니다.

창세기 29–30장에서 라헬과 레아는 야곱의 가정을 이루는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그들과 그 집안의 여종들에게서 야곱의 아들들이 태어나고, 그 아들들의 이름은 훗날 이스라엘 지파들의 기초가 됩니다. 성문에 모인 사람들은 룻도 그들처럼 이스라엘 집안을 세우는 여자가 되기를 빕니다.

이 축복은 출신의 차이를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룻이 모압 여자라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녀를 축복의 대상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에브라다와 베들레헴은 룻기 첫머리의 가족 소개에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1:2). 처음에 엘리멜렉의 가족은 베들레헴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 보아스와 룻의 집안이 그곳에서 번성하기를 축복받습니다.

그 땅에서 가족의 삶이 다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왜 하필 다말인가

12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 젊은 여자에게서 당신에게 주실 후손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집안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기를 빕니다.」룻기 4:12 · 본디새김

왜 사람들은 보아스와 룻의 혼인을 축복하면서 다말과 베레스를 떠올렸을까요?

다말은 유다의 아들 에르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어서 다른 아들 오난도 죽었고, 유다는 다말에게 셋째 아들 셀라가 자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약속한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남편의 집안에서 자신의 권리와 미래를 얻지 못한 채 남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유다를 통해 임신했고,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유다는 뒤늦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며 다말이 자기보다 의롭다고 말했습니다(창세기 38:26).

창세기 38장과 룻기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편이 죽은 여자, 끊어질 위기에 놓인 가족의 미래, 그리고 그 가문을 이어 가야 할 남자 친족의 책임이라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의 진행은 다릅니다.

다말의 경우 유다가 책임을 이행하지 않아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룻기의 보아스는 오히려 책임을 맡겠다고 나서며 공동체 앞에서 일을 처리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이야기가 모두 가족의 지속성과 관련된 위기 속에서 여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베레스는 유다 지파의 중요한 조상입니다. 보아스가 속한 가계의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성문에 모인 사람들은 보아스의 집안이 베레스의 집안처럼 번성하기를 빕니다.

후손이 끊어질 듯했던 위기와 복잡한 가족 관계 속에서도 다음 세대가 태어났던 역사를 떠올리는 축복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베레스는 곧 마지막 족보의 첫 인물로 다시 등장합니다. 마지막 족보에서 독자는 바로 그 베레스의 후손인 보아스가 낳은 아들을 통해 다윗에 이르는 계보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축복 속에서 먼저 등장한 이름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여는 이름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에는 신명기 23:3–6의 모압에 대한 제한을 기억하는 독자가 느낄 만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 본문은 모압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관계를 배경으로 모압 사람의 회중 참여를 제한합니다. 룻기는 그 규정의 모든 법적 적용 문제를 직접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압 여자인 룻이 여호와야훼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신실한 행동으로 공동체에 알려진 뒤,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연결되는 축복을 받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야기는 그녀가 모압 출신이라는 사실보다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독자가 함께 보도록 이끕니다.

「여호와야훼가 룻을 임신하게 했고」

룻기 4:13 본문 →

성문에서 긴 대화와 절차가 끝난 뒤, 서술자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사건을 전개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맞아들이니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보아스가 룻과 잠자리를 함께했다. 여호와야훼가 룻을 임신하게 했고, 룻은 아들을 낳았다.룻기 4:13 · 본디새김

밤중에 룻이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 있었던 장면은 매우 자세했습니다. 성문에서 친족의 권리를 정리하는 대화도 길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혼인과 임신, 출산은 한 문장 안에서 이어집니다.

처음으로 분명하게 기록되는 하나님의 개입

룻기에서 하나님의 행동은 주로 사람들의 말과 기도를 통해 언급되어 왔습니다.

나오미는 여호와야훼께서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1:6). 보아스는 룻이 여호와야훼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받기를 빌었습니다(2:12). 나오미는 여호와야훼께서 친절을 거두지 않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2:20).

그러나 여기서는 서술자 자신이 하나님의 행동을 직접 말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룻에게 임신을 허락하셨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떠난 가족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연결을 모든 기근이나 불임이 하나님의 형벌이며, 모든 풍작이나 임신이 개인의 의로움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룻기는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왜 죽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룻이 이전에 왜 자녀를 얻지 못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4:13은 지금의 임신이 여호와야훼의 선물이라고 말할 뿐, 이전의 불행에 대한 원인을 소급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은 그들이 자기 뜻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신실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물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임신을 허락하셨다는 사실도 보아스와 룻이 했던 선택의 의미를 없애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인간의 행동을 거치지 않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책임 있는 선택은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 힘으로 통제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자 이야기의 중심은 다시 나오미에게로 옮겨갑니다.

「일곱 아들보다 나은 며느리」

룻기 4:14–16 본문 →

아이는 룻이 낳았는데, 왜 여인들은 나오미를 축복하는가

아들이 태어난 뒤 가장 먼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베들레헴의 여인들입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했다. 「여호와야훼를 찬양해요. 여호와야훼께서 오늘 당신에게 되찾아 주는 친족이 끊기지 않게 하셨어요. 그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알려지기를 빌어요.」룻기 4:14 · 본디새김

앞에서는 보아스가 그 역할을 맡을 사람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인들은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나오미에게 그런 친족이 끊기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아이가 당신의 삶을 되살리고 노년의 당신을 부양해 줄 거예요.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에게 일곱 아들보다 나은 며느리가 그 아이를 낳았으니까요.」룻기 4:15 · 본디새김

성문에서는 땅을 누가 되찾을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이제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누가 남아 있고, 앞으로 누가 그녀의 삶을 이어 갈 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녀에게 다시 가족의 미래가 생겼습니다.

「삶을 되살리고」라는 말의 깊이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상실을 겪은 뒤 자신이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탄식했습니다. 이제 여인들은 태어난 아이가 그녀의 삶을 다시 일으키고 노년을 돌볼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기대가 중요한 까닭은 나오미가 살아갈 미래를 다시 상상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에게 가족의 죽음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누가 자신을 돌보고, 가족의 삶이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여인들은 그 미래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다음 문장은 더욱 뜻밖입니다.

일곱 아들보다 나은 한 며느리

당시 가족의 상속과 사회적 보호를 생각할 때 아들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상실이 깊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녀에게 남편과 아들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룻이 「일곱 아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압을 떠나 유다로 함께 왔습니다. 이삭을 주워 양식을 마련했습니다. 보아스에게 가족의 미래에 관한 책임을 요청했습니다.

여인들은 이 모든 행동을 통해 드러난 룻의 사랑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룻은 아들이 아니었지만, 나오미에게 아들들이 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었던 돌봄과 신실함을 실제로 베풀었습니다.

나오미가 생각했던 가족의 미래는 아들들이 죽으면서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가 다시 열리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모압에서 온 며느리였습니다.

여기서 룻의 가치를 오직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에만 두어서도 안 됩니다. 여인들은 룻이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기 전에 그녀가 나오미를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은 출산 이전부터 행동으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탄생은 룻의 사랑을 처음으로 가치 있게 만든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이어져 온 사랑과 신실함이 새로운 가족의 탄생으로 연결된 사건입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어요」

나오미는 아이를 받아 품에 안고 그 아이를 돌보며 길렀다.룻기 4:16 · 본디새김

서술자는 나오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웃 여인들은 더욱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어요」

실제로 아들을 낳은 사람은 룻입니다. 서술자는 그 사실을 이미 13절에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들은 이 아이의 탄생이 나오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돌아왔던 나오미에게 가족의 삶을 이어 갈 아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1장에서 베들레헴의 여인들은 나오미를 보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오미인가요?」(1:19)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이웃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그녀의 달라진 처지를 보고 놀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족을 기뻐합니다. 회복은 반드시 잃어버린 것을 이전과 똑같이 돌려받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룻기에서 회복은 잃은 가족을 대신할 수 없는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은 이 자리의 고엘을 아이로 이해합니다. 그 아이를 낳은 사람이 룻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14절의 고엘을 보아스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앞서 실제로 토지와 혼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보아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출생과 양육의 문맥을 고려하면 아이를 가리키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이때 갓 태어난 아이가 곧바로 토지를 되찾는 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보아스에게 적용되었던 고엘이라는 말이 이제 나오미의 삶을 이어 주고 장차 그녀를 돌볼 후손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사용되는 것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분함과 풍성함을 표현할 수 있으며, 여기서는 아들들이 줄 수 있는 보호와 풍요를 크게 나타내는 비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며 길렀다는 표현은 양육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나오미가 직접 젖을 먹였다고 단정하거나, 현대적인 의미의 법적 입양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오벳에서 다윗까지

룻기 4:17–22 본문 →

아이의 이름은 누가 지었는가

이웃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어요」라고 말하며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그들은 아이를 오벳이라 불렀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였고,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였다.룻기 4:17 · 본디새김

보통 출생 이야기에서 이름을 짓는 일은 부모의 행동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룻기에서는 이웃 여인들이 이름을 부여하는 장면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처음에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이제 그 고향의 여인들은 나오미가 품은 아이에게 이름을 줍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나오미의 삶을 바라보던 공동체가, 끝에서는 그녀에게 찾아온 새로운 생명을 함께 기뻐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개인의 가족 이야기가 공동체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에 갑자기 등장하는 다윗

그런데 17절은 아이의 이름을 밝힌 뒤에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지금까지 독자는 나오미와 룻, 보아스의 이야기를 따라왔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먹을 양식, 안전한 삶, 가족의 재산과 이름을 지키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벳이라는 아이가 태어난 뒤, 이야기는 갑자기 다윗에게 이어집니다.

1:1은 「재판관들이 다스리던 때」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윗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정이 세워지기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다윗의 조상 이야기였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룻기의 가족 이야기는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의 더 큰 흐름과 연결됩니다.

족보가 왜 베레스에서 시작되는가

18–22절은 베레스에서 다윗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기록합니다.

족보에는 베레스, 헤스론, 람, 암미나답, 나손, 살몬, 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의 열 이름이 등장합니다. 성문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조상 베레스를 떠올리며 미래의 후손을 축복했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서술자는 그 축복과 관련된 가계가 실제로 다윗까지 이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한 출생 기록을 넘어 룻기의 이야기가 유다 집안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려 줍니다.

다윗의 계보 속에 있는 모압 여자

족보에는 룻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오벳이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모압 여자 룻입니다. 따라서 마지막에 다윗의 이름이 등장했을 때, 독자는 이스라엘 왕의 조상 가운데 모압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게 됩니다.

룻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이유는 그녀가 다윗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다윗이 등장하기 전부터 나오미에게 신실하게 행동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훌륭한 여자라고 부른 것도 그녀가 장차 왕의 조상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녀가 나오미에게 행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문에 모인 사람들 역시 룻이 다윗의 조상이 될 것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녀를 축복했습니다. 룻의 신실함은 훗날의 위대한 결과가 드러났기 때문에 비로소 가치 있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신실함은 결과를 알 수 없었던 때에도 이미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족보는 그 가치를 새로 만들어 내기보다, 독자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연결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마태복음 1:5–6은 보아스와 룻, 오벳과 이새, 다윗의 계보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기록합니다. 이는 룻기 마지막 족보를 이어받는 직접적인 계보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룻기 4장 자체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오벳의 출생이 다윗의 가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며, 그 연결을 통해 이 가족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 자리 잡는다는 점입니다.

끝맺음 — 아이를 품에 안은 나오미

룻기 4:1–22 본문 →

룻기는 다윗의 이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다윗에 이르는 계보가 펼쳐지기 직전에 룻기는 잠시 나오미의 품에 머뭅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나오미는 자신이 겪은 상실을 탄식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녀는 새로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돌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과 이어지는 계보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이처럼 눈에 보이는 회복과 보상이 주어진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룻기는 구체적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모든 과부가 재혼하게 된다거나, 모든 상실이 자녀의 출생으로 회복된다는 약속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서술자는 나오미가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다시 해석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마라라는 이름을 포기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남편과 아들들에 대한 슬픔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한때 자신의 삶을 빈손이라고 표현했던 그 여자가 이제 두 팔로 아이를 안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죽은 가족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생은 나오미가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이며, 돌볼 사람이 있고, 함께할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룻기는 그녀의 모든 슬픔을 설명하지 않은 채 끝납니다.

다만 그녀의 품에 아이 하나를 안겨 줍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에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