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15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지혜의 선물과 선택의 책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면, 인간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할까요?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설명할 때 여러 이유를 찾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격이나 환경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그런 상황에 자신을 두셨으니 결국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집회서 15장은 그러한 생각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먼저 지혜가 한 사람을 마중 나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집회서 15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주셨는가를 먼저 보여 준 다음, 그 선물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지혜는 인간이 혼자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요구되는 응답입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815장 본문 읽기 →

지혜를 찾아갔더니 지혜가 마중 나온다

집회서 15:1–3 본문 →

주를 경외하는 이는 이렇게 할 것이고, 율법을 굳게 붙드는 이는 지혜를 붙잡을 것이다.집회서 15:1 · 본디새김

첫 구절의 ‘이렇게 할 것이고’라는 표현은 앞 장과 연결됩니다.

집회서 14장 끝에서는 지혜의 집을 찾아가 그 곁에 머물며, 지혜의 보호 아래 삶을 꾸리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15장 첫 구절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여기서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존중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려는 태도입니다.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규칙들의 모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지혜와 연결되는 길로 제시됩니다.

지혜자는 지혜를 얻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지혜는 어머니처럼 그를 마중 나올 것이고, 처녀로 맞아들인 아내처럼 그를 맞아 줄 것이다.집회서 15:2 · 본디새김

인간은 지혜를 얻기 위해 애쓰지만, 지혜를 얻는 일이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 역시 사람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맞이하고 돌보며 성장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지혜자가 지혜를 어머니에 비유한 것은 지혜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을 돌보고 길러 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머니는 양육과 돌봄을, 아내는 친밀함과 기쁜 맞아들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새로운 혼인 관계에서 경험하는 친밀한 환대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깨달음의 빵을 먹이고, 지혜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집회서 15:3 · 본디새김

빵과 물은 특별한 사치품이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음식입니다. 지혜자는 깨달음과 지혜를 그러한 음식에 비유합니다.

지혜가 인간에게 필요한 까닭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똑똑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지혜는 빵과 물을 내놓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먹이고 마시게 합니다.

이 모습은 잠언 9:1–6에서 지혜가 자기 집에 음식을 차리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와서 자신의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명철의 길로 걸어가라고 권합니다.

지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이며, 그 사람의 삶을 길러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지혜가 사람의 입을 열어 준다

집회서 15:4–6 본문 →

그는 지혜에 기대어 굳게 서서 결코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혜를 의지하여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15:4 · 본디새김

여기서 지혜의 역할은 먹이고 마시게 하는 것에서 지탱해 주는 것으로 달라집니다.

‘기댄다’는 표현은 자신의 힘만으로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의지할 곳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것을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으며 결코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문학의 이러한 표현은 지혜에 의지하는 삶의 안정성과 신뢰할 만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지혜는 그를 그의 이웃들보다 높일 것이고, 모임 한가운데서 그의 입을 열어 줄 것이다.집회서 15:5 · 본디새김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 능력을 자랑하며 말을 많이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그의 입을 열어 준다고 합니다.

이 구절의 배경에는 공동체 안에서 말하고 판단을 나누는 삶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공동체의 모임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와 자신의 말이 존중받는 것이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그런 능력을 재산이나 지위가 아니라 지혜와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앞의 집회서 13장과도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그곳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지혜로운 말을 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지혜가 사람의 입을 열어 주고 그를 높입니다.

지혜로운 말의 가치는 말하는 사람의 재산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 말에 담긴 지혜에서 나옵니다.

그는 기쁨을, 환희의 관을, 또 영원한 이름을 상속받을 것이다.집회서 15:6 · 본디새김

관은 명예와 승리의 상징이며, 이름은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특히 ‘영원한 이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간다는 뜻으로 곧바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문학의 문맥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명예와 기억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지혜자가 묘사하는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능력으로 명예를 획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혜를 통해 좋은 것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지혜자는 그 환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의 ‘모임’은 여기서는 후대의 기독교 교회를 직접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인 회중이나 집회를 뜻합니다.

지혜를 붙잡지 못하는 사람과 찬양할 수 없는 입

집회서 15:7–10 본문 →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코 지혜를 붙잡지 못할 것이고, 죄인들은 결코 지혜를 보지 못할 것이다.집회서 15:7 · 본디새김

1절에서는 율법을 붙드는 사람이 지혜를 붙잡는다고 했습니다.

같은 ‘붙잡다’라는 표현이 정반대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일까요? 8절을 보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혜는 교만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거짓말쟁이들은 결코 지혜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15:8 · 본디새김

문제의 중심은 지적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삶의 태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자신의 판단을 돌아볼 필요도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진실을 알더라도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합니다.

이 두 태도는 모두 지혜를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됩니다. 지혜를 배우려면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9절은 이 문제를 말과 찬양으로 옮깁니다.

죄인의 입에 있는 찬양은 주가 보낸 것이 아니므로 어울리지 않는다.집회서 15: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5절과 대조됩니다. 5절에서는 지혜가 사람의 입을 열어 주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입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가치는 같지 않습니다.

지혜자는 찬양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지보다, 그 찬양이 어떤 삶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죄를 계속 행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말과 삶이 서로 어긋난 상태입니다.

이사야 1:11–17에서도 하나님은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는 백성을 책망하시며 악행을 멈추고 정의를 배우라고 요구하십니다. 예배 행위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삶을 유지하면서 예배 행위로 그것을 가리려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찬양은 지혜 안에서 전해질 것이고, 주는 그 찬양이 잘 이루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15:10 · 본디새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은 단순히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과 관계됩니다.

본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오는 사람의 찬양이 거절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경계하는 것은 죄를 행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찬양입니다.

특히 다음 구절에서 지혜자는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만, 그 말을 통해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입은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의 입은 하나님의 이름을 변명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주 때문에 내가 떠나갔다」 —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

집회서 15:11–13 본문 →

「주 때문에 내가 떠나갔다」고 말하지 마라. 주가 미워한 일을 너는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집회서 15:1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떠나갔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장소를 떠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이 왜 그 길에서 벗어났는지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미워하시는 일을 인간에게 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그릇된 길로 이끌었다」고 말하지 마라. 주에게는 죄인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집회서 15:12 · 본디새김

‘주에게는 죄인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자신의 계획을 위해 필요로 하신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는 이유나,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주권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더 구체적인 주장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그 주장을 거부합니다.

주는 온갖 가증한 것을 미워했다. 그것은 주를 경외하는 이들에게도 사랑받지 않는다.집회서 15:13 · 본디새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과 미워하시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그분이 미워하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은 서로 모순됩니다.

하나님이 악을 원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으셨다면, 인간은 왜 악을 행하는가요? 지혜자는 그 대답을 인간이 처음 창조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의 창세기 2–3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선택하고 그 결과를 맞이하는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특히 창세기 3:12에서 아담은 자신에게 열매를 준 여자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그 여자를 자신과 함께 있게 하셨다는 사실까지 끌어들입니다. 집회서 15장이 창세기 3장의 이 장면을 직접 인용한다고 볼 근거는 없지만,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려는 모습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신약의 야고보서 1:13–15에서도 하나님이 사람을 악으로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죄는 인간의 욕망과 행동 속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집회서의 직접 인용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악행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다는 공통된 주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기셨다

집회서 15:14–15 본문 →

주가 처음부터 사람을 만들었고, 사람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겨 두었다.집회서 15:14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판단할 책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자신의 의향과 성향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숙고하고 판단하여 선택할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읽기입니다. 본디새김은 뒤따르는 계명과 선택의 문맥을 고려하여 두 번째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는 시대나 가정, 신체적인 조건,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상황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지혜자도 그러한 모든 조건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도덕적인 행동에 관한 책임입니다.

네가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신실함을 실천해라.집회서 15:15 · 본디새김

지혜자는 계명을 지키는 일이 인간의 의지와 관계된다고 말합니다. 계명은 무엇이 옳은지 가르치지만, 인간은 그 가르침에 응답해야 합니다.

명령형으로 읽으면 지혜자가 인간의 의지를 향해 직접 명령합니다. 부정사로 읽으면 인간이 신실하게 행동할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 계명을 지키고 신실하게 행동하는 일에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이 필요하다는 점을 공유합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그 가르침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조금 더 깊이

14절은 직역하면 ‘자기 숙고의 손에’ 또는 ‘자기 판단의 권한 아래’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디아불리온은 숙고나 판단,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고대 히브리어 전승에서는 인간의 성향이나 의향을 뜻하는 표현과 연결되는 읽기가 나타납니다. 15절 후반의 포이에사이는 명령형으로 읽으면 ‘행하여라’라는 뜻이 됩니다. 본디새김은 이를 따라 기꺼운 마음으로 신실함을 실천하라고 옮겼습니다. 반면 일부 그리스어 판본은 같은 철자에 악센트를 달리 붙인 포이에사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부정사로 읽히므로 신실하게 행동하는 일 역시 자신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대 본문의 원래 글자 배열이 달라서 생기는 차이라기보다, 문법적으로 어떻게 읽고 악센트를 부여하느냐에 따른 해석상의 차이입니다.

불과 물 — 어느 쪽으로 손을 뻗을 것인가

집회서 15:16–17 본문 →

주는 네 앞에 불과 물을 놓았다. 네가 원하는 쪽으로 네 손을 뻗을 것이다.집회서 15:16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두 가지 대상과 하나의 손이 등장합니다.

이 단순한 장면은 인간의 선택을 눈에 보이게 만듭니다. 사람은 어느 방향으로 손을 뻗을지 결정합니다. 그러나 손을 뻗는 행위가 실제로 무엇을 가져올지는 그 선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고, 사람이 어느 것을 택하든 그것이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집회서 15:1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신명기 30:15–20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과 좋은 것, 죽음과 나쁜 것을 놓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선택하라고 권합니다.

다만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하여 약속의 땅에서 생명을 누릴 것인가가 중요한 문맥을 이룹니다. 집회서에서는 그 선택의 책임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도덕적 삶으로 확대되어 제시됩니다. 두 본문은 계명과 선택, 생명과 죽음을 긴밀하게 연결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여기서 ‘생명과 죽음’을 단순히 육체적으로 오래 사느냐 일찍 죽느냐 하는 문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의 언약적 배경에서는 생명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복된 삶과 연결됩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남으로써 맞게 되는 파멸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올바른 선택을 하면 언제나 즉시 번영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언제나 즉시 죽는다는 기계적인 인과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집회서는 다른 곳에서 의로운 사람에게도 고난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선택한 길에는 실제적인 결과가 따른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앞에 선택의 길을 놓으셨지만, 인간을 대신하여 그 손을 움직이셨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불과 물을 놓으시는 행동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 가운데 어느 쪽으로 손을 뻗는지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행동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흔히 불을 악으로, 물을 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은 태우고 파괴할 수 있으며, 물은 생명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런 해석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불이 반드시 악이고 물이 반드시 선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불과 물은 각각 유익하게도 위험하게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확실하게 강조되는 것은 두 대상의 구체적인 도덕적 의미보다, 서로 다른 선택지가 인간 앞에 놓여 있고 인간이 그 가운데 하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지만 죄를 명령하지 않으신다

집회서 15:18–20 본문 →

17절에서 인간의 선택이 강조되었다면, 18절부터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등장합니다.

주의 지혜가 크기 때문이다. 주는 권세가 강하고 모든 것을 본다.집회서 15:18 · 본디새김

지혜자의 관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선택을 미리 아시는 방식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선택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에게서 감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눈은 그를 경외하는 이들을 향하고, 그는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알 것이다.집회서 15:19 · 본디새김

하나님의 눈이 경외하는 사람들을 향한다는 말은 그들을 향한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행동을 아신다는 말은 인간의 행위가 그분의 판단 밖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자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근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아시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는 방향으로 논리가 전개됩니다.

주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행하라고 명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죄를 짓도록 허락하지 않았다.집회서 15:20 · 본디새김

인간은 자신의 악한 행동을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악을 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더라도, 그것을 해도 좋다고 인정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14–17절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구절의 허락은 악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그 악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승인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선택이 하나님의 지혜와 판단 앞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집회서 15장의 메시지를 후대의 자유의지 논쟁이나 예정론의 한쪽 입장으로 곧바로 옮겨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장은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지식이 어떤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손을 뻗기 전에

집회서 15:1–20 본문 →

인간은 하나님께 지혜를 받아 살아가지만, 그 지혜를 따라 살아갈 책임까지 하나님께 떠넘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고, 인간의 책임은 그 길을 실제로 선택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제 사람의 손이 움직일 차례입니다.

불과 물이 그의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어느 쪽으로든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을 뻗은 뒤에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선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죄를 명령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집회서 15장은 사람이 선택을 마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생명과 죽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에서 끝납니다.

무엇을 택할지는 아직 그의 앞에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