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들은 말과 사람을 판단하는 지혜
집회서 19장은 한 가지 작은 습관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작은 말 한마디를 가볍게 여깁니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한 번 옮기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 관한 소문을 듣고 조금 의심하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 슬쩍 이야기하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런데 스승은 바로 그러한 작은 행동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너무 쉽게 믿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속임수를 품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교묘하게 꾸밉니다.
첫 번째 사람은 판단력이 부족해서 속고, 두 번째 사람은 판단력을 악용해서 남을 속입니다. 이 둘 사이에 스승이 가르치는 지혜가 있습니다. 들은 말을 함부로 믿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지 않는 지혜, 잘못을 바로잡되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지혜, 겉모습을 관찰하되 그것만으로 사람을 단정하지 않는 지혜입니다.
집회서 19장이 묻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믿고 어떻게 판단하며 그 판단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느냐입니다.
조금씩 무너지는 삶 — 절제하지 못한 욕망의 끝
술에 취하는 일꾼은 부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적은 것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조금씩 무너질 것이다.집회서 19:1 · 본디새김
앞 장은 돈주머니가 비었는데도 빚을 내어 술판을 벌이는 사람으로 끝났습니다. 19장은 그 행동이 반복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보여 주며 시작합니다.
스승은 큰 재난만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작은 낭비와 방심이 반복되는 일을 경계합니다. 일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부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을 지속적으로 낭비한다면, 일의 결실이 삶을 지탱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적은 것을 하찮게 여긴다’는 말은 적은 재산을 가진 사람을 낮추어 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몫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 태도입니다.
작은 것은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을 잃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포도주와 여자들은 깨달음 있는 이들을 빗나가게 할 것이며, 창녀들에게 달라붙는 사람은 더욱 무모해질 것이다.집회서 19:2 · 본디새김
이 문장은 고대 남성 독자를 주된 대상으로 삼은 지혜문학의 언어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여자들’을 모든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뒤이어 창녀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언급되는 점에서, 스승은 성적 욕망과 방탕한 관계에 빠져 분별력을 잃는 남성의 행동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욕망에 빠지는 사람을 처음부터 깨달음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깨달음 있는 사람도 빗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아는 능력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절제하는 능력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그 이해와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이 판단을 압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썩음과 구더기들이 그를 물려받을 것이며, 무모한 사람의 목숨은 끊어질 것이다.집회서 19:3 · 본디새김
이는 죽음과 부패를 가리키는 강렬한 풍자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얻고 누리는 데 몰두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조차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승이 모든 음주나 성적 잘못에 반드시 조기 사망이라는 결과가 따른다고 의학적 예측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모한 삶의 파괴성을 극단적인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을 잃는 이야기였지만, 끝에서는 생명 자체를 잃는 이야기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다음 절부터는 행동보다 판단의 문제가 전면에 나타납니다.
너무 쉽게 믿는 마음은 왜 위험한가?
성급히 믿는 사람은 마음이 가볍고, 죄짓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집회서 19:4 · 본디새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곧바로 따라갑니다. 성급히 믿는 사람은 들은 것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고 곧바로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행동과 판단 사이에 필요한 시간을 두지 않습니다.
들었다고 곧바로 사실이라고 여기고, 누군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믿어 버리는 태도입니다. 스승이 비판하는 것은 사람을 신뢰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신뢰와 판단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죄는 다른 사람에게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닙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 역시 자신의 삶을 해칩니다. 남의 이야기를 무책임하게 퍼뜨리면 상대방의 명예와 관계를 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도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왜 책망받을 일인가?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은 책망받을 것이고,집회서 19:5 · 본디새김
즐거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집회서의 다른 곳에서는 적절한 기쁨과 즐거움을 긍정적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본디새김이 따른 그리스어 문면은 호 에우프라이노메노스(εὐφραίνω) 카르디아로,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다른 본문 읽기에서는 즐거움의 대상을 ‘악’으로 이해하여 악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습니다. 그 경우 문장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악한 이야기를 즐기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이 됩니다.
첫 번째 읽기는 앞의 방탕한 즐거움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읽기는 뒤에 나오는 수다와 소문에 관한 경고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어느 쪽이든 단순히 마음이 기쁜 사람은 책망받아야 한다는 일반 원칙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수다를 싫어하는 사람은 해를 덜 입는다.집회서 19:6 · 본디새김
여기서 수다는 일상의 모든 대화나 친근한 잡담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문맥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무분별하게 옮기고 퍼뜨리는 행동이 중심입니다.
스승은 이제 인간관계를 무너뜨리는 중요한 통로가 입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들은 말을 네 안에서 죽게 하여라
들은 말을 결코 다시 옮기지 마라. 그러면 네게 아무런 손해도 없을 것이다.집회서 19:7 · 본디새김
스승은 무언가를 들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분리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가에게 옮기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그 이야기가 흥미롭거나 놀랍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퍼뜨리지 않을 책임이 있습니다. 잘못된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을 책임이 있습니다.
친구에게도 원수에게도 이야기하지 마라. 입을 다무는 것이 네게 죄가 되지 않는다면, 드러내지 마라.집회서 19:8 · 본디새김
사람은 적대적인 상대의 잘못을 퍼뜨리기 쉽습니다. 상대방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에게도 무분별하게 이야기를 옮길 수 있습니다. 친밀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비밀까지 공유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실은 드러내지 않는 편이 옳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실은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피해를 입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도 숨기거나, 부당한 일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외면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현대적 사례들을 직접 열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침묵 자체가 죄가 될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모든 사실에 대한 절대적인 비밀 유지 규칙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말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이야기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퍼뜨릴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비밀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신뢰를 잃는다
그는 네 말을 듣고 너를 경계했으며, 때가 되면 너를 미워할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19:9 · 본디새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야기의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전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비밀을 쉽게 말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 사람이 자기 이야기 역시 다른 곳에서 퍼뜨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들었느냐? 그 말이 너와 함께 죽게 하여라. 안심하여라. 그 말이 결코 너를 터뜨리지는 않을 것이다.집회서 19:10 · 본디새김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남에게 말하지 못하면 답답해합니다. 마치 자신의 몸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어 터질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소문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하고, 그것이 자신의 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표현입니다.
말을 품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의 고통
어리석은 자는 말 때문에 산고를 겪을 것이다. 아이를 낳는 여자가 아기 때문에 그러하듯이.집회서 19:11 · 본디새김
무언가를 들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 됩니다.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나서야 비로소 편해질 것처럼 느낍니다.
넓적다리 살에 박힌 화살처럼, 어리석은 자의 배 속에 든 말도 그러하다.집회서 19:12 · 본디새김
11절의 출산과 12절의 화살은 성격이 다른 이미지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이미지 모두 몸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의 10절을 기억하면 이 비유의 풍자가 보입니다.
이 단락에서 스승이 가르치는 절제는 단순히 말을 적게 하는 습관이 아닙니다. 내가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충동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실제로 잘못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가르침이 잘못을 덮어 두라는 뜻일까요?
조금 더 깊이
신약의 야고보서 3:1–12 역시 혀가 작지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이는 집회서를 직접 인용한다기보다 언어의 책임이라는 공통된 지혜의 주제로 연결됩니다.
비난하기 전에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라
친구에게 따져 물어라. 그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무슨 일을 했다면, 다시는 하지 않도록 하여라.집회서 19:13 · 본디새김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이미 사실로 받아들이고 생각을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했을까요?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스승은 그보다 앞선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했나요?
세 번 반복되는 명령
13–15절에서 ‘따져 물어라’는 명령이 세 번 반복됩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상대방에게 공격적으로 추궁하라는 뜻으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잘못이 실제로 있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면 바로잡도록 하라는 일련의 행동을 포함합니다.
13절은 어떤 행동을 했다는 소문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므로 확인해야 합니다. 14절은 어떤 말을 했다는 소문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므로 확인해야 합니다.
친구에게 따져 물어라. 중상이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모든 말을 다 믿지는 마라.집회서 19:15 · 본디새김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전달되는 과정에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일부만 전해질 수도 있고, 상황이 빠진 채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하지 않은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에게는 확인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3:1의 거짓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19:15 역시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어떤 죄나 잘못을 확정하지 못하도록 규정합니다.
물론 집회서 19장이 공식 재판 절차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말을 근거로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서는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잘못을 확인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3–14절에는 확인 이후의 행동도 들어 있습니다. 잘못을 했다면 다시 하지 않도록 하고, 잘못된 말을 했다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확인했다면, 그 사실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이 바로잡히고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지점에서 레위기 19:17–18이 떠오릅니다. 그곳에서는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반드시 타일러야 하며, 원수를 갚거나 원한을 품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반드시 반대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잘못이 실제로 있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말실수와 고의적인 악을 구별하라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도 말실수를 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혀로 죄짓지 않은 사람이 누구냐?집회서 19:16 · 본디새김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말실수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실수도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말이 나왔다고 해서 언제나 의도적인 모욕이나 악의가 있었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네 이웃을 위협하기 전에 그에게 따져 물어라. 지극히 높은 이의 율법에 자리를 내주어라.집회서 19:17 · 본디새김
위협은 상대방을 두렵게 만들고 자신의 힘을 내세우는 행동입니다. 반면 따져 묻는 일에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스승은 자신의 분노와 판단이 모든 자리를 차지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율법이 작용할 자리를 마련하라고 합니다.
진실을 확인하는 일은 사랑의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판단으로 이웃을 해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이제 스승은 왜 이러한 태도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인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잠언 18:13은 사정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것이 어리석음과 수치라고 말합니다. 잠언 18:17에서는 먼저 자기 사정을 말하는 사람이 옳아 보이지만 다른 사람이 와서 그를 조사한다고 합니다. 이는 집회서 19:13–17의 가르침과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영리함과 지혜는 무엇이 다른가?
모든 지혜는 주를 경외함이며, 모든 지혜에는 율법을 행함이 있다.집회서 19:20 · 본디새김
집회서에서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이 절에서는 주를 경외하는 것과 율법을 행하는 것이 나란히 놓입니다. 스승은 율법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에는 율법을 실제로 행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악을 잘 아는 사람도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가?
악에 대한 지식은 지혜가 아니고, 죄인들의 궁리가 슬기가 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집회서 19:22 · 본디새김
스승은 지식과 지혜를 구별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매우 잘 파악합니다. 상황을 빠르게 읽고,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데 능숙할 수 있습니다.
악한 일을 치밀하게 계획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혜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 능력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악함이 있는데, 그것은 역겨운 것이다. 지혜가 모자라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집회서 19:23 · 본디새김
깨달음이 부족해도 경외하는 사람이 슬기가 넘쳐도 율법을 어기는 사람보다 낫다.집회서 19:24 · 본디새김
여기서 스승은 두 가지 부족함을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깨달음의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올바름의 부족입니다.
깨달음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판단이 느리거나 지식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슬기가 풍부하면서 율법을 어기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과 지혜를 악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스승은 능력의 부족보다 능력의 악용을 더 심각하게 봅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빠르게 판단하는 사람이 반드시 공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의 언변과 판단력이 실제로 진실과 이웃을 위해 사용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공정한 판결조차 왜곡할 수 있는 영리함
치밀한 간교함이 있는데, 그것은 의롭지 않다. 판결을 드러내려고 왜곡하는 사람도 있다.집회서 19:25 · 본디새김
어떤 계획은 매우 정교할 수 있습니다. 논리가 빈틈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악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스승은 그것을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뒤의 ‘판결을 드러내려고 왜곡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처럼 목적 표현으로 읽으면, 어떤 판결을 드러내거나 이끌어 내기 위해 사실이나 상황을 왜곡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반면 호의나 은혜라는 명사로 읽으면, 판결을 얻기 위해 호의를 왜곡하거나 부당하게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초점은 부정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는 원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절은 단순히 거짓말을 잘하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판단과 판결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도 간교함이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사실만 골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공정한 판단처럼 보이게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목적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원하는 결과를 얻는 능력만이 아니라, 그 결과를 얻는 과정까지 올바르게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으로 악을 꾸미는 사람
25절까지 스승은 간교함을 일반적인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간교함을 가진 한 사람의 모습을 그립니다.
어두운 낯빛으로 몸을 구부린 채 악을 꾸미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속은 속임수로 가득하다.집회서 19:26 · 본디새김
본문이 이 사람을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실제로 악을 꾸미고 속임수를 품고 있다고 명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얼굴을 숙이고 못 들은 척하다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네게 선수를 칠 것이다.집회서 19:27 · 본디새김
앞에서 스승은 들은 말을 함부로 퍼뜨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다른 사람의 비밀을 지키고 잘못된 소문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반면 여기서 침묵은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한 행동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비슷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죄를 짓지 못하는 것과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다르다
힘이 부족하여 죄짓지 못한다 해도, 기회를 찾으면 악을 행할 것이다.집회서 19:28 · 본디새김
힘이 없어서 악을 행하지 못하는 것과 악을 행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이 없어서 조용합니다. 그러나 힘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남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의 악함은 아직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또 하나의 위험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하나요? 겉으로 겸손해 보이는 사람도 악할 수 있다면, 사람의 모습을 보고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26절의 ‘어두운 낯빛’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멜라니아(μελανία)는 검거나 어두운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를 실제 낯빛의 어두움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침울한 태도의 묘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옷차림과 웃음과 걸음걸이로 사람을 알 수 있을까?
사람은 겉모습으로 알아볼 수 있고, 지각 있는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면 알아볼 수 있다.집회서 19:29 · 본디새김
사람의 옷차림과 이를 드러내는 웃음, 그리고 걸음걸이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준다.집회서 19:30 · 본디새김
앞에서 스승은 성급히 믿지 말고, 소문을 확인하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확정하기 전에 직접 물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앞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나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성급한 판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겉모습은 아무 의미가 없을까?
27절에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을 악용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9절에서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스승은 사람의 행동과 태도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옷차림은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웃음은 감정이나 태도의 한 단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걸음걸이 역시 몸에 배어 있는 습관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고대 지혜문학에서는 이처럼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성품을 연결하여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은 겉모습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완벽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입증하지 않습니다. 또한 특정한 얼굴이나 몸짓, 옷차림이 반드시 선하거나 악하다는 기준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앞의 26–28절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제 의도가 다를 수 있음을 이미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구절들을 모든 사람의 겉모습으로 도덕성을 정확하게 판정할 수 있다는 규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다 안다는 것은 다르다
사람의 외적인 태도는 그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를 근거로 그의 죄와 의도를 확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말을 피하거나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가 불편함을 느끼거나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감추려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외적인 행동 하나만으로 그 이유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해석상의 긴장은 남습니다.
29–30절은 실제로 외적인 모습에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단지 외모 판단의 위험성만을 말하고 있다고 바꾸어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그는 인간의 태도와 습관이 바깥으로 드러난다는 고대 지혜의 통찰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앞 단락들을 함께 읽으면, 그러한 관찰 역시 충분한 확인과 분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은 독자에게 다른 사람을 잘 관찰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관찰이 성급한 확신이나 부당한 정죄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남겨 두어야 할 자리
집회서의 대답은 모든 사람을 의심하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곧바로 옮기지 않고, 잘못을 의심할 때는 사실을 확인하며, 상대방의 행동을 바로잡아야 할 때는 하나님의 율법에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집회서 19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옷차림이 보이고, 웃는 모습이 보이며, 걸음걸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고, 불편하거나 수상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을 처음부터 읽어 온 독자는 그 순간 쉽게 판단을 끝내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눈에 들어온 모습을 무시하지 않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은 진실까지 보았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확신하기 전에, 그 사람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지 않은 일이라면 부당한 비난을 막을 수 있고, 실제로 잘못했다면 다시는 그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 작은 순서의 차이가 한 사람의 명예를 지키고, 무너질 뻔한 관계를 붙들 수 있습니다.
집회서 19장은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설 자리를 남겨 두라고 가르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