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23장 · 지혜의 시작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미루는 사람
집회서 18장에는 예상과 반대되는 결론이 등장합니다.
스승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인간의 삶은 지극히 짧다고 말합니다. 바다의 물 한 방울이나 모래 한 알처럼, 인간의 세월은 하나님의 영원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인간의 무가치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한 이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승은 바로 그 연약함을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설명하는 이유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이 생겨납니다.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짧은 삶을 사는 인간은 정작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룹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나중으로 넘깁니다. 반면 순간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에는 성급하게 달려듭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대조됩니다.
이 대조를 따라 읽으면 처음의 장엄한 창조 찬양과 마지막의 소박한 술자리 경고가 왜 한 장에 놓였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알아낸 줄 알았을 때 다시 시작한다
영원히 사는 이는 모든 것을 함께 창조했다.집회서 18: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승은 처음부터 죽음에 제한받지 않는 창조주를 바라봅니다. 강조점은 만물 전체가 한 창조주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주만이 의롭게 될 것이다.집회서 18:2 · 본디새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이 인정되거나 드러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정당성을 인간이 최종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뒤따르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일들을 다 알릴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다. 누가 그의 위대한 일들을 헤아리겠느냐?집회서 18:4 · 본디새김
누가 그의 위엄이 지닌 힘을 다 헤아리겠느냐? 또 누가 더 나아가 그의 자비를 낱낱이 이야기하겠느냐?집회서 18:5 · 본디새김
하나님의 능력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은 쉽게 이해됩니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현상을 알지 못하고, 창조의 모든 신비를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스승은 하나님의 자비 역시 낱낱이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은 하나님의 힘만이 아닙니다.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우신지도 인간의 계산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6절의 ‘줄일 수도 보탤 수도 없다’는 말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파악하고 평가할 수 없다는 문맥에서 읽어야 합니다. 스승의 관심은 인간 지식의 한계에 있습니다.
사람은 끝마쳤을 때 비로소 시작하고, 그쳤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집회서 18:7 · 본디새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헤아리고 그 놀라운 일들을 설명하는 문제가 반복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충분히 알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모든 설명을 끝냈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아직 밝혀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멈춰 서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지 깨닫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이것은 지식을 추구하지 말라는 경고가 아닙니다. 스승 자신이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발견한다는 통찰에 가깝습니다.
욥기 38–41장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던지시는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 세계의 여러 일을 물으시지만, 욥은 그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욥기 42:3에서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을 말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사람은 무엇이며 그의 쓰임은 무엇이냐? 그의 선은 무엇이며 그의 악은 무엇이냐?집회서 18:8 · 본디새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이 인간에게 선하고 악한가까지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이후의 모든 생활 지침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여전히 선과 악을 분별하고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스승은 그 책임을 설명하기 전에 인간의 시간을 헤아려 보게 합니다.
한 방울의 물, 한 알의 모래 —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이유
사람이 사는 날의 수는 많아야 백 년이다.집회서 18:9 · 본디새김
긴 인생의 대표적인 수치를 들어 인간의 유한함을 나타내는 지혜문학적 표현입니다. 시편 90:10 역시 사람의 수명을 칠십 년,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고 말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숫자를 사용하지만, 인간의 생애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사는 짧은 세월은 영원의 하루에 견주면 바다에서 나온 물 한 방울과 모래 한 알과 같다.집회서 18:10 · 본디새김
한 방울의 물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바다 전체와 비교하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습니다. 모래 한 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로는 분명한 존재지만, 헤아릴 수 없는 모래 전체와 나란히 놓으면 얼마나 작은지 드러납니다.
‘영원의 하루’ 역시 실제로 영원이 하루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일상적인 시간의 언어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시편 90:4의 천 년이 하나님 앞에서 지나간 어제와 같다는 말씀과 가까운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통해 스승이 도달하는 결론은 의외입니다.
그 때문에 주는 그들에게 오래 참았고, 그들 위에 자신의 자비를 쏟았다.집회서 18:11 · 본디새김
‘그 때문에’라는 연결어가 인간의 유한함과 하나님의 자비를 인과관계로 묶습니다. 인간의 삶이 짧고 연약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에, 그분은 오래 참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단지 심판을 유예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자비를 적극적으로 베푸십니다.
그는 그들의 파멸이 참혹함을 보고 알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베푸는 속죄를 늘렸다.집회서 18:12 · 본디새김
이 절은 그 속죄가 어떤 의식이나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이 용서와 자비를 풍성히 베푸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시편 103:13–14는 아버지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듯 하나님이 자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이 티끌임을 기억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목자의 손길과 같다
사람의 자비는 자기 이웃에게 미치지만, 주의 자비는 모든 육신에게 미친다. 주는 꾸짖고 훈계하고 가르치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돌이키듯 돌아서게 한다.집회서 18:13 · 본디새김
사람은 대개 자신이 알고 있거나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관심에는 범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육신’에게 미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범위를 드러냅니다.
뜻밖에도 하나님의 자비는 무조건 부드러운 태도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지적하시고 사람의 행동을 바로잡으십니다.
그런데 스승은 그 모습을 목자에 비유합니다.
길을 잃어 가는 양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목자의 자비가 아닙니다. 양이 위험한 길로 들어섰다면 돌아오게 하는 것이 돌봄입니다.
이사야 40:11은 하나님이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양들을 품으신다고 말합니다. 에스겔 34:11–16에서는 하나님이 흩어진 양을 찾아 모으시고, 상한 양을 싸매시며, 병든 양을 강하게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집회서가 보여 주는 목자의 모습에도 그러한 돌봄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길을 돌이키게 하는 행동이 강조됩니다.
그는 교훈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자신의 법도로 서둘러 나아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긴다.집회서 18:14 · 본디새김
13절은 자비의 넓은 범위를 말합니다. 14절은 그 자비로운 가르침에 사람이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에게 고쳐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길만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제 스승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사람에게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좋은 것을 주면서 상대방을 아프게 할 수 있다
얘야, 선을 베풀면서 비난을 보태지 말고, 무엇을 주든 말로 슬픔을 더하지 마라.집회서 18:15 · 본디새김
스승은 이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때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면서 그 사람의 부족함을 들추거나, 도움받는 처지를 부끄럽게 만들거나, 자신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끊임없이 강조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도움은 분명히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은 모욕과 슬픔까지 함께 받아야 합니다.
스승은 이러한 행동을 온전한 자비라고 보지 않습니다.
선행의 가치는 준 물건의 크기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경험을 남기는지도 중요합니다.
이슬 한 방울이 더위를 식히듯
이슬이 타는 더위를 가라앉히지 않겠느냐? 그처럼 말이 선물보다 낫다.집회서 18:16 · 본디새김
한여름의 타는 더위와 비교하면 아주 작은 물기입니다. 그러나 메마르고 뜨거워진 곳에 맺히는 이슬은 시원함을 가져옵니다. 스승은 친절한 말을 바로 그 이슬에 비유합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더 많은 물질만은 아닙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도록 해 주는 말,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해 주는 말이 때로는 큰 선물보다 깊은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보아라, 말은 좋은 선물보다 낫지 않으냐?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이 둘이 다 있다.집회서 18:17 · 본디새김
따뜻한 말과 실제적인 도움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스승이 말의 중요성을 높이는 것은 선물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물이 정말로 선한 행동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13절에 등장한 하나님의 자비와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꾸짖고 가르치시며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작용합니다.
사람의 자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주느냐만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으로 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색한 사람의 선물은 눈을 상하게 한다
어리석은 자는 매정하게 모욕할 것이고, 인색한 자의 선물은 눈을 짓무르게 한다.집회서 18: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말이 이슬처럼 더위를 식혔습니다. 이번에는 선물이 오히려 눈을 상하게 합니다.
주는 행동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인색함과 모욕적인 태도를 그대로 가진 채 선물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비에는 물질적인 나눔과 함께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제 스승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문제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간에 관한 표현이 거듭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이 구절에서 누구의 눈이 상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엑테케이 옵탈무스는 눈을 녹이거나 쇠약하게 만든다는 강렬한 표현인데, 그 눈이 누구의 것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의 눈이라면, 도움을 받으면서 겪는 수치와 슬픔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물을 주는 사람의 눈이라면, 인색한 사람이 자기 재물이 줄어드는 것을 몹시 아까워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판을 기다리지 말고, 심판 전에 자신을 살펴라
말하기 전에 배우고, 병들기 전에 몸을 돌보아라.집회서 18:19 · 본디새김
공통점은 순서에 있습니다.
스승은 일이 잘못된 뒤에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를 먼저 가르치지 않습니다. 잘못되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이 원리가 곧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심판 전에 자신을 살펴라. 그러면 살핌을 받는 때에 속죄를 얻을 것이다.집회서 18:20 · 본디새김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 때 비로소 그것을 인정합니다. 때로는 심각한 결과가 나타난 뒤에야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초래했는지 깨닫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그 순간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직 결과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 아직 돌아설 수 있을 때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합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시는 때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보다, 지금 자신을 돌아보라는 데 있습니다.
병들기 전에 자신을 낮추고, 죄를 지었을 때에는 돌아서는 모습을 보여라.집회서 18:21 · 본디새김
자신을 낮추는 일은 재난이나 질병이 닥친 뒤에만 하는 행동이어서는 안 됩니다. 반면 실제로 죄를 지었다면 그때는 돌아서는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스승은 모든 일을 무조건 미리 처리하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일에 알맞은 때가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서원을 제때 갚는 것과 성급하게 서원하지 않는 것
서원한 것을 제때 갚는 데 방해받지 말고, 의롭게 되는 일을 죽을 때까지 미루지 마라.집회서 18:22 · 본디새김
서원하기 전에 자신을 준비하고, 주를 시험하는 사람처럼 되지 마라.집회서 18:23 · 본디새김
성급하게 약속해서도 안 되고, 일단 약속한 것을 무책임하게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드리는 자발적인 약속입니다. 신명기 23:21–23에서도 하나님께 서원했다면 지체하지 말고 갚아야 하지만, 서원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전도서 5:4–5 역시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약속의 양이 아니라 약속의 진실성입니다.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약속할수록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실제로 지킬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종교적인 열심만으로 약속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가볍게 대하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주를 시험하는 사람처럼 되지 마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약속하면서 그 약속을 자신이 지키지 않아도 무방할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절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한 선언이고, 22절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일을 미루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후자의 말씀을 선행을 쌓아 의로움을 구매하라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스승은 이미 하나님이 속죄와 자비를 베푸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자비를 의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은 계속 연기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신중해야 할 일은 시작하기 전에 헤아리고, 바로잡아야 할 일은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 관리가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에서 ‘살핌을 받는 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엔 호라 에피스코페스는 방문이나 감독, 살핌의 때를 뜻하며 문맥상 하나님의 심판 또는 점검의 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죽음 직후나 세상 마지막의 특정 심판 시점으로 한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배부른 날에 굶주림을 기억할 수 있는가?
죽음의 날에 닥칠 진노를 기억하고, 얼굴을 돌릴 때 닥칠 보복의 때도 기억하여라.집회서 18:24 · 본디새김
여기서 ‘얼굴을 돌릴 때’라는 표현은 누구의 행동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는 때로 읽으면 하나님의 호의나 보호가 거두어지는 심판의 순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죽음에 이른 인간이 얼굴을 돌리는 때로 읽으면 생명이 끝나는 순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그 행동의 주체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전체 문맥은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닥치기 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권면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스승은 죽음과 심판이라는 엄숙한 주제를 아주 일상적인 경험으로 옮깁니다.
배부른 때에 굶주릴 때를 기억하고, 부유한 날에 가난과 궁핍을 기억하여라.집회서 18:25 · 본디새김
스승은 현재의 상태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배부르면 굶주림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풍족한 삶이 계속되면 가난은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처럼 보입니다. 현재 경험하지 않는 현실까지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오늘의 행동을 바꾼다
24–25절에서는 ‘기억하여라’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눈앞에 있는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건강하지만 병을 생각하고, 지금 부유하지만 가난을 생각하며, 지금 살아 있지만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끊임없이 불행을 상상하면서 불안하게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지금의 삶을 더 올바르게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배부른 사람이 굶주림을 기억한다면, 굶주리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부유한 사람이 궁핍을 기억한다면,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단순히 게으름의 결과로만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는 25절에 직접 명령된 자선 행위라기보다, 앞에서 말한 자비로운 삶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적용입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도 때는 바뀌고, 주 앞에서는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다.집회서 18:26 · 본디새김
여기서 ‘때’는 단순히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형편을 포함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건강했던 사람이 병들 수 있고, 안정적이던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상황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하는 일을 하나님은 자신의 다스림 가운데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인간의 예상이나 시간표에 매이지 않는다는 강조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지금 자신이 누리는 형편을 영원한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일에 조심할 것이고, 죄의 날에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집회서 18:27 · 본디새김
‘죄의 날’에는 두 가지 읽기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죄의 유혹이 강하게 밀려오는 때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 지혜로운 사람은 유혹에 휩쓸려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이나 보응의 때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 어려운 때에도 또 다른 잘못을 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스어의 ‘죄들의 날들’이라는 표현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는 이 단락의 중심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살펴야 합니다.
미래를 모두 예측하는 것이 지혜는 아닙니다. 미래를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의 행동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제 스승은 그러한 지혜를 배운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는지 말합니다.
지혜로운 말은 비처럼 내리지만, 욕망은 사람을 끌고 간다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지혜를 알았고, 지혜를 찾아낸 이를 칭찬할 것이다.집회서 18:2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스승이 독자에게 직접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지혜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그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혜는 혼자서만 소유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지혜를 인정하고,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말을 이해하는 이들은 자신들도 지혜로워졌고, 정확한 격언들을 비처럼 쏟아 냈다.집회서 18:29 · 본디새김
앞의 16절에서는 선한 말이 이슬과 같았습니다. 이제 지혜로운 격언들은 비처럼 쏟아집니다. 이슬은 뜨거운 더위를 식힙니다. 비는 마른 땅을 적십니다.
적절한 말은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정확한 가르침은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한다는 사실만으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이 옳은지 헤아려야 합니다.
여기서 다시 19절의 ‘말하기 전에 배우라’는 명령이 떠오릅니다. 먼저 배우고, 이해한 다음,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0절에서 말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네 욕망을 뒤따라가지 말고, 네 욕구를 자제하여라.집회서 18:30 · 본디새김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과 실제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충분히 배우고도 자기 욕망에 끌려갈 수 있습니다. 미래의 위험을 알아도 현재의 즐거움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단순한 정보나 언어 능력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욕망을 ‘뒤따라가지’ 말라는 표현
이것은 욕망을 인간 바깥에 있는 어떤 주인처럼 그려 냅니다. 욕망이 앞서가고 인간은 그 뒤를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스승이 경계하는 것은 욕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배고픔이나 휴식,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모두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욕구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네 마음에 욕망의 만족을 안겨 주면, 그 마음이 너를 네 원수들의 비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다.집회서 18:31 · 본디새김
사람은 욕망을 만족시키면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는 사람이 결국 그 마음 때문에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욕망이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허용하면,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장기적인 안전이나 책임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돈주머니는 비었는데, 술자리는 계속된다
크게 호사를 누리며 즐거워하지 말고, 그 비용을 나누어 내는 데 얽매이지 마라.집회서 18:32 · 본디새김
네 돈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빚을 내어 술판을 벌여 가난해지지 마라.집회서 18:33 · 본디새김
장엄한 창조 찬양으로 시작된 장이 아주 구체적인 술자리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자리에 참여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포기하지 못하고 돈을 빌려서라도 참여하려 합니다.
즐거움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에 매이는 것이 문제다
본문은 잔치에 참석하거나 음식을 즐기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집회서의 다른 곳에서는 기쁨을 누리는 삶도 긍정적으로 다룹니다. 집회서 14:11–14는 주어진 좋은 것들을 누릴 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18:32–33을 모든 즐거움과 소비를 경계하는 금욕주의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즐거움이 자신의 형편과 판단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합니다. 좋은 음식과 술을 누리고 싶은 욕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에 무조건 끌려가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비용까지 떠안게 됩니다.
25절의 「배부른 때에 굶주릴 때를 기억하고, 부유한 날에 가난과 궁핍을 기억하여라」라는 말씀은 단순한 미래 대비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의 즐거움이 내일의 궁핍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경고로도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과 자신을 위해 빌리는 돈
앞에서는 남에게 주는 선물에 인색함과 모욕을 보태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감당하지 못할 돈까지 쓰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에는 그 사람의 존엄을 지켜야 합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쓸 때에는 자신의 형편과 책임을 헤아려야 합니다. 둘 다 돈의 액수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혼자서 누리는 즐거움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자리에서는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돈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싫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심리적 동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 비용을 부담하는 모임과 빚을 내어 술판을 벌이는 장면은, 사회적 즐거움이 경제적인 부담으로 바뀔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이것을 함께 먹고 마시는 모임에서 참가자들이 비용을 나누어 부담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임이 어떤 규모였는지, 특정한 축제나 정기적인 친목 행사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빈 돈주머니 앞에서
집회서 18장은 마지막까지 인간의 일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스승은 바다의 물 한 방울과 모래 한 알을 통해 인간의 짧은 생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텅 빈 돈주머니 하나를 보여 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그 자비를 아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손에 빈 돈주머니가 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형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즐거운 술자리에 참여하고 싶어 합니다. 지금 돈이 없으니 빚을 내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스승의 모든 가르침이 실제적인 문제가 됩니다.
사람은 앞날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돈주머니가 비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영원의 크기는 헤아릴 수 없지만, 오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지금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승은 그 사람을 조롱하지 않습니다. 더 큰 재앙이 닥치기 전에 자신의 형편을 보라고 합니다.
영원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이라도, 오늘 자신이 걸어가는 길은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