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33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하나님의 손과 인간의 손
집회서 33장에는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두 장면이 있습니다.
한 장면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로 등장하십니다. 사람은 자신을 만든 분의 손에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시작하지 않았고, 삶의 모든 조건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전혀 다른 손이 등장합니다.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의 손, 자녀들에게 유산을 넘겨주는 사람의 손, 종에게 일을 시키고 차꼬를 채우는 주인의 손입니다.
여기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는 모든 사람이 피조물이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 소유물처럼 다룹니다.
집회서 33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동시에 인간이 행사하는 권한을 다룹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과 인간의 권력 행사가 언제나 정당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폭풍 속의 배와 돌아가는 수레바퀴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는 약속의 의미
주를 경외하는 이에게는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며, 시험 가운데서도 주는 그를 다시 건져 낼 것이다.집회서 33:1 · 본디새김
첫 문장만 읽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이 그런 이해를 어렵게 만듭니다.
저자는 주를 경외하는 사람이 시험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이 다시 건져 내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물론 이 말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이 생전에 모든 재앙에서 반드시 구조된다는 무조건적인 보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집회서 자체도 시련을 인간의 삶에서 제거하지 않습니다. 집회서 2:1–6은 주를 섬기려는 사람에게 시련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도 흔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무엇을 의지하느냐입니다.
율법을 따르는 척하는 사람은 왜 폭풍 속의 배와 같은가
지혜로운 사람은 율법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나, 율법을 겉으로만 따르는 이는 폭풍 속의 배와 같다.집회서 33:2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율법을 찾는 사람과 겉으로만 꾸미는 사람이 대비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차이를 폭풍 속의 배라는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실제로 율법의 가르침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방향을 잃게 됩니다.
폭풍 속의 배는 바람과 파도에 따라 요동칩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보다 지금 몰아치는 힘에 좌우되기 쉽습니다.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율법을 신뢰할 것이고, 율법은 그에게 의로운 이들의 신탁처럼 믿을 만할 것이다.집회서 33:3 · 본디새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율법을 신탁처럼 점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율법이 믿을 만한 가르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준비된 말과 제자리에서 맴도는 생각
할 말을 준비하여라. 그래야 사람들이 네 말을 들을 것이다. 배운 것을 갈무리하고 대답하여라.집회서 33:4 · 본디새김
하나님의 가르침을 신뢰하는 사람이란 그것을 무작정 반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배운 것을 정리하고 충분히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이의 속은 수레바퀴이고, 그의 생각은 빙빙 도는 굴대와 같다.집회서 33:5 · 본디새김
수레바퀴와 굴대는 계속 돌아갑니다. 그러나 같은 회전을 반복한다는 것은 곧 생각이 깊어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배운 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사고방식입니다.
6절에서는 비웃는 친구를 교미에 쓰는 말에 비유합니다. 누구든 올라타면 그 밑에서 울어 대는 말의 모습으로, 상대에 따라 분별 없이 반응하는 사람을 풍자합니다.
이 비유의 정확한 사회적 상황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의 수레바퀴와 함께 읽으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스스로 숙고하고 판단하기보다 자극과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판단 능력에 관한 가르침을 멈추고,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신탁에 관한 표현은 신탁을 구하여 대답을 얻는 일과 관련된 표현으로, 하나님께 뜻을 묻던 고대 이스라엘의 관행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8:30과 민수기 27:21에 나오는 우림과 둠밈을 통한 판별과도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태양 아래서 날들이 달라지는 이유
왜 어떤 날은 다른 날보다 뛰어난가? 한 해의 모든 날에 비치는 빛은 해에서 오는데.집회서 33:7 · 본디새김
그런데 어떤 날은 특별한 날로 여겨지고, 어떤 날은 평범한 날로 지나갑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듭니까?
주의 지식으로 날들이 구별되었고, 주는 때와 명절들을 서로 다르게 했다.집회서 33:8 · 본디새김
그 가운데 어떤 날들은 높이고 거룩하게 했으며, 어떤 날들은 그저 날수에 넣었다.집회서 33:9 · 본디새김
저자는 날들의 차이를 태양의 성질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이 시간을 구별하시고 특정한 날을 거룩하게 하신 데서 나옵니다.
창세기 2:3에서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레위기 23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안식일과 여러 절기가 규정됩니다.
어떤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다른 날들은 일상적인 날로 남아 있습니다. 두 종류의 날 모두 하나님의 시간 안에 속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특별하게 구별하셨다는 사실이, 다른 것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자는 날들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사람들의 차이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같은 흙에서 나왔는데
날들의 차이에서 사람들의 차이로
사람들도 모두 땅바닥에서 나왔고, 아담은 땅에서 창조되었다.집회서 33:10 · 본디새김
날들의 근원은 같지만 날들은 서로 구별됩니다. 사람들의 근원도 같지만 사람들의 길은 서로 다릅니다.
그리스어 본문 33:8과 33:11에는 ‘구별하다’라는 같은 어근의 동사와 ‘다르게 하다’라는 같은 동사가 반복됩니다. 날들이 구별된 방식과 사람들이 구별된 방식을 의도적으로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두 경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날들이 거룩한 날과 평범한 날로 나뉘는 것은 주로 시간의 용도와 관련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구별은 복과 저주, 높아짐과 낮아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과 자리에서 쫓겨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왜 같은 흙에서 나온 사람들이 이처럼 다른 삶을 살아갑니까?
복을 받는 사람과 낮아지는 사람
주는 풍부한 지식으로 그들을 구별했고, 그들의 길을 서로 다르게 했다.집회서 33:11 · 본디새김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는 복을 주고 높였으며, 어떤 이들은 거룩하게 하고 자기 곁으로 가까이 데려왔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주하고 낮추었으며,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뒤엎어 버렸다.집회서 33: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을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사람의 지위와 삶의 길이 모두 인간 자신의 능력이나 선택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의 직무와 연결됩니다. 민수기 16:5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속한 사람을 구별하시어 가까이 나아오게 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역할과 지위를 부여하시는 일을 포함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르게 대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악하게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집회서 15:11–20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 않으시며, 사람 앞에는 선택과 책임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33:11–12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죄인으로 창조하시고 그에게 악행을 강요하신다는 주장으로 읽는 것은 책 전체의 문맥과 충돌합니다.
이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인간의 다양한 운명과 지위가 하나님의 다스림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삶이 주어졌는지,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책임이 각각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질문을 해결하는 대신 저자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제시합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놓인 진흙
토기장이의 진흙이 그의 손에 있고, 진흙의 모든 길이 토기장이의 뜻에 달려 있듯이, 사람들도 자신들을 만든 이의 손에 있어, 그의 판결에 따라 되갚음을 받는다.집회서 33:13 · 본디새김
같은 흙으로도 서로 다른 형태와 용도의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릇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질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저자는 이 이미지를 통해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단순히 하나님이 사람을 마음대로 만드신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사람이 대우받는다는 말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는 창조의 주권과 판단의 주권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18:1–10에서도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한 민족을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셨더라도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거두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복을 약속받은 민족이 악을 행하면 그 복에 관한 결정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이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지만, 반드시 인간의 선택과 응답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집회서 33장에서도 1–6절의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14절의 경건한 사람과 죄인의 차이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관한 책임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사람이 땅에서 나왔다는 선언은 창세기 2:7에 근거합니다. 이는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서로 다른 지위와 역할을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둘씩 둘씩, 하나가 다른 하나의 맞은편에 있다
악의 맞은편에는 선이 있고, 죽음의 맞은편에는 생명이 있다. 그처럼 경건한 이의 맞은편에는 죄인이 있다.집회서 33:14 · 본디새김
그렇게 지극히 높은 이의 모든 일을 바라보아라. 둘씩 둘씩, 하나가 다른 하나의 맞은편에 있다.집회서 33:15 · 본디새김
여기서는 또 다른 형태의 구별이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거룩한 날과 평범한 날, 높아지는 사람과 낮아지는 사람이 대비되었습니다. 이제는 선과 악, 생명과 죽음, 경건한 사람과 죄인이 나란히 놓입니다.
본문에서 모든 것은 한 분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또한 선과 악이 서로 대립한다고 해서 악이 선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저자는 선과 악의 차이를 분명히 유지합니다.
「지극히 높은 이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선과 악을 똑같은 의미로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의 악행도 하나님이 직접 원하신 것이라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가 관찰하는 것은 창조 세계와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대조의 구조입니다. 그가 여기서 악의 기원에 관한 완성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7절에서는 특별한 날과 평범한 날을 구분했지만, 평범한 날도 같은 태양 아래에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살아가지만, 모두 같은 땅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공통된 기원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저자는 잠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집회서 42:24에도 사물들이 둘씩 짝을 이룬다는 관찰이 다시 나타납니다. 저자는 이런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생명과 죽음, 선과 악의 대조는 신명기 30:15–20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생명과 복, 죽음과 재앙이 사람 앞에 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사랑하며 따르는 일이 삶의 방향과 연결됩니다.
늦게 온 이삭 줍는 사람이 포도즙 틀을 채우다
나도 맨 마지막에, 포도를 거두는 이들 뒤에서 남은 것을 줍는 이처럼 깨어 애썼다. 주의 복으로 앞섰고, 포도를 거두는 이처럼 포도즙 틀을 가득 채웠다.집회서 33:16 · 본디새김
이 장면은 포도 수확이 끝난 밭에서 시작합니다.
포도를 거두는 사람들이 먼저 지나갔습니다. 그 뒤에 남은 포도를 줍는 사람이 따라갑니다. 수확이 끝난 뒤의 밭에는 풍성한 열매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뒤늦게 온 사람은 앞서 온 사람들의 수확을 따라잡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는 자신보다 앞서 지혜를 가르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자신이 처음부터 모든 지혜를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배우고 수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는 주의 복으로 앞섰고, 포도를 거두는 사람처럼 포도즙 틀을 가득 채웠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를 말하면서 그 결실의 근원을 「주의 복」에 돌립니다.
자신보다 앞서 있던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수고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결실을 자기 혼자 차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만을 위해 수고한 것이 아니라, 교훈을 찾는 모든 이를 위해 수고했음을 알아 두어라.집회서 33:18 · 본디새김
포도즙 틀을 가득 채운 사람이 그 풍성한 수확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의 결실도 혼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백성의 높은 이들아, 내 말을 들어라. 모임을 이끄는 이들아, 귀를 기울여라.집회서 33:19 · 본디새김
그의 가르침은 특별히 사람과 재산에 대해 권한을 가진 이들에게 향합니다. 이제 창조주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설명했던 지혜자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실제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늦게 왔다는 고백과 앞섰다는 선언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본디새김의 16절에 함께 실린 뒷부분은 통상적인 그리스어 절 구분에서는 17절에 해당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자리를 넘겨주지 마라
재산을 넘겨준 뒤 다시 구걸하는 사람
네가 살아 있는 동안 아들과 아내에게도, 형제와 친구에게도 너를 좌우할 권한을 주지 마라. 후회하며 그 재산을 달라고 빌게 되지 않도록, 네 재산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지 마라.집회서 33:20 · 본디새김
왜 저자는 가족을 이렇게 경계합니까?
네가 아들들의 손을 바라보는 것보다, 자녀들이 네게 청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집회서 33:22 · 본디새김
어떤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데 자기 재산을 자녀에게 모두 넘겨주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 뒤로 그는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녀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문제 삼는 것은 단지 재산의 감소가 아닙니다.
경제적 의존이 개인의 생활과 결정권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특히 가족이 노년의 생계와 돌봄을 담당하는 중요한 관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재산을 완전히 넘겨준 사람은 가족의 선의에 크게 의존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21절에서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물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삶을 이끌 권한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고에는 당시 가족관계의 위계질서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자녀가 부모에게 청하는 상황을 부모가 자녀에게 청하는 상황보다 낫다고 평가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권한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든 부모는 자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해서는 안 된다거나, 가족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인 원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관심은 자신의 생계와 판단권을 무리하게 포기한 뒤 생기는 취약함에 있습니다.
유산은 언제 넘겨야 하는가
네 모든 일에서 주도권을 지녀라. 네 명예에 흠을 내지 마라.집회서 33:23 · 본디새김
네 삶의 날들이 끝나는 날, 죽음의 때에 유산을 나누어 주어라.집회서 33:24 · 본디새김
오늘날의 다양한 상속 방식에 그대로 적용할 법률 규정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필요한 자산과 권한을 너무 일찍 포기하지 말라는 실천적 지혜입니다.
저자는 지혜를 나누는 일에는 적극적입니다. 자신이 얻은 교훈은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여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재산을 넘기는 일에는 신중합니다. 자기 생계를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서둘러 넘겨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혜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다고 해서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통해 다른 사람도 그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재산은 실제로 넘겨주면 이전 소유자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 주도권을 지키는 일이 가족보다 언제나 우선해야 한다는 윤리 전체를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저자는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지 충분히 다루지 않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은 재산을 가진 사람의 조심스러운 처신입니다.
그런데 다음 단락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는 것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실제로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자유를 찾는 종과 그를 붙잡으려는 주인
나귀와 종을 나란히 놓는 이유
나귀에게는 먹이와 매와 짐이 있고, 집안 종에게는 빵과 훈육과 일이 있다.집회서 33:25 · 본디새김
저자는 가축과 집안 종을 같은 구조의 문장에 놓습니다. 종에게 자유롭게 일을 그만둘 권리가 있다고 전제하지 않으며, 주인이 신체적 강제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다룹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종’이라는 말을 오늘날의 직원이나 부하 직원으로 바꾸어 읽으면 본문의 역사적 현실이 사라집니다.
멍에와 가죽끈은 목을 굽힐 것이고, 악행을 저지르는 집안 종에게는 고문틀과 고문이 있다.집회서 33:2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단순한 훈육에 관한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 신체적 강제를 가리키는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저자는 악행을 저지르는 집안 종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일을 허용합니다.
집회서가 지혜를 가르치는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구절의 폭력성을 무시하거나, 모든 표현을 영적인 훈련에 대한 비유로 바꾸어 읽는 것은 본문을 존중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저자는 실제 종을 가진 사람에게 실제 행동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행동 가운데에는 오늘날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내용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회서 33장의 종에 관한 부분을 오늘날의 직장 관리 방법이나 교육 방법으로 직접 옮겨서는 안 됩니다. 강제노동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이 본문을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종이 자유를 찾는 것을 문제 삼는다
종에게 일을 시켜라. 그러면 네가 쉼을 얻을 것이다. 그에게서 손을 놓아 보아라. 그러면 그는 자유를 찾을 것이다.집회서 33:26 · 본디새김
종의 노동이 주인의 여유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를 찾는 행위는 긍정적인 목표가 아니라 주인이 피해야 할 상황으로 제시됩니다. 종의 삶을 어떻게 자유롭게 할 것인지가 아니라, 주인이 어떻게 종의 노동과 복종을 확보할 것인지가 우선적인 관심입니다.
28–29절에서도 종이 빈둥거리지 않도록 일을 시키라고 말합니다. 빈둥거림이 악을 가르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권고에서 종의 입장은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그가 왜 일을 거부하거나 자유를 찾으려 하는지,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강제로 일해야 하는 상황이 그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주인의 관리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지만, 종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이 침묵 자체가 본문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갑자기 한계를 설정한다
그에게 맞는 일을 맡겨라. 말을 듣지 않으면 그의 차꼬를 무겁게 하여라. 또 누구에게든 도를 넘지 말고, 판단 없이 아무것도 하지 마라.집회서 33:30 · 본디새김
저자는 강제적인 종 관리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인에게 무제한적인 폭력을 행사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합니다.
「누구에게든 도를 넘지 말고」라는 말은 종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에도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앞의 폭력적인 명령을 취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종의 자유와 신체적 안전을 현대적인 의미의 기본권으로 선언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을 통제하는 체계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지나친 행동을 경계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두 절에서는 저자의 어조가 다시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1:2–11은 히브리 종의 복무 기간과 해방에 관한 규정을 제시합니다. 신명기 15:12–15는 히브리 종을 풀어 줄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25:39–43은 가난해져서 다른 이스라엘 사람에게 종속된 동족을 가혹하게 다스리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 규정들이 모든 형태의 노예제를 폐지한 것은 아닙니다. 각각 적용 대상과 조건도 다릅니다. 그러나 종속된 사람의 처우에 제한을 두고, 특정한 상황에서 해방을 명령한다는 점에서는 집회서 33장의 강압적인 권고를 평가할 중요한 정경적 배경이 됩니다.
그를 너 자신처럼 대하여라
집안 종이 네게 있으면 그를 너와 같은 이로 삼아라. 네가 피로 그를 얻었기 때문이다. 집안 종이 네게 있으면 그를 너 자신처럼 대하여라. 네 목숨만큼이나 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집회서 33:3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종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주인 또한 그 종 없이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주인은 종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종의 노동과 존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권한은 주인에게 있지만, 주인에게 필요한 능력과 노동은 종에게 있습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잊기 쉽습니다.
종을 학대하면 어떻게 되는가
네가 그를 학대하여 그가 떠나 달아나면, 어느 길에서 그를 찾겠느냐?집회서 33:32 · 본디새김
지금까지 주인은 종이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종에게 일을 시키고, 자유를 찾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불복종하면 벌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가 더 이상 종의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학대는 관계를 파괴합니다. 강압적인 통제는 겉으로 복종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계속 곁에 머물도록 보장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 결말을 종의 해방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종이 달아난 것을 자유를 얻은 승리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필요한 종을 잃었다는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종이 달아난 뒤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같은 흙에서 나왔다는 선언은 종에게도 적용되는가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저자의 선언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종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실제 가르침에서는 이 창조의 공통성이 사회적인 평등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같은 흙에서 나왔다고 말하면서도, 주인이 종에게 차꼬를 채우는 일을 허용합니다. 이 긴장을 무시하고 33장 전체가 이미 모든 사람의 동등한 자유를 선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반대로 마지막의 형제 같은 대우에 관한 권고를 아무 의미도 없는 말로 치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을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종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창조주의 권한과 인간 소유주의 권한은 같은 종류의 권한이 아닙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를 이용하여 인간 주인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지워 버리는 셈입니다. 본문은 이 결론을 직접 진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와 인간의 권한을 구별하여 읽으면, 33장 전반부의 신학이 후반부의 사회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은 「그를 너 자신처럼 대하여라」라고 옮겼지만, 대응하는 그리스어 구절에는 중요한 표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게 아우톤 호스 아델폰, 곧 ‘그를 형제처럼 대하여라’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종을 단순한 노동력이나 가축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피로 얻었다」는 표현의 구체적인 의미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큰 희생과 수고를 들여 종을 얻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고, 다른 취득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그 피가 누구의 피이며 어떤 사건을 뜻하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어 문장은 주인이 그 종을 자기 생명만큼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따라서 저자가 종을 형제처럼 대하라고 하는 이유에는 주인이 종에게 의존한다는 현실도 포함됩니다. 신약의 빌레몬서 1:16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종 이상의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는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이는 집회서 33장의 직접적인 인용이 아니라, 종의 신분과 형제 관계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맺음말 — 주인은 어느 길에서 그를 찾을 것인가
이 마지막 장면을 앞의 토기장이 비유와 나란히 놓으면, 인간의 권한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관리하는 것과, 그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의 권한을 지키는 방법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행사하는 권한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33장의 마지막은 종이 달아날 경우를 경고합니다.
주인은 그가 떠난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의 손에는 권한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 권한으로는 떠난 사람을 다시 곁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아는 사람만이, 그 힘을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