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37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말과 마음과 욕망을 분별하는 지혜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조언은 반드시 어리석은 사람에게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잘 알고, 설득력 있게 말하며, 자신을 도우려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의 조언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유익보다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집회서 37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남의 조언을 경계하라고 가르친 뒤, 자기 마음의 조언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마음의 변화와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뜻밖에도 음식을 지나치게 먹지 말라는 권고로 끝납니다.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은 밖에서 들려오는 나쁜 조언만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욕망도 얼마든지 조언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837장 본문 읽기 →

친구라는 이름과 친구의 실제 모습

집회서 37:1–6 본문 →

친구가 원수가 되는 슬픔

친구라면 누구나 「나도 그와 친구가 되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만 친구인 친구도 있다.집회서 37:1 · 본디새김

누구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 관계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친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어도 그 이름에 걸맞은 행동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벗과 친구가 원수로 돌아서는 것은 죽을 만큼 슬픈 일이 아니냐?집회서 37:2 · 본디새김

낯선 사람이 처음부터 적대하는 것과 친구가 원수로 돌아서는 것은 다릅니다. 친구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약점, 계획을 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가까웠던 관계가 무너지면, 그동안 신뢰의 근거였던 친밀함이 오히려 상처의 원인이 됩니다.

아, 악한 생각아, 땅을 속임수로 뒤덮으려고 어디서 굴러 들어왔느냐?집회서 37:3 · 본디새김

여기서 지혜자는 배신한 친구에게 직접 항의하지 않습니다. 그 친구를 움직인 악한 생각을 불러 세웁니다. 배신은 단순히 관계가 나빠진 사건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릇된 생각이 인간관계를 파괴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17–18절에서 지혜자는 사람의 마음과 혀가 선과 악, 생명과 죽음에 관계한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악한 생각을 탄식하지만, 나중에는 독자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게 하는 셈입니다.

기쁜 날에는 가까이, 어려운 날에는 맞은편에

벗은 친구가 기뻐할 때 즐거워하지만, 환난의 때에는 맞은편에 서 있을 것이다.집회서 37:4 · 본디새김

겉으로 보이는 우정은 충분히 진실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함께 웃고, 식사하고, 기뻐합니다.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 관계의 속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찾아오면 그가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집니다.

본문은 단순히 친구가 떠난다고 하지 않고 “맞은편에” 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문맥상 어려움에 빠진 친구에게서 돌아서거나 대립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관계의 변화가 하나의 공간적 장면으로 그려집니다.

벗은 제 배를 위해 친구와 함께 수고하며, 전쟁을 앞두고 방패를 집어 들 것이다.집회서 37:5 · 본디새김

그리스어의 “제 배를 위해”라는 표현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 친구를 돕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방패를 집어 들 것이다”는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위험한 순간에도 친구를 지키려고 방패를 드는 참된 동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함께 수고하던 사람이 전쟁이 닥치자 자기 안전을 위해 방패를 드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어 문장 자체는 그 방패로 누구를 지키는지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참된 친구와 거짓 친구 중 어느 한쪽의 묘사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부유해졌을 때에도 친구를 잊지 마라

네 마음속에서 친구를 잊지 말고, 네가 재물을 지녔을 때에도 그를 잊지 마라.집회서 37:6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거짓 친구를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자에게 친구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남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도 친구에게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환난이 친구의 진실함을 시험했습니다. 여기서는 풍요가 독자의 진실함을 시험합니다.

친구가 어려울 때 곁을 떠나는 것도 배신이지만, 자신이 잘되었다고 오래된 친구를 잊는 것도 신실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집회서 6:8–12도 형편이 좋을 때만 가까이하다가 어려워지면 떠나는 친구를 경계합니다. 그러나 37장은 여기에 책임의 방향을 하나 더합니다.

참된 우정은 어려울 때 떠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고, 형편이 좋아졌을 때 잊지 않는 것으로 유지됩니다.

좋은 조언보다 먼저 살펴야 할 것

집회서 37:7–11 본문 →

조언하는 사람에게도 원하는 것이 있다

조언하는 이는 누구나 제 조언을 높이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조언하는 이도 있다.집회서 37:7 · 본디새김

친구는 삶을 함께하는 사람이지만, 조언자는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조언하는 사람이 대체로 자기 조언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더구나 그 조언이 객관적으로 타당해 보이더라도, 조언하는 사람의 숨은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조언하는 이를 경계하여 너 자신을 지키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 두어라. 그도 자신을 위해 궁리할 것이다. 그가 너를 두고 제비를 던지고,집회서 37:8 · 본디새김

지혜자는 조언의 내용부터 평가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돈일 수도 있고, 지위나 인정일 수도 있으며, 자기 손해를 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언하는 사람이 사실을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강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최선의 선택과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이 일치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하나의 길처럼 제시하는 것입니다.

“네 길은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

네게 「네 길은 좋다.」 하고 말한 뒤 맞은편에 서서 네게 무슨 일이 닥치는지 지켜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집회서 37:9 · 본디새김

이 장에서 두 번째로 “맞은편”이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4절에서는 거짓 친구가 환난의 때에 맞은편에 섰습니다. 9절에서는 조언자가 좋은 말을 해 놓고 맞은편에 서서 결과를 지켜봅니다. 두 장면 모두 상대방의 어려움에 함께 참여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좋은 조언자는 정답처럼 들리는 말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말이 상대방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조언자가 모든 결과를 함께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경계하는 것은 책임의 한계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상대방을 자기 이익이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묻지 말라고 할까?

11절은 여자와 경쟁자, 겁쟁이와 전쟁, 장사꾼과 거래, 인색한 사람과 감사, 게으른 사람과 일 등 여러 조합을 열거합니다. 특히 특정 성별이나 신분을 언급하는 부분에는 고대 사회의 관계와 노동에 대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를 여성이나 특정 직업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좋은 조언자가 될 수 없다는 일반 명제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장사꾼은 거래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거래에서 자신이 이익을 얻는다면 조언이 한쪽으로 기울 수 있습니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에게 판매 가격을 물을 때도 비슷한 문제가 생깁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낮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인색한 사람에게 감사와 관대함을 묻거나, 자비 없는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씨를 묻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성품이 조언의 방향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조언의 신뢰성은 지식의 많고 적음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이해관계와 성품, 그리고 지금 묻는 문제 사이의 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조언을 믿어야 할까요?

나와 함께 아파할 사람을 찾아라

집회서 37:12–15 본문 →

경건함을 판단하는 기준

오히려 계명을 지키는 사람으로 네가 알아본 경건한 사람과 늘 함께하여라. 그는 마음이 너와 통하고, 네가 넘어지면 너와 함께 아파할 사람이다.집회서 37:12 · 본디새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종교적인 말을 잘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집회서에서 계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구체적인 기준입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조건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자는 좋은 조언자의 조건을 결국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능력에서 찾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조언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실패해도 자신의 몫만 챙기면 됩니다. 그러나 함께 아파하는 사람은 그 실패를 남의 일처럼 구경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친구와 조언자의 기준이 만납니다.

진실한 친구는 어려울 때 맞은편에 서지 않습니다. 진실한 조언자도 상대방이 넘어질 때 멀리 서서 지켜보지 않습니다.

그는 곁에 서서 함께 아파합니다.

그런데 왜 자기 마음을 더 믿으라고 할까?

또 너에게 네 마음의 조언보다 더 믿음직한 것은 없으니, 그 조언을 굳게 세워라.집회서 37:13 · 본디새김

여기서 자신의 마음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충동이나 감정을 옳다고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동안 경험하고 생각하며 얻은 판단을 가볍게 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실제로 사람의 마음은 때로 높은 곳에 앉아 망을 보는 파수꾼 일곱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 주곤 한다.집회서 37:14 · 본디새김

높은 곳의 파수꾼은 멀리서 다가오는 위험을 볼 수 있습니다. 일곱 명이라는 숫자는 경계의 철저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밖에서 관찰하는 사람은 상황의 일부만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은 그동안의 경험, 관계의 역사, 자신의 능력과 한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사정까지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자는 자기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때로” 그렇다고 말합니다. 경험에서 나온 내면의 판단은 귀중하지만, 그것을 무오류의 기준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조언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더하여 지극히 높은 이에게 간구해라. 그가 네 길을 진리 안에서 곧게 이끌도록.집회서 37:15 · 본디새김

지혜자는 좋은 판단을 위해 세 가지를 함께 요청합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의 조언을 듣고, 자기 마음의 판단을 세우며,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길을 진리 안에서 곧게 이끌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역할은 단순히 인간의 선택을 성공시키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선택이 참되고 올바른 길을 향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잠언 3:5–6은 자기 명철만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야훼를 인정하라고 권합니다. 집회서 37장은 자기 판단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 판단 위에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강조점은 다르지만 자기 지혜를 최종 권위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지혜로운 판단은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마저 하나님의 진리 앞에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혀를 통해 드러난다

집회서 37:16–18 본문 →

모든 일의 시작은 말이고, 모든 행동에 앞서는 것은 계획이다.집회서 37: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지금까지의 조언에 관한 가르침을 인간의 행동 전체로 넓힙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 말이 자신의 계획에 들어오고, 자신의 행동을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을 하는가는 삶의 방향과 연결됩니다.

마음에서 솟아나는 네 갈래

변화의 자취는 마음에 있다. 네 갈래가 솟아난다.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늘 다스리는 것은 혀다.집회서 37:17–18 · 본디새김

이 부분은 압축적인 시적 표현이라 문장 사이의 관계를 한 가지로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은 마음의 변화와 그 흔적을 말한 뒤, 네 갈래가 솟아난다고 이어집니다. 이를 마음에서 변화가 시작되어 네 방향으로 전개되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고,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이라는 갈림길에서 마음의 변화가 드러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선과 악은 도덕적인 방향을, 생명과 죽음은 그 방향이 가져오는 중대한 결과를 나타냅니다. 두 쌍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모든 개별 행동이 즉시 생사로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거짓 친구와 그릇된 조언자는 모두 말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친구라고 선언하고, 좋은 길이라고 설득하며, 속마음과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반대로 좋은 조언자도 말을 통해 상대방을 돕습니다. 자기 지혜를 표현하고 어려운 순간에 올바른 방향을 일러 줍니다.

혀는 마음속 판단이 다른 사람의 삶으로 건너가는 통로입니다.

잠언 18:21은 죽음과 생명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집회서는 이 지혜 전통을 이어받되, 앞서 등장한 친구와 조언자의 모습을 통해 그 말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기에 혀를 잘 사용하는 것과 참된 지혜를 지닌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닙니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하는 사람

집회서 37:19–24 본문 →

지식을 전달하는 능력과 지혜롭게 사는 능력

영리하고 많은 이를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 있다.집회서 37:19 · 본디새김

여기서 “영리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panoûrgos(πανοῦργος)는 기민하거나 약삭빠른 능력을 가리킬 수 있고, 문맥에 따라 교활한 뉘앙스도 지닙니다. 반면 22–24절에서 반복되는 “지혜로운”은 sophós입니다.

지혜자는 영리함과 지혜로움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영리한 사람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삶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절제하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약속은 지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21절에서는 말로 지혜로워 보이지만 미움을 받고, 결국 먹을거리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에 대해 본문은 주에게서 은혜를 받지 못했으며 지혜를 빼앗겼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을 모든 사람이 좋아해야 참된 지혜자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진실을 말한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는 사람들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맥에서 문제 되는 사람은 단순히 인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서는 지혜로워 보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지혜의 유익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집회서는 지혜를 단순한 말솜씨나 타고난 재능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영리함은 참된 지혜와 같지 않습니다.

자기 삶에 열매를 맺고, 다른 사람에게도 열매를 남기다

자기 자신을 위해 지혜로운 이가 있으니, 그의 입에 있는 깨달음의 열매들은 믿음직하다.집회서 37:22 · 본디새김

“자기 자신을 위해 지혜로운”이라는 말은 반드시 이기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뒤따르는 구절들과 함께 보면, 자신의 삶을 먼저 지혜롭게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가 말하는 깨달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에서 확인된 열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백성을 가르칠 것이며, 그의 깨달음의 열매들은 믿음직하다.집회서 37:23 · 본디새김

19절의 사람은 많은 사람을 가르치지만 자기 자신에게 쓸모가 없습니다. 반면 23절의 사람은 자기 백성을 가르치고, 그의 깨달음은 믿을 만한 열매를 맺습니다. 둘 다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차이는 가르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지혜의 진실성에 있습니다.

24절은 그런 사람에게 복이 가득하고, 그를 보는 이들이 복되다고 말한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부유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참된 지혜의 유익을 알아보고 그 사람을 복되다고 인정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짧지만 지혜의 열매는 오래 남는다

집회서 37:25–26 본문 →

한 사람의 삶은 날수로 셀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날들은 셀 수 없다.집회서 37:2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갑자기 시야를 넓힙니다.

지혜자의 역할은 자기 생애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가르친 사람들이 살아가고, 그들 또한 다음 세대에 지혜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날수는 셀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정된 생애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삶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날들은 셀 수 없다”는 표현은 이러한 세대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정치적 공동체가 역사 속에서 아무런 위기도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이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신뢰를 물려받을 것이며, 그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집회서 37:26 · 본디새김

지혜자가 물려받는 것은 단순한 명성이 아닙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믿을 만했다는 공동체의 인정입니다. 그의 이름이 오래 살아 있다는 표현도 이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그가 가르친 지혜와 남긴 영향은 사람들의 기억과 삶 속에 계속 남을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었다면, 여기서는 회복된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과 신뢰 위에서 이어져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셈입니다. 집회서의 후반부인 44장 이하에서 조상들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길게 이어지는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앞선 세대가 남긴 믿음과 지혜가 다음 세대의 기억 속에서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살펴봅니다.

지혜로운 삶의 가치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얻었느냐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을 남겼느냐에도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간 시선을 다시 한 사람의 몸으로 돌립니다.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아라

집회서 37:27–31 본문 →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 같은 것은 아니다

얘야, 살아가면서 너 자신을 시험해 보고, 무엇이 네게 해로운지 살펴라. 그런 것은 너 자신에게 주지 마라.집회서 37:27 · 본디새김

여기서는 자신의 몸과 생활을 살펴 무엇이 해로운지 경험을 통해 알아 가라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것이 해로운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집회서 37:28 · 본디새김

하나는 유익함의 차이입니다. 같은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로울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호의 차이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도 다릅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이 둘을 구분합니다. 자신이 좋아한다는 사실과 자신에게 이롭다는 사실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무제한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았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에게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아는 지혜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무엇이 자신에게 이로운지를 알아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좋아하는 것을 멈출 수 있는 능력

온갖 맛난 음식을 탐식하지 말고, 먹을거리에 빠져들지 마라.집회서 37:29 · 본디새김

사람이 음식을 먹는 까닭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먹는 즐거움이 지나치게 커지면, 생명을 위해 주어진 음식이 오히려 몸을 해칠 수 있습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아픔이 생길 것이고, 탐식은 토사곽란에까지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37:30 · 본디새김

여기에는 고대의 신체 경험에 기초한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탐식 때문에 많은 이가 죽었지만, 조심하는 이는 삶을 늘릴 것이다.집회서 37:31 · 본디새김

이 구절을 절제하는 사람은 반드시 장수한다는 보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혜문학 특유의 일반적 관찰이며, 지나친 욕망이 생명을 해칠 수 있고 신중한 생활이 생명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교훈입니다.

앞에서는 자기 배를 위해 친구와 함께하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 배를 다스리지 못해 몸을 해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전자는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왜곡할 수 있는 사람이고, 후자는 욕망 때문에 자신의 몸을 해치는 사람입니다.

이 둘을 직접 연결하는 설명이 본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의 시작과 끝에 배와 음식이 등장한다는 점은 전체 흐름과 잘 어울립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본문은 choléra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고대에는 심한 구토와 설사 등을 동반하는 여러 소화기 질환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이를 현대 의학에서 특정 세균 감염을 뜻하는 콜레라와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관심은 구체적인 병원체가 아니라 과도한 식사가 가져올 수 있는 신체적 고통입니다. 이 마지막 단락은 집회서 31:12–22에서 이미 다루었던 식탁 예절과 절제의 주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집회서는 음식을 즐기는 일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집회서 37장이 보여 주는 지혜의 중심

집회서 37:1–31 본문 →

지혜는 다른 사람의 이기심을 간파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욕망이 판단을 흐리지 않도록 살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집회서 37장은 이런 질문들을 따라가며,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길을 찾는 사람의 모습을 그립니다.

마지막에 남는 장면은 화려한 지혜자가 많은 사람 앞에서 가르치는 모습이 아닙니다.

음식이 놓인 식탁 앞에 앉은 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 맛있는지 압니다. 더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무엇이 이로운지 살피고, 해로운 것은 스스로에게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분별할 줄 알던 사람이 마침내 자기 욕망까지 분별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집회서 37장은 그 조용한 절제의 장면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