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43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눈부신 세상과 말로 다 담지 못하는 영광
집회서 43장은 눈부신 하늘에서 시작합니다.
해가 떠올라 온 땅을 비추고, 산을 불태울 듯한 열기를 내뿜습니다. 달은 차오르고 기울며 계절과 축제의 시간을 알립니다. 별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무지개는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이어서 먹구름과 번개, 눈과 우박, 얼음과 바다까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창조 찬양에는 뜻밖의 긴장이 흐릅니다.
해는 너무 밝아서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합니다(4절). 눈은 너무 희어서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18절). 바다는 너무 크고 위험해서 그곳을 항해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경탄하게 됩니다(24절).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을 알게 해 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다 알지 못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로 해를 움직이시고, 별들을 제자리에 세우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붙드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많은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위대함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움직이지만, 인간의 말은 그 말씀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며 누가 만족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42:25). 이제 43장은 그 질문에 대한 긴 응답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을 하나씩 가리키지만, 볼수록 하나님의 위대함은 더욱 커집니다.
해 — 가장 강력한 빛도 하나님의 작품이다
해는 떠오르며 무엇을 선포하는가?
맑은 창공은 높은 곳의 자랑이고, 하늘의 모습은 영광스러운 광경이다.집회서 43:1 · 본디새김
저자는 특정한 사물이 아니라 하늘 전체에서 시작합니다.
맑게 펼쳐진 창공은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광경입니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하늘을 다 덮을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경탄할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곧바로 시선이 한곳에 집중됩니다.
해는 떠오를 때 그 모습으로 선포한다. 놀라운 도구이며 지극히 높은 이의 작품이다.집회서 43:2 · 본디새김
해는 사람처럼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알려 줍니다.
그것이 지극히 높은 이의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19:1–4에서도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의 손이 하신 일을 알립니다. 그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 메시지는 온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그러나 집회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해를 단순히 아름다운 빛이라고 부르지 않고 「놀라운 도구」이자 「작품」이라고 부릅니다. 저자는 하늘에서 가장 눈부시고 강력한 존재를 가리키면서도 그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신적인 힘이 아니라 누군가 만드신 도구라고 말합니다.
해가 대단할수록 그 해를 만드신 분의 위대함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것은 창세기 1:14–18에서 해와 달이 땅을 비추고 낮과 밤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만드신 광명체로 등장하는 것과 같은 방향입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것 (3–4절)
해는 한낮에 땅을 바싹 말린다. 그 뜨거운 열기 앞에서 누가 견디겠느냐?집회서 43:3 · 본디새김
해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열기는 땅을 말리고 인간을 압도합니다. 저자는 해를 찬양하면서도 그 힘이 인간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숨기지 않습니다.
가마를 지키는 이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일하지만, 해는 그 세 배의 열기로 산들을 불태운다. 불 같은 김을 불어 내고, 빛살을 내뿜어 눈을 흐리게 한다.집회서 43:4 · 본디새김
사람은 해를 보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를 계속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해조차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인간이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운 해를 만드신 분이라면, 그분의 영광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저자가 이 질문을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장 마지막의 「누가 그를 보아서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31절)을 읽고 나면 처음의 해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해조차 자기 길을 따르는 존재다 (5절)
해를 만든 주는 위대하다. 그의 말에 해는 제 길을 서둘러 갔다.집회서 43:5 · 본디새김
해는 인간에게 거대한 힘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해 자신은 창조주의 명령 아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해를 만드신 주가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해가 하루의 시간을 보여 준다면, 다음에 등장하는 달은 더 긴 시간의 흐름을 알려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세 배」는 해의 실제 온도가 가마보다 정확히 세 배 높다는 과학적 측정이 아닙니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극심한 열기를 훨씬 넘어서는 해의 압도적인 힘을 표현하는 시적 비교입니다.
달과 별 — 하나님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드셨다
달은 단순히 밤하늘을 밝히지 않는다
달도 언제나 제때를 지켜 시기를 알리고 세월의 표지가 된다.집회서 43:6 · 본디새김
해는 강렬한 빛과 열기로 묘사되었습니다. 반면 달을 설명할 때는 시간에 관한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제때」, 「시기」, 「세월의 표지」, 「축제의 표지」, 「한 달」.
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저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이 의미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이어집니다.
축제의 표지는 달에서 오고, 이 빛은 끝에 이르면 줄어든다.집회서 43: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축제들은 달의 주기를 따르는 달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월절은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에 시작되며(레위기 23:5), 초막절은 일곱째 달 열닷샛날에 시작됩니다(레위기 23:34). 달의 변화는 이러한 날짜를 헤아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은 달을 보며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단지 흘러가고 사라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공동체가 함께 모이며, 정해진 절기를 지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변하기 때문에 시간을 알려 주는 달 (8절)
한 달이라는 이름은 달의 이름을 따른다. 달은 모습을 바꾸며 놀랍게 차오른다. 높은 곳에 있는 비교의 도구로서, 하늘의 창공에서 환히 빛난다.집회서 43:8 · 본디새김
달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날마다 차오르거나 기울면서 형태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변화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그 변화를 불안정함이나 결함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마련하신 놀라운 질서로 바라봅니다. 창세기 1:14에서 광명체들은 날과 해와 절기를 구별하는 표지로 주어집니다.
특히 달의 변화는 정기적으로 되풀이됩니다. 매번 다른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변화 자체에는 알아볼 수 있는 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모든 것을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고정하는 질서가 아닙니다. 변화하는 것들이 제때에 제 역할을 하도록 세우신 질서입니다.
하늘의 파수꾼들 (9–10절)
달에 이어 저자는 별들을 바라봅니다.
주는 하늘의 아름다움이며 별들의 영광, 높은 곳에서 빛을 비추는 장식이다.집회서 43: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읽기가 갈립니다.
이 번역은 그리스어의 마지막 「주」를 주격 퀴리오스로(κύριος) 읽어, 앞선 표현들을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다른 그리스어 본문에는 소유격 퀴리우가 나타납니다. 이 경우 앞에 나오는 아름다움과 영광과 장식은 하나님 자신보다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을 가리키게 됩니다.
앞뒤에서 달과 별들의 운행을 이야기하므로 별들을 묘사하는 읽기가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하늘의 아름다움이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전체적인 의미는 유지됩니다.
거룩한 말에 따라 별들은 결정된 대로 설 것이며, 자기들의 파수 자리에서 결코 지치지 않을 것이다.집회서 43:10 · 본디새김
별들은 마치 보초를 서는 병사들처럼 묘사됩니다. 고대인이 바라본 밤하늘에는 반복해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의 배치와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그 규칙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합니다.
해는 힘차게 달리고, 달은 차오르고 기울며, 별들은 파수 자리를 지킵니다.
그 모든 움직임과 반복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습니다.
무지개 —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것을 만든 이를 기억하다
무지개를 보라는 명령
무지개를 보고 그것을 만든 이를 찬양해라. 무지개는 그 광채가 몹시 아름답다.집회서 43:11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저자는 처음으로 독자에게 직접 명령합니다.
해와 달과 별에 관해서는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지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무지개에 이르면 「보고」, 「찬양해라」라고 말합니다. 그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독자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둥근 띠로 하늘을 둘렀고, 지극히 높은 이의 손이 그것을 펼쳤다.집회서 43:12 · 본디새김
무지개는 사람이 만든 어떤 장식보다 큽니다. 저자는 그 장대한 광경을 하나님의 손이 펼치신 작품이라고 묘사합니다.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해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는 일이 찬양의 출발점이 됩니다.
노아의 무지개와의 연결
무지개는 창세기 9:12–17을 떠올리게 합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은 노아와 그 후손,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생물과 언약을 세우시며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십니다. 무지개는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명을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지가 됩니다.
그러나 집회서 43:11–12에서는 무지개와 언약을 직접 연결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강조점은 무지개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런데 집회서의 저자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이제 같은 하늘에서 훨씬 거칠고 두려운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눈과 우박, 바람과 얼음 —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함께 있는 세계
하늘의 곳간이 열리다 (13–15절)
그는 자기 명령으로 눈을 그치게 했고, 자기 심판의 번개들을 재촉한다.집회서 43:13 · 본디새김
해와 달과 별들은 일정한 질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기상 현상들이 등장합니다.
확실한 것은 눈과 번개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저자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번개에는 특별한 표현이 붙습니다. 「자기 심판의 번개들」입니다. 이 표현은 자연 현상을 단순히 아름다운 구경거리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구약에서는 폭풍과 번개가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시편 18:12–14와 나훔 1:3–6에서도 하나님은 폭풍과 구름과 번개를 통해 위엄을 드러내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번개나 자연재해가 특정한 사람의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라는 주장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집회서가 여기서 사용하는 것은 창조 세계의 강력한 현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묘사하는 찬양의 언어입니다.
그 때문에 곳간들이 열렸고, 구름들이 새처럼 날아 나왔다.집회서 43:14 · 본디새김
욥기 38:22에서도 하나님은 욥에게 눈의 곳간과 우박의 창고에 들어가 보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표현은 하늘 어딘가에 실제로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창고가 있다는 지리적 설명이라기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눈과 우박까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집회서에서는 구름들이 창고에서 풀려난 새들처럼 하늘을 날아갑니다. 무겁게 하늘을 뒤덮은 구름을 새들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위엄으로 구름들에 힘을 주었고, 우박 덩이들이 부서졌다.집회서 43:15 · 본디새김
부드럽게 떠다니는 구름에서 단단한 우박이 떨어지는 광경은 저자에게 놀라운 현상입니다. 같은 하늘에서 구름과 번개, 눈과 우박이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땅을 뒤흔든다 (16절과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산들이 흔들릴 것이며, 그의 뜻에 따라 남풍이 불 것이다. 그의 천둥소리가 땅을 꾸짖었고, 북풍의 폭풍과 소용돌이바람도 그리했다. 그는 눈을 새들이 날아 내려앉듯 뿌리니, 그 눈이 내리는 모습은 내려앉는 메뚜기 같다.집회서 43:16 · 본디새김
이 부분에서 기상 현상은 단순한 자연의 움직임을 넘어 하나님의 현현, 곧 하나님이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시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시편 29:3–9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목소리는 물 위에 울리고, 백향목을 부수며, 광야를 뒤흔듭니다. 그곳에서 천둥은 하나님의 위엄을 전하는 소리처럼 묘사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남풍과 북풍이 함께 등장합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서로 방향이 다릅니다. 그러나 저자는 어느 방향의 바람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묘사합니다.
새처럼 내려앉고 메뚜기처럼 쏟아지는 눈 (16–18절)
저자는 눈이 내리는 모습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생물에 비유합니다.
새들이 날아 내려앉는 모습은 가볍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눈송이가 바람을 따라 흩날리다가 땅에 내려앉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메뚜기가 등장합니다.
메뚜기 떼가 내려앉는 광경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수많은 개체가 한꺼번에 몰려와 땅을 덮습니다.
눈송이 하나하나는 새처럼 가볍게 내려앉지만, 그 수많은 눈송이가 함께 쏟아질 때는 메뚜기 떼가 내려앉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자연을 대충 바라보지 않습니다. 움직임과 모양, 규모와 색채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그 관찰이 경탄으로 이어집니다.
그 흰빛의 아름다움에 눈이 크게 놀라고, 그것이 쏟아져 내리는 데 마음이 넋을 잃을 것이다.집회서 43:18 · 본디새김
해는 강렬한 빛으로 눈을 흐리게 했습니다. 눈은 빛나는 흰색으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합니다. 하나는 뜨거운 빛이고 다른 하나는 차가운 눈이지만, 둘 다 인간을 압도할 만큼 놀라운 광경입니다.
저자는 단지 창조 세계가 아름답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인간의 반응까지 묘사합니다.
차가움도 불처럼 태운다 (19–21절)
그는 서리를 소금처럼 땅에 뿌리고, 서리는 얼어붙어 가시 끝이 된다.집회서 43:19 · 본디새김
이번에는 눈보다 더 작은 서리의 모습을 관찰합니다.
이 비교는 형태와 색채를 자세히 살피는 시선에서 나옵니다. 저자는 멀리 있는 하늘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땅 위에 내려앉은 작은 서리의 모습도 놓치지 않습니다.
차가운 북풍이 불고, 물에서 얼음이 얼어붙을 것이다. 얼음은 물이 모인 곳마다 내려앉고, 물은 그것을 갑옷처럼 입을 것이다.집회서 43:20 · 본디새김
물이 얼어붙으면 그 표면에 단단한 층이 형성됩니다. 저자는 그 모습을 물이 갑옷을 입은 것처럼 표현합니다. 물은 흐르는 존재인데, 얼음이 되면 단단하게 굳습니다.
그런데 21절은 더욱 뜻밖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산들을 삼키고 광야를 태우며, 불처럼 풀을 시들게 할 것이다.집회서 43:21 · 본디새김
여기서 「그것」은 문맥상 강한 추위와 서리, 얼음이 초래하는 파괴적인 효과를 묘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차가운 것이 불처럼 태운다는 말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극심한 추위도 식물을 상하게 하고 생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해가 산들을 불태웠습니다(4절). 이제는 추위가 광야를 태우고 풀을 시들게 합니다(21절). 불과 얼음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둘 다 압도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만들어 내는 고통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안개와 이슬이 가져오는 회복 (22절)
안개는 모든 것을 재빨리 낫게 하고, 뜨거운 바람에서 오는 이슬은 생기를 줄 것이다.집회서 43:22 · 본디새김
여기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저자는 이슬이 맺히는 모습을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메마른 세계가 다시 생기를 얻는 장면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인간을 압도하는 힘도 있고, 지친 생명을 회복시키는 작용도 있습니다.
저자는 창조 세계를 오직 위험한 곳이나 오직 평화로운 곳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두려움과 아름다움, 메마름과 회복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제 저자는 육지와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인간에게 가장 넓고 낯선 공간 가운데 하나인 바다를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먼저 13절의 「눈을 그치게 했다」는 표현에는 본문상의 난점이 있습니다. 이 번역이 따르는 그리스어에는 카테파우센, 곧 멈추게 했다는 동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어 전승에는 카테스페우센, 곧 재촉했다는 형태가 전합니다. 이 경우 눈을 신속히 내리게 하셨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뒤에 구름과 우박, 눈이 계속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눈을 내리게 하신다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치게 했다」를 따른다고 해서 문맥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상 현상을 일으키실 뿐 아니라 멈추게 하실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22절에서 이 번역은 「뜨거운 바람에서 오는 이슬」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 아포 카우소노스는 문맥에 따라 더위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방향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슬이 뜨거운 바람이나 열기로 지친 세계에 시원함과 생기를 준다는 뜻이 됩니다. 두 읽기 모두 앞선 파괴적인 기상 현상들과 22절의 회복을 대조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다 — 사람이 끝까지 알 수 없는 세계
하나님은 깊은 바다를 잠잠하게 하십니다
그는 자기 생각으로 깊은 바다를 잔잔하게 했고, 예수는 그것을 심었다.집회서 43:23 · 본디새김
고대의 바다는 인간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항해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었고, 바다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충분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바다마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9에서는 하나님이 물을 한곳으로 모으시고 마른땅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시편 104:6–9에서는 물이 하나님의 꾸짖음에 물러가며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넘지 못한다고 노래합니다. 집회서의 표현도 이러한 창조 신앙의 전통에 속합니다.
바다를 심은 예수는 누구인가?
그런데 이 구절에서 갑자기 「예수」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문맥상 매우 부자연스럽습니다. 앞뒤에서는 줄곧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정한 인물이 깊은 바다를 심었다는 설명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에 참여하셨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더 넓은 정경 안에서 그리스도와 창조의 관계를 논의할 수는 있지만, 이 구절의 「예수」라는 표기는 먼저 사본 전승의 문제로 다루어야 합니다.
섬들을 심었다는 읽기를 따르면 본문의 전체 장면은 선명해집니다.
거대한 바다가 있고, 하나님은 그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며, 그 가운데 섬들을 세우십니다. 인간에게 바다는 한없이 넓고 낯설지만, 하나님에게는 질서 없이 방치된 영역이 아닙니다.
항해자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은 그 위험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우리 귀로 듣고 놀란다.집회서 43:24 · 본디새김
여기서는 저자의 시선이 또 한 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 해와 달과 눈과 서리 등은 비교적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관해서는 항해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항해는 사람과 물건을 멀리 이동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바다에서는 폭풍과 파도, 항로의 불확실성이 큰 위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바다의 위험도 항해자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본 것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고 전해 주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넓힙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바다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뜻밖의 놀라운 일들이 있고, 온갖 다양한 생물과 지어진 바다 짐승들이 있다.집회서 43:25 · 본디새김
시편 104:25–26에서도 넓고 큰 바다에는 크고 작은 생물들이 무수히 있으며, 배들이 다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곳에서 움직입니다. 집회서도 같은 경탄을 표현합니다.
인간에게 위험하고 낯선 장소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의 가치를 인간에게 얼마나 편리하고 안전한지로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바다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 끝은 향기이고, 그의 말로 모든 것이 함께 짜여 있다.집회서 43:26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첫 부분 역시 본문 전승이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르는 그리스어에는 유오디아(εὐωδία) 텔로스 아우투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향기」와 「끝」을 뜻하는 단어들이 결합되어 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좋은 결말을 맺는다는 의미로 읽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항해가 안전하게 끝난다거나 바다의 모든 일이 좋은 결과로 끝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그리스어 전승에는 유오도이 앙겔로스 아우투라는 읽기가 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 또는 심부름꾼이 순조롭게 자기 일을 수행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앞서 등장한 해와 달, 별과 바람 등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이 각각 맡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로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읽기가 원래의 문장을 가장 정확하게 보존했는지는 이 자료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의 의미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함께 짜여 있다」는 표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함께 질서를 이룬다는 의미를 잘 전달합니다.
저자가 묘사한 창조물들은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그 모든 것을 연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저자는 전혀 다른 종류의 말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말입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예수」는 그리스어 이에수스입니다. 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철자가 같으며, 구약의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표기할 때도 사용됩니다. 다른 그리스어 전승에는 다음과 같은 읽기가 있습니다. 에퓌튜센 엔 아우테 네수스, 곧 「그 안에 섬들을 심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전승도 「섬들」이라는 목적어를 뒷받침합니다. 이 읽기는 앞부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깊은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으며, 그 바다 가운데 섬들을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섬을 「심었다」는 것은 나무를 심듯이 섬을 바다에 세우셨다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리스어 사본 사이에서 글자들이 비슷한 형태로 전달되는 과정에 본문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이루지만, 인간의 말은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많은 말을 해도 끝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겠지만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며, 말의 결론은 그가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집회서 43:27 · 본디새김
저자는 마치 하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일이 먼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며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이 인간의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창조 세계가 동일하다는 범신론적 선언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다음 절은 하나님이 자신이 하신 모든 일보다 크시다고 말하고, 33절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선언합니다.
창조주와 창조물은 구별됩니다.
따라서 「그가 모든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존재와 질서의 궁극적인 근원이시며, 모든 찬양이 그분에게 향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많은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저자는 더욱 복잡한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가장 간결한 고백을 남깁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보다 크십니다
우리가 영광을 돌린들 어디까지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자기가 한 모든 일보다 크기 때문이다.집회서 43:28 · 본디새김
여기서 저자는 창조 세계가 얼마나 장엄한지를 설명한 뒤, 그것을 초월하는 창조주를 이야기합니다. 창조 세계를 깊이 관찰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함을 더 알게 되지만, 그 관찰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는 두려우며 몹시 위대하고, 그의 권세는 놀랍다.집회서 43:29 · 본디새김
이 장에서 인간은 강렬한 해의 열기, 천둥과 번개, 폭풍과 깊은 바다를 바라보며 압도당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두려움에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엄 앞에서 느끼는 경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경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향한 경탄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도달할 수 없는데도 왜 더욱 힘을 쏟아 찬양하라고 할까?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 주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를 높여라. 그는 그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높이며 더욱 힘을 쏟아라. 지치지 마라. 너희는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집회서 43:30 · 본디새김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면 보통은 그 일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반대입니다.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힘을 쏟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인간의 능력을 증명하는 경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성취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발견한 하나님의 위대함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해를 바라보며 감탄했던 사람은 달을 보며 다시 감탄할 수 있습니다. 달과 별을 본 사람은 눈과 무지개를 보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순간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충분히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에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찬양의 실패가 아니라, 찬양이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보지 못한 것이 더 많지만, 하나님은 지혜를 주신다
누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누가 그를 보아서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누가 그를 있는 그대로 높이겠느냐?집회서 43:31 · 본디새김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3:18–23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전부 볼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욥기 38–41장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 세계에 관한 질문들을 던지십니다. 욥은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창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는 지혜가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모두 설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세계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가 한 일 가운데 조금만 보았습니다
이보다 더 큰 것들이 많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그가 한 일들 가운데 조금만 보았기 때문이다.집회서 43:32 · 본디새김
이 문맥에서 숨겨진 것들은 인간이 아직 보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특정한 천상의 비밀이나 미래 사건을 암시하는 것으로 좁히기보다, 창조 세계에 관한 인간의 지식이 제한되어 있다는 고백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는 자기비하가 없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조금은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조금의 지식이 찬양의 근거가 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부분적인 지식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올바르게 바라보도록 이끈다면 참된 지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43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납니다.
실로 주는 모든 것을 만들었고, 경건한 이들에게 지혜를 주었다.집회서 43:33 · 본디새김
왜 창조 찬양의 끝에 지혜가 등장할까요?
집회서는 처음부터 인간이 지혜를 어떻게 얻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43장에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가 인간의 지식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지혜는 인간이 자기 능력만으로 온전히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집회서 1:1의 첫 선언과 연결됩니다. 집회서는 모든 지혜가 주에게서 온다고 말하며 시작합니다. 창조 세계가 하나님에게서 나왔듯이, 그 세계를 올바르게 바라보고 살아가는 지혜도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시편 104:24는 하나님이 지혜로 만물을 지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집회서 43장 역시 지혜와 창조를 연결하지만, 마지막에는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도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경건한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경건한 사람은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거나, 신앙이 있으면 지식의 한계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 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일 가운데 조금만 보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아는 능력을 주기보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길을 열어 줍니다.
눈송이가 내려앉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모두 설명할 수 없더라도, 이미 발견한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는 만큼 그분의 지혜와 영광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43장이 보여 주는 경건한 지혜의 태도입니다.
이 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입니다.
저자는 눈이 새처럼 날아 내려앉는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 눈이 메뚜기 떼처럼 쏟아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눈이 내리는 평범한 겨울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눈에는 같은 눈송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가볍게 흩날리는 움직임도 있고, 수없이 많은 눈송이가 땅을 덮는 장관도 있습니다.
그 광경 앞에서 눈이 놀라고 마음이 넋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송이 하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도 아직 볼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물며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영광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저자는 그렇게 창조 세계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합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