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51장

이 장의 자리 · 51장 · 감사의 기도

죽음의 문턱에서 지혜의 집으로

집회서의 마지막 장은 예상과 조금 다르게 시작합니다. 평생 지혜를 가르쳐 온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요약하거나 마지막 교훈을 남기는 대신, 죽음의 문턱까지 몰렸던 기억을 꺼내 놓습니다. 그는 중상을 당했고, 거짓말에 둘러싸였으며,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그를 건져 내신 분이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13절에 이르면 장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어떻게 지혜를 찾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교훈을 들으라고 초대합니다.

앞부분에서 그는 남의 혀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보상이 바로 혀라고 말합니다.

그를 파멸시킬 뻔한 것도 사람의 말이었고, 그가 다른 사람에게 지혜를 전하는 도구도 말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다른 이들의 삶을 돕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751장 본문 읽기 →

사람의 말은 그를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키셨습니다

집회서 51:1–6 본문 →

첫 구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을 「주님, 임금님」이라고 부릅니다. 이어 「저의 구원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호칭은 6절을 읽을 때 특별한 의미를 얻습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임금에게 저자를 중상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인간의 임금 앞에서는 불의한 고발의 대상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임금으로 부르며 찬양합니다.

2절의 「혀의 중상이 놓은 올무」와 「거짓을 지어내는 입술」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무는 원래 짐승을 잡기 위해 숨겨 놓는 장치입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땅처럼 보이지만, 한 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저자는 중상을 바로 그런 것으로 경험했습니다. 거짓말은 한 번 퍼지기 시작하면 피해자가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해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그 말이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전달되면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3–5절에서는 위협을 묘사하는 이미지가 점점 격렬해집니다.

먼저 그를 삼키려는 자들의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다음에는 사방을 둘러싼 불이 등장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데스의 뱃속 깊은 곳」까지 내려갑니다.

저자는 자신이 일으키지 않은 불 속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자신이 초래하지 않은 재난에 휘말렸다는 호소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앞뒤에 거짓 중상에 관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점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그를 살린 것은 자신에게 위기를 헤쳐 나갈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보호자와 돕는 이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에서 나타나는 하데스는 그리스어로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여기에서는 6절의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묘사와 함께, 목숨을 잃을 만큼 깊은 위험에 빠졌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죽음 이후의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구절은 아닙니다. 한편 6절에는 중요한 원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제 마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찬양했고」라고 옮겼습니다. 이는 그리스어 에네센, ‘찬양했다’를 따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어 본문에는 엥기센, ‘가까이 다가갔다’가 나타납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죽음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뜻이 되어, 다음 행의 「제 생명은 저 아래 하데스 가까이에 있었습니다」와 자연스럽게 병행합니다. 앞의 읽기에서는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뒤의 읽기에서는 죽음에 거의 이른 절박한 상태가 강조됩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때, 그는 기억했습니다

집회서 51:7–12 본문 →

7절에는 같은 내용이 두 번 반복됩니다.

그들이 사방에서 저를 에워쌌으나 돕는 이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바라보았으나 아무 도움도 없었습니다.집회서 51:7 · 본디새김

여기서 저자는 처음부터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제로 사람의 도움을 기대했으나 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자비와 먼 옛날부터 당신이 하신 일을 기억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이들을 건져 내실 것이며, 그들을 민족들의 손에서 구하십니다.집회서 51:8 · 본디새김

위기가 해결되기 전에 먼저 일어난 변화는 기억이었습니다.

그는 눈앞의 상황에서 도움의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전부터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해 오셨다는 기억 위에서 기도합니다.

이것은 집회서 2:7–11에서 이미 강조된 주제입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자비를 기다리고, 어려운 시기에 그분을 신뢰하라고 권합니다. 이제 51장의 저자는 자신이 가르쳤던 그 태도를 실제 위기 속에서 어떻게 붙들었는지 고백합니다.

저는 땅에서 제 간청을 높였고, 죽음에서 건짐받기를 빌었습니다.집회서 51:9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데스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이미지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그는 땅에서 자신의 간청을 높입니다. 아래로 끌려가는 생명과 위로 올려 드리는 기도가 서로 대조됩니다.

본문에서 확실한 것은 저자가 하나님을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분으로 부른다는 점입니다. 그는 「환난의 날들」과 「도울 이가 없는 때」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 기도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당신의 이름을 늘 찬양하고, 감사하며 찬미를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간구가 받아들여졌습니다.집회서 51:11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은 앞에서 길게 묘사한 모든 위험에 대한 응답입니다. 사람에게서는 얻지 못했던 도움이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12절에서는 처음의 감사가 다시 울려 퍼집니다. 저자는 자신을 멸망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첫 번째 시를 마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제 주의 아버지이신 주」라는 표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문면에는 실제로 ‘주’, ‘아버지’, ‘나의 주’에 해당하는 말들이 이어지지만, 둘째 「주」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을 특정한 신학적 관계에 대한 명확한 선언으로 삼기 어렵습니다. 집회서 51장의 감사 기도는 시편의 여러 탄식과 감사의 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시편 142:4–7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없고 피할 곳도 없다고 호소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건져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집회서 51:7–12도 인간적인 도움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다는 점에서 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찾았다는 고백

집회서 51:13–17 본문 →

13절부터 저자는 독자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을 들려줍니다.

나는 아직 젊었을 때, 헤매기 전에, 기도하며 드러내 놓고 지혜를 구했다.집회서 51:13 · 본디새김

그는 지혜를 모든 경험을 마치고 나서 얻은 결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삶의 방향이 아직 만들어지고 있던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구했다고 말합니다.

성소 앞에서 지혜를 달라고 청했고, 마지막까지 지혜를 찾아 나설 것이다.집회서 51:14 · 본디새김

성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였고, 지혜를 구하는 일도 그 예배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혜는 단순히 경험 많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한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 선물을 얻기 위해 사람이 구하고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집회서 24:23에서 지혜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집회서의 지혜는 삶에서 능숙하게 처신하는 기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신 길을 알고 그 길을 살아가는 일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지혜를 이미 얻은 사람도 지혜를 계속 찾습니다.

15절은 이 오랜 여정을 포도의 성장에 비유합니다.

꽃이 핀 때부터, 익어 가는 포도처럼, 내 마음은 지혜 안에서 기뻐했다. 내 발은 곧은 길을 밟았고, 나는 젊은 시절부터 지혜의 발자취를 좇았다.집회서 51:15 · 본디새김

꽃은 열매의 시작이지만 아직 열매 자체는 아닙니다. 포도가 익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기쁨은 16절에서 배움의 태도로 이어집니다.

나는 귀를 조금 기울여 받아들였고, 나를 위한 많은 교훈을 찾았다.집회서 51:16 · 본디새김

여기서 「조금」과 「많은」의 대조가 눈에 띕니다. 이 대조는 배우려는 마음을 여는 일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가 열립니다.

나는 지혜 안에서 앞으로 나아갔다. 나에게 지혜를 주는 이에게 영광을 돌리겠다.집회서 51:17 · 본디새김

자신이 구하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지혜의 근원을 아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13–30절은 히브리어 전승에서 자음의 순서를 활용한 알파벳 시의 형태를 보입니다. 그 일부는 쿰란의 시편 두루마리인 11Q5에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시가 처음부터 현재의 위치를 위해 쓰였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집회서의 결말에 놓이면서 지혜를 찾는 삶을 하나의 완결된 여정처럼 보여 줍니다. 13절의 「헤매기 전에」라는 표현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어 플라네테나이는 길을 잃거나 떠돌아다니는 것을 나타낼 수 있으며, 문맥에 따라 잘못된 길로 벗어나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것을 잘못된 삶에 빠지기 전에 지혜를 찾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여행하거나 세상을 떠돌아다니기 전에 지혜를 찾았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집회서 34:9–12에서는 여러 곳을 다니며 얻은 경험과 지식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실제 여행의 의미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51장 자체만으로 어느 뜻인지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원문의 「꽃이 핀 때부터」라는 표현이 기쁨이 시작된 시점을 나타내는지, 포도가 익어 가는 비유와 결합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지혜를 향한 기쁨을 성장의 이미지와 연결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혜는 선물로 주어지지만,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집회서 51:18–22 본문 →

18절부터 지혜를 추구하는 일이 훨씬 힘겨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저자는 지혜를 실천하기로 결심했고, 선한 것에 열성을 쏟았다고 말합니다. 지혜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과 지혜를 실천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집회서의 가르침은 사람의 말과 행동, 가족관계, 경제생활, 권력과 약자를 대하는 태도까지 다루어 왔습니다. 지혜는 삶과 분리된 지식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은 지혜를 두고 힘껏 씨름해 왔고, 나는 굶는 일에도 철저했다. 나는 높은 곳을 향해 두 손을 펼쳤고, 지혜를 알지 못했던 일들을 슬퍼했다.집회서 51:19 · 본디새김

지혜를 찾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편안하지만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바꾸어야 할 수도 있고, 익숙한 욕망을 거절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손을 펼치는 행위는 기도의 자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는 지혜를 향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슬퍼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지혜를 찾아갈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분명하게 발견하는 경험이 나타납니다. 배움은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는 과정인 동시에, 자신에게 아직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20–21절에서는 그 노력이 결실을 맺습니다.

그는 마음을 지혜로 곧게 향했고, 정결함 가운데 지혜를 찾았으며, 마침내 「좋은 재산」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얻은 재산은 금이나 은이 아닙니다. 지혜 자체가 귀한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2절에는 예상 밖의 보상이 나타납니다.

주는 내게 혀를 내 삯으로 주었고, 나는 그 혀로 그를 찬양하겠다.집회서 51:22 · 본디새김

사람이라면 누구나 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혀는 단순한 신체 기관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지혜를 깨달은 것을 말로 표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집회서의 앞부분에서는 말을 잘못 사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거듭 경고해 왔습니다. 특히 28:13–26에서는 중상하는 혀가 사람들의 관계와 삶을 파괴하는 위험을 길게 묘사합니다.

지혜 자체뿐 아니라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까지 하나님의 선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나는 굶는 일에도 철저했다」에는 원문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어 전승에는 리무, ‘굶주림’이 나타납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음식에 대한 절제나 결핍을 견디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른 편집 그리스어 본문에는 노무, ‘율법’이 채택되어 있어,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철저했다는 뜻이 됩니다. 후자는 문맥을 고려한 교정 읽기로도 이해되므로 어느 한쪽을 확정적인 원문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두 읽기 모두 지혜를 찾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다루었다는 흐름에 놓이지만, 구체적인 실천 내용은 달라집니다.

지혜의 집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부릅니다

집회서 51:23–26 본문 →

23절은 따뜻하면서도 힘 있는 초대입니다.

배우지 못한 이들아, 내게 가까이 와라. 교훈의 집에서 묵어라.집회서 51:23 · 본디새김

고대의 지혜 교육은 오늘날처럼 정해진 학교 제도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가 중요했고, 지혜 교사는 자신의 경험과 전통을 학생들에게 전수했습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실제 별도의 학교 건물이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교훈의 집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실제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고, 스승의 가르침 아래 머무는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묵어라」라는 말은 단순히 방문하여 한 번 강의를 듣는 것보다 깊은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지혜는 잠깐 들렀다가 필요한 정보만 얻어 가는 방식으로 배우기 어렵습니다. 시간을 들여 머물고, 듣고, 실천하면서 조금씩 자기 삶에 익혀 가야 합니다.

너희가 이런 것들이 모자란다고 말하고, 너희 마음이 몹시 목말라 하기에,집회서 51:24 · 본디새김

목마름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는 상태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도 자신의 삶에서 방향을 잃거나 중요한 판단 앞에서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오라고 부릅니다.

나는 입을 열어 말했다. 「그들을 위해 은전 없이 교훈을 얻어라.」집회서 51:25 · 본디새김

이 구절의 그리스어는 앞 문맥의 지혜를 「너희 자신을 위해」(ἑαυτοῦ) 값없이 얻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초대는 이사야 55:1–3의 물과 양식을 값없이 얻으라는 부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은 모두 사람의 깊은 결핍을 말하면서, 참으로 필요한 것을 단순한 금전 거래의 대상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26절은 곧바로 다른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너희 목을 멍에 아래에 두고, 너희 마음이 교훈을 받아들이게 하여라. 교훈은 가까이에 있어 찾을 수 있다.」집회서 51:26 · 본디새김

멍에는 짐승에게 씌워 일을 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멍에 아래에 목을 둔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고 일정한 방향과 훈련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집회서 6:24–30에서도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에게 발을 속박에 넣고, 목을 지혜의 멍에 아래에 두라고 권합니다. 그곳에서 멍에는 처음에는 부담스럽지만 결국 영광스러운 장식처럼 바뀝니다.

지혜는 돈이 없다고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런 부담 없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를 찾기 위해 세상의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를 기울이고 배우려는 사람에게 지혜는 가까이 있습니다.

지혜의 문은 열려 있지만, 그 문 안에서 살아가려면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또한 지혜를 찾는 교사의 초대는 잠언 8:1–11에서 지혜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부르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지혜는 숨어서 일부 사람에게만 자신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라고 초대합니다.

멍에 아래에서 발견하는 쉼

집회서 51:27–30 본문 →

27절은 앞의 멍에 이미지와 뜻밖의 대조를 이룹니다.

「너희 눈으로 보아라. 나는 조금 수고하고도 나를 위한 많은 쉼을 찾았다.」집회서 51:27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저자는 지혜를 얻기 위해 힘껏 씨름했다고 말했으며, 이제 학생들에게는 멍에를 받아들이라고 권했습니다. 실제로 노력이 거의 필요 없었다는 뜻으로 읽으면 앞의 고백과 어긋납니다. 오히려 그가 얻은 결과에 비해 자신의 수고가 작게 느껴졌다는 고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쉼」도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내적인 안정과 만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기 전에는 무엇이 옳은지 몰라 흔들렸지만, 이제는 삶의 방향을 알기에 이전과 다른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28절에서는 다시 금전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많은 은전을 들여 교훈에 참여하고, 그것으로 많은 금을 얻어라.」집회서 51:2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은전 없이 지혜를 얻으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많은 은전을 들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 가지 읽기는 지혜가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는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돈으로 지혜 자체를 살 수 있다는 뜻보다는 재물을 아끼지 않을 만큼 지혜를 귀하게 여기라는 권고입니다.

다른 읽기는 실제로 지혜 교육을 위해 지출할 수 있는 비용을 인정하면서, 그 결과로 얻는 것이 훨씬 값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두 표현 사이에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두 구절 모두 지혜의 가치를 금전으로 충분히 측정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읽힙니다.

지혜를 은과 금에 비유하는 것은 잠언에서도 나타납니다. 잠언 3:13–15는 지혜에서 얻는 유익을 은이나 금보다 귀하게 말합니다. 집회서의 저자도 지혜를 얻기 위해 들인 비용과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가치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두 절에서는 화제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너희 마음이 그의 자비 안에서 기뻐하기를, 그를 찬미하며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집회서 51:29 · 본디새김

저자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얻은 것과 같은 기쁨을 바랍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근거는 교사의 탁월함이나 학생들의 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때가 오기 전에 너희 일을 하여라. 그러면 그가 자기 때에 너희 삯을 줄 것이다.」집회서 51:30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두 시간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사람이 일해야 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삯을 주시는 때입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보상을 마음대로 끌어낼 수 있다는 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때에 보상하신다는 믿음 속에서, 지금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라는 권고입니다.

이것은 8절의 「끈기 있게 기다리는 이들」이라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오늘 해야 할 일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오늘의 수고에 충실하면서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마지막까지 집회서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마태복음 11:28–30에서는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시며 자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집회서 51:26–27의 멍에와 쉼이라는 표현은 이 말씀과 주제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다만 마태복음이 집회서 51장을 직접 인용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집회서에서는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삶이 강조되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에게 나아와 그에게 배우는 것이 강조됩니다.

맺으며 — 지혜를 얻은 사람이 입을 열다

집회서 51:1–30 본문 →

그는 젊은 시절부터 지혜를 찾아왔지만, 그 여정의 마지막에 자신만을 위한 완성된 삶을 세우지 않습니다. 지혜를 전하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런데 집회서는 마지막에 교사를 혼자 남겨 두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얻은 지혜를 품은 채 조용히 물러나지 않습니다. 교훈의 집을 열고,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부릅니다. 「배우지 못한 이들아, 내게 가까이 와라. 교훈의 집에서 묵어라.」

한때 거짓된 혀 때문에 죽음 가까이 갔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께 받은 혀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의 앞에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전히 목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있고, 그 안에서 들을 수 있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집회서의 마지막 장면은 지혜를 모두 얻은 한 사람의 완성이 아니라, 그가 문을 열어 다른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