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빗기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니느웨의 토빗 집안
빼앗긴 땅에서도 잃지 않은 길
토빗기 1장에는 한 사람의 삶을 뒤집어 놓는 뜻밖의 변화가 있습니다. 아시리아 왕의 신임을 얻어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던 사람이, 나중에는 다음 왕이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묻습니다. 왕의 호의를 받던 그는 결국 왕에게 쫓겨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도망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충실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고향을 잃고, 재산을 잃고, 생명까지 위협받는다면 그 충실함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토빗기 1장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토빗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지키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차례로 보여 줍니다.
이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토빗이 예루살렘에서 지키던 신앙이 니느웨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상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포로의 이야기
토빗기는 낯선 이름들의 긴 목록으로 시작합니다. 토빗에게는 아버지 토비엘이 있고, 그 위로 하난엘과 아두엘을 비롯한 여러 조상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가 납달리 지파에 속한다고 밝힙니다.
곧이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 시대에 티스베에서 포로로 잡혀갔다. 티스베는 상부 갈릴리에 있는 납달리의 게데스 오른쪽, 하솔 위쪽, 해 지는 쪽 뒤편, 포고르 왼쪽에 있었다.토빗기 1:2 · 본디새김
아시리아의 포로 정책은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통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땅과 성소뿐 아니라 자신이 어느 백성에 속하는지를 지켜 나가는 일도 중요해졌습니다.
그의 현재 거주지는 니느웨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니느웨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는 납달리 지파에 속한 사람이며,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의 역사를 지닌 사람입니다.
1–2절에서는 토빗을 소개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3절에서는 토빗 자신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 토빗은 평생 진실의 길을 걸으며 의롭게 살았다. 나는 나와 함께 포로로 아시리아 땅 니느웨에 간 내 형제들과 내 민족에게 구제를 많이 베풀었다.토빗기 1:3 · 본디새김
특히 이 구제에 관한 진술은 16절에서 다시 등장하고, 17절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펼쳐집니다. 처음의 자기소개가 뒤에서 실제 사건으로 확인되는 구조입니다.
토빗이 지키려는 정체성은 혈통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삶으로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15:29는 납달리 지역의 주민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간 왕을 디글랏빌레셀이라고 기록합니다. 반면 토빗기 1:2는 살만에셀 시대라고 말합니다. 열왕기하 17:3–6은 살만에셀이 관여한 북이스라엘 말기의 정복과 포로 사건을 다룹니다. 따라서 토빗기의 연대를 열왕기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인의 연대기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토빗기는 실제 아시리아 지배와 이스라엘의 포로 경험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의 모습을 이야기로 그려 냅니다.
모두가 단으로 향할 때 예루살렘으로 가다
토빗은 포로 시절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젊은 시절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회상은 가족이 살던 아름다운 고향의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떠난 사건을 먼저 말합니다.
내가 내 고향 이스라엘 땅에 있을 때, 내가 아직 젊었을 때, 나의 조상 납달리의 온 지파는 나의 조상 다윗의 집안과 예루살렘을 떠났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제사를 바칠 곳으로 정해진 도시였다.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영원토록 모든 세대를 위해 그 도시에 세워졌다.토빗기 1:4 · 본디새김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계속 올라가면 다시 다윗 왕조에 마음을 돌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이 그곳에서 예배하도록 했습니다(열왕기상 12:26–33).
단은 북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주요 성소였으므로, 납달리 지파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보다 가까운 예배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토빗은 이 현실을 단순한 편의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토빗은 자신이 북이스라엘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북쪽 지파들만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둘로 나뉘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백성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명기 12:5–14와 연결됩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각자 원하는 곳에서 제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예배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 명절에 자주 예루살렘으로 갔다. 온 이스라엘에 영원한 명령으로 기록된 대로였다. 나는 첫 예물과 첫 소출과 가축의 십일조와 양에게서 처음 깎은 털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토빗기 1:6 · 본디새김
여기서 ‘나 혼자만’은 토빗이 자신의 충실함을 강조하는 회고의 표현입니다. 이를 당시 납달리 지파에서 토빗 외에는 단 한 사람도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는 역사적 통계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토빗의 예배가 소극적인 의무 이행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번거롭고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토빗이 젊은 시절에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길은 나중에 아시리아로 끌려가면서 더 이상 이전처럼 걸을 수 없는 길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배운 삶의 태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는 것은 떨어져 있지 않다
7–8절에는 상당히 자세한 제물과 십일조의 목록이 등장합니다.
첫 예물과 첫 소출, 가축의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주었습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와 여러 열매의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또 다른 십일조를 은전으로 마련하여 예루살렘에서 사용했습니다.
민수기 18:21–32는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십일조를 다루고, 신명기 14:22–27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십일조로 음식을 마련하여 먹고 기뻐하는 일을 설명합니다. 특히 신명기는 먼 곳에 사는 사람이 소출을 모두 운반하기 어려우면 그것을 은으로 바꾸어 가져가도록 허용합니다(신명기 14:24–26). 토빗이 은전을 마련하여 예루살렘에서 사용했다는 설명은 이러한 규정과 연결됩니다.
이어서 토빗은 셋째 해의 나눔을 이야기합니다.
또 나는 그것들을 고아와 과부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합류한 이주민들에게 주었다. 셋째 해에 그것들을 가져가 그들에게 주었고,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서 그들에 관해 정한 명령과 우리 조상 하난엘의 어머니 드보라가 명한 계명에 따라 그것들을 먹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나를 고아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토빗기 1:8 · 본디새김
이것은 신명기 14:28–29 및 26:12–13의 규정과 관련됩니다. 그곳에서는 십일조를 레위 사람과 이주민, 고아와 과부가 먹고 배부르게 하도록 명령합니다.
토빗의 설명은 여러 십일조를 구별하기 때문에, 신명기에 나오는 규정들을 각각 독립된 십일조로 이해한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율법 본문 자체가 모든 십일조를 어떻게 서로 계산하도록 의도했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토빗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예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을 ‘우리가 먹었다’고 회상합니다. 이는 나눔이 단순한 재산 이전만이 아니라 함께 먹는 식탁의 모습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제단 앞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토빗이 이해한 율법의 삶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사람들을 먹이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본문은 토빗이 고아였기 때문에 다른 고아를 도왔다고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고아였다는 기억을 바로 이 자리에서 언급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더욱이 그는 율법과 함께 조상 드보라의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드보라는 여기서 사사기의 여예언자 드보라와 동일 인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토빗 가문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가르쳐 준 조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가르치는 규정으로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전해졌고, 부모를 잃은 아이의 삶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토빗은 자신이 물려받은 신앙을 다시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음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9절에서 그가 결혼하여 아들 토비야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이런 점에서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조상에게서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이었고, 이제는 다음 세대에 그것을 전해야 할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빵을 먹지 않았지만, 자신의 빵은 나누었다
장면은 다시 니느웨로 옮겨집니다.
토빗은 포로가 된 뒤 자신과 함께 끌려온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의 빵을 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방 사람들의 빵을 먹지 않도록 나 자신을 지켰다.토빗기 1:11 · 본디새김
여기서 ‘이방 사람들의 빵’이 정확히 어떤 음식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율법에서 금지한 음식을 포함했을 수도 있고, 이방 사회의 식사 관습이나 종교적인 문제와 관계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이방인이 만든 모든 음식이 율법상 부정하다는 뜻으로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다니엘 1:8에서 다니엘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결심하는 장면이 비슷한 문제를 다룹니다. 두 이야기 모두 포로가 된 사람이 이방 왕국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먹을 것인지에 관해 신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중함이 17절의 「굶주린 이들에게 내 빵을 주었고」라는 말처럼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 태도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거절하는 일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어 주는 일이 한 사람의 삶 안에 공존합니다.
12절은 그가 이렇게 살아간 이유를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내가 온 마음으로 나의 하나님을 기억했을 때,토빗기 1:12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배운 교리를 잊지 않는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토빗은 하나님을 기억했기 때문에 먹는 일을 달리했고, 재산을 사용하는 방식을 달리했으며,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죽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달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기억은 삶의 방향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8:11–18이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도 단지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잊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잊고, 삶의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토빗 역시 아시리아 왕국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이 누구 앞에서 살아가는지를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왕의 호의를 얻은 사람에게 모든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토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호의를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높은 이가 나로 하여금 살만에셀에게 호감을 사고 좋은 인상을 주게 했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사 주었다.토빗기 1:13 · 본디새김
이것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실의 물품 구매를 담당한다는 것은 상당한 신뢰와 실무 능력이 요구되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토빗은 메대까지 오가며 왕의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은 열 탈란톤을 맡겼습니다.
은 열 탈란톤은 적지 않은 재산입니다. 본문은 정확한 화폐 환산보다, 토빗이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먼 지역의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겨 두었다는 사실을 전달합니다.
이 돈은 14절에서 잠깐 등장하지만, 독자는 그 존재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뒤 토빗은 자기 재산을 모두 빼앗겼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왕실이 압수한 재산과 메대에 맡긴 돈은 서로 다른 장소에 있었습니다.
15절에서 왕이 죽고 권력이 바뀌자 메대로 가는 길이 끊깁니다.
토빗은 자신이 쌓아 놓은 재산과 능력만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는 왕실의 신임과 경제적 안정을 소개한 직후 그것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토빗은 왕의 호의를 얻은 뒤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은 곧 왕의 뜻과 충돌하게 됩니다.
성벽 뒤에 버려진 사람들을 묻다
16절에서 토빗은 다시 자신이 행한 구제를 이야기합니다.
굶주린 이들에게 내 빵을 주었고, 헐벗은 이들에게 겉옷을 주었다. 내 민족 가운데 누군가가 죽어 니느웨 성벽 뒤에 내버려져 있는 것을 보면 그를 묻었다.토빗기 1:17 · 본디새김
앞의 두 행위는 살아 있는 사람을 돌보는 일입니다. 마지막 행위는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음식을 줄 수도, 옷을 입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토빗은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시신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과 그 가족에 대한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시신이 들판이나 성 밖에 버려져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도 시신을 함부로 방치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신명기 21:22–23은 나무에 달려 처형된 사람의 시신을 밤새 그대로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도록 명령합니다. 그 규정은 특별한 처형 상황을 다루지만, 죽은 사람의 몸을 계속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또한 사무엘상 31:11–13에서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모욕당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토빗의 행동도 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닙니다. 그는 단순히 장례를 도운 것이 아니라, 권력의 폭력 때문에 정상적인 장례를 치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의무를 다하려 했습니다.
18절에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산헤립은 하늘의 왕이 그의 모독 때문에 그를 심판하던 날들에 유대에서 달아나왔다. 그때 그가 누군가를 죽이면 나는 그를 묻었다. 당시 산헤립은 분노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나는 그들의 시신을 훔쳐다가 묻곤 했다. 산헤립은 그 시신들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토빗기 1:18 · 본디새김
아시리아의 왕은 제국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고, 그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통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토빗기의 서술자는 아시리아 왕 위에 또 다른 왕이 계심을 말합니다.
하늘의 왕입니다.
아시리아 왕은 죽은 사람의 몸을 찾으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이 옳은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토빗은 재물을 훔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장례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왕의 통제를 거스른 것입니다.
왕이 찾는 것은 시신이고, 토빗이 지키려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마지막 의무입니다.
토빗의 의로움은 단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버려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데에도 있습니다.
이 행동은 곧 그 자신의 안전을 무너뜨립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산헤립이 유대에서 달아났다는 설명은 열왕기하 18–19장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곳에서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위협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니느웨로 돌아갑니다(열왕기하 19:35–36).
의로운 행동이 불러온 박해
토빗의 선행은 오래 숨겨지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사람 하나가 가서 내가 그들을 묻는다고 왕에게 알렸다. 나는 몸을 숨겼다. 왕이 나에 관해 알게 되었고 나를 죽이려고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두려워 달아났다.토빗기 1:19 · 본디새김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려고 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인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는 않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도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토빗이 보여 준 용기는 죽음이 무섭지 않다는 확신보다, 위험이 따를 수 있는 일을 실제로 행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는 가혹했습니다.
내게 있던 것은 모두 빼앗겼다. 내게 남은 것은 내 아내 안나와 내 아들 토비야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왕실로 가져갔다.토빗기 1:20 · 본디새김
이는 그의 가족만큼은 왕실의 압수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재산을 빼앗기는 장면에서 가족이 남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구별합니다.
토빗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눔 때문에 자신의 것을 강제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자기 빵을 내어 주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재산을 잃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에게 장례를 마련해 주던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도망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그의 선행을 잘못된 선택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토빗의 고백은 여전히 3절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진실과 의로움의 길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왕은 죽고, 추방자는 돌아오다
토빗이 모든 것을 잃은 뒤 이야기는 갑자기 궁정의 사건으로 옮겨집니다.
산헤립이 두 아들에게 살해되고,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 아래에서 뜻밖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아키카르입니다. 그는 토빗의 조카로 소개되며, 왕국의 재정과 행정에 중요한 권한을 가진 인물입니다. 아키카르는 토빗을 위해 청원했고, 토빗은 니느웨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3절에서는 지극히 높은 이가 토빗으로 하여금 왕의 호의를 얻도록 하셨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나 22절에서 토빗이 돌아올 때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토빗이 회복의 기회를 얻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왕조의 교체와 아키카르의 중재였습니다.
물론 독자는 이를 하나님의 돌보심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일일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토빗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었고,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묻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행동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하 19:37과 이사야 37:38 역시 산헤립이 아들들에게 살해되고 에살핫돈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들의 실제 계보에는 살만에셀과 산헤립 사이에 사르곤 2세가 있으며, 산헤립의 유다 원정과 그의 죽음 사이에도 상당한 시간이 있습니다. 토빗기의 ‘사십 일이 지나기도 전에’라는 표현을 실제 아시리아 역사 전체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장면은 세밀한 왕실 연대기보다는 토빗의 운명을 뒤바꾼 정권 교체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아키카르는 고대 근동의 지혜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토빗기는 이 인물을 토빗의 친족으로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혜로운 궁정 신하의 전승이 토빗의 가족 이야기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다시 니느웨로
토빗기 1장이 먼저 보여 주는 것은, 삶의 형편이 달라져도 하나님께 대한 충실함이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먼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의 성벽 뒤에 버려진 사람에게 다가가는 길은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토빗이 왕의 호의를 얻게 하셨지만, 그가 왕에게 쫓기는 일까지 막아 주셨다고 기록되지는 않습니다. 토빗은 다시 니느웨로 돌아왔지만, 그가 잃은 모든 것을 회복했다는 결말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메시지를 ‘하나님께 충실하면 결국 모든 일이 잘된다’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돌아온 곳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그가 포로 생활을 하던 바로 그 도시, 니느웨입니다.
그곳에는 자신이 먹였던 굶주린 사람들이 있고, 자신이 옷을 주었던 헐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그가 몰래 거두어 묻었던 이들의 무덤도 있습니다.
이제 토빗은 다시 니느웨에 들어옵니다. 왕의 물품을 사던 사람도, 모든 재산을 가진 사람도 아닌 채로 돌아옵니다. 그의 곁에는 아내 안나와 아들 토비야가 있습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어떤 길을 걸어온 사람인지는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바로 그 사람을 따라 계속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