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빗기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3–14장 · 감사 노래와 마지막 말
무너지는 니느웨와 남는 말씀
토빗기는 한 사람의 눈이 열리고, 한 가정이 회복되는 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은 그보다 훨씬 먼 곳을 바라봅니다.
토빗은 자신이 살던 도시가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자기 후손들의 미래를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 속에서 이야기합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니느웨의 견고한 성벽도, 오랜 세월 축적한 재산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토빗은 미래의 모든 일을 자기가 해결해 주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이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토빗은 죽기 전까지 무엇을 계속했는가
14장은 토빗의 죽음을 먼저 기록합니다.
이렇게 토빗의 감사 찬송의 말들이 끝났다. 그는 백열두 살에 평안히 죽었고, 니느웨에 영예롭게 묻혔다.토빗기 14: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토빗은 포로의 땅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찬송하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노래했습니다. 이제 그 찬송을 마친 사람이 자신의 생애도 마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 뒤, 다시 그의 마지막 날들로 돌아갑니다. 14:3부터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 이어지고, 14:11에서 그의 죽음이 다시 서술됩니다. 먼저 생애의 결말을 요약하고, 그 결말에 이르기 전에 남긴 중요한 말을 들려주는 서술 방식입니다.
그가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평안히 죽었다는 말
그는 고향을 떠나 포로로 살았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며, 시력을 잃고 죽음을 간구할 만큼 괴로워했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고난이 없었던 삶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고난을 지나 맞이한 마지막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가 눈이 멀었을 때는 예순두 살이었다. 다시 보게 된 뒤에는 풍족하게 살며 구제를 베풀었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위엄을 고백했다.토빗기 14:2 · 본디새김
그의 회복된 삶을 요약하는 행동은 재산을 늘리는 일이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일이 아닙니다. 구제와 찬송입니다. 이것은 토빗기 첫 장에서 소개된 그의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그는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동족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죽은 이들을 묻어 주었습니다(토빗 1:16–18).
토빗의 삶에서 고난은 끝났지만, 고난 이전부터 행하던 선한 일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토빗은 아들에게 낯선 삶의 원칙을 갑자기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음 세대에게 건네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이 따르는 시내 사본에서는 토빗이 백열두 살에 죽고 예순두 살에 시력을 잃었다고 하지만, 다른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실명 당시 나이를 쉰여덟 살로 기록합니다. 따라서 각 나이를 이용해 정확한 생애 연표를 만들 때에는 본문 전승의 차이를 고려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왜 니느웨를 떠나라고 하는가
토빗은 아들 토비야를 불러 말합니다.
「얘야, 네 자녀들을 데리고 떠나서」 「메대로 달아나라.」
이제 토비야에게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한때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 먼 길을 떠났던 청년이 이제는 자기 자녀들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안전을 넘어 가족의 미래를 생각하는 명령입니다.
토빗은 예언자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에 아들의 거처까지 바꾸라고 권합니다.
나훔과 니느웨
나훔서는 아시리아의 중심 도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나훔 3:1은 니느웨를 피의 성읍이라고 부르며, 속임수와 약탈이 가득한 도시로 고발합니다. 나훔 3:5–7에서는 니느웨가 수치와 황폐를 당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니느웨의 멸망을 하나님께서 불의와 폭력에 대해 행하시는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그가 살고 있는 제국은 강합니다. 그 제국은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강제로 옮겼습니다. 토빗 자신도 그러한 제국의 지배 아래 포로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토빗은 그 제국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이 익숙하게 살아온 곳을 떠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디새김이 따르는 시내 사본은 예언자의 이름을 나훔으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바티칸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대표로 하는 다른 그리스어 본문 계열에서는 요나가 등장합니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그러므로 토빗이 멸망을 확신하는 맥락에서는 나훔이라는 이름이 직접적으로 어울립니다. 반면 요나서에서 니느웨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돌이켜 심판을 피했던 도시입니다(요나 3:5–10). 요나를 언급한 전승을 따른다면, 한때 심판을 면했던 도시의 멸망을 이제 다시 이야기한다는 긴장이 생깁니다. 요나서는 악에서 돌이키는 민족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훔서는 폭력과 약탈을 일삼는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불의를 영원히 용인한다는 뜻은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이 그분의 자비를 부정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한마디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 — 무너지는 제국과 남는 말씀
14:4에서 토빗은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반복해서 선언합니다.
「메대로 달아나라. 나는 니느웨를 두고 나훔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 아시리아와 니느웨에 닥칠 것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일도 다 닥칠 것이다. 그 모든 말씀에서 아무것도 줄어들지 않고, 모든 일이 저마다의 때에 일어날 것이다. 메대에서는 아시리아 사람들 가운데서나 바벨론에서보다 더 안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모두 이루어져 일어나고, 그 말씀들 가운데 한마디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알고 믿는다. 이스라엘 땅에 사는 우리 형제들은 모두 그 수가 헤아려지고, 그 좋은 땅에서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이스라엘의 온 땅이 황폐해지고 사마리아와 예루살렘도 황폐해질 것이며, 하나님의 집은 슬픔에 잠기고 한동안 불탈 것이다.」토빗기 14:4 · 본디새김
토빗이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변합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며, 사람들이 강제로 고향을 떠나고, 한때 번영하던 도시가 폐허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변화를 겪으면서도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성취는 인간이 조급하게 앞당기거나 자신의 생애 안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여호수아 21:45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선한 말씀 가운데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열왕기상 8:56에서도 솔로몬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도 헛되지 않았다고 찬송합니다.
이제 토빗은 그 약속의 다른 절반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14:4는 니느웨의 멸망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황폐, 성전의 파괴와 포로 생활을 모두 앞으로 일어날 일처럼 이야기합니다. 역사적으로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함락은 기원전 722년경, 니느웨 함락은 기원전 612년,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기원전 587/586년에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들을 토빗 개인의 생애와 엄밀하게 맞추면 연대상 어려움이 생깁니다. 특히 토빗은 이미 북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경험한 인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토빗이 실제 역사 속에서 모든 사건을 미래로 예측한 정확한 연대 기록으로 취급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한 가지 설득력 있는 문학적 이해는, 이야기의 서술자가 이스라엘이 겪은 여러 역사적 재난과 회복의 소망을 토빗의 마지막 유언에 모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본문은 연대순 역사 개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라는 신학적 증언으로 기능합니다.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만, 아직 처음과 같지 않다
토빗은 이스라엘이 겪을 재난을 숨기지 않습니다.
14:4의 ‘하나님의 집’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포로들에게 성전의 파괴는 단순히 중요한 건물 하나를 잃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임재를 기념하던 중심 공간이 무너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다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 집을 다시 세우겠지만, 정해진 시기들이 다 차는 때까지는 처음 집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 뒤에 그들은 모두 포로살이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영예롭게 세울 것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을 두고 말한 그대로다.」토빗기 14:5 · 본디새김
본문에서 회복의 첫 주체는 포로들 자신이 아닙니다. 회복을 시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돌아온 백성은 그 자비에 응답하여 다시 집을 세웁니다.
왜 두 번의 회복처럼 말하는가?
왜 성전의 재건을 이야기한 뒤에 또 다른 회복을 기대합니까?
여기에는 단순한 귀환과 궁극적인 회복 사이의 차이가 놓여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 유다 사람들은 실제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러나 재건된 성전이 과거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 같지 않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에스라 3:12에서는 첫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이 새 성전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고 크게 울었습니다. 학개 2:3도 현재의 성전이 이전의 영광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어 보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토빗기 14:5 역시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성전이 다시 세워졌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반드시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회복을 두 단계로 바라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포로들이 돌아와 성전을 다시 세웁니다. 그러나 아직 처음과 같은 회복, 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충만한 회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정해진 때가 다 차면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집이 더욱 영예롭게 세워질 것입니다.
다만 그 마지막 회복이 정확히 어떤 건축물이나 역사적 시점을 가리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미래에 특정한 성전이 반드시 세워질 것이라는 상세한 건축 예언으로 해석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무엇보다 성전 재건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의 귀환을 넘어, 모든 민족이 돌아온다
토빗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머물지 않습니다.
「온 땅의 모든 민족이, 모두가 돌아와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할 것이다. 모두가 거짓으로 자기들을 미혹에 빠뜨리던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토빗기 14:6 · 본디새김
여기서 ‘돌아와’라는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 땅으로 이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이 돌아온다는 것은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 2:2–4와 연결됩니다. 이사야는 많은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올라와 그분의 길을 배우는 모습을 예언합니다.
14:4에서는 아시리아가 심판받고 니느웨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14:6에서는 온 땅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제국의 불의를 심판하신다는 사실과, 민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 함께 놓이는 것입니다.
누가 안전하게 살게 되는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롭게 찬송할 것이다. 그날들에 구원받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기억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한데 모여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땅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살 것이고, 그 땅은 그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기뻐하고, 죄와 불의를 행하는 이들은 온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토빗기 14:7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이나 민족적 소속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기억하고 사랑하는 일이 중요하게 제시됩니다.
아브라함의 땅에서 안전하게 살게 된다는 약속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의 약속과 이어집니다(창세기 12:7; 17:8). 또한 에스겔 37:21–28에서 흩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모여 자기 땅에서 안전하게 살 것이라는 회복의 소망과도 연결됩니다.
토빗에게 구원이란 단순히 지배자가 바뀌는 일이 아닙니다. 억압과 속임수와 불의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망은 한 나라의 회복에서 시작하지만, 온 땅의 변화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엄한 미래의 전망 다음에 토빗은 아주 구체적인 가정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남긴 것은 재산보다 삶의 방식이었다
「이제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 보시기에 기쁜 일을 해라. 너희 자녀들에게도 의를 행하고 구제를 베풀라는 명이 주어질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제나 진실하게 온 힘을 다해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이제 얘야, 너는 니느웨에서 나가 여기 머물지 마라.」토빗기 14:8 · 본디새김
토빗은 세계사의 미래를 이야기한 뒤, 그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이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이것은 토빗기가 처음부터 보여 준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토빗의 가르침은 토비야에게서 멈추지 않습니다.
토비야는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같은 삶의 방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재산은 상속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롭게 사는 삶은 다음 세대가 스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기억은 종종 행동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8:11–18에서는 이스라엘이 풍요를 누릴 때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이 가진 능력과 재물이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토빗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가르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자비를 잊지 않고, 그 자비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에 불의를 없애실 것이라는 소망은, 지금 불의를 행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됩니다. 장차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오늘 자신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토빗은 미래에 대한 소망과 현재의 행동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토빗기의 가르침을 선한 행동을 하면 반드시 장수하고 풍족하게 산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토빗 자신이 선한 일을 하면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가 의롭게 살았다는 사실이 시련을 막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가 믿었던 하나님의 자비나 의로운 삶의 가치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니느웨의 죄를 한 사람의 이야기로 보여 주다
토빗은 자녀들에게 선한 삶을 가르친 뒤 다시 니느웨를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토빗은 자신이 죽자마자 아들이 떠나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돌보고 장례를 치르는 책임을 다한 뒤 떠나라고 합니다.
「네 어머니를 나와 함께 묻는 날, 바로 그날부터 니느웨의 경계 안에서 밤을 보내지 마라. 내가 보니 그 안에는 불의가 많고 속임수가 많이 행해지는데도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얘야, 나답이 자기를 길러 준 아키카르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보아라. 아키카르는 산 채로 땅속에 내려보내진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그 수치를 나답의 얼굴에 되돌리셨다. 아키카르는 빛으로 나왔고, 나답은 아키카르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영원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구제를 베풀었을 때, 아키카르는 나답이 그를 잡으려고 놓은 죽음의 올무에서 벗어났다. 나답은 죽음의 올무에 빠졌고, 그 올무가 그를 파멸시켰다.」토빗기 14:10 · 본디새김
이것은 악행이 개인의 일탈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에 익숙해진 상태를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 6:15에서도 하나님은 가증한 일을 행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백성을 책망하십니다. 죄를 행하면서도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심판의 징후로 등장합니다.
아키카르와 나답은 누구인가
토빗기 첫 장에서 아키카르는 아시리아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는 토빗과 친족 관계에 있으며, 토빗이 어려움을 겪을 때 그를 도왔던 사람입니다(토빗 1:21–22; 2:10).
이 이야기는 고대에 전해지던 「아키카르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그 이야기에서 아키카르는 높은 지위에 오른 지혜로운 관리이고, 자신이 길러 준 나답의 배신으로 죽음의 위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결국 아키카르는 살아남고 배신자는 자신이 꾸민 계략의 대가를 치릅니다.
토빗기는 이 사건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인 것처럼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아키카르와 나답의 이야기는 니느웨의 도덕적 상태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돌보아 준 사람을 배신합니다. 그 배신은 상대를 죽이려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다툼이 아니라, 신뢰와 은혜를 배반하는 행동입니다.
빛으로 나온 사람과 어둠으로 들어간 사람
빛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어둠은 배신자가 맞이하는 파멸을 나타냅니다.
아키카르는 아래로 내려갔다가 밖으로 나옵니다. 나답은 남을 떨어뜨리려다가 자신이 떨어집니다.
잠언 26:27은 함정을 파는 사람이 그 안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사람에게 그 돌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7:15–16에서도 악인이 자신이 판 구덩이에 빠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나답의 파멸은 그가 아키카르에게 하려고 했던 바로 그 악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악인이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자신이 꾸민 계략에 똑같이 당한다는 보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사건을 통해 불의가 결국 생명을 파괴한다는 도덕적 진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구제가 생명과 연결되고, 불의가 죽음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시내 사본에는 구제를 행한 주체를 ‘나’라고 읽게 하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죽음의 올무를 벗어난 사람은 아키카르입니다. 다른 본문 전승에서는 이 구절을 아키카르가 구제를 베풀었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시내 사본의 문면 그대로라면 토빗의 구제와 아키카르의 구원이 연결되는 셈인데, 그 구체적인 관계는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에게 어떤 구제를 베풀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원에 이르렀는지 확정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토빗의 죽음 — 남겨진 사람에게 맡겨진 책임
「이제 얘들아, 구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불의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아라. 불의는 사람을 죽인다. 보아라, 내 목숨이 다해 간다.」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눕혔고, 그는 죽었다. 그는 영예롭게 묻혔다.토빗기 14:11 · 본디새김
이것은 앞서 그가 평생 살아온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토빗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를 베풀었고, 죽은 사람들을 묻어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구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아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는 자신의 삶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은 그의 죽음을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의 특별한 환상이나 기적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이제 이야기의 중심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옮겨 갑니다.
14:12는 토비야가 어머니 안나가 죽은 뒤 어머니를 아버지와 함께 장사 지냈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 니느웨를 떠납니다.
아버지의 예언을 믿는다는 이유로 어머니에 대한 돌봄을 버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핑계로 아버지의 경고를 영원히 미루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가 메대에 도착했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늙은 장인과 장모를 공경하며 보살폈다. 그들을 메대의 엑바타나에 묻었고, 라구엘과 자기 아버지 토빗의 집안 재산을 물려받았다.토빗기 14:13 · 본디새김
토비야가 처음 메대로 떠날 때는 아버지의 부탁을 수행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사라의 남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메대에서 그는 두 가문의 책임을 맡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상속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가 늙은 장인과 장모를 공경하며 보살폈다고 말합니다. 토비야가 물려받는 재산은 아무런 관계 없이 얻은 보상이 아닙니다. 두 집안의 삶과 책임을 함께 이어받는 과정에서 주어집니다.
장례가 연결하는 두 세대
토빗기에는 매장이 중요한 행동으로 반복됩니다.
토빗은 죽은 동족을 묻어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위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버려두지 않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 토비야가 부모를 묻습니다. 이어 장인과 장모도 묻습니다.
아버지가 행하던 돌봄의 방식이 아들의 삶에서 다른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토비야는 아버지가 가르친 것을 말로만 기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실행합니다.
그렇게 한 세대가 떠나고 다음 세대가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토비야의 삶도 평온한 노년의 이야기로만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말한 니느웨의 운명을 보게 됩니다.
토비야는 아버지가 보지 못한 일을 보았다
그는 백열일곱 살에 영예롭게 죽었다.토빗기 14:14 · 본디새김
그는 죽기 전에 니느웨의 멸망을 보고 들었다. 또 니느웨의 포로들이 메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메대의 왕 키아카레스가 사로잡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과 아시리아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일로 하나님을 찬송했다. 죽기 전에 니느웨의 일을 두고 기뻐했으며, 주 하나님을 영원무궁토록 찬송했다. 아멘.토빗기 14:15 · 본디새김
토빗은 니느웨의 멸망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약속을 믿었고, 아들은 그 말씀의 역사적 성취를 경험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아버지가 믿고 떠난 미래를 아들이 살아서 확인합니다.
물론 토비야가 모든 예언의 성취를 본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니느웨의 멸망을 보았지만, 예루살렘의 궁극적인 회복이나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미래까지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약속받았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그 땅 전체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11:13–16은 아브라함과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았다고 해석합니다.
토빗 역시 자기 생애 안에 모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아니라, 자신이 보지 못할 미래까지 하나님께 맡겼다는 믿음입니다.
토비야는 왜 니느웨의 멸망을 기뻐했는가?
본문은 토비야가 기뻐한 일과 하나님의 심판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그가 포로 개개인의 고통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지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기쁨을 민간인의 죽음이나 고통 자체를 즐기는 감정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동시에 본문이 적국의 멸망을 기뻐하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제국의 몰락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정의로운 심판으로 이해하는 전통과 연결됩니다. 나훔 3:19에서도 니느웨의 멸망을 듣는 사람들이 손뼉을 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니느웨의 끊임없는 악행으로 고통받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토비야의 기쁨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니느웨의 강함이 영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다른 민족을 짓밟고 포로로 끌어갔던 제국이 이제 스스로 몰락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긴장이 남습니다.
토빗기 14:6–7은 모든 민족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미래를 노래했습니다. 따라서 니느웨의 멸망을 기뻐하는 마지막 장면이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향해 갖고 계신 더 넓은 목적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습니다.
제국의 폭력에 대한 심판과 민족들의 회복에 대한 소망이 같은 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의 독자는 이 구절을 모든 적대 국가나 원수의 재난을 기뻐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야기는 토비야가 특정한 역사적 심판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로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토비야의 죽음에 기록된 나이는 시내 사본의 전승을 따르는 수치입니다. 다른 그리스어 본문에는 백스물일곱 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내 사본의 그리스어 이름은 아키아카로스로, 앞서 등장한 아키카르의 이름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니느웨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고려하면 이 인물은 메대 왕 키아카레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를 함락시킨 세력은 메대 왕 키아카레스와 바빌로니아 왕 나보폴라사르가 이끈 연합군이었습니다. 기원전 612년의 니느웨 함락은 고대 바빌로니아 연대기를 통해 확인됩니다. 다른 그리스어 본문 전승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을 느부갓네살과 아하수에로의 일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이름들의 조합은 알려진 함락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이 ‘키아카레스’라고 옮긴 것은 시내 사본에 적힌 이름을 그대로 음역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맞추어 인물을 식별한 번역상의 판단입니다. 토빗기는 실제 역사적 배경과 인물들을 사용하지만, 세부 연대와 인명까지 모두 정확하게 보존한 역사 연대기와 같은 방식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찬송이다
제국은 강했지만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토빗의 생애도 끝났고, 토비야의 생애도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송하는 믿음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졌습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그 가족이 믿었던 하나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토빗은 자신이 보지 못할 미래를 아들에게 맡겼습니다. 토비야는 그 미래의 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아버지가 평생 행했던 일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토빗기의 마지막에는 니느웨의 승리도, 토빗 가문의 재산도 남지 않습니다. 무너진 제국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