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5장 · 의와 죽지 않는 삶
의로운 사람이 불편한 이유
사람이 자기 삶의 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질까요?
지혜서 2장은 이 질문을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직접 말하게 합니다. 그들은 삶이 짧고 괴로우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최대한 누리자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아는 사람들의 솔직한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지혜서 2장은 악한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을 박해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보다 깊은 곳에서는 인간의 생각이 어떻게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마침내 폭력으로 발전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1장 마지막에서 저자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친구로 삼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2장에서는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직접 말하는 것처럼 들려줍니다. 이 사람들의 말은 저자가 동의하는 진리가 아니라, 그 잘못을 드러내기 위해 제시된 말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생각
그들은 바르게 생각하지 않고 서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짧고 괴로우며, 사람이 죽을 때에는 치유가 없고, 하데스에서 돌아온 사람도 알려진 바 없다.」지혜서 2:1 · 본디새김
그들의 첫마디에는 특별히 이상한 주장이 없어 보입니다.
인간의 삶이 짧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삶에는 고통이 있고, 죽은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도 볼 수 없습니다. 욥기 14장에서도 인간은 수명이 짧고 고통으로 가득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욥은 사람이 꽃처럼 피었다가 시들고, 그림자처럼 사라진다고 말합니다(욥기 14:1–2).
욥은 인간의 덧없음 앞에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반면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찰한 현실을 근거로 인간의 존재 전체에 대한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우리는 우연히 생겨났고, 이후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코 안의 숨은 연기이며, 우리의 이성은 심장의 움직임 속 불티이기 때문이다.」지혜서 2:2 · 본디새김
삶이 짧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우연히 생겨났으며, 죽음 뒤에는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다는 것은 그 경험만으로 확정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숨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생각은 작은 불티처럼 꺼집니다. 몸은 재가 되고, 영은 엷은 공기처럼 흩어집니다. 이 이미지들은 인간을 이루는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생각을 드러냅니다.
「우리 이름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것이고, 아무도 우리가 한 일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삶은 구름의 자취처럼 지나갈 것이며, 햇살에 쫓기고 그 열기에 짓눌린 안개처럼 흩어질 것이다.」지혜서 2:4 · 본디새김
특히 4절에서는 단순히 인간이 죽는다는 문제를 넘어 기억의 소멸을 말합니다. 죽음 자체도 두렵지만,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조차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면 그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전도서 1:11과 2:16도 지나간 사람과 그가 한 일이 잊히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그렇다고 전도서와 지혜서 2장의 사람들이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몫을 누리고 그분을 경외할 것을 말합니다(전도서 3:12–14; 12:13). 지혜서의 사람들은 자신의 유한함을 근거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삶의 목적 자체를 지워 버립니다.
「사실 우리 삶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과 같고, 우리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 죽음은 봉인되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지혜서 2:5 · 본디새김
봉인된 문은 사람이 임의로 열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증명하는 말은 아닙니다.
저자는 이들의 말을 중간에 반박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말하게 합니다. 그들의 인생관이 옳은지에 관한 논쟁보다, 그 인생관을 가지고 실제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짧으니 모든 것을 누리자
「자, 그러니 지금 있는 좋은 것들을 누리자. 젊음을 쓰듯 창조된 것들을 힘껏 쓰자.」지혜서 2:6 · 본디새김
앞에서 그들은 인간의 삶이 짧고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사실을 근거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론을 내립니다.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면,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7–8절에는 즐거움을 나타내는 이미지들이 이어집니다. 값비싼 포도주, 향유, 꽃, 장미 봉오리, 화관. 모두 고대의 잔치와 향락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향유를 바르며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쓰는 모습에는 풍요와 젊음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앞에서는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슬퍼했습니다. 이제는 꽃이 시들기 전에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장미 봉오리가 시들기 전에 그것으로 화관을 써 보자.」지혜서 2:8 · 본디새김
아름다움 자체를 즐기기보다, 그것이 없어지기 전에 붙잡으려는 마음이 앞서 있습니다.
그들에게 시간은 선물이면서 동시에 위협입니다.
전도서 9:7–9는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삶이 짧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일상의 즐거움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지혜서 역시 여기서 포도주나 꽃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즐거움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창조된 세계를 누리려 합니다. 하지만 그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삶을 원하시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창조 세계는 함께 살아가는 자리라기보다, 시간이 다하기 전에 최대한 소비해야 할 대상으로 바뀝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우리의 방탕한 즐거움에서 빠지지 않게 하자. 곳곳에 기쁨의 표를 남기자. 이것이 우리의 몫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지혜서 2:9 · 본디새김
그들은 자기 삶에 주어진 몫을 당장의 즐거움으로 한정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오직 지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함께 즐기자고 말한 직후, 다른 사람을 억누르자고 합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약자를 짓밟다
「가난하고 의로운 이를 억누르자. 과부도 봐주지 말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백발도 공경하지 말자.」지혜서 2:10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그들은 꽃과 향유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난한 사람, 과부, 노인이 등장합니다. 앞에서 말한 즐거움의 추구가 어떤 사회적 태도와 결합되어 있는지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 힘이 부족합니다. 과부는 당시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할 경우 쉽게 취약한 처지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노인은 오랜 삶으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실제적인 힘이 부족하다면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2:22–24는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19:32는 백발의 노인 앞에서 일어나 그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신명기 24:17–18은 나그네와 고아의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과부의 옷을 담보로 잡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라고 명령하신 사람들을, 이들은 오히려 짓밟아도 되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우리의 힘을 의의 법으로 삼자. 약한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지혜서 2:11 · 본디새김
여기서는 의의 의미 자체가 뒤집힙니다.
보통 법과 정의는 힘을 가진 사람도 지켜야 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힘이 곧 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법을 어기는 태도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법과 의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기준을 자기들의 힘으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지혜서 1:1은 땅을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의를 사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힘을 의의 법으로 삼겠다고 선언합니다.
앞에서는 권력이 의에 복종해야 했습니다. 여기서는 의가 권력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들은 약한 것이 쓸모없다고 말합니다. 이 판단에는 인간의 가치를 오직 힘과 유용성으로 평가하는 사고방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약하다는 사실과 가치가 없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의 율법은 힘이 부족한 사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을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저자는 모든 즐거움의 추구가 필연적으로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즐거움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존엄을 존중해야 한다는 기준이 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욕망 외에 아무런 기준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은 쉽게 장애물이 됩니다.
의로운 사람은 왜 존재 자체가 불편한가?
「의로운 이를 노리자. 그는 우리에게 성가시고, 우리가 하는 일에 맞서며, 율법을 어긴 죄로 우리를 꾸짖고, 우리가 받은 가르침을 어긴 죄를 들추어 말하기 때문이다.」지혜서 2:12 · 본디새김
그들은 의로운 사람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꾸짖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따라야 할 기준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거스릅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을 단순히 하나님이나 율법을 한 번도 알지 못한 외부인들로만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적어도 율법과 도덕적 가르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도적인 반항을 묘사합니다. 다만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집단을 대표하는지는 이 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의로운 사람에게 느끼는 불편함은 점점 깊어집니다.
「그는 우리 생각의 잘못을 드러내는 자가 되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버겁다.」지혜서 2:14 · 본디새김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 때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럽습니다.
「그의 삶이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가 걷는 길도 유별나기 때문이다.」지혜서 2:15 · 본디새김
다른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거부하고, 모두가 받아들이는 기준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악한 사람들이 세운 질서가 유일하게 가능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의로운 사람의 존재가 불편한 이유는 그의 삶이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가짜로 여겨졌고, 그는 더러운 것들을 피하듯 우리의 길을 멀리한다. 그는 의로운 이들의 마지막이 복되다고 하며,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뽐낸다.」지혜서 2:16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의 눈에는 그 삶이 거짓되거나 부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힘과 이익을 기준으로 자신들을 평가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름을 기준으로 삶을 평가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승인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이 그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선택이 거부당했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뽐낸다」는 평가는 악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자가 의로운 사람을 교만하다고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거만한 주장으로 받아들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이 주장을 듣고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립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라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 주시지 않겠는가?
그들은 이것을 시험하기로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편이라면 구해 보시라고 하자
「그의 말이 참인지 보고, 그의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시험해 보자.」지혜서 2:17 · 본디새김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실제로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시는지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모욕과 고문으로 그를 시험하자. 그의 너그러움을 알아보고 악을 견디는 그의 참을성을 판단하려는 것이다.」지혜서 2:19 · 본디새김
이는 정당한 시험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상황을 폭력으로 만들어 놓고, 그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을 근거로 상대방의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그 사람에게 고난이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인간이 정한 시점에 구원이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되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지금 고난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는 폭력에 맞서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그가 고통 속에서 분노하거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의 믿음만이 아니라 그의 성품까지 부정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선고하자.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돌봄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지혜서 2:20 · 본디새김
수치스러운 죽음이라는 표현은 의로운 사람의 명예까지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그가 공개적으로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삶과 믿음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그 돌봄이 눈앞의 구출이라는 방식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정한 조건을 하나님에게 강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그들이 죽음을 선고하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이 끝난 뒤, 저자가 다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욥의 친구들은 고난과 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이야기는 의로운 사람도 큰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욥의 친구들이 자신에 관하여 옳게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욥기 42:7).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적대와 살해 위협을 받았습니다(예레미야 11:18–21). 시편 22편의 고난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이유로 조롱을 당합니다. 그러나 시편 22편은 그런 조롱을 의로운 사람의 신뢰가 거짓이라는 증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롱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탄식하며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들려줍니다. 신약의 마태복음 27:43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향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조롱이 등장합니다. 이는 지혜서 2:18의 표현과 매우 가까운 주제적·언어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지혜서의 본래 장면은 고난받는 의로운 사람을 박해하는 악인들의 논리를 그린 것이며, 이 구절을 오직 예수의 처형만을 가리키는 직접 예언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고, 그릇된 길로 갔다. 자기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지혜서 2:21 · 본디새김
저자는 그들에게 지식이 부족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상태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그들이 의로운 사람을 보는 것조차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자는 그들이 실제로 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선언합니다.
의로운 사람의 삶은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행동을 알고 있었고,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의로운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사실들을 악의적으로 해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들을 알지 못했고, 거룩함의 삯도 바라지 않았으며,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도 헤아리지 않았다.지혜서 2:22 · 본디새김
문맥에서 그 비밀은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악한 사람들은 눈앞의 고난과 죽음을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 기준을 벗어나는 하나님의 목적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의 마지막이 복되다는 말을 비웃었습니다(2:16).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상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지혜서가 말하는 보상은 단순히 착한 일을 했으니 물질적인 대가를 받는다는 뜻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장에서 이 책은 의로운 사람의 운명이 겉으로 보이는 고난이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깊이 설명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찰할 수 있는 것만으로 인간의 운명을 최종 판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품으신 목적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마지막 두 절에서 밝힙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은 불멸을 위해 사람을 창조했고, 자기 고유한 본성의 형상으로 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지혜서 2:23 · 본디새김
여기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창조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앞에서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일시적인 불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불멸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부패와 멸망의 지배에 종속되는 존재가 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우연히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불티로만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분의 생명을 향한 목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죽음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그러나 마귀의 시기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의 몫에 속한 이들은 죽음을 맛본다.지혜서 2:24 · 본디새김
죽음은 누구의 시기로 들어왔는가?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을 향하지만, 시기는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마귀」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가장 익숙한 읽기는 창세기 3장의 뱀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창세기 4장의 카인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또한 특정 인물의 이름보다 일반적인 적대자나 헐뜯는 자로 읽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적대자의 이름이나 시기의 구체적인 대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느 해석을 택하더라도 본문이 말하지 않는 세부적인 사건까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시기라는 감정은 앞의 의로운 사람을 박해하는 장면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의 선함을 보면서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의로운 사람이 가진 것을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없애려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몫을 얻는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다시 「몫」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즐거움을 선택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그들이 죽음의 몫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몫이라고 선언한 것은 즐거움이었지만, 저자가 드러내는 그들의 몫은 죽음입니다.
다만 「죽음을 맛본다」는 말을 모든 인간이 겪는 육체적 죽음과 아무 구별 없이 동일시할 경우 문제가 생깁니다. 의로운 사람도 현실에서는 죽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문맥에서는 죽음을 인간이 결국 겪는 생물학적 사건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생명과 분리되는 파멸의 차원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분은 다음 장에서 의로운 사람들이 겉으로는 죽은 것처럼 보여도 그 운명이 악한 사람들의 판단과 다르다는 설명을 통해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지혜서는 그 형상을 불멸의 문제와 연결합니다. 그리스어 사본에는 하나님의 「고유한 본성」 또는 「고유성」을 뜻하는 이디오테스 계열의 읽기와, 「영원성」을 뜻하는 아이디오테스 계열의 읽기가 전해집니다. 전자를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의 고유한 본성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이고, 후자를 따르면 하나님의 영원성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어느 읽기가 원래의 것인지는 이 구절의 전승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24절의 원문의 디아볼로스는 헐뜯는 자, 고발자, 적대자라는 뜻으로 쓰이며, 성경의 문맥에서는 사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창세기 3장의 뱀과 연결하는 읽기는 뱀의 유혹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창세기 3장 자체는 뱀을 마귀라고 명시하지 않으며, 뱀이 시기 때문에 행동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카인은 아벨에게 분노하여 형제를 죽였고(창세기 4:3–8), 지혜서 10:3도 형제를 죽인 불의한 사람을 언급합니다. 이 연결을 따르면 시기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다는 말은 인간 사이에서 처음 일어난 살인과 가까워집니다. 24절의 「그의 몫」에서 「그의」가 바로 앞의 마귀를 가리키는지, 문맥의 중심인 죽음을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원문은 대명사만 사용하므로 어느 쪽인지 완전히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마귀의 몫으로 읽으면 그 적대자에게 속한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몫으로 읽으면 죽음에 속한 사람들이 그 결과를 겪는다는 뜻이 됩니다.
죽음을 이긴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에 속하게 된 사람들
그들은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누린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파괴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장의 핵심은 죽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어도 된다고 여기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세운 마지막 계획은 수치스러운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의로운 사람의 삶이 헛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혜서의 저자는 그들의 긴 연설을 단 한 문장으로 뒤집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고, 그릇된 길로 갔다. 자기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로운 사람의 눈을 감기려 했지만, 정작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