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2–14장 ·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
전쟁의 도시에서 거룩한 삶의 자리로
스가랴 14장은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성읍이 함락되고 집들이 약탈당합니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주민의 절반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앞선 약속들을 기억하는 독자에게는 충격적인 시작입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전혀 다른 예루살렘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전리품을 나누어 가지던 도시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제물을 삶을 솥을 함께 사용하는 도시가 됩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까?
스가랴 14장이 보여 주는 마지막 미래는 단지 예루살렘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땅이 여호와야훼의 통치를 인정하고, 거룩함이 일상의 가장 평범한 물건에까지 미치는 세계입니다.
이 장을 이어 주는 것은 연대표보다 반복되는 한 표현입니다.
「그날에」
스가랴는 그날에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새롭게 되며, 마침내 누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는데, 왜 예루살렘이 먼저 무너지는가?
보라,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고 있다. 네게서 빼앗은 전리품이 네 안에서 나뉠 것이다.스가랴 14:1 · 본디새김
구약의 예언서에서 여호와야훼의 날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여 심판과 구원을 이루시는 때를 가리키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언제나 이스라엘에게 즉각적인 승리와 기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모스 5:18–20에서 여호와야훼의 날을 간절히 바라던 사람들은 뜻밖의 경고를 듣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밝은 날이 아니라 어둠의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의 백성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분의 심판에서 자동으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날이 오는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패배입니다.
전리품을 빼앗아 멀리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 한가운데에서 나누어 가집니다. 이것은 적들이 그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이미지입니다.
「내가 모든 민족을 예루살렘으로 모아 전쟁하게 하겠다. 성읍은 함락되고 집들은 약탈당하며 여자들은 강간당할 것이다. 성읍의 절반은 포로로 끌려가겠지만,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스가랴 14: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하나님이 역사 밖에서 전쟁의 결과만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 민족의 움직임까지 자신의 심판과 구원의 계획 안에서 다루시는 분이라는 예언적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뒤이어 등장하는 폭력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전쟁 중 발생하는 성폭력을 명백히 묘사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며, 하나님이 전쟁을 자신의 주권 아래 두신다고 해서 침략자들의 폭력이 선한 행위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스가랴 12장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모든 나라를 멸절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12:9). 그런데 14장에서는 그들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킵니다.
예루살렘은 실제로 함락됩니다. 그러나 함락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상황에서도 백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13:8–9에서도 많은 사람이 사라지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 관계를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나 14:2의 남은 사람들을 13:9의 삼분의 일과 정확히 동일한 집단으로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두 본문은 남은 자라는 주제를 공유하지만, 동일한 인구 통계나 사건 순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여호와야훼가 행동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자음 본문인 케티브에는 샤갈이라는 거친 표현이 쓰여 있고, 전통적으로 소리 내어 읽는 케레에서는 샤카브, 눕다에서 나온 표현으로 바꾸어 읽습니다. 읽는 전통이 표현을 완화하더라도, 함락과 약탈의 문맥에서 강제적인 성폭력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올리브산이 갈라지고, 피할 길이 열린다
여호와야훼가 나가서 그 민족들과 싸울 것이다. 전투의 날에 그가 싸우던 것처럼 싸울 것이다.스가랴 14:3 · 본디새김
「그가 싸우던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구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4:14에서 모세는 홍해 앞에 선 백성에게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호수아 10:14에서도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동쪽 맞은편에 있는 올리브산 위에 설 것이다. 올리브산은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다.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나머지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 갈 것이다.스가랴 14:4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임재와 행동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표현하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평소에는 사람이 마음대로 옮길 수 없는 산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움직입니다.
「너희는 내 산들의 골짜기를 지나 달아날 것이다. 산들의 골짜기가 아셀까지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유다 왕 웃시야 때 지진을 피해 달아났듯이 달아날 것이다.」 내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올 것이며, 거룩한 이들이 모두 너와 함께할 것이다.스가랴 14:5 · 본디새김
산이 무너지는 일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위험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긴 지형의 변화가 도피로를 만들어 줍니다.
막혀 있던 곳에 길이 열립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 14장의 바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다 앞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시자 그 사이에 길이 열렸습니다.
스가랴 14장에서는 바다가 아니라 산이 갈라집니다.
앞에서는 「내 산들」이라는 하나님의 직접 발언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내 하나님 여호와야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예언자의 목소리로 돌아온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은 백성이 스스로 적을 압도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곳에 하나님이 길을 여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등장으로 달라지는 것은 지형만이 아닙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낮과 밤의 질서까지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11:23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떠나 성읍 동쪽에 있는 산 위에 머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스가랴가 그 장면을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할 수는 없지만, 두 본문은 예루살렘 동쪽의 산과 하나님의 임재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에스겔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는 모습이었다면, 스가랴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직접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하시는 모습입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은 본디새김처럼 사람들이 골짜기를 통해 달아나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골짜기가 막히거나 메워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두 읽기는 지형의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다르게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의 세부 지형을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아셀’ 또는 ‘아잘’이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미가 1:11의 벳에셀과 연결하려는 읽기가 있지만, 동일한 지명이라고 확정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1:1에도 웃시야 시대에 일어난 지진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이 지진은 두 예언서가 함께 기억하는 사건입니다. 스가랴가 그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지질학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달아났던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한 이들’은 하나님과 함께 등장하는 천상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33:2와 다니엘 7:10에서도 하나님의 현현과 천상의 무리가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 자체가 그들의 정확한 정체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너와 함께」에서 ‘너’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말로 읽을 수도 있고, 예루살렘을 향한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스가랴 14장의 올리브산은 신약의 예수 이야기와 지리적으로 연결됩니다. 사도행전 1:9–12에서는 예수의 승천과 올리브산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스가랴 14:4가 그 사건을 직접 인용하거나, 사도행전이 이 구절을 명시적으로 성취 선언으로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올리브산이라는 장소의 공통점을 곧바로 모든 사건의 동일성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낮도 밤도 아닌 날, 저녁에 찾아오는 빛
그날에는 빛도, 찬란함도, 얼어붙음도 없을 것이다.스가랴 14:6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에게 알려진 하나의 날이 있을 것이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닐 것이다. 저녁때에 빛이 있을 것이다.스가랴 14:7 · 본디새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질서에서는 낮이 지나가면 저녁이 오고, 저녁이 지나면 밤이 옵니다. 그런데 이 예언에서는 그 질서가 달라집니다.
어두워져야 할 저녁에 빛이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에게 알려진 하나의 날」이라는 말은 그날에 대한 궁극적인 앎이 여호와야훼께 속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가지고 구체적인 날짜를 계산하거나, 어떤 자연 현상이 나타나면 반드시 이 예언의 성취라고 판정하는 것은 본문의 목적을 넘어섭니다.
구약에서 빛은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이사야 60:19–20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에게 영원한 빛이 되실 것이므로 해와 달이 더 이상 그들의 유일한 빛의 근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스가랴 14장에서도 기존의 낮과 밤의 질서가 달라지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날이 평범한 시간의 연장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먼저 6절의 히브리어는 단어들의 의미와 문장 관계가 모두 분명하지 않습니다. 칠십인역은 빛과 추위와 얼음이라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반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표현을 따라 빛나는 것들이 굳거나 사라지는 상태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태양과 달이 물리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는지, 지구의 온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표현을 구체적인 천문 현상의 예고로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문 자체는 그런 현상의 과학적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언적 이미지로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낮과 밤의 구별조차 하나님의 그날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물을 공급받던 도시가 물의 근원이 된다
그날에 살아 있는 물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다. 절반은 동쪽 바다로, 절반은 서쪽 바다로 흐를 것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할 것이다.스가랴 14:8 · 본디새김
「살아 있는 물」은 고대 이스라엘의 정결 규정에서는 흐르거나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레위기 14:5–6에서는 정결 의식과 관련하여 살아 있는 물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2:13에서는 여호와야훼 자신이 살아 있는 물의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예루살렘은 산지에 위치한 도시로, 물을 확보하는 일이 생활과 방어에서 중요했습니다. 열왕기하 20:20에는 히스기야가 물을 성읍 안으로 끌어들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물을 외부에서 끌어들이는 도시가 아니라, 물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도시가 됩니다.
동쪽 바다는 일반적으로 사해를 가리키고, 서쪽 바다는 지중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나온 물이 동쪽과 서쪽으로 흘러 땅을 가로지르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비가 주로 서늘한 계절에 내립니다. 여름에는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물의 흐름이 달라지는 곳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보여 주는 물은 특정한 우기에만 흐르지 않습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계속 흐릅니다.
이 장면은 에스겔 47:1–12의 환상과 매우 가깝습니다. 에스겔은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물은 점점 깊어지고,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을 가져옵니다. 특히 사해와 연결되는 지역의 물이 되살아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스가랴 14장은 그 물의 방향을 동쪽과 서쪽 모두로 확대합니다. 요엘 4:18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집에서 샘이 흘러나와 골짜기를 적시는 미래가 선포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예루살렘은 더 이상 자기 생존만을 걱정하는 도시가 아닙니다. 주변으로 생명을 공급하는 곳이 됩니다.
도시를 향해 몰려들던 것은 침략자들이었지만,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살아 있는 물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온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다. 그날에 여호와야훼는 하나일 것이며, 그의 이름도 하나일 것이다.스가랴 14:9 · 본디새김
처음에는 예루살렘이라는 특정한 도시가 위협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도시를 넘어 온 땅에 대한 여호와야훼의 왕권이 선포됩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는 하나일 것이며, 그의 이름도 하나일 것이다」라는 표현은 신명기 6:4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신명기 6:4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한 분이심이 선언됩니다.
본문의 관심은 하나님의 존재가 변화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온 땅이 여호와야훼의 유일한 통치를 인정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도 하나일 것이라는 말은 여러 민족이 서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경쟁하던 질서 대신,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온 땅에서 인정받는 미래를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구원은 한 도시의 생존으로 끝나지 않고, 온 땅이 누구의 다스림 아래 있는지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확장됩니다.
조금 더 깊이
먼저 하나님의 왕권에 관한 선언은 시편 47:7–9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시며 여러 민족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선포됩니다. 요한계시록 21:23–26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비추고 여러 민족이 그 빛 가운데 걸어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와 생명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스가랴 14장의 빛과 물, 민족들과 하나님의 왕권이라는 이미지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장면을 스가랴 14장의 모든 지형 변화와 역사적 사건에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문학적 맥락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통치와 생명의 회복을 표현합니다.
주변은 낮아지고 예루살렘은 제자리에 선다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림몬까지 온 땅이 벌판처럼 바뀔 것이다. 예루살렘은 높이 솟아, 베냐민 문에서 첫째 문 자리까지,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탑에서 왕의 포도주 틀들까지 제자리에 자리 잡을 것이다.스가랴 14:10 · 본디새김
게바는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지명이고, 림몬은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두 지명을 통해 유다 땅의 넓은 범위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4절에서 올리브산이 갈라졌던 장면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등장 앞에서 익숙했던 지형이 새로워집니다.
예루살렘이 「제자리에」 자리 잡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12:6에서 예루살렘이 다시 자기 자리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루살렘을 없애고 전혀 다른 도시로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괴와 위협을 경험한 그 도시가 다시 자기 자리에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베냐민 문, 첫째 문, 모퉁이 문, 하나넬 탑, 왕의 포도주 틀들. 이것들은 도시의 경계와 시설을 떠올리게 하는 구체적인 이름들입니다. 일부 문과 시설의 정확한 위치에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본문이 보여 주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은 추상적인 영적 상징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문과 탑이 있고, 사람들이 거주하며, 포도주를 만드는 시설이 있는 실제 도시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 도시가 이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상태에 놓입니다.
사람들이 그 안에 살 것이며, 더 이상 진멸은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살 것이다.스가랴 14:1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모든 지형 변화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더 이상 진멸은 없을 것이다」는 여기서는 도시를 파멸로 몰아가는 심판이나 진멸의 상태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회복은 단지 전쟁이 잠시 멈추는 휴전 상태가 아닙니다. 파괴될 위협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주하는 상태입니다.
스가랴 14장은 온 땅의 왕이 여호와야훼라고 선언하면서도, 그 통치의 결과를 사람들의 일상적인 거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매우 크지만, 그 왕권이 만들어 내는 변화는 사람들의 집과 생활공간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장면 뒤에 예언은 다시 적들에게 임하는 심판을 묘사합니다.
이 장면들을 반드시 정확한 시간 순서대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목록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12–15절은 앞에서 이미 선포된 승리의 장면을 다시 심판의 측면에서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격하던 군대가 자기 몸과 동료를 잃는다
예루살렘을 치러 싸운 모든 민족을 여호와야훼가 칠 재앙은 이러할 것이다. 그들이 제 발로 서 있는 동안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살을 썩게 할 것이며, 그들의 두 눈은 그 눈구멍들 안에서 썩고, 그들의 혀는 그들의 입 안에서 썩을 것이다.스가랴 14:12 · 본디새김
예언이 강조하는 것은 공격자들이 자기 몸조차 지킬 수 없게 되는 급격하고 철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그 파괴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확대됩니다.
그날에 여호와야훼에게서 오는 큰 혼란이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동료의 손을 붙잡고, 동료의 손에 맞서 제 손을 치켜들 것이다.스가랴 14:13 · 본디새김
이것은 전쟁에서 적군의 조직과 결속이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외부를 향하던 폭력이 내부로 향합니다.
사사기 7:22에서는 미디안 군대가 혼란 가운데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사무엘상 14:20에서도 블레셋 군대 안에서 혼란이 일어나 서로를 공격합니다. 스가랴 14장의 장면도 이런 전쟁의 역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울 것이다. 주변 모든 민족의 재물 곧 금과 은과 옷이 아주 많이 모일 것이다.스가랴 14:14 · 본디새김
처음에는 예루살렘이 약탈당했지만, 이제는 공격하던 나라들의 재물이 모여듭니다.
전쟁의 힘과 방향이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그 진영들에 있을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모든 가축에게 닥칠 재앙도 이 재앙과 같을 것이다.스가랴 14:15 · 본디새김
이 동물들은 전쟁에서 이동과 운송, 보급에 사용될 수 있는 가축들입니다. 따라서 사람뿐 아니라 군대의 이동과 전쟁 수행을 뒷받침하던 수단들까지 심판의 범위에 포함됩니다.
여기까지 보면 스가랴 14장은 적들의 완전한 파괴로 끝나는 듯합니다.
그런데 16절에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민족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이것이 특정한 질병이나 무기의 작용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어떤 전염병이나 무기와 연결하여 정확한 발생 방식을 설명할 근거는 없습니다. 살은 몸의 생명과 힘을 드러내고, 눈은 보는 능력이며, 혀는 말하는 능력과 연결됩니다. 이를 반드시 각각의 죄에 대한 정확한 상징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몸의 기본적인 능력조차 유지하지 못한다는 이미지가 선명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에서」라는 표현은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문법상 유다가 예루살렘을 상대로 싸운다는 가능성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 민족의 패배와 재물의 수집이라는 문맥에서는 유다가 예루살렘에서 싸운다는 읽기가 자연스럽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온 사람들이 예배하러 돌아온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 가운데 남은 이들은 모두 해마다 올라가서, 왕인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초막절을 지킬 것이다.스가랴 14:16 · 본디새김
처음에는 전쟁을 위해 모였습니다.
이제는 예배를 위해 모입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약탈하려 했습니다.
이제는 그곳에서 여호와야훼 앞에 엎드립니다.
처음에는 자기 나라의 힘을 앞세웠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야훼를 왕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본문이 공격에 참여했던 모든 개인이 살아남아 회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12–15절에서 많은 사람이 심판받는 것으로 묘사되며, 16절은 민족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스가랴 2:11에서는 많은 민족이 여호와야훼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되었습니다. 8:22–23에서는 많은 민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야훼를 찾고, 유다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4장에서는 그 민족들이 처음부터 평화로운 순례자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적대가 심판받은 뒤,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들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향하는 궁극적인 대상은 예루살렘의 인간 왕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입니다. 9절에서 온 땅의 왕이 여호와야훼라고 선언되었던 말씀이 16절에서는 여러 민족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왜 특별히 초막절입니까?
왜 모든 민족이 초막절을 지키는가?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가을 수확을 마친 뒤 지키는 절기입니다.
신명기 16:13–15에서는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서 소출을 거둔 뒤 초막절을 지키며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23:39–43에서는 이스라엘이 초막에 거주하는 이유를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초막에 거주했던 역사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초막절에는 두 가지 중요한 기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땅의 소산을 공급하신다는 감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살아가게 하셨다는 기억입니다.
이 장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안전한 거처를 잃는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아갈 도시가 된다고 약속했습니다. 초막절은 집과 땅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거처와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임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모든 민족이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그들 역시 자기 힘과 부에 의지하던 삶에서 벗어나, 생명을 공급하시는 여호와야훼를 인정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8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살아 있는 물이 사계절 내내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비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땅의 씨족들 가운데 왕인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엎드려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들에게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스가랴 14:17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초막절의 농경적 배경과 연결됩니다. 농작물의 결실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가 내려야 하고, 땅이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초막절에 여호와야훼를 경배하지 않는 자들에게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분이 주시는 공급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다는 뜻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신명기 11:13–17에서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기면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와도 연결됩니다.
그런데 스가랴 14장에서는 그 경고의 대상이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온 땅의 씨족들입니다.
16절에서는 모든 민족 가운데 남은 사람들이 경배하러 올 것이라고 했는데, 17절에서는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왕권은 온 땅에 선포되지만, 그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경고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 씨족이 올라가지 않고 오지 않으면, 그들에게도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가지 않는 민족들을 여호와야훼가 칠 재앙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스가랴 14:18 · 본디새김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종살이했고,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셨습니다.
또한 이집트의 농업은 나일강의 범람과 관개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이는 비에 의존하는 유다 산지의 농경 조건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집트가 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예외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인 만군의 여호와야훼를 경배하지 않는다면 이집트 역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집트의 죗값이며,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가지 않는 모든 민족의 죗값일 것이다.스가랴 14:19 · 본디새김
여기서 이집트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언급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나라였지만, 이제는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야훼를 왕으로 인정해야 하는 나라가 됩니다.
이러한 예언적 장면을 오늘날 모든 민족이나 국가가 특정한 종교 의식을 강제로 지켜야 한다는 정치적 명령으로 직접 옮길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의 통치가 온 땅에 드러나는 미래를 고대 이스라엘의 절기와 순례의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이 거대한 미래를 설명한 다음 마지막으로 매우 작은 물건 하나를 보여 줍니다.
말의 방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18절의 히브리어는 문장이 압축되어 있어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말을 앞 절에서 이어받아야 하는지, 이어지는 재앙의 문장과 연결해야 하는지 해석이 갈립니다. 본디새김은 앞 절의 비에 대한 경고를 반복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중요한 것은 이집트가 여호와야훼의 통치 밖에 있는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의 방울에 새겨진 대제사장의 글
그날에는 말의 방울들 위에 「여호와야훼에게 거룩한 것」이라는 글이 있을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집에 있는 솥들은 제단 앞의 대접들과 같아질 것이다.스가랴 14:20 · 본디새김
스가랴서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예언의 시선은 급격히 작아집니다.
「여호와야훼에게 거룩한 것」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8:36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대제사장이 이마에 두르는 금패에 「여호와야훼에게 거룩한 것」이라는 글을 새기라고 명령하십니다. 대제사장이 이마에 착용하는 금패는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와 관련된 특별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 14장에서는 같은 글이 말의 방울 위에 나타납니다.
15절에서는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군대의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가 재앙을 당했습니다. 스가랴서의 다른 곳에서도 말은 종종 전쟁과 군사적 힘에 연결됩니다. 12:4에서는 하나님이 적들의 말을 혼란에 빠뜨리고 눈멀게 하셨습니다.
군사적 힘을 떠올리게 하던 동물의 장식품이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표시되는 것입니다.
제단 앞의 대접은 제사와 관련된 특별한 기구입니다. 그러나 솥은 음식을 삶고 익히는 데 사용하는 일상적인 도구입니다. 그 물건들이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낮은 지위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단순히 깨끗하고 아름다운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속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의 성소 제도에서는 거룩한 공간과 일상적인 공간, 특별한 제의용 기구와 일반적인 물건이 구별되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변화는 거룩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 삶의 더 넓은 영역으로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은 이 선언을 성전 밖으로까지 확장합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솥이 거룩해지는 날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은 만군의 여호와야훼에게 거룩한 것이 될 것이다. 제물을 잡는 이들은 모두 와서 그 솥들을 가져다가 그 안에서 삶을 것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집에 더 이상 상인이 없을 것이다.스가랴 14:21 · 본디새김
20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집에 있는 솥들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범위가 더욱 넓어집니다.
대제사장의 금패에서 시작된 거룩함의 언어가 말의 방울을 지나, 이제는 사람들의 집에서 사용하는 솥에까지 이릅니다. 이것은 제사에 사용되는 물건과 일상의 물건 사이에 있던 구별이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1장부터 예언자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회복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약속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7–8장에서는 금식과 정의, 진실과 평화의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거하시는 도시는 진실과 평화가 실현되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에서 하나님께 속한 거룩함은 성전 건물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에까지 확장됩니다. 일상적인 식사와 제의적 봉헌에 사용되는 물건 사이의 거리마저 좁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뜻밖에도 상인에 관한 말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케나아니(כְּנַעַנִי)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가나안 사람’입니다. 따라서 스가랴 14:21의 케나아니를 ‘상인’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이라는 민족명을 그대로 읽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가나안 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이 본질적으로 부정하거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여러 민족들이 여호와야훼를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장면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모든 상업 활동 자체를 악한 것으로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에서 상인이 사라진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나 거래 관행을 겨냥하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는 가나안 사람이 상업 활동과 연결되어 언급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호세아 12:7에서는 저울을 손에 들고 속이기를 좋아하는 상인의 모습과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스바냐 1:11에서도 상인들의 멸망과 관련된 표현이 등장합니다. ‘상인’으로 읽는 경우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의 집에서 상업적인 활동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가나안 사람’이라는 민족명을 그대로 읽으면 하나님의 집에서 부정하거나 부적절한 존재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는 정결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마다 거룩한 솥을 가져다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특별한 제의용 기구를 구하기 위해 별도의 상업적인 공급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상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이 거래와 이익을 추구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배의 장소로 온전히 구별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성전 상인들이 반드시 부정한 거래를 했다고 밝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들을 모두 착취자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면 — 성전에서 평범한 솥을 가져오는 사람들
예루살렘은 더 이상 빼앗길 전리품이 쌓인 도시가 아닙니다. 여러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하러 올라오는 도시이며, 사람들의 평범한 생활 도구까지 하나님께 거룩한 것으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온 땅에 미치고, 그분의 거룩함은 일상의 작은 물건까지 품습니다.
또한 스가랴가 묘사하는 심판을 근거로 현재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예언의 언어로 묘사합니다. 인간에게 그 심판을 대신 집행할 권한을 위임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행동이 자동으로 거룩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삶을 살더라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선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까지 하나님께 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제물을 드리러 온 사람들은 그 솥들을 가져다가 제물을 삶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스가랴는 가장 평범한 솥까지 하나님께 거룩한 것으로 보여 줍니다.
그 솥은 더 이상 단순히 음식을 삶는 물건으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삶의 한 부분이 됩니다.
그리고 스가랴서는 바로 그 장면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