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다가온 심판의 날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했고, 제사장들이 있었으며, 종교적 의식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이롭게 하지도 해롭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스바냐 1장에서 가장 자주 행동하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야훼입니다. 하나님은 쓸어 없애겠다고 선언하시고, 손을 뻗으시며, 제사를 준비하시고, 사람들을 벌하시며,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십니다.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도하십니다.

스바냐 1장의 심판은 단순히 악한 행동에 대한 처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기 삶과 무관한 분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의 세계가 무너지는 사건입니다.

이 장은 그 무너짐을 점점 가까이 보여 줍니다. 먼저 온 땅이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그 시선이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좁혀집니다. 이어 성전과 지붕 위의 종교생활, 왕궁과 상인들의 거리, 사람들의 집과 마음속까지 드러납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온 땅으로 시야가 넓어집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91장 본문 읽기 →

요시야 시대, 개혁을 앞둔 나라의 깊은 병

스바냐 1:1 본문 →

스바냐는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요시야는 유다 역사에서 중요한 종교 개혁을 시행한 왕입니다. 열왕기하 23장에 따르면 그는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군대를 위해 만든 기물들을 제거하고, 우상 숭배에 관여하던 제사장들을 폐지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따라 예배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스바냐 1장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이러한 개혁의 내용과 놀랄 만큼 겹칩니다. 바알, 우상 제사장, 하늘의 군대에 대한 숭배가 모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1:4-5; 열왕기하 23:4-5, 12).

이 때문에 스바냐의 선포를 요시야의 본격적인 개혁 이전에 놓고 읽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1장만으로 그 정확한 시점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개혁 이후에도 남아 있던 종교적 관행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보통 예언자 소개에서 아버지의 이름 정도가 제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스바냐는 네 세대에 걸친 조상들의 이름을 밝힙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 히스기야라면 스바냐는 왕실과 관련된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으므로 동일 인물이라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왕실 출신인지 아닌지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에게 임한 말씀이 왕궁을 포함한 예루살렘 전체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통치 아래 있던 유다는 단순히 제도를 조금 고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만큼 깊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창조 세계를 거꾸로 거두어 가시는 하나님

스바냐 1:2–3 본문 →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반드시 쓸어 없애겠다.」 여호와야훼가 선언했다.스바냐 1:2 · 본디새김

그런데 무엇을 쓸어 없애겠다는 것입니까? 사람과 짐승,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입니다.

이 목록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물속의 생물과 하늘의 새를 창조하시고, 땅의 짐승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스바냐는 그 생명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나열 순서도 창세기의 창조 진행과 대체로 반대 방향입니다.

더 중요한 연결은 창세기 6장과 7장의 홍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보시고 자신이 창조하신 생명들을 땅에서 쓸어버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창세기 6:7). 스바냐 1장의 언어도 바로 그와 같은 창조 세계의 붕괴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두 본문 사이에는 차이도 있습니다. 스바냐는 바다의 물고기까지 명시합니다. 홍수 이야기에서처럼 살아 있는 존재들의 범위를 넘어, 창조 세계 전체가 흔들리는 장면으로 심판의 규모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은 인간들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전체의 질서를 위협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기 삶과 주변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리라고 생각한다면, 스바냐는 그 확신을 무너뜨립니다. 창조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그것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시야가 갑자기 좁아집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의 「걸림돌들을 악인들과 함께」라는 표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마크셸롯(⁨מַכְשֵׁלָה⁩)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관련된 말입니다. 여기서 우상이나 죄를 유발하는 장애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무너진 잔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으며, 앞서 나열된 생명체들과 문법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특정 종류의 우상이라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를 버린 사람들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를 섞어 섬기는 사람들

스바냐 1:4–6 본문 →

4-6절에는 심판의 대상이 연이어 나열됩니다. 바알의 남은 것, 우상 제사장들, 하늘의 군대에 절하는 사람들, 여호와야훼와 다른 권위를 함께 붙드는 사람들, 그리고 여호와야훼를 따르다가 돌아선 사람들입니다.

「나는 유다를 향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향해 내 손을 뻗겠다. 이곳에서 바알의 남은 것을 끊어 버리고, 우상 제사장들의 이름도 제사장들과 함께 끊어 버리겠다.」스바냐 1:4 · 본디새김

세계 전체에 대한 심판의 선언은 이제 언약 백성의 중심부를 향합니다.

처음에는 노골적인 우상 숭배가 등장합니다. 바알 숭배와 우상 제사장들은 누구나 종교적 배교로 알아볼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또 지붕 위에서 하늘의 군대에게 절하는 자들을, 절하며 여호와야훼에게 맹세하고 자기들의 왕을 두고도 맹세하는 자들을 끊어 버리겠다.」스바냐 1:5 · 본디새김

여기서 「자기들의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캄(⁨מַלְכָּם⁩)은 해석이 갈립니다. 모음 표기대로 자신들의 왕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고, 암몬의 신 밀곰 또는 그와 관련된 신명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열왕기상 11:5, 7은 밀곰과 몰록 계열의 이방 신 숭배를 언급합니다.

후자의 해석을 따르면 이 구절은 여호와야훼와 다른 신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를 직접 비판합니다. 전자의 해석을 따르면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충성과 다른 왕권에 대한 충성이 나란히 놓이는 문제가 부각됩니다. 어느 쪽이든 여호와야훼에 대한 충성이 나뉘어 있다는 점은 문맥상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6절은 더 조용한 형태의 불신앙을 드러냅니다.

「여호와야훼를 따르다가 물러난 자들과, 여호와야훼를 찾지도 않고 그에게 묻지도 않은 자들을 끊어 버리겠다.」스바냐 1:6 · 본디새김

「찾다」와 「묻다」는 모두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뜻을 구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하나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느냐는 문제입니다.

앞의 사람들은 여호와야훼 외에 다른 대상에게도 충성합니다. 뒤의 사람들은 아예 여호와야훼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만드는 것과, 여호와야훼를 삶에서 없어도 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모두 그분의 주권을 거부하는 방식입니다.

심판을 희생 제사로 묘사하다

스바냐 1:7–9 본문 →

7절에서 예언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주 여호와야훼 앞에서 잠잠하라. 여호와야훼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가 희생 제사를 준비하고, 자기가 부른 이들을 거룩하게 구별했기 때문이다.스바냐 1:7 · 본디새김

이 침묵은 평화로운 묵상의 분위기와 다릅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엄숙한 자리에 들어선 사람들의 침묵에 가깝습니다.

평소 희생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제사를 준비하십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하던 공동체가 정작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입니다. 종교적 행위를 수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합니다.

「여호와야훼의 희생 제사 날이 되면, 내가 고관들과 왕의 아들들, 다른 나라의 옷을 입은 모든 자를 벌하겠다.」스바냐 1:8 · 본디새김

「다른 나라의 옷」은 단순히 외국산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는 뜻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그 옷이 외국의 종교적 관행을 따르는 표시일 수도 있고, 외국의 문화와 권력에 동화된 상류층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옷 자체가 어느 관행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왕실과 고관들에 이어 등장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지도층이 외국의 권위와 생활양식에 기울어 있는 모습을 비판하는 문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날에 나는 문턱을 뛰어넘는 모든 자, 자기 주인들의 집을 폭력과 속임수로 채우는 자들을 벌하겠다.」스바냐 1:9 · 본디새김

여기서 스바냐의 비판은 제사 행위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옮겨갑니다. 앞에서는 여호와야훼 이외의 대상을 섬기는 문제가 등장했고, 이제는 남의 삶을 해치면서 자기 집을 채우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단지 예배의 형식이 틀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 제물이고, 누가 초대받은 사람들입니까? 7절은 이를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8절부터 유다의 고관들과 왕의 아들들이 심판받는다는 점에서, 제사의 희생물이 되는 쪽을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심판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세력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을 특정한 나라나 군대로 지명하지 않습니다. 문턱을 뛰어넘는 행위는 사무엘상 5:5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구절에서는 다곤의 제사장들과 숭배자들이 문턱을 밟지 않는 관습이 언급됩니다. 그래서 스바냐가 외래 종교의 의식을 비판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 폭력과 속임수로 집을 채우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때문에 남의 집에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는 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본문은 두 행동의 관계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울려 퍼지는 붕괴의 소리

스바냐 1:10–11 본문 →

지금까지 심판의 대상은 사람들의 신앙과 행동이었습니다. 이제 스바냐는 심판이 일어나는 도시의 모습을 들려줍니다.

「그날에는 물고기 문에서 외치는 소리가, 둘째 구역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나고, 언덕들에서 큰 붕괴가 일어날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선언했다.스바냐 1:10 · 본디새김

이 지명들은 독자에게 예루살렘의 실제 공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언은 막연한 하늘의 심판이 아니라 주민들이 알고 있는 거리와 구역에서 벌어질 일로 그려집니다.

이 장에서 심판은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시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먼저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통해 재난이 자기들에게 접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막데스 주민들아, 울부짖어라. 상인들이 모두 망했고, 은을 짊어진 자들이 모두 끊어졌기 때문이다.」스바냐 1:11 · 본디새김

이것을 상업이나 재산 자체에 대한 정죄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폭력과 속임수로 다른 사람의 것을 채우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곧 등장할 13절과 18절에서는 재산이 그 소유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경제적 능력은 사람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스바냐가 보여 주는 도시에서는 그 능력조차 질서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물고기 문은 예루살렘의 성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느헤미야 3:3과 12:39에도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도시 북쪽의 방어 시설과 관련된 문으로 이해됩니다. 둘째 구역은 열왕기하 22:14에서 여예언자 훌다가 거주하던 예루살렘의 구역과 연결됩니다. 막데스는 이름상 움푹 파인 지형을 연상시키지만,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시는 하나님

스바냐 1:12–13 본문 →

「그때가 되면 나는 등불로 예루살렘을 샅샅이 뒤지고, 자기들의 술찌꺼기 위에 굳어 있는 사람들, 마음속으로 『여호와야훼는 이롭게 하지도 해롭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을 벌하겠다.」스바냐 1:12 · 본디새김

등불을 들고 샅샅이 뒤진다는 표현은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세밀한 수색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힘일 뿐 아니라, 인간의 숨겨진 태도까지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포도주를 오래 두면 찌꺼기가 밑에 가라앉습니다. 용기를 옮기거나 술을 따르지 않으면 찌꺼기가 계속 쌓인 상태로 남게 됩니다. 스바냐에서 이 비유는 움직이지 않고 굳어 버린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제도 평안했고 오늘도 평안합니다. 당장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므로 앞으로도 별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안정은 점차 하나의 신학적 확신으로 바뀝니다.

이 말이 특히 심각한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공의로우심을 부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분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할 이유도, 그분에게 도움을 구할 이유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필요도, 자신의 행동을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결국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의 재산은 약탈물이 되고, 그들의 집은 폐허가 될 것이다. 그들은 집을 짓겠지만 그곳에 살지는 않을 것이며, 포도밭을 심겠지만 그 포도주를 마시지는 않을 것이다.」스바냐 1:13 · 본디새김

집을 짓는다는 것은 미래의 생활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포도밭을 심는다는 것은 여러 해 뒤의 수확을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계획은 앞으로도 세상이 지금처럼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 위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스바냐는 그들이 계획한 미래가 더 이상 자신들의 소유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소유한 물건의 가치를 문제 삼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기 삶이 안전하다고 믿는 그 확신 자체를 흔드십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48:11도 모압이 오래도록 안정된 상태에 있었던 모습을 비슷한 포도주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13절의 표현은 신명기 28:30의 언약적 저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집을 짓고도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밭을 가꾸어도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의 날, 용사마저 울부짖는 날

스바냐 1:14–16 본문 →

14절부터 문장의 호흡이 급격하게 짧아지고 빨라집니다.

여호와야훼의 큰 날이 가깝다. 가깝고, 매우 빠르게 다가온다. 여호와야훼의 날의 소리. 거기서 용사가 비통하게 부르짖는다.스바냐 1:14 · 본디새김

여기서 「가깝다」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심판은 단순히 언젠가 벌어질 사건이 아니라, 이미 다가오고 있는 사건처럼 묘사됩니다.

보통 전쟁에서 용사는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안기는 인물입니다. 위기 가운데서도 싸울 수 있는 힘과 훈련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날에는 그 용사가 비통하게 부르짖습니다.

그날은 진노의 날, 고난과 압박의 날, 파괴와 황폐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짙은 구름의 날이다.스바냐 1:15 · 본디새김

여기에는 상세한 사건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들이 반복적으로 밀려옵니다. 이러한 병렬은 독자가 심판을 단순한 하나의 사건으로 축소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날은 사람들이 의지하던 여러 안전장치가 동시에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16절의 뿔나팔과 함성은 요새화된 성읍과 높은 망대들을 향합니다.

성벽이 높다는 것은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바냐가 보여 주는 심판은 인간의 방어 시설이 보장하는 안전을 넘어섭니다.

여호와야훼의 날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소유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권자이심을 드러내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의 의미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어둠과 구름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묘사하는 구약의 언어와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9:16-18에서는 시내산에 짙은 구름과 나팔 소리가 나타나며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납니다. 스바냐에서도 구름과 뿔나팔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안심할 수 있는 사건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공동체에게 그분의 임재는 두려운 심판으로 다가옵니다. 아모스 5:18-20은 여호와야훼의 날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날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만으로 심판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뒤집는 것입니다. 스바냐도 같은 예언자적 전통 안에 있습니다. 신약의 데살로니가전서 5:2-3 역시 「주의 날」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임한다는 예언자적 주제를 이어받습니다. 이는 스바냐 1장을 직접 인용하기보다는, 인간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날이 다가올 수 있다는 주제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눈먼 사람들처럼 걷는 백성

스바냐 1:17–18 본문 →

17절에서 예언은 다시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릴 것이니, 그들은 눈먼 이들처럼 걸을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는 먼지처럼, 그들의 내장은 똥처럼 쏟아질 것이다.」스바냐 1:17 · 본디새김

이것을 단순히 심판받은 사람들이 길을 찾지 못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문맥과 함께 보면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길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왕권과 재산, 도시의 성벽과 군사력이 자기들의 삶을 지탱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피와 내장의 이미지는 매우 거칩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가 가져오는 파괴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18절에서 마지막 안전장치도 사라집니다.

그들의 은도 금도 여호와야훼의 진노의 날에 그들을 구해 낼 수 없으며, 그의 질투의 불에 온 땅이 삼켜질 것이다. 그가 땅의 모든 주민을 참으로 갑작스럽게 전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스바냐 1:18 · 본디새김

은과 금은 물건을 구입하고, 사람을 고용하며, 위기를 넘길 자원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질투」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경쟁자를 시기하신다는 뜻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자신과 백성 사이의 언약적 관계에 대한 배타적인 요구와 연결됩니다(출애굽기 20:5; 신명기 4:24).

여호와야훼는 자신과 맺은 관계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취급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관계를 파괴하는 우상 숭배와 불의에 대하여 행동하십니다.

실제로 스바냐서의 다음 장은 심판을 앞두고 여호와야훼를 찾으라고 촉구하며(2:3), 마지막 장은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를 부르고 낮고 겸손한 백성이 남는 미래를 그립니다(3:9, 12).

스바냐 1장의 전면적인 심판 언어는 그 뒤에 이어지는 회복의 약속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8:29 역시 언약을 어긴 백성이 눈먼 사람처럼 더듬으며 걷게 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스바냐는 언약적 심판의 언어를 사용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던 백성이 결국 방향을 잃게 되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내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후맘(⁨לָחוּם⁩)은 의미가 확정되지 않습니다. 살점이나 육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신체 부위를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온 땅」이 구체적으로 유다 땅을 가리키는지,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지는 문맥에 따라 논의할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에레츠(⁨אֶרֶץ⁩)는 땅과 나라와 지구상의 세계를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스바냐 1장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심판을 묘사하면서도, 처음과 끝에서 그 범위를 온 땅으로 확장합니다. 따라서 18절을 유다에만 국한된 작은 사건으로 축소할 필요도 없고, 모든 인류의 영구적인 소멸을 예고한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맺음 — 어둠 속에서 켜진 등불

스바냐 1:1–18 본문 →

그러나 이 모든 장면 가운데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12절의 등불입니다. 스바냐가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지적 불신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문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실제로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집을 짓고, 포도밭을 가꾸고, 재산을 모으며 살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여호와야훼는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찾으시는 것은 단지 감추어진 죄의 흔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어 온 생각, 곧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스바냐는 그 확신이 잘못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아직 심판이 시작되지 않은 예루살렘의 거리 위로, 다가오는 여호와야훼의 날의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이 자기 집 안에서 내일을 계획하는 동안, 하나님은 등불을 드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