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이웃 민족들을 향한 말
무너진 성읍에 누가 머물 것인가
스바냐 2장에는 서로 닮았지만 전혀 다른 두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장면은 블레셋의 성읍 아스글론입니다. 한때 사람들이 번성하던 도시가 황폐해졌지만, 그곳에는 다시 누군가가 찾아옵니다.
두 번째 장면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입니다. 이 도시 역시 황폐해집니다. 하지만 그곳에 돌아오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두 도시 모두 무너집니다. 두 도시 모두 누군가가 머무는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한곳에는 살아남은 백성이 평안히 눕고, 다른 곳에는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짐승들이 차지합니다.
심판이 지나간 뒤 무엇이 남는가? 누가 살아남으며, 어디에서 참된 안전을 얻는가?
앞 장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날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2장은 뜻밖에도 사람들을 향한 초청으로 시작합니다. 심판이 다가온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날을 맞이하는 길이 하나 제시됩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 심판 선언 사이에 놓인 초청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여라, 함께 모여라, 갈망하지 않는 민족아.스바냐 2:1 · 본디새김
히브리어 니크사프(כָּסַף)는 여기서 해석이 갈리는 표현입니다. 갈망하거나 간절히 바라는 뜻으로 읽으면, 이 민족은 무엇인가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거나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상태로 읽으면, 아무도 바라지 않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문맥에 따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민족으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첫 번째 가능성을 선택했습니다. 백성은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들에게 모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아직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먼저 말씀이 주어집니다.
날은 겨처럼 지나간다. 법령이 태어나기 전에, 여호와야훼의 타오르는 분노가 너희에게 닥치기 전에, 여호와야훼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닥치기 전에 모여라.스바냐 2:2 · 본디새김
겨는 곡식을 타작하고 남은 가벼운 껍질로, 바람이 불면 쉽게 날아갑니다. 사람들은 흩어지지 말고 모여야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덧없이 지나갑니다.
모이라는 명령은 시간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유가 아닙니다. 시간이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긴급한 부름입니다.
세 번 반복되는 ‘전에’
히브리어 본문은 ‘전에’라는 시간적 표현을 거듭 사용합니다. 심판이 아직 실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복될수록, 역설적으로 그날이 가까워졌다는 긴박함도 커집니다.
「법령이 태어나기 전에」라는 표현도 독특합니다. 법령은 사람이 선포하거나 공포하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마치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태어납니다.
이는 심판의 결정이 정해진 때에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이 아직 심판 자체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인지, 이미 정해진 결정이 실행되기 전이라는 뜻인지는 이 문장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요엘 2:12–17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야훼의 날을 앞두고 백성이 모이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부름을 듣습니다. 두 예언서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말씀은 동시에 백성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부르는 말씀이 됩니다.
스바냐의 심판 선언은 아직 듣는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미 겸손한 사람들에게 왜 다시 겸손을 찾으라고 할까?
그의 법도를 행한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여호와야훼를 찾아라. 의를 찾아라. 겸손을 찾아라. 어쩌면 여호와야훼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숨겨질지도 모른다.스바냐 2:3 · 본디새김
여기서는 앞절과 청중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갈망하지 않는 민족 전체를 불렀지만, 이제는 「그의 법도를 행한」 겸손한 사람들을 특별히 부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언자는 다시 의와 겸손을 찾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쩌면」은 우연히 들어간 말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반드시 피할 것이라고 보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희망도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를 동시에 붙잡습니다. 여호와야훼를 찾는 것이 살 길이라는 사실과, 그분의 심판을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단순한 인격적 미덕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겸손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자기 처지를 바르게 아는 태도입니다. 의롭게 행동했다는 사실조차 하나님에게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으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겸손을 계속 찾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의로움마저 의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조차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이유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을 모두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의를 분별하고 의를 행하면서도,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가 어디인지 예언자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피난할 성읍의 이름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여호와야훼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숨겨질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안전한 곳을 확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가능성을 실제 장면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블레셋에 대한 말씀입니다.
블레셋의 해안 — 버림받은 땅에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
도시의 이름이 도시의 운명을 말하다
가자가 버림받고 아스글론이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스돗을 한낮에 몰아낼 것이며, 에그론은 뿌리째 뽑힐 것이다.스바냐 2:4 · 본디새김
예언자의 시선은 유다 서쪽의 지중해 해안으로 이동합니다.
가자,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은 블레셋의 주요 성읍들입니다. 이 네 성읍은 블레셋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대표합니다. 블레셋의 다른 주요 성읍인 가드는 여기서 언급되지 않지만,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에그론에 쓰인 「뿌리째 뽑히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패배보다 강합니다. 오래 자리 잡은 나무가 뿌리까지 뽑히듯, 도시가 의지하던 기반 자체가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네 도시의 이름을 빠르게 부르는 것은 지도 위의 성읍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듯한 효과를 만듭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지워진 도시의 땅을 다시 보여 줍니다.
무너진 도시가 목초지가 되다
바닷가 땅은 목초지가 되고, 목자들의 우물과 양 떼의 우리가 될 것이다.스바냐 2:6 · 본디새김
이것은 블레셋에게는 번영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도시의 정치적·경제적 기능이 사라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장면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회복의 약속이 됩니다.
그 땅은 유다 집안의 남은 자들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가축을 치고, 저녁이면 아스글론의 집들에 누울 것이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돌보고 그들의 포로 된 처지를 돌이킬 것이기 때문이다.스바냐 2:7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사람을 끊어 버리겠다는 심판이 반복되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남겨 두실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전쟁과 포로 생활을 겪은 사람에게 저녁에 안전하게 누울 집이 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약속된 회복은 거창한 승리의 행진보다 평범한 일상이 돌아오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핵심은 「돌보고」라는 말입니다. 이 절에서는 포로 된 처지를 돌이키는 행동과 연결되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그들의 형편에 개입하시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을 보시고 그들을 돌보십니다(출애굽기 3:16–17; 4:31).
본문은 블레셋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유다의 남은 자들이 그 땅에 거할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그 회복이 언제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실현될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약속을 곧바로 특정한 정복 전쟁의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도시의 이름과 멸망을 표현하는 말이 서로 울립니다. 마치 도시의 이름 속에서 그 도시의 끝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스돗이 「한낮에」 쫓겨난다는 표현도 눈길을 끕니다. 한낮은 고대 근동의 더운 기후에서 사람들이 쉬기 쉬운 시간입니다. 이 표현을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들이닥치는 급작스러운 재난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실제 공격 시각을 상세히 알려 주려는 기록은 아닙니다.
모압과 암몬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모욕을 들으십니다
서쪽 블레셋에서 이제 시선은 요단강 동쪽으로 옮겨갑니다.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복잡한 관계를 맺어 온 이웃 민족입니다. 창세기 19:30–38은 두 민족의 조상이 롯의 후손이라고 전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스라엘과 전혀 관계없는 낯선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모압의 모욕과 암몬 자손들의 욕설을 들었다. 그들은 내 백성을 모욕하고, 그들의 영토를 두고 거드름을 피웠다.」스바냐 2:8 · 본디새김
모압과 암몬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한 문장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모욕과 조롱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교만한 태도에서 나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먼저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직접 복수를 요청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을 향해 쏟아진 말이 하나님께 들렸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유다를 조롱하면서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그들이 미처 고려하지 않은 관계를 드러냅니다.
그들이 모욕한 백성은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교만은 단순한 민족 간의 경쟁이나 감정적 적대에 머물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돌보시는 백성을 멸시하는 행동이 됩니다.
소돔에서 살아남은 가문의 후손이 소돔처럼 되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모압은 반드시 소돔처럼, 암몬 자손들은 고모라처럼 될 것이다. 잡초가 차지한 땅과 소금 구덩이, 영원히 황폐한 곳이 될 것이다.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내 민족의 남은 이들이 그들을 차지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선언했다.스바냐 2:9 · 본디새김
모압과 암몬의 조상인 롯은 소돔의 멸망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롯의 후손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이 선포됩니다.
이것을 조상 때문에 후손이 심판받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바냐는 심판의 이유를 이미 밝혔습니다. 그들의 모욕과 교만 때문입니다.
과거에 심판에서 구출된 가문에 속한다는 사실이, 현재의 교만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습니다.
소금 구덩이와 잡초가 차지한 땅이라는 이미지는 그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람이 가꾸고 열매를 거두던 땅이 생명이 번성하기 어려운 황폐한 장소로 변합니다.
블레셋에 대한 말씀에서는 남은 자들이 가축을 치고 집에 눕는 평화로운 장면이 나왔습니다. 모압과 암몬에 대한 말씀에서는 그들이 적의 재산과 땅을 차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장면의 모습은 다릅니다. 하지만 남은 자들이 심판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미래를 부여받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모든 이웃 민족을 향한 무제한적인 약탈 허가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모압과 암몬의 교만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교만에 대한 몫이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백성을 모욕하고, 그 백성을 향해 거드름을 피웠기 때문이다.스바냐 2:10 · 본디새김
모압과 암몬이 심판받는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바냐는 한 민족의 고난을 다른 민족이 조롱할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굶주리는 신들 — 심판의 지평이 갑자기 넓어지다
여호와야훼는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가 땅의 모든 신을 야위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들의 모든 해안 주민이,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그에게 절할 것이다.스바냐 2:11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특정 민족을 향한 심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땅의 모든 신」과 「민족들의 모든 해안 주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모압·암몬의 관계를 다루던 이야기가 온 세상의 예배 문제로 확장됩니다.
신들이 굶주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고대 근동의 여러 종교에서는 신에게 음식을 바치고 제물을 제공하는 제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신상을 실제 살아 있는 신적 존재처럼 섬기며 음식을 마련하는 관습도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신들을 야위게 한다」는 표현은 날카로운 풍자가 됩니다.
사람들이 제물을 바치고 섬기면서 힘을 유지한다고 여겼던 신들이, 정작 여호와야훼 앞에서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리던 숭배와 권위가 사라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의 진정한 반전은 바로 뒤에 나옵니다.
민족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여호와야훼를 예배하다
앞에서는 여러 민족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먼 해안 지역의 주민들까지 여호와야훼께 절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심판의 목적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적을 제거하는 것으로만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모두 이동하여 예배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민족들이 자기 자리에서 여호와야훼께 절합니다.
이것을 예루살렘 성전의 역할이 끝났다는 명시적인 선언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 문제를 직접 논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유다 한 지역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전망은 분명합니다.
말라기 1:11에서도 민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받고 여러 곳에서 그 이름을 위한 예물이 바쳐지는 전망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19:19–25에서는 이집트와 아시리아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미래가 그려집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민족들의 교만을 무너뜨리지만, 그 결과로 모든 민족이 여호와야훼를 알아보는 길을 열어 놓습니다.
스바냐는 이 전망을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절만 제시한 뒤 다시 심판받을 민족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이 표현을 모든 신을 멸한다는 뜻으로 옮깁니다. 히브리어의 ‘야위게 하다’라는 생생한 비유보다 그 결과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구스 — 하나님의 칼은 먼 남쪽에도 미친다
「구스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찔려 죽은 자들이다.」스바냐 2:12 · 본디새김
구스에 대한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짧습니다.
블레셋은 여러 성읍의 이름과 함께 묘사되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심판의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스에게는 한 절만 주어집니다.
구스는 일반적으로 이집트 남쪽 나일강 상류의 누비아 지역과 연관되는 고대의 지리적 명칭입니다. 현대의 특정 국가명과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유다에서 바라볼 때 구스는 먼 남쪽의 세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너희도」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미 심판이 선포된 민족들의 대열에 구스도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남쪽의 먼 나라라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내 칼」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군대가 그들을 공격할 것인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전투가 이 선언에 해당하는지도 이 절에서 직접 밝히지 않으십니다.
예언의 강조점은 전쟁의 세부 경과가 아니라 그 심판의 궁극적인 주체에 있습니다.
이제 시선은 정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스바냐 2장의 가장 길고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이 시작됩니다.
니느웨 — “나뿐이다”라고 말하던 도시의 마지막 모습
제국의 중심을 향해 뻗는 손
그가 북쪽을 향해 손을 뻗어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니느웨를 황폐하게, 광야처럼 메마르게 만들 것이다.스바냐 2:13 · 본디새김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을 지배했던 강대한 제국이었습니다. 니느웨는 그 제국의 중요한 수도였습니다.
아시리아는 군사력과 광대한 지배 영역을 통해 여러 민족에게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유다도 그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8–19장은 아시리아 군대가 유다를 위협했던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그 제국의 중심을 향해 여호와야훼께서 손을 뻗으신다고 말합니다.
왕궁에 들어온 짐승들
그 안에 짐승 떼가, 민족의 모든 짐승이 누울 것이다. 사다새도 호저도 그 성읍의 기둥머리에서 밤을 지낼 것이다. 창에서는 소리가 노래하고, 문턱에는 황폐함이 있을 것이다. 그가 백향목 판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스바냐 2:14 · 본디새김
화려하게 꾸며졌던 건물은 외부에 노출되고, 사람이 드나들던 문턱에는 황폐함이 자리 잡습니다.
「창에서는 소리가 노래하고」라는 표현도 인상적입니다. 한때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말하고 웃고 명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창가에서 들리는 것은 폐허에 머무는 생물들의 소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바냐는 니느웨의 멸망을 시체와 불길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소리와 공간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한때 사람이 살던 곳에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었던 건물은 남아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던 문명은 사라졌습니다.
니느웨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이 즐거워하며 안전하게 살던 성읍이다. 마음속으로 「나뿐이다.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던 성읍이다. 어쩌다 황폐한 곳이, 짐승이 눕는 곳이 되었는가.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쉿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 것이다.스바냐 2:15 · 본디새김
즐거움과 안전 자체가 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바냐는 도시의 번영을 묘사한 뒤, 그 번영 속에서 형성된 마음의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그 도시는 자기 힘이 너무 강하다고 여긴 나머지, 자기 밖의 다른 존재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스바냐는 도시를 한 사람처럼 묘사하여 그 마음속 생각을 들려줍니다.
도시는 수많은 사람과 건물과 제도로 이루어져 있지만, 예언자는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목소리로 압축합니다.
그 목소리는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바냐가 보여 준 니느웨의 마지막 모습에는 그 도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졌던 도시가 이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사라지고, 도시의 공간은 동물들에게 넘어갑니다.
자기 혼자 충분하다고 믿던 곳이 결국 자신을 유지할 수도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내는 마지막 몸짓
행인이 폐허가 된 니느웨를 바라보며 소리를 내고 손을 흔듭니다.
한때 여러 민족을 두렵게 만들던 제국이 이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어떤 긴 연설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폐허 자체가 니느웨의 오만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니느웨의 멸망은 주전 612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스바냐의 관심은 도시가 어떻게 함락될 것인지에 대한 군사적 설명보다,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인 것처럼 여기던 도시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가에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동물들을 가리키는지는 원문에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디새김이 「사다새」와 「호저」로 옮긴 낱말들은 드물게 사용되며, 다른 종류의 새나 동물로 이해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백향목은 고대 근동에서 고급 건축재로 사용되었습니다. 왕궁이나 부유한 건물의 장식에 사용될 만큼 귀한 목재였습니다. 이사야 47:8–10에서도 바벨론이 비슷한 자기 확신을 표현합니다. 강대한 제국들이 자신을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여기던 교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특히 여호와야훼의 유일성을 선포하는 이사야 45:5–6과 나란히 읽으면 더욱 날카로운 대비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지만, 니느웨는 자신이 그런 존재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여기서 「쉿 소리」는 누군가를 조용히 시키는 소리라기보다, 놀라움이나 경멸을 드러내는 휘파람 또는 야유의 소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손을 흔드는 행위도 환영의 몸짓이 아니라 조롱이나 경멸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맺음말 — 저녁이 찾아온 두 도시
두 도시 모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가 무너진 곳입니다. 그러나 한곳에서는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가고, 다른 곳에서는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여기던 도시의 빈자리가 드러납니다. 안전은 단순히 위험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심판하신다는 말은 이스라엘만 예외적으로 안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뒤에야 주변 민족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스바냐의 세계는 단순히 이스라엘은 선하고 다른 나라들은 악하다는 구도로 나뉘지 않습니다.
아스글론에서는 남은 자들이 양 떼를 돌보다가 저녁이 되면 집에 눕습니다.
니느웨에서는 사람이 사라진 건물의 기둥머리에 동물들이 머물고, 황폐한 창가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아스글론의 남은 자들이 특별히 강했던 것은 아닙니다. 니느웨가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스바냐가 그려 낸 두 도시의 저녁은 전혀 다릅니다.
한곳에는 사람이 다시 누울 자리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사람이 살던 흔적만 남았습니다.
스바냐 2장은 그 차이를 보여 준 뒤, 마지막으로 니느웨를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남깁니다.
그 사람은 한때 세상을 두렵게 했던 도시의 폐허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쉿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듭니다.
「나뿐이다.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던 도시를 향해, 이제 아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