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7–10장 · 질문에 답하는 말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삶
고린도 교회에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며 성적인 욕구를 채우는 일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바로 앞 장에서 그들에게 몸은 주님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기 몸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7장을 열면 뜻밖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남자는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7:1) 이번에는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더 좋다는 주장입니다. 앞에서는 성적 관계를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성적 관계를 피하는 것이 더 거룩한 삶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느 편에 설까요?
그는 어느 한쪽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서로의 몸을 존중하고 부부로서 할 도리를 다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굳이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라고 권하면서도,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려 한다면 보내 주라고 합니다. 현재의 처지에 머무르라고 하면서도, 노예가 자유로워질 기회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마치 일관된 원칙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권면 사이에 하나의 문장을 세워 놓습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십시오」(7:24)라는 문장이 7장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결혼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노예냐 자유로운 사람이냐 하는 구별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처지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지금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먼저 자기 삶의 조건을 바꾸어야만 그를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부르시고, 그 부르심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혼인 안에서 누구의 몸이 누구에게 속하는가?
고린도에서 온 편지
바울은 7장을 새로운 말로 시작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편지에 써 보낸 문제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남자는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고린도전서 7:1 · 두루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 들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직접 편지로 물어본 문제에 답합니다. 그 편지는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을 했는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결혼과 성적 관계를 길게 설명한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두고 실제적인 논의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것」에서 원문은 ‘건드리다’라는 뜻의 합토마이(ἅπτω)를 씁니다. 여기서는 성적인 접촉을 에둘러 말하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편지에 쓴 말로 보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원문에는 인용 부호가 없어 바울 자신의 견해를 먼저 말한 뒤 설명을 이어 간다고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바울은 그 생각이 실제 결혼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성적인 방종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적인 관계를 지나치게 부정하는 태도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두 경우 모두에서 몸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몸에 대한 권한이 서로에게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부부로서 할 도리를 다해야 하며,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7:3 · 두루새김
바울은 부부의 성적인 관계를 한쪽이 다른 쪽에게 베푸는 특별한 호의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남편에게만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일이 있고, 아내 역시 남편에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은 다음 절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내의 몸을 다스릴 권리는 아내 자신이 아니라 남편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몸을 다스릴 권리는 남편 자신이 아니라 아내에게 있습니다.고린도전서 7:4 · 두루새김
앞 문장만 읽으면 남편이 아내의 몸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정확히 대칭되는 문장을 덧붙입니다.
이 대칭을 놓치면 바울의 논증이 무너집니다.
원문에서도 아내와 남편의 위치가 서로 바뀌면서 같은 동사가 반복됩니다. 「다스릴 권리」(ἐξουσιάζω)로 옮긴 동사는, 앞 장에서 바울이 어떤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말할 때 사용한 동사와 같은 계열입니다. 6장에서는 자신의 자유가 다른 무엇의 지배 아래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7장에서는 결혼한 사람들이 자기 몸에 대해 자기만의 권리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과 배우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관계는 같은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결혼을 서로를 위한 관계로 이해합니다. 몸은 오직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소유물이 아니라, 결혼 안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관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쪽 배우자가 다른 쪽에게 성적 관계를 강요할 권리가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에게 마땅히 돌아갈 몫이 있다는 말과, 상대방의 뜻을 무시하여 강제로 그 몫을 빼앗을 수 있다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부부가 뜻을 모으는 일을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바울은 부부 중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 만들지 않습니다. 서로가 자기만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두 사람 모두를 상대방에 대한 책임 앞에 세웁니다. 이 구절만으로 바울이 당시의 모든 결혼 관습과 법적 불평등을 없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남성 중심의 고대 사회에서 부부의 성적 관계에 관해 남편에게만 권리를 주고 아내에게만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성관계를 중단할 수 있습니까?
기도에 힘쓰려고 서로 뜻을 모아 잠시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는 경우 외에는, 서로에게 부부로서 할 도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 뒤에는 다시 잠자리를 함께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5 · 두루새김
바울은 잠시 성적인 관계를 중단하는 일을 허용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을 모아야 합니다.
기간이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힘쓰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전제됩니다.
이 조건들은 신앙적인 이유를 들어 한쪽 배우자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는 일이 정당화되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에 집중하는 특별한 기간을 허용하면서, 그 일이 부부 사이의 서로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는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탄의 유혹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사람이 가진 욕구와 자신을 절제하는 힘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다룹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 역시 서로 상대방의 몸과 뜻을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렇게 해도 좋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6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하는 말의 성격을 구별합니다. 「그렇게 해도 좋다는 뜻」이 잠시 성관계를 중단하는 일을 가리키는지, 앞의 결혼생활에 관한 권면 전체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생활 방식을 강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절에서 밝혀집니다.
혼인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은혜의 선물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은 서로 다릅니다.고린도전서 7:7 · 두루새김
바울은 독신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모든 사람의 의무로 만들지 않습니다. 저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 다르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선물」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은사를 중요하게 여기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결혼과 독신에 관한 논의에서도 하나님의 선물을 이야기합니다. 특별한 능력을 나타내는 은사만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도록 주어졌는지도 은혜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신이 더 거룩하고 결혼은 그보다 낮은 신앙의 단계일까요?
바울은 그런 서열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처럼 지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혼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뒤에서 여러 차례 결혼은 죄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결혼한 사람이 독신자를 미완성된 사람처럼 대할 필요도 없고, 독신자가 결혼한 사람보다 자신이 더 높은 영적 수준에 있다고 여길 근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합토마이가 모든 성관계를 피하는 것을 뜻하는지, 성적 쾌락을 위한 관계를 특히 문제 삼는지도 논의됩니다. 고대 그리스어 자료에서 이 말이 쓰인 예를 바탕으로, 이 표현이 반드시 모든 성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성적 쾌락을 위한 접촉과 관련될 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 바울이 당시 어떤 결혼 상태에 있었는지는 7절만으로 완전히 확정할 수 없지만, 7–8절은 그가 편지를 쓸 당시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음을 강하게 보여 줍니다. 그가 이전에 결혼했는지, 배우자와 사별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혼인을 유지할 것인가, 갈라설 것인가?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혼인할 자유가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남편을 잃은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처럼 결혼하지 않은 채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결혼하십시오. 욕망에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7:8–9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처럼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하지만, 그 권면은 조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령이 아닙니다. 「욕망에 불타는 것」은 성적 욕망으로 불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성적 욕망을 악한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그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결혼을 단지 성욕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줄여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지금 답하고 있는 질문 자체가 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이 더 좋은가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 문제에 맞추어 결혼의 한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반복해서 지키려는 것은 선택의 여지입니다.
결혼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그 선택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미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결혼한 사람들에게 명령합니다. 이것은 내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갈라서지 마십시오.고린도전서 7:10 · 두루새김
「내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는 말은 바울 자신의 말에는 권위가 없고, 주님의 말씀에만 권위가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뒤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서도 주님께서 자신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7:25, 40). 따라서 여기서의 구별은 권위의 높고 낮음보다, 예수님께서 이미 직접 가르치신 내용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결혼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아내는 남편과 갈라서지 말고, 남편은 아내와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갈라선 경우도 언급합니다.
이미 갈라섰다면 결혼하지 않은 채 지내거나 남편과 화해하십시오. 남편도 아내와 이혼하지 마십시오.고린도전서 7:1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 교회 안에 실제로 별거하거나 이혼한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결혼생활을 이어 가는 일과 화해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모든 형태의 결혼생활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세부 규정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폭력과 강압, 학대처럼 상대방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을 이 구절이 직접 다루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결혼생활을 유지하라는 이 권면을 피해자의 안전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관계를 지속하도록 강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관심은 결혼한 신자들이 종교적인 이유나 새로운 영적 열심 때문에 기존의 결혼 관계를 가볍게 해체하는 일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직접 대응하는 사례가 없는 새로운 상황, 한쪽 배우자만 그리스도를 믿게 된 가정을 다룹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와 계속 살아도 됩니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내가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믿음의 형제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고, 그 아내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아내와 이혼하지 마십시오.고린도전서 7:12 · 두루새김
이어 13절에서는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의 경우도 똑같이 다룹니다. 한쪽이 믿고 다른 쪽이 믿지 않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이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신자인 쪽에서 먼저 결혼 관계를 해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왜 생겼을까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게 된 뒤,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거룩함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 바울은 신자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한 몸을 이루는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런데 바울의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를 통해 거룩해졌고,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을 통해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자녀는 더러울 텐데, 지금은 거룩합니다.고린도전서 7:14 · 두루새김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앞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으로 거룩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믿지 않는 배우자도 거룩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배우자가 자동으로 구원받았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바로 16절에서 믿는 배우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를 구원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이미 구원받았다고 전제한다면 이 질문은 어색해집니다.
여기에는 두 방향의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결혼 관계 자체가 더럽거나 부정하지 않아서,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생활을 유지해도 신자의 거룩함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거룩함은 그 사람이 직접 믿게 되는 일과 구별되며, 관계에서 생기는 의미를 갖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 상당 부분 겹칩니다. 어느 경우든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결혼 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논증을 자녀들에게까지 넓힙니다. 이 말도 자녀들이 부모의 믿음 때문에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확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함께 이루는 가정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실 수 있는 관계로 설명합니다.
거룩함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멀어지는 방식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거룩함이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언제나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겠다고 한다면
그러나 믿지 않는 쪽이 갈라서려 한다면 갈라서게 두십시오. 이런 경우에는 믿는 남편이나 아내가 노예처럼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 가운데로 부르셨습니다.고린도전서 7:15 · 두루새김
바울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라고 권했지만, 한쪽이 떠나겠다고 할 때 다른 한쪽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붙잡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이루는 관계입니다.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상대방의 마음과 행동까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노예처럼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이 그 사람에게 재혼할 자유까지 허락하는지를 두고는 해석이 갈립니다. 재혼이 가능하다고 보는 해석은, 더 이상 결혼 관계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지 않다는 선언이 실제로 결혼 관계가 끝났음을 뜻한다고 봅니다. 재혼 여부는 여기서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보는 해석은, 11절에서 바울이 이미 갈라선 사람에게 결혼하지 않은 채 지내거나 화해하라고 말한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본문은 재혼 가능성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문제를 한쪽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든 바울은 믿는 배우자에게 불가능한 관계를 끝없이 붙잡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평화 가운데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평화는 다툼이 없는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살아가는 관계의 성격입니다.
이것을 모든 갈등이 생길 때마다 관계를 끝내도 된다는 허락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떠나려는 상황에서, 신자에게 그 관계를 강제로 유지할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이 남편을 구원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내 여러분, 여러분이 남편을 구원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남편 여러분, 여러분이 아내를 구원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고린도전서 7:16 · 두루새김
이 질문은 두 방향으로 읽힙니다. 하나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장차 믿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쉽게 관계를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배우자를 구원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앞에서 결혼생활의 유지를 권하다가 15절에서는 이별을 허용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읽을 수 있고, 본문이 한쪽을 명확하게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두 읽기 모두에서 분명한 것은,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자기 능력으로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배우자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며, 함께 살아가면서 믿음의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까지 자기 손에 쥐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더 넓은 원칙으로 나아갑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 순간 자신의 모든 사회적 조건과 관계를 반드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원칙입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주님의 명령」은 예수님께서 이혼에 관해 질문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창조 때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키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마가복음 10:2–12의 가르침과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19:3–9에도 관련된 가르침이 전해지는데, 두 복음서의 표현과 예외 조항에는 차이가 있지만 결혼을 사람이 쉽게 해체할 수 있는 관계로 보지 않는다는 중심은 같습니다. 7:10–16의 이혼에 관한 바울의 권면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의 관계도 해석이 갈립니다. 14절은 구약의 에스라 9–10장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 민족과 결혼하면서 언약에 충실한 삶과 종교적 정체성을 해친 문제가 다루어지고, 이방인 아내들과의 분리가 추진됩니다. 에스라의 문제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언약 백성 정체성과, 고린도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유지되고 있는 결혼 관계와 관련되어 있어서 두 본문을 똑같은 상황에 대한 반대 명령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5절의 「노예처럼 얽매여」에 쓰인 동사는 노예로 만들거나 노예의 상태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자리에서
세 번 반복되는 「머무르라」는 권면
17절부터 24절까지는 7장 전체의 중심축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결혼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할례와 노예 신분을 이야기합니다. 처음 읽으면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처럼 보이지만, 이 대목이 앞뒤 문맥을 이어 줍니다.
결혼한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 관계를 해체해야 합니까?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신앙적으로 완전해지기 위해 반드시 결혼해야 합니까?
노예가 신자가 되면 먼저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은 자신의 종교적·사회적 정체성을 바꾸어야 합니까?
바울은 이 모든 질문을 한 가지 원칙 아래 놓습니다.
다만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대로,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의 처지대로 살아가십시오. 나는 모든 교회에 이렇게 지시합니다.고린도전서 7:17 · 두루새김
그는 같은 원칙을 20절과 24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현재의 처지에 머무르라는 권면이 되풀이되고, 두루새김에서는 「살아가십시오」, 「그대로 머무르십시오」, 「함께 지내십시오」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처지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야기합니다.
다음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무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현재의 신분을 유지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신분에 있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할례도, 할례받지 않음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할례를 받는 것도 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19 · 두루새김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표시로 주어졌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할례는 단순한 신체적 관습이 아니라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깊이 관련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할례 여부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감추거나 지우려 할 필요가 없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할례를 받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의 요점은 민족적 정체성을 가치 없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하기 위해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의 구별을 새로운 자격 조건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도 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할례 역시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할례라는 언약의 표시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자격 조건으로 삼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여전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겉으로 어떤 상태에 있느냐보다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에 등장하는 사례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노예 신분입니다.
노예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해방된 사람입니다
노예일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 일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살리십시오.고린도전서 7:21 · 두루새김
그렇다면 바울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 노예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일까요?
먼저 역사적 현실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매인 존재였습니다. 노예의 삶은 주인의 권한과 사회적·법적 제약 아래 놓였으며, 노동과 생활, 신체적 안전에 관한 심각한 불평등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회 안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21절의 마지막 표현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원문 말론 크레사이는 문자적으로 ‘오히려 활용하라’에 가까운데, 무엇을 활용하라는지 목적어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살리라는 읽기이고, 두루새김은 「그 기회를 살리십시오」라고 옮겨 이 읽기를 따릅니다. 다른 하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도 현재의 처지를 활용하며 살아가라는 읽기입니다.
21절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특별히 언급한다는 점은 첫 번째 읽기를 뒷받침하고, 앞의 20절과 뒤의 24절이 현재의 처지에 머무르라고 권한다는 점은 두 번째 읽기에 힘을 줍니다. 원문의 표현만으로 어느 읽기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노예로서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자유롭게 해 주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고린도전서 7:22 · 두루새김
바울은 법적 신분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속 관계를 교차시킵니다. 로마의 노예가 실제로 자유로운 사람의 법적 권리를 갖게 되었다거나, 자유로운 사람이 법적으로 노예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법적인 지위보다 깊은 곳에 있음을 밝힙니다. 자유로운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주인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을 사기 위해 값이 치러졌습니다.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고린도전서 7:23 · 두루새김
바로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했던 표현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것은 값이 치러진 일이었으므로,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궁극적인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노예제도를 직접 없애라는 사회적 명령과 같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제도를 없애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역사적 한계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절을 노예제도를 영원히 정당화하는 선언으로 읽을 수도 없습니다. 당시의 제도를 즉각 없애는 선언은 아니지만, 신분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태도를 흔드는 주장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서 하나님과 함께」
형제자매 여러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십시오.고린도전서 7:24 · 두루새김
이 문장은 17절부터 이어진 논의를 마무리합니다. 할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노예인지 자유로운 사람인지 하나씩 언급한 뒤,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바울의 권면은 단순히 현재 처지에 안주하라는 말과 달라집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도 더 나은 조건을 꿈꾸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신분을 바꿔야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예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노예가 자유를 얻는 일과 얻지 못하는 일은 실제 삶에서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혼과 독신도 서로 다른 책임과 기쁨,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바울은 그 차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이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그 흔적을 없애려 하지 마십시오」는 실제로 할례의 흔적을 감추거나 되돌리려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는 몸의 겉모습을 바꾸어 할례의 흔적을 감추려는 사례들이 알려져 있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로 누군가 그런 수술을 시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19절은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은 상태 자체보다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한 갈라디아서 5:6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21절에 대해서는 로마 시대 고린도의 노예 해방 제도를 고려하여 자유를 얻을 기회를 살리라고 읽으면서, 실제로 해방된 노예의 사회적 처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또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오네시모를 더 이상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방향으로 빌레몬을 권합니다(빌레몬서 15–16절). 두 편지의 상황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보게 한다는 점은 연결됩니다.
왜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가?
「지금 닥친 어려움 때문에」
처녀들에 대해서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되게 하셨으므로, 내 생각을 말하겠습니다.고린도전서 7:25 · 두루새김
바울은 주님께서 직접 주신 명령이 있는 문제와, 사도로서 상황을 살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문제를 구별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가치 없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자신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말합니다. 이 표현은 4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믿고 맡길 만한 태도라고 했던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판단을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지금 닥친 어려움 때문에, 사람은 현재의 처지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고린도전서 7:26 · 두루새김
「지금 닥친 어려움」은 해석이 갈리는 대목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이 겪던 경제적 어려움이나 식량 부족,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박해나 사회적 압박,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시대의 마지막 때에 겪는 어려움 가운데 무엇을 가리키는지 의견이 나뉩니다. 본문은 그 어려움이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 밝히지 않으므로, 특정한 기근이나 박해를 확정적으로 배경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는 이유를 그들이 처한 현실과 연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결혼 자체가 더러운 일이라거나 하나님께 속한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혼할 자유를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결혼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처녀가 결혼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이 삶에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해 주고 싶습니다.고린도전서 7:28 · 두루새김
바울은 서로 다른 선택 사이의 실제적인 유익과 어려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혼하면 배우자를 돌보고 가정의 삶을 함께 책임져야 하는데, 어려운 시대에는 그런 책임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기와 같은 삶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을 생각하여 신중하게 결정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바울은 그 판단의 근거를 더 넓은 차원으로 가져갑니다.
남은 시간이 짧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남은 시간이 짧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우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처럼 지내고, 세상의 것을 쓰는 사람들도 거기에 온통 매달리지 않는 사람처럼 지내십시오. 이 세상의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7:29–3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7장 후반부의 중심입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끝없이 반복되는 현재 속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구원을 이루셨고, 장차 그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짧습니다」라는 말을 바울이 구체적인 연도나 날짜를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세상이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최종 현실이 아니라는 시간의 성격입니다.
처음 읽으면 이 표현들은 극단적으로 들립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돌보지 말라는 뜻일까요? 우는 사람이 슬픔을 억누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결혼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마땅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한 바울의 앞선 권면과 충돌합니다.
반복되는 「사람처럼」은 원문에서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구조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실제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가 되거나, 슬픔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관계와 감정과 소유를 최종적인 현실인 것처럼 붙잡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를 사랑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 관계가 그 사람의 모든 존재를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실제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이 하나님의 미래를 완전히 가로막는 최종적인 현실은 아닙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기쁨 역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물건을 사는 사람은 실제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유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31절은 「이 세상의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로 끝납니다. 「모습」은 어떤 것의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나 현재의 모습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창조 세계 자체가 가치 없다고 말하지 않고, 현재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모습과 질서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삶을 더 넓은 하나님의 미래 안에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이런 시간 이해는 결혼과 독신에 대한 판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인생에서 무언가가 모자란 상태가 아니고, 결혼하는 것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인생의 완성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시대에 주어진 삶의 형태이며,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마음이 나뉘는 사람들,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
결혼한 사람의 마음은 왜 나뉘는가?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지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지 생각하며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고린도전서 7:32 · 두루새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반면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은 결혼한 사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과 책임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혼한 사람이 마음을 쓰는 「세상일」, 곧 배우자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과 무관한 세속적인 행동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앞에서 바울이 결혼 관계를 하나님 앞에서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친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여기서 세상일은 악한 일이 아니라, 결혼한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감당해야 할 일상적인 책임과 관심을 가리킵니다. 다만 그런 책임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보다 시간과 관심을 여러 방향으로 나누어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나뉩니다」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마음이 나뉩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처녀는 몸과 영이 모두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지 생각하며 세상일에 마음을 씁니다.고린도전서 7:34 · 두루새김
바울은 1장에서 그리스도가 나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결혼한 사람의 「마음이 나뉩니다」(μερίζω)라고 말하며, 원문에서도 두 곳에 같은 계열의 동사가 쓰입니다. 다만 1장에서는 교회의 분열이 중심이었고, 7장에서는 결혼한 사람이 서로 다른 책임과 관심 사이에서 나뉘는 상황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7장에서 마음이 나뉘는 것을 곧바로 죄나 영적 실패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독신 생활이 주님께 집중하는 데 실제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혼한 사람을 하나님께 덜 충실한 사람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그 권면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을 묶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바르게 살며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35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의 조언이 고린도 교인들을 새로운 규칙으로 옭아매는 일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고, 이 표현은 24절의 「하나님과 함께 지내십시오」와 의미상 연결됩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다른 욕망에 모두 빼앗길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배우자를 사랑하고 돌보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어떤 생활 형태가 더 종교적으로 보이는가에 있지 않고, 그 삶이 실제로 주님께 집중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34절 첫머리의 나뉜다는 말을 앞의 결혼한 남성에 대한 설명에 붙일 것인지, 뒤의 결혼하지 않은 여성과 처녀에 대한 설명에 붙일 것인지를 두고 사본과 구두점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두루새김은 이 말을 앞 문장에 붙여 「마음이 나뉩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이 선택은 문맥상 자연스럽지만 원문상의 논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며, 어느 읽기를 택하더라도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삶의 책임을 감당한다는 요점은 같습니다.
결혼시키는 것도 잘하는 일이고, 결혼시키지 않는 것도 잘하는 일입니다
가장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
자기 딸이 결혼할 나이를 지났는데도 그대로 두는 것이 딸에게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결혼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딸과 그 결혼 상대가 결혼하게 하십시오.고린도전서 7:36 · 두루새김
가장 큰 문제는 원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사람과 그에게 속한 처녀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해석은 셋으로 갈립니다. 딸의 결혼을 결정하는 아버지나 보호자로 보는 읽기, 약혼한 남자와 그의 약혼녀로 보는 읽기, 성적인 관계 없이 함께 지내기로 한 남녀로 보는 읽기입니다. 두루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따라 「자기 딸」이라고 옮겼습니다. 누가 결정하는 사람인지가 달라지지만, 바울이 내리는 판단의 핵심은 어느 해석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딸을 결혼시키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고, 결혼시키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38 · 두루새김
바울은 결혼시키는 것도 잘하는 일이라고 인정하면서, 지금의 상황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 더 좋을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더 잘할 것입니다」를 모든 시대와 모든 상황에서 독신자가 결혼한 사람보다 더 거룩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장은 앞에서 설명한 현재의 어려움, 남은 시간이 짧다는 인식, 주님의 일에 집중하는 삶이라는 문맥 안에 놓여 있습니다.
왜 바울은 결정의 조건을 그렇게 자세히 설명할까?
37절에서 바울은 결혼시켜야 할 사정이 없는지,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지, 마음을 굳게 정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표현들은 그 결정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압력이나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해석할 경우, 그 시대에 아버지가 가졌던 권한이 문장에 깔려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딸의 의사와 결정권을 현대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이해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오늘날 부모가 성인 자녀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권한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바울은 다시 한번 결혼할 자유와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함께 인정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버지와 딸로 읽는 해석은 고대 사회에서 결혼에 관해 부모나 보호자가 중요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 기대며,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라 38절도 「자기 딸을 결혼시키는 사람」이라고 옮겼습니다. 약혼 관계로 읽는 해석은 결혼하지 않고 지내려 했던 약혼자가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여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문제로 봅니다. 36절 원문의 그들이 결혼하게 하라는 표현은 이 읽기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두루새김은 앞의 해석에 맞추어 「딸과 그 결혼 상대가 결혼하게 하십시오」라고 옮겼습니다. 셋째 읽기는 초기 교회에서 알려진 영적 결혼 또는 금욕적 동거 관습과 연결하지만, 그런 관습이 바울이 편지를 쓰던 고린도 교회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언어적·문화적 배경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읽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설득력 있다는 해석도 있으나 약혼 관계로 읽는 견해도 계속 논의되고 있어, 원문이 분명히 밝히지 않는 인물 관계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 남겨진 자유
죽음은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를 끝냅니다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남편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주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7:39 · 두루새김
바울은 마지막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의 재혼 문제를 다룹니다. 결혼 관계가 배우자의 죽음으로 끝나므로, 그 여성은 다시 결혼할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사람과 반드시 결혼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주님 안에서」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합당한 방식으로 결혼하라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결혼을 신앙과 무관한 결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다시 자신이 더 좋다고 여기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대로 지내는 편이 더 복됩니다. 나도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고린도전서 7:40 · 두루새김
바울은 독신을 무언가가 모자란 상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반드시 다시 결혼해야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상대방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더 좋아하는 길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재혼할 자유를 먼저 인정한 상태에서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권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를 자신이 정말 성령을 받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고백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사도로서 내리는 판단이 하나님의 성령과 무관한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성령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택을 모두 하나로 통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더 좋다고 여기는 길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길도 죄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시는가?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 삶을 바꾸어야 더 거룩해질 수 있는지 묻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이 더 거룩한지, 믿지 않는 배우자와 계속 살아도 되는지, 노예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삶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형편을 살폈고, 명령과 자신의 생각을 구별했으며, 가능한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붙잡은 중심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부르셨고,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시고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결혼한 뒤에야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독신을 선택해야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신분을 얻은 뒤에야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의 모든 조건을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의한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거나, 해로운 관계를 무조건 지속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현재의 조건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누구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가 끝나는 아픔을 경험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현재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유를 얻을 기회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변화의 가능성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결혼에 관한 긴 권면 사이에, 결혼한 사람에게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노예에게도 자유로운 사람에게도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바울이 이 장에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는 삶의 중심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