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7–10장 · 질문에 답하는 말

옳은 지식이 사람을 무너뜨릴 때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르는 형제자매를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이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잘못된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이들은 신학적으로 옳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우상은 참된 신이 아니며, 음식 자체가 사람을 하나님께 더 가깝게 만들거나 멀어지게 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편지가 진행될수록 뜻밖의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옳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 지식 때문에 그리스도께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그들의 지식이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형제자매를 멸망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 장의 논증은 세 번 방향을 바꿉니다. 먼저 사람의 앎을 하나님의 앎 앞에 세우고, 이어서 우상에 관한 논쟁을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고백으로 끌어올립니다. 마지막에는 그 높은 신앙고백을 다시 한 사람의 식탁으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 식탁에 앉아 있는 형제자매 한 사람 때문에, 바울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선언합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68장 본문 읽기 →

앎은 부풀리고 사랑은 세운다

고린도전서 8:1–3 본문 →

고린도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것

바울은 새로운 문제를 꺼냅니다.

이제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지식이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우쭐하게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세워 줍니다.고린도전서 8:1 · 두루새김

당시 고린도에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문제는 단순한 식생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은 종교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제물로 쓰인 음식은 종교 의식과 연결된 식사 자리에서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피하는 일은 때로 사회적 관계와 식사 모임에 참여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특히 바울이 10절에서 언급하는 장소는 우상을 모신 신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고린도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상은 참된 신이 아니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므로, 우상에게 바쳤다는 사실이 고기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이런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두려움 없이 먹을 자유가 있다.

바울은 먼저 이들의 주장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1절의 「우리 모두에게 지식이 있습니다」는 바울 자신의 진술일 수도 있지만, 고린도 신자들이 내세우던 주장을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모든 사람이 이런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일단 받아 적고 그 말의 한계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말을 인용 부호로 표시했지만, 원래 편지에는 현대적인 인용 부호가 없으므로 인용의 범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랑한 것은 바로 지식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에서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말과 지식에 두루 넉넉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8장에서는 바로 그 지식이 사람을 우쭐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지식 자체가 악해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사람이 자기 우월성의 근거로 삼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문에서 「우쭐하게」(φυσιόω) 한다는 말은 안에 공기가 차서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겉으로는 커지지만, 그것이 곧 튼튼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면 「세워 줍니다」는 건물을 짓는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그리스어 동사 오이코도메오(οἰκοδομέω)에서 나왔습니다. 무엇인가가 실제로 자라나고 튼튼해지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지식은 그것을 가진 사람을 크게 보이게 할 수 있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이 설 수 있도록 만듭니다. 바울은 지식의 양보다 그 지식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묻습니다.

그 지식이 누구를 세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인가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마땅히 알아야 할 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8:2–3 · 두루새김

2절의 초점은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자기 지식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 확신이 다른 사람의 처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는 아직 마땅히 알아야 할 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라는 문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아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능력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아시는 관계로 초점이 옮겨 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표현은 정보를 갖고 계신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관계를 맺으신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9에서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다가, 곧 하나님의 아심을 받게 되었다고 고쳐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이 지식으로 이루어 낸 성취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면, 자신의 지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지위를 얻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사람들이 실제로 알고 있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분 하나님, 한 분 주

고린도전서 8:4–6 본문 →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8:4 · 두루새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를 우상이라는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상의 형상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숭배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부정되는 것은 우상이 참된 신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오랫동안 선포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44:9–20에서는 사람이 나무의 일부로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면서, 같은 나무의 다른 일부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리는 모습이 풍자됩니다. 그 비판은 인간이 만든 것을 자신을 구원할 신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하늘에든 땅에든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고 해도—신이나 주라고 불리는 대상이 많기는 하지만—고린도전서 8:5 · 두루새김

「신이나 주라고 불리는 대상이 많기는 하지만」은 그 모든 신을 참된 신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신이나 주로 불리는 존재들이 수없이 많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 모든 주장을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유일신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다

우리에게는 한 분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또 한 분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을 통해 존재합니다.고린도전서 8: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8장의 중심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에 관한 진술이 나란히 놓이지만, 완전히 같은 표현이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존재하는 분이시며, 우리 또한 그분을 통해 존재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에게 창조와 구원은 모두 예수님과 관계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음식의 본질에 관한 논리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세계 전체가 누구에게서 나왔고 누구를 통해 존재하는지부터 다시 고백하게 합니다.

그들의 자유를 판단하는 출발점은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 고백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어떻게 이어받는가

신명기 6:4에는 이스라엘에게 들으라고 부르며, 여호와야훼께서 우리 하나님이시며 한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흔히 쉐마라고 부르는 이 고백은 이스라엘이 여러 신을 섬기는 민족들 가운데서 오직 여호와야훼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는 신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8:6은 이 신앙의 언어를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한 분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쉐마의 유일신 고백을 예수님 중심으로 다시 구성하여,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만이 지니시는 신적 정체성 안에 포함시킨다고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주님이라는 표현을 함께 쓰면서 예수님께 모든 것의 존재와 관련된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이 구절이 반드시 쉐마를 의식적으로 다시 구성한 것은 아니며, 유일신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구별된 지위와 역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고 봅니다.

두 해석의 차이는 가볍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쪽을 따르더라도, 바울은 유일신 신앙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주변에 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분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며, 한 분 주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자기 자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고백을 훨씬 깊고 풍성한 형태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은 다시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점에 서 있지는 않다

고린도전서 8:7–9 본문 →

어떤 사람에게는 고기가 여전히 제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그 음식을 여전히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며 먹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약해서 더럽혀집니다.고린도전서 8:7 · 두루새김

바울은 지식의 부족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 경험이 현재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봅니다. 「습관」(συνήθεια)으로 옮긴 말은 익숙해져 있는 상태, 오래된 관습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는 과거에 어떤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그 신이 자신과 가족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우상이 참된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배웠다고 해서 오랜 세월 형성된 종교적 경험과 감각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여전히 과거의 신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그것이 두 사람에게 같은 행위가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자신의 행위를 도덕적·종교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내면의 의식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양심이 약하다는 표현을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거나 하나님께 덜 사랑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판단은 아직 새로운 신앙의 이해 안에서 충분히 안정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는 음식에 종교적 의미가 있다고 여기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가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행동을 하도록 이끌릴 위험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걱정하는 양심의 손상입니다.

물론 그의 신앙적 이해가 자라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가 입을 수 있는 손상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지식이 정답을 알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집중했다면, 바울은 그 정답을 받아들이는 데 각 사람이 놓인 상황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음식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결정하는가

음식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먹는다고 우리가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먹지 않는다고 부족해지는 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8:8 · 두루새김

모든 것이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예수님을 통해 존재한다면, 음식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힘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을 동시에 자유롭게 합니다. 먹는 사람은 자신이 더 성숙하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고, 먹지 않는 사람도 영적으로 부족한 상태에 놓였다고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유를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그들이 자랑할 수 없게 만드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음식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우월성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영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먹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까?

다만 여러분이 누리는 이 권리가 양심이 약한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린도전서 8:9 · 두루새김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권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보라고 합니다. 자유가 있다는 사실과 그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판단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유를 포기하라고 명령하기 전에, 먼저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원문은 먹는다고 더 나아지지도 않고 먹지 않는다고 부족해지지도 않는다는 순서로 읽는 본문과 그 반대 순서로 읽는 본문이 전해집니다. 두루새김은 전자의 순서를 따릅니다. 어느 쪽이든 먹음과 먹지 않음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우월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논지는 같습니다.

사람을 세운다는 말의 무서운 반전

고린도전서 8:10–12 본문 →

우상의 신전에 기대어 누운 사람

지식이 있는 여러분이 우상을 모신 신전의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고 해 봅시다. 양심이 약한 그 사람도 용기를 얻어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고린도전서 8:10 · 두루새김

이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바울은 이제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지식이 있는 한 사람을 겨냥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자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모신 신전의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다른 신자가 그를 봅니다. 그 신자는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일이 여전히 잘못된 행위라고 여기지만, 자신보다 신앙 지식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저 사람도 먹고 있구나.

하나님에 관해서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도 저렇게 하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먹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는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동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용기를 얻어」로 옮긴 자리에는, 1절에서 사랑이 사람을 「세워 줍니다」라고 할 때 쓴 오이코도메오가 수동형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세워지는 방향은 완전히 다릅니다. 1절에서는 사랑이 다른 사람을 세워 줍니다. 10절에서는 지식 있는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을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쪽으로 세웁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하나는 바울이 의도적으로 빈정거리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랑하는 세움이라는 말을 다시 사용하여, 실제로는 형제자매를 위험한 행동으로 이끌고 있다고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이 동사를 특별한 반어법 없이 어떤 행동을 하도록 확신을 갖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에도 준비되지 않은 신자가 성급히 행동하도록 영향을 받는다는 논지는 같습니다. 다만 1절에 긍정적으로 쓴 말을 11절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장면에 다시 배치하기 때문에, 문맥에서는 반어적인 효과가 특히 두드러집니다.

형제자매를 세운다고 생각한 행동이, 실제로는 그를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지식이 있는 여러분」이라고 옮겼지만, 원문은 지식이 있는 한 사람을 직접 가리키는 단수 표현을 씁니다. 또 원문은 그가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당시 정식 잔치에서는 기대어 누운 자세로 먹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이는 지나가다 음식을 집어 먹는 모습이 아니라 신전 공간의 식사에 참여하는 장면입니다. 다만 8장이 주로 그 행동이 형제자매에게 미치는 결과를 다룬다고 해서, 바울이 신전에서의 식사 자체를 원칙적으로 허용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10:14–22에서는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행위 자체를 경고하고, 10:25–27에서는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나 믿지 않는 사람의 초대를 받아 먹는 음식에 관해 더 넓은 자유를 인정합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의미로, 누구와 함께 먹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

이렇게 여러분의 지식 때문에 그 약한 사람이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형제자매를 위해 죽으셨습니다.고린도전서 8:11 · 두루새김

이 절은 8장의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는가, 누가 더 자유로운가, 누가 우상을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형제자매를 판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형제자매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사람을, 나는 내 자유를 행사하기 위해 얼마나 가볍게 대하고 있습니까?

6절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존재한다고 말했고, 1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한 형제자매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주 전체의 존재에 관여하시는 예수님의 일과 한 사람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이 같은 장 안에서 만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예수님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관심은 약한 사람이 단순히 불쾌해하는 것을 막는 정도가 아닙니다. 「멸망하게 됩니다」는 망하거나 멸망하는 것을 가리키는 심각한 말입니다. 다만 이 구절만으로 그 형제자매가 실제로 최종적인 구원을 잃었다거나 반드시 영원한 멸망에 이른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 위험을 강력하게 경고하여, 형제자매의 믿음을 해치는 일을 사소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합니다.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 예수님께 죄를 짓는 일이 되는 이유

여러분이 이렇게 믿음의 형제자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12 · 두루새김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일과 하나님께 잘못한 일을 구별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장에서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상처를 입히는 것」(τύπτω)으로 옮긴 원문은 치거나 때린다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7절에서 더럽혀지던 양심이 이제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예수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까? 답은 11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사람들이 그 형제자매를 함부로 대하면서 예수님께 충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어 주신 생명 앞에서 나의 권리와 자유가 다시 평가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태복음 25:40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형제자매 가운데 작은 이 하나에게 한 일이 자신에게 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의 상황은 다르지만, 예수님께 속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하다는 점에서 서로 통합니다.

그래서 나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

고린도전서 8:13 본문 →

그러므로 음식이 내 믿음의 형제자매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고기를 영원히 먹지 않겠습니다. 내 형제자매를 넘어뜨리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8:13 · 두루새김

바울은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명령 대신 자기 자신을 내세웁니다.

앞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했고, 이어서 「여러분」의 권리에 관해 말했고, 「지식이 있는 여러분」이 신전에서 먹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나는」이라고 자신을 주어로 내세웁니다. 그는 자유에 관해 논쟁하는 사람에서,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가 자유를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신학이 불확실해서도,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한 형제자매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3절은 지식을 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지식이 가리키는 예수님께 충실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영영 먹지 않겠다는 말은 얼마나 절대적인가

「영원히」는 결코 다시는이라는 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생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으로 읽으면 「음식이 내 믿음의 형제자매를 넘어뜨린다면」이라는 조건을 놓치게 됩니다. 바울은 앞에서 음식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우열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의 선언은 채식에 관한 일반 명령이 아니라, 형제자매가 넘어지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음식 선택을 끝까지 제한할 의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자유는 신전에 들어가서도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사실로 표현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자유는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먹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로 표현됩니다.

그렇다고 이 원칙이 다른 사람이 내 행동을 조금이라도 싫어하면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권리를 내려놓는 이유는 상대방의 모든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실제로 형제자매를 넘어뜨릴 수 있다는 구체적인 위험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문제 되는 것은 신앙적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누군가를 이끌어 그의 믿음을 해치는 일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와,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문제를 첫 번째 문제만큼 진지하게 다룹니다. 바울에게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는 자신이 가진 권리에 매여 있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합니다.

두 사람의 식탁

고린도전서 8:1–13 본문 →

바울은 지식과 사랑을 서로 경쟁하는 두 가치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문제는 너무 많이 알았다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아는 진리를 다른 사람을 세우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자유를 행사하려는 바로 그 자리의 형제자매도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잘못된 믿음을 그대로 유지해 주라고 요구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진리를 알아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사용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그 사실을 잊는다면 우리는 신학적으로 옳은 말을 하면서도 그 신학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사랑과 어긋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다시 두 장면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에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음식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 지식을 가지고 신전의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그곳에서 먹는 일이 두렵고 혼란스럽지만, 자신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먹고 있으므로 따라 먹으려 합니다.

바울은 그 모습을 바라보게 한 뒤, 「나는 고기를 영원히 먹지 않겠습니다」라는 완전히 다른 결심을 내놓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증명하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형제자매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 그 식탁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독자에게 어느 사람이 더 많이 아는지 묻지 않습니다. 어느 사람이 형제자매를 세우고 있는지 묻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은 그 질문을 남긴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