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7–10장 · 질문에 답하는 말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 곁에 머무는 삶
고린도 교회에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며 성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일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바로 앞 장에서 그들에게 몸은 주님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기 몸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7장을 열면 뜻밖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남자가 여자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7:1). 이번에는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더 좋다는 주장입니다. 앞에서는 성적 관계를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성적 관계를 피하는 것이 더 거룩한 삶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느 편에 설까요?
그는 어느 한쪽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혼인한 사람들에게는 서로의 몸을 존중하고 부부의 의무를 다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굳이 혼인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혼인을 유지하라고 권하면서도,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려 한다면 보내 주라고 합니다. 현재의 처지에 머물라고 하면서도, 노예가 자유로워질 기회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열어 둡니다.
마치 일관된 원칙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권면 사이에 하나의 문장을 세워 놓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마다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곁에 머물 일입니다」(7:24). 이 문장이 7장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혼인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노예냐 자유인이냐 하는 구별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처지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지금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외적인 처지의 변화 자체가 사람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먼저 자기 삶의 조건을 바꾸어야만 그를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부르시고, 그 부르심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혼인과 독신, 이혼과 재혼, 노예와 자유인,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긴 논의를 하나로 묶는 중심입니다.
혼인 안에서 누구의 몸이 누구에게 속하는가?
고린도에서 온 편지
바울은 7장을 새로운 말로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써 보낸 것을 두고 말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고린도전서 7:1 · 본디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 들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직접 편지로 물어본 문제에 답합니다. 그 편지의 원문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을 했는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혼인과 성적 관계를 길게 설명한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두고 실제적인 논의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건드리다」는 여기서 성적인 접촉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편지에 쓴 말로 보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원문에는 인용 부호가 없습니다. 바울 자신의 견해를 먼저 말한 뒤 설명을 이어 간다고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어떤 사람들은 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바울은 그 생각이 실제 혼인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게 성적인 방종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적인 관계를 지나치게 부정하는 태도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두 경우 모두에서 몸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몸에 대한 권한이 서로에게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진 빚을 갚을 일이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7:3 · 본디새김
바울은 부부의 성적인 관계를 한쪽이 다른 쪽에게 베푸는 특별한 호의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만 권리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일이 있고, 아내 역시 남편에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내는 자기 몸에 대한 권한이 없고 도리어 남편에게 있습니다. 그와 같이 남편도 자기 몸에 대한 권한이 없고 도리어 아내에게 있습니다.고린도전서 7:4 · 본디새김
앞 문장만 읽으면 남편이 아내의 몸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정확히 대칭되는 문장을 덧붙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아내와 남편의 위치가 서로 바뀌면서 같은 동사가 반복됩니다.
이 대칭을 놓치면 바울의 논증이 무너집니다.
「권한이 있다」(ἐξουσιάζω)는 동사는 앞 장에서 바울이 「나는 아무것에도 지배당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동사와 같은 계열입니다. 6장에서는 자신의 자유가 다른 무엇의 지배 아래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7장에서는 혼인한 사람들이 자기 몸에 대해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권한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욕망의 지배를 받는 것과 배우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관계는 같은 일이 아닙니다. 몸은 오직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혼인 안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관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쪽 배우자가 다른 쪽에게 성적 관계를 강요할 권리가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에게 마땅히 돌아갈 몫이 있다는 말과,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여 강제로 그 몫을 빼앗을 수 있다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본문의 핵심은 일방적인 권한이 아니라 상호적인 책임이며,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부부가 뜻을 맞추는 일을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바울은 부부 중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 만들지 않습니다. 서로가 자기만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두 사람 모두를 상대방에 대한 책임 앞에 세웁니다. 이 구절만으로 바울이 당시의 모든 혼인 관습과 법적 불평등을 폐지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부부의 성적 관계에 관해 남편에게만 권리를 주고 아내에게만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성관계를 중단할 수 있습니까?
서로에게 돌아갈 몫을 빼앗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고 그 뒤에는 다시 함께 지내려는 것이라면, 뜻을 맞추어 얼마 동안은 그 몫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자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 사탄이 여러분을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5 · 본디새김
바울은 일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중단하는 일을 허용합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중요합니다.
두 사람이 뜻을 맞추어야 합니다.
기간이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전념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함께 지내는 것이 전제됩니다.
이 조건들은 신앙적인 이유를 들어 한쪽 배우자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는 일이 정당화되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에 집중하는 특별한 기간을 허용하면서, 그 일이 부부 사이의 상호적인 책임을 무시하는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탄의 시험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인간이 가진 욕구와 자제력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다룹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험의 가능성을 말한다고 해서 배우자에게 상대방의 성적 욕구를 언제나 충족시켜야 할 무제한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은 상대방의 몸과 의사를 존중하는 상호성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양보로 하는 말이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고린도전서 7:6 · 본디새김
여기서 양보의 대상이 일시적인 성관계 중단인지, 앞의 혼인생활에 관한 권면 전체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생활 방식을 강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절에서 밝혀집니다.
혼인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은혜의 선물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마다 하나님에게서 자기 몫으로 받은 은혜의 선물을 지니고 있어,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습니다.고린도전서 7:7 · 본디새김
바울은 독신을 선호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모든 사람의 의무로 만들지 않습니다. 저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의 선물이 다르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은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제 혼인과 독신에 관한 논의에서도 은혜의 선물을 이야기합니다. 특별한 능력을 나타내는 은사만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도록 주어졌는지도 은혜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신이 더 거룩하고 혼인은 그보다 낮은 신앙의 단계일까요?
바울은 그런 서열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처럼 지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결혼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뒤에서 여러 차례 혼인은 죄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습니다」라고 말하며 서로 다른 선물을 인정하니, 독신만 은사이고 혼인은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적합한 삶의 형태가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최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혼인한 사람이 독신자를 미완성된 사람처럼 대할 필요도 없고, 독신자가 혼인한 사람보다 자신이 더 높은 영적 수준에 있다고 여길 근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건드리다」가 모든 성관계를 피하는 것을 뜻하는지, 성적 쾌락을 위한 관계를 특히 문제 삼는지도 논의됩니다. 고대 그리스어 자료의 용례를 바탕으로 이 표현이 반드시 모든 성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성적 쾌락을 위한 접촉과 관련될 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한편 7절에서 말하는 바울의 당시 혼인 상태는 이 구절만으로 완전히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7–8절은 그가 편지를 쓸 당시 혼인하지 않은 상태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며, 그가 이전에 혼인했는지, 배우자와 사별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혼인을 유지할 것인가, 갈라설 것인가?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혼인할 자유가 있습니다
혼인하지 않은 이들과 과부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나처럼 혼인하지 않은 채로 지내면 그들에게 좋습니다. 그러나 자제하지 못하면 혼인할 일입니다. 달아오르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7:8–9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처럼 혼인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권합니다. 그러나 그 권면은 조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명령이 아닙니다. 자제하기 어렵다면 혼인하라고 합니다. 「달아오르는 것」은 성적 욕망으로 불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성적 욕망을 악한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그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혼인을 단지 성욕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축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지금 답하고 있는 질문 자체가 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이 더 좋은가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 문제에 맞추어 혼인의 한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반복해서 지키려는 것은 선택의 여지입니다.
혼인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혼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그 선택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미 혼인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혼인한 이들에게는 내가 명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10 · 본디새김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말에는 권위가 없고, 주님의 말씀에만 권위가 있다고 구별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뒤에서 자신의 소견을 말하면서도 주님께서 자신을 믿음직한 사람으로 세우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영을 지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7:25, 40).
따라서 여기서의 구별은 권위의 높고 낮음보다, 예수님께서 이미 직접 가르치신 내용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마가복음 10:2–12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해 질문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창조 때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키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그 가르침을 혼인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적용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남편은 아내와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섰더라도 혼인하지 않은 채로 지내거나 남편과 화해할 일입니다 — 그리고 남편은 아내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고린도전서 7:1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 교회 안에 실제로 별거하거나 이혼한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특정 사례가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혼인의 지속과 화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형태의 결혼생활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세부 규정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폭력과 강압, 학대처럼 상대방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을 이 구절이 직접 다루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혼인을 유지하라는 이 권면을 피해자의 안전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관계를 지속하도록 강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관심은 혼인한 신자들이 종교적인 이유나 새로운 영적 열심 때문에 기존의 혼인 관계를 가볍게 해체하는 일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 가르침에 직접 대응하는 사례가 없는 새로운 상황을 다룹니다. 한쪽 배우자만 그리스도를 믿게 된 가정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와 계속 살아도 됩니까?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아니라 내가 말합니다. 어떤 형제가 믿지 않는 아내를 가지고 있고 그 아내가 남편과 함께 살기로 동의하면, 그 형제는 아내와 이혼하지 말 일입니다.고린도전서 7:12 · 본디새김
이어 13절에서는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의 경우도 동일하게 다루며, 또 한 번 남편과 아내를 대칭적으로 언급합니다. 상대방이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신자인 쪽에서 먼저 혼인을 해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왜 생겼을까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게 된 뒤,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거룩함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 바울은 신자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한 몸을 이루는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런데 바울의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신자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 안에서 거룩해졌고 믿지 않는 아내가 그 형제 안에서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자녀가 더러운 것일 텐데,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고린도전서 7:14 · 본디새김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앞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으로 거룩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믿지 않는 배우자도 거룩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배우자가 자동으로 구원받았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바로 16절에서 믿는 배우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를 구원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이미 구원받았다고 전제한다면 이 질문은 어색해집니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방향의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혼인 관계 자체가 더럽거나 부정하지 않다는 뜻으로,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생활을 유지해도 신자의 거룩함이 손상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 경우 거룩함은 개인적인 회심과 구별되는 관계적 의미를 갖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 상당 부분 겹칩니다. 어느 경우든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혼인 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논증을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자녀가 더러운 것일 텐데,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라며 자녀들에게까지 확장합니다. 이 말도 자녀들이 부모의 믿음 때문에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확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함께 이루는 가정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실 수 있는 관계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믿지 않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혼인 관계 안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함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거룩함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멀어지는 방식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거룩함이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언제나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겠다고 한다면
그러나 믿지 않는 쪽이 갈라서면 갈라서게 두십시오. 그런 경우에 형제나 자매는 노예로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평화 안에서 부르셨습니다.고린도전서 7:15 · 본디새김
바울은 혼인을 유지하라고 권했지만, 한쪽이 떠나겠다고 할 때 다른 한쪽에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붙잡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혼인은 두 사람이 함께 이루는 관계입니다.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상대방의 마음과 행동까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노예로 매여 있지 않습니다」(δουλόω)라는 동사는 노예로 만들거나 노예의 상태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이 표현이 그 사람에게 재혼할 자유까지 허락하는지를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재혼이 가능하다고 보는 해석은, 더 이상 혼인 관계에 노예처럼 매여 있지 않다는 선언이 실질적인 혼인의 해소를 뜻한다고 봅니다. 반면 재혼 여부는 여기서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보는 해석은, 7:11에서 바울이 이미 갈라선 사람에게 혼인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거나 화해하라고 말한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본문은 재혼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문제를 한쪽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든 바울은 믿는 배우자에게 불가능한 관계를 끝없이 붙잡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로 하나님이 그들을 평화 안에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 없는 외적인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살아가는 관계의 중요한 성격입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갈등이 생길 때마다 관계를 끝내도 된다는 허락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혼인의 지속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대가 남편을 구원할지 어찌 알고 있습니까?」
아내여, 그대가 남편을 구원할지 어찌 알고 있습니까? 남편이여, 그대가 아내를 구원할지 어찌 알고 있습니까?고린도전서 7:16 · 본디새김
이 질문에는 서로 다른 방향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장차 믿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쉽게 관계를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배우자를 구원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바울이 혼인의 유지를 권하다가 15절에서는 이별을 허용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읽을 수 있고, 본문이 한쪽을 명확하게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에서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자기 능력으로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사람은 배우자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며, 함께 살아가면서 믿음의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까지 자기 손에 쥐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혼인의 지속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혼인이라는 관계 자체를 구원의 보증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그는 더 넓은 원칙으로 나아갑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 순간 자신의 모든 사회적 조건과 관계를 반드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원칙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19:3–9에도 전해집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표현과 예외 조항에는 차이가 있지만, 혼인을 인간이 쉽게 해체할 수 있는 관계로 보지 않는다는 중심은 같습니다. 7:10–16의 이혼에 관한 바울의 권면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의 관계도 해석이 갈립니다. 12–14절을 고린도 교회의 거룩함과 공동체의 경계에 관한 논쟁 속에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 읽기에 따르면 바울은 거룩함을 단순히 믿지 않는 사람과의 분리로 이해하지 않고, 혼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그 거룩함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새롭게 설명합니다. 구약의 에스라 9–1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변 민족과 혼인하면서 언약적 충실함과 종교적 정체성을 훼손한 문제가 다루어지고, 이방인 아내들과의 분리가 추진됩니다. 그러나 에스라의 문제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언약적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고, 고린도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유지되고 있는 혼인 관계에 관한 것이므로, 두 본문을 똑같은 상황에 대한 반대 명령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자리에서
세 번 반복되는 「머물라」
17절부터 24절까지는 7장 전체의 중심축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혼인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할례와 노예 신분을 이야기합니다. 처음 읽으면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처럼 보이지만, 이 대목이 앞뒤 문맥을 이어 줍니다.
혼인한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혼인을 해체해야 합니까?
혼인하지 않은 사람이 신앙적으로 완전해지기 위해 반드시 혼인해야 합니까?
노예가 신자가 되면 먼저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까?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은 자신의 종교적·사회적 정체성을 바꾸어야 합니까?
바울은 이 모든 질문을 한 가지 원칙 아래 놓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저마다에게 나누어 주신 그대로, 하나님이 저마다를 부르신 그대로 걸을 일입니다. 나는 모든 교회에서 이렇게 지시합니다.고린도전서 7:17 · 본디새김
그는 같은 원칙을 20절과 24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처지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야기합니다.
다음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 머물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에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곁에」 머물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현재의 신분을 유지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신분에 있든 하나님 곁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바울은 구체적인 예를 통해 그 의미를 보여 줍니다.
할례도, 할례받지 않음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할례받지 않음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19 · 본디새김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표징으로 주어졌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할례는 단순한 신체적 관습이 아니라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깊이 관련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할례 여부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할례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감추거나 지우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할례를 받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바울의 요점은 민족적 정체성을 무가치하게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새로운 자격 조건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할례도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할례 역시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단순한 원칙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할례라는 언약의 표징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자격 조건으로 삼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여전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외적인 처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삶의 내용까지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겉으로 어떤 상태에 있느냐보다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음에 등장하는 노예 신분의 사례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노예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대가 노예일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로워질 수 있거든 오히려 그것을 쓰십시오.고린도전서 7:2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 노예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일까요?
먼저 역사적 현실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다른 사람에게 법적으로 예속된 존재였습니다. 노예의 삶은 주인의 권한과 사회적·법적 제약 아래 놓였으며, 신분에 따라 노동과 생활, 신체적 안전에 관한 심각한 불평등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회 안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21절의 마지막 표현에는 중요한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원문 말론 크레사이(χράομαι)는 문자적으로 「오히려 활용하라」에 가까운데, 무엇을 활용하라는지 목적어가 명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 기회를 활용하라는 읽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어도 현재의 처지를 활용하며 살아가라는 읽기입니다.
앞의 20절과 뒤의 24절이 현재의 처지에 머물라고 권한다는 점은 두 번째 읽기에 힘을 줍니다. 그러나 21절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특별히 언급한다는 점은 첫 번째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본문의 표현만으로 어느 읽기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노예는 주님께 속한 해방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자유인일 때 부르심을 받은 이는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고린도전서 7:22 · 본디새김
바울은 법적 신분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속 관계를 교차시킵니다. 그는 로마의 노예가 실제로 자유인의 법적 권리를 갖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유인이 법적으로 노예가 되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법적인 지위보다 깊은 곳에 있음을 밝힙니다.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주인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값이 치러져 산 바 되었습니다.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고린도전서 7:23 · 본디새김
바로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했던 표현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것은 값이 치러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궁극적인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노예제도를 직접 폐지하라는 사회적 명령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제도를 철폐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역사적 한계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절을 노예제도를 영원히 정당화하는 선언으로 읽을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사람을 소유하는 법적 관계가 존재하던 사회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궁극적인 신분은 인간 주인의 소유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당시의 제도를 즉각 없애는 선언은 아니지만, 신분에 따른 인간의 가치 평가를 흔드는 주장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곁에」
형제 여러분, 저마다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곁에 머물 일입니다.고린도전서 7:24 · 본디새김
할례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바울은 이런 조건을 하나씩 언급한 뒤, 그 자리에서 하나님 곁에 머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곁에」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바울의 권면은 단순히 현재 처지에 안주하라는 말과 달라집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도 더 나은 조건을 꿈꾸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신분을 바꿔야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예도 하나님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인도 하나님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혼인한 사람도, 혼인하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 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적인 조건의 변화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노예가 자유를 얻는 일과 얻지 못하는 일은 실제 삶에서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혼인과 독신도 서로 다른 책임과 기쁨, 어려움을 수반합니다.
바울은 그 차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이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원칙은 뒤에 나오는 혼인에 관한 권면에도 적용됩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그 자국을 지우려 하지 말 일입니다」는 실제로 할례의 흔적을 감추거나 되돌리려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는 신체의 외양을 바꾸어 할례의 흔적을 감추려는 사례들이 알려져 있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로 누군가 그런 수술을 시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19절은 할례나 무할례 자체보다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갈라디아서 5:6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21절에 대해서는 로마 시대 고린도의 노예 해방 제도를 고려하여 자유를 얻을 기회를 활용하라는 읽기도 있으며, 이 읽기에서는 실제 해방된 노예의 사회적 처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오네시모를 더 이상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방향으로 빌레몬을 권합니다(빌레몬서 15–16절). 두 편지의 상황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보게 한다는 점은 연결됩니다.
왜 바울은 혼인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가?
「지금 닥쳐 있는 어려움 때문에」
처녀들을 두고는 주님의 명령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셔서 믿음직해진 사람으로서 내 소견을 말합니다.고린도전서 7:25 · 본디새김
바울은 주님께서 직접 주신 명령이 있는 문제와, 자신이 사도로서 상황을 분별하여 소견을 제시하는 문제를 구별합니다. 그는 자신의 소견을 무가치한 개인적인 취향으로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음직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말합니다. 이 표현은 4장에서 하나님의 살림꾼에게 요구되는 것이 믿음직함이라고 했던 내용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구체적인 형편을 살피며 책임 있게 판단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판단을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닥쳐 있는 어려움 때문에 나는 이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곧 사람이 지금 처지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26 · 본디새김
「지금 닥쳐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이 경험하던 경제적 어려움이나 식량 부족과 같은 구체적인 위기로 보기도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박해나 사회적 압박으로 보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시대의 종말론적 어려움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어려움이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 밝히지 않으므로, 특정한 기근이나 박해를 확정적으로 배경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는 이유를 그들이 처한 현실과 연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혼인 자체가 더러운 일이라거나 하나님께 속한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인할 자유를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혼인해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처녀가 혼인해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이들은 육에 환난을 지니게 될 것이고, 나는 여러분을 아끼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28 · 본디새김
바울은 서로 다른 선택 사이의 실제적인 유익과 어려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혼인하면 배우자를 돌보아야 하고, 가정의 삶을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어려운 시대에는 그런 책임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는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기와 같은 삶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정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바울은 그 판단의 근거를 더 넓은 차원으로 가져갑니다.
시간이 단축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단축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내를 지닌 이들도 지니지 않은 이들처럼 지내고, 우는 이들도 울지 않는 이들처럼, 기뻐하는 이들도 기뻐하지 않는 이들처럼, 물건을 사는 이들도 차지하고 있지 않은 이들처럼 지내고, 세상을 이용하는 이들도 한껏 이용하지 않는 이들처럼 지낼 일입니다. 이 세상의 겉모습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7:29–31 · 본디새김
바울은 왜 혼인 문제를 논하다가 갑자기 시간에 관해 이야기할까요?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끝없이 반복되는 현재 속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구원을 이루셨고, 장차 그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단축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바울이 구체적인 연도나 날짜를 알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정확히 언제 이루어질지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양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결정적인 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현재의 세상은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최종 현실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표현들은 처음 읽으면 극단적으로 들립니다.
혼인한 사람이 혼인하지 않은 사람처럼 지내야 한다면, 배우자를 돌보지 말라는 뜻일까요?
우는 사람이 울지 않는 사람처럼 지내야 한다면, 슬픔을 억누르라는 뜻일까요?
기뻐하는 사람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지내야 한다면, 기쁨까지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게 읽으면 바울이 앞에서 했던 권면과 충돌합니다. 그는 혼인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마땅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책임을 지워 놓고 갑자기 배우자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구조가 반복됩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실제로 혼인하지 않은 상태가 되거나, 슬픔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관계와 감정과 소유를 최종적인 현실인 것처럼 붙잡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혼인한 사람은 배우자를 사랑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혼인 관계가 그 사람의 모든 존재를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실제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이 하나님의 미래를 완전히 가로막는 최종적인 현실은 아닙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기쁨 역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물건을 사는 사람은 실제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유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31절의 「겉모습」은 어떤 것의 외적인 형태나 현재의 모습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이라는 창조 세계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모습과 질서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더 넓은 하나님의 미래 안에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이런 시간 이해는 혼인과 독신에 대한 판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혼인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인생의 결핍이 아닙니다. 혼인하는 것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인생의 완성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시대에 주어진 삶의 형태이며,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시간 이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분의 부활은 현재의 삶이 마지막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혼인과 사회적 신분과 재산과 기쁨과 슬픔은 모두 실제적이고 중요하면서도 최종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신을 위해 값을 치르셨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것처럼 장차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기다리기 때문에, 현재의 조건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조건 속에서 책임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갈라지는 사람들, 흐트러짐 없이 주님 곁에 있는 사람들
혼인한 사람의 마음은 왜 나뉘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걱정이 없기를 바랍니다. 혼인하지 않은 이는 주님의 일에, 곧 어떻게 주님을 기쁘게 할지에 마음 씁니다.고린도전서 7:32 · 본디새김
혼인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반면 혼인한 사람은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은 혼인한 사람이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과 책임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33절에서 바울은 「혼인한 이는 세상의 일에, 곧 어떻게 아내를 기쁘게 할지에 마음 씁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배우자를 돌보는 일이 하나님과 무관한 세속적인 행동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앞에서 바울이 혼인 관계를 하나님 앞에서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친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일은 반드시 악한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혼인한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감당해야 할 일상적인 책임과 관심을 가리킵니다. 다만 그런 책임 때문에 혼인하지 않은 사람보다 시간과 관심을 여러 방향으로 나누어야 할 수 있습니다.
「갈라집니다」라는 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래서 혼인한 이는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혼인하지 않은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도 영으로도 거룩하려고 주님의 일에 마음 씁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세상의 일에, 곧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지에 마음 씁니다.고린도전서 7:34 · 본디새김
바울은 1장에서 그리스도가 나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혼인한 사람의 마음이 갈라진다고 말하며, 그리스어에서도 두 곳에 같은 계열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다만 1장에서는 교회의 분열이라는 문제가 중심이었고, 7장에서는 혼인한 사람이 서로 다른 책임과 관심 사이에서 나뉘는 상황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7장의 「갈라짐」을 곧바로 죄나 영적 실패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갈라집니다」를 어느 문장에 붙일지는 사본과 구두점에 따라 갈리지만, 어느 읽기를 택하더라도 혼인한 사람과 혼인하지 않은 사람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삶의 책임을 감당합니다. 바울은 독신 생활이 주님께 집중하는 데 실제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혼인한 사람을 하나님께 덜 충실한 사람으로 판정하지 않고, 이제 그 권면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이롭게 하려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단정하게 지내며 흐트러짐 없이 주님 곁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35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조언이 고린도 교인들을 새로운 규칙으로 옭아매는 일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혼인하지 않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그 유익을 모든 사람에게 강제되는 의무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흐트러짐 없이 주님 곁에」 있는 것이며, 이 표현은 24절의 「하나님 곁에 머물 일입니다」와 의미상 연결됩니다.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혼인하지 않은 상태 자체를 자랑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한 사람들에게는 혼인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부족한 신자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혼인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을 다른 욕망에 모두 빼앗길 수 있고, 혼인한 사람도 배우자를 사랑하고 돌보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단순히 어떤 생활 형태가 더 종교적으로 보이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 삶이 실제로 주님께 집중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34절에는 본문비평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갈라집니다」를 앞의 혼인한 남성에 대한 설명에 붙일 것인지, 뒤의 혼인하지 않은 여성과 처녀에 대한 설명에 붙일 것인지를 두고 사본과 구두점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번역은 「갈라집니다」를 앞 문장에 붙여 혼인한 사람의 마음이 갈라진다고 옮겼습니다. 이 선택은 문맥상 자연스럽지만, 원문상의 논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혼인시키는 것도 잘하는 일이고, 혼인시키지 않는 것도 잘하는 일입니다
가장 어려운 문장 가운데 하나
누가 자기에게 딸린 처녀에게 온당하지 않게 굴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리고 그 처녀가 한창때가 지났으며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면,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할 일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혼인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7:36 · 본디새김
가장 큰 문제는 바울이 말하는 「누가」와 「자기에게 딸린 처녀」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번역은 관계를 구체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자기에게 딸린 처녀」라고 옮겼습니다. 이 표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따라 권면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주요 해석
읽기는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아버지나 보호자가 딸의 혼인을 결정하는 상황, 약혼한 남자와 그의 약혼녀, 성적인 관계 없이 함께 지내기로 한 남녀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누가 누구의 혼인을 결정하는지가 달라집니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읽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설득력 있다는 해석도 있지만, 약혼 관계로 읽는 견해도 계속 논의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본문이 말하지 않는 인물 관계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내리는 판단의 핵심은 어느 해석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딸린 처녀를 혼인시키는 이도 잘하는 것이고, 혼인시키지 않는 이는 더 잘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7:38 · 본디새김
바울은 혼인시키는 것도 잘하는 일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혼인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 더 좋을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더 잘할 것입니다」는 모든 시대와 모든 상황에서 독신자가 혼인자보다 더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현재의 어려움, 때가 단축되었다는 인식, 주님의 일에 집중하는 삶이라는 문맥 안에 놓인 판단입니다.
왜 바울은 결정의 조건을 그렇게 자세히 설명할까?
37절에서 바울은 마음에 굳게 서 있는지,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지, 자기 뜻대로 결정할 권한이 있는지, 마음에 정한 것이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표현들은 그 결정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압력이나 순간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해석할 경우, 그 시대의 가부장적 권한이 문장에 전제되어 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딸의 의사와 결정권을 현대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이해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오늘날 부모가 성인 자녀의 혼인을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권한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혼인 여부에 관한 서로 다른 결정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신앙적 실패와 성공의 단순한 기준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그는 다시 한번 혼인할 자유와 혼인하지 않을 자유를 함께 인정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버지나 보호자로 읽는 해석은, 고대 사회에서 혼인에 관해 부모나 보호자가 중요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 기댑니다. 이 경우 어떤 아버지가 딸을 혼인시키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면 그렇게 해도 죄가 아니라는 뜻이 되며, 38절의 「혼인시키는 이」라는 표현이 이 읽기에 잘 맞습니다. 약혼 관계로 읽으면, 바울은 혼인하지 않고 지내려 했던 약혼자가 자신의 형편을 고려하여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되며, 36절의 「그들은 혼인할 일입니다」가 이 읽기에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세 번째 읽기는 초기 교회에서 알려진 영적 결혼 또는 금욕적 동거 관습과 연결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그런 관습이 실제로 바울이 편지를 쓰던 고린도 교회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워, 이 읽기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 남겨진 자유
죽음은 혼인의 결속을 끝냅니다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잠들면 그 여자는 자유로워 자기가 원하는 이와 혼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주 안에서 그리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7:39 · 본디새김
바울은 마지막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의 재혼 문제를 다룹니다. 혼인 관계가 배우자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이 전제되고, 남편이 죽은 여성은 다시 혼인할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여성에게 특정한 사람과 반드시 혼인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이」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주 안에서」라는 조건을 덧붙입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과 혼인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합당한 방식으로 혼인하라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혼인을 신앙과 무관한 결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소견으로는 그 여자가 그대로 지내면 더 복됩니다. 그리고 나도 하나님의 영을 지녔다고 여깁니다.고린도전서 7:40 · 본디새김
「더 복됩니다」는 혼인하지 않은 상태를 더 행복한 삶의 가능성으로 평가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독신을 불행한 결핍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반드시 다시 혼인해야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혼할 자유를 먼저 인정한 뒤 「내 소견으로는」이라며 소견을 제시합니다. 상대방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선호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의 여지를 인정한 상태에서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권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지녔다고 여깁니다」를 자신이 정말 성령을 지녔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고백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에서는 자신의 사도적 분별이 하나님의 영과 무관한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성령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택을 모두 하나로 통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더 좋다고 여기는 길을 말하면서도, 다른 길도 죄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7장 마지막에 남는 중요한 균형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시는가?
고린도 교인들은 혼인한 사람도 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이 더 거룩한지, 믿지 않는 배우자와 계속 살아도 되는지, 노예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려운 시대에 지금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바울은 그 질문들에 답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삶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형편을 살폈고, 명령과 소견을 구별했으며, 가능한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붙잡은 중심은 하나였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어떤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혼인한 뒤에야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독신을 선택해야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신분을 얻은 뒤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해방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부르셨고,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시고 그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모든 조건을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의한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거나, 해로운 관계를 무조건 지속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의 조건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궁극적인 정체성을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 삶을 바꾸어야 더 거룩해질 수 있는지 묻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부터 기억하게 하고, 혼인에 관한 긴 권면 사이에 「형제 여러분, 저마다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곁에 머물 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삶의 자리에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혼인한 사람에게도, 혼인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노예에게도, 자유인에게도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