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6장 · 교회 안의 문제
다툼과 자유, 자신의 것이 아닌 몸
고린도전서 6장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두 가지 문제가 등장합니다.
앞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법정에 서서 다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며, 서로를 이기려고 소송을 벌입니다. 뒷부분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무엇이든 허락되어 있다고 말하며, 자기 몸으로 무엇을 하든 문제가 없다는 듯 행동합니다.
하나는 재산과 권리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성과 몸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두 문제를 다루면서 비슷한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정말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법정에서 이기려고 다투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차라리 부당한 일을 당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자기 몸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19절)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3장에서 바울이 했던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라는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떻게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면서, 우리는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삶과 죽음까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은 이 소속 관계가 재산과 권리, 다른 사람, 자기 몸과 성을 대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 줍니다. 바울은 두 문제 사이에 「여러분은 … 씻음을 받았고 거룩해졌고 의롭게 되었습니다」(11절)라는 선언을 놓습니다. 그들이 이전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실제로 새로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이 서로 법정에 서다
바울이 놀란 것은 소송의 존재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첫 문장을 강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이와 다툴 일이 있을 때에 성도들 앞에 가지 않고 의롭지 않은 이들 앞에서 감히 소송을 벌입니까?고린도전서 6:1 · 본디새김
「감히」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바울은 새로운 정보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을 두고,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의 사람들이 서로 분쟁을 벌이면서, 그 해결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서로 다투면서, 그 분쟁의 해결을 공동체 밖에 맡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재판관의 능력보다 그들의 소속을 먼저 문제 삼습니다.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공동체가 책임 있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 사이의 분쟁을 외부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의롭지 않은 이들」이라는 표현으로 바울이 모든 비그리스도인 재판관이 실제로 부패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공동체와 그 밖의 사람들을 대조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뒤의 9–11절과도 연결됩니다. 바울은 「의롭지 않은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한다고 말한 뒤, 고린도 교인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누가 법률 지식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할 것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이 여러분에게 판단을 받는다면, 여러분이 가장 작은 사건을 가릴 자격조차 없단 말입니까?고린도전서 6:2 · 본디새김
바울은 갑자기 미래의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이 논증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내려옵니다. 성도들이 장차 세상을 판단하는 일에 참여할 것이라면, 지금 자기들 사이의 작은 분쟁도 판단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다니엘서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는 짐승으로 상징되는 제국들이 등장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이 나라를 받게 됩니다(특히 7:22). 그 본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제국들이 영원히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된 종말론적 전망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다니엘 7장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이 각 그리스도인이 장차 어떤 재판을 맡는지, 그 심판이 어떤 절차로 이루어지는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에 참여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역설이 발생합니다.
장차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이 지금은 자기들 사이의 다툼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꾸짖기 위해서만 미래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미래와 그들이 지금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 논증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살아가는 일은 판단하지 못하겠습니까?고린도전서 6:3 · 본디새김
사람들이 천사들을 판단한다는 말은 해석이 갈립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하나님을 거역한 악한 천사들로 이해합니다. 베드로후서 2:4와 유다서 6절에는 죄를 지은 천사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심판이 언급되므로, 성도들이 최종 심판에 참여한다는 전망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해석에서는 바울이 천사의 종류를 구별하지 않았다고 보며, 초점을 성도들에게 주어질 놀라운 종말론적 지위에 둡니다. 본문은 어떤 천사들을 어떤 방식으로 판단하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어느 해석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논증에서 더 중요한 것은 천사를 판단하는 것과 「살아가는 일」을 판단하는 것 사이의 크기 차이입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판단을 이야기한 뒤, 바울은 다시 일상생활의 분쟁으로 돌아옵니다.
미래에 주어질 영광은 현재의 책임을 회피할 이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책임을 더욱 진지하게 감당해야 할 이유입니다.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도 재판석에 앉힐 수 있습니까?
4절은 해석이 어려운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상생활에 관한 사건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이들, 바로 그런 이들을 재판석에 앉히는 것입니까?고린도전서 6:4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질문으로 옮겨져 있지만, 원문의 동사는 형태상 직설법으로도, 명령법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외부의 재판관을 세우는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는 질문으로 읽으면, 교회의 관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왜 재판관으로 세우느냐는 뜻이 됩니다. 둘째, 명령으로 읽으면, 교회 안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에게 판단을 맡기라는 뜻이 됩니다.
첫 번째는 외부에 판단을 맡기는 행동을 비판하고, 두 번째는 공동체 안의 평범한 사람도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바울의 논증은 5절에서 분명해집니다.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말합니다. 그렇게도 여러분 가운데 자기 형제들 사이의 분쟁을 가려 줄 만한 지혜로운 이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고린도전서 6:5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지혜에 대한 자부심을 되돌려 줍니다. 그들은 뛰어난 교사들의 이름을 내세웠고, 말과 지식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형제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찾는 지혜는 논쟁에서 상대방을 이기는 기술이 아닙니다. 서로 다투는 사람들이 정의롭고 책임 있게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설령 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할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소송 자체보다 더 깊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분쟁의 내용을 밝히지 않습니다. 재산을 둘러싼 다툼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계약이나 채무, 재산권 문제였는지, 다른 종류의 민사 분쟁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 도시였고, 법적 분쟁에는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이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어떤 법적 절차를 지칭했는지도 논의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교인들이 로마의 공식 법정에서 서로 소송을 벌였다고 이해했고, 로마 속주의 법률 관행과 문서 자료를 고려하여 교회 밖 인물을 통한 사적 중재를 문제 삼았을 가능성을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두 해석은 법적 절차를 다르게 이해하지만, 분쟁의 해결을 공동체 밖에 맡겼다는 핵심 상황에서는 만납니다. 4절에서 해석이 갈리는 동사는 카티제테로, 형태상 직설법과 명령법이 같습니다.
이기려고 법정에 섰지만, 이미 졌습니다
재판에서 이기더라도 패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여러분은 이미 아주 진 셈입니다. 어찌하여 차라리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차라리 빼앗기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6: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고린도전서 6장의 첫 번째 절정입니다.
소송을 벌이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판결을 받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거나 자기 권리를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재판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그들이 이미 졌다고 말합니다.
무엇에 졌는지 바울은 명시하지 않지만, 문맥에서는 그 패배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사람들이 서로를 적대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관계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누가 법적인 승리를 거두더라도 이미 형제들 사이의 관계에는 손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사실을 패배라고 부릅니다.
법정은 누가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누가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지 판단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묻습니다. 법적으로 옳은 주장을 했더라도, 그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형제를 짓밟고 공동체를 파괴했다면 그것을 온전한 승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차라리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습니까?」라는 물음은 자기 권리를 반드시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흔듭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형제를 상대로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그 손해를 감수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마태복음 5:39–42에서 예수님께서 보복을 거절하고 자기에게 요구하는 사람에게 더 내어주는 삶을 가르치신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 가르침은 인간이 가진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언제나 앞설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허가가 아닙니다. 바울은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하면서 가해자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절에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직접 책망합니다.
누가 실제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있습니까?
도리어 여러분이 부당한 일을 저지르고 빼앗습니다. 그것도 형제들에게 말입니다.고린도전서 6:8 · 본디새김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서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데만 있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부당한 일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 사실을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7절과 8절은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7절만 떼어 읽으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부당한 대우를 참아야 하고,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해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8절에서 바울은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책임을 묻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사기, 폭력, 착취, 학대의 피해자에게 법적 구제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범죄나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필요한 법적 보호와 공적 책임을 교회 내부의 화해 절차로 대신해야 한다고 일반화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직접 다루는 것은 고린도 교회 안의 분쟁과 그 분쟁을 둘러싼 잘못된 태도이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법 절차를 금지하는 규칙이 아닙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이기려는 욕망이 형제에 대한 책임을 밀어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어째서 형제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전에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한다는 경고
아니면 여러분은 의롭지 않은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음행하는 이들이나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나 간음하는 이들이나 무른 이들이나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자들이나,고린도전서 6:9 · 본디새김
앞에서 형제들에게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책망한 바울은, 이제 그 행동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합니다.
상속은 일반적으로 상속받는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획득한 소유와 구별됩니다. 바울은 「물려받다」라는 언어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미래의 유업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물려받는다는 사실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경고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만 돌리지 않습니다. 그는 바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속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로 불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제를 속이고 빼앗는 행동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그는 음행, 우상숭배, 간음, 특정한 성적 행위, 도둑질, 탐욕, 술 취함, 모욕, 강탈을 나열합니다. 바울은 앞에서 형제의 것을 빼앗는 문제를 다루었고, 이 목록에도 도둑과 탐욕스러운 사람과 강탈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성적인 잘못만을 특별히 떼어 내어 공격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높이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삶 전반을 문제 삼습니다.
「무른 이들」과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자들」
9절에는 번역과 해석이 특별히 어려운 두 표현이 등장합니다.
「무른 이들」은 그리스어 말라코이(μαλακός)를 옮긴 것입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부드럽거나 무른 것을 뜻하며, 문맥에 따라 사치스러운 생활, 절제력의 부족, 남성에게 기대되던 사회적 역할과 어긋나는 모습, 또는 남성 간 성행위에서 특정한 역할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남자들」에 해당하는 아르세노코이타이(ἀρσενοκοίτης)는 남성을 뜻하는 낱말과 잠자리를 뜻하는 낱말이 결합한 형태입니다. 레위기 18:22와 20:13의 그리스어 번역에 나타나는 어휘와 밀접하게 연결될 가능성이 있지만, 이 단어가 실제로 어느 범위의 행위를 가리키는지를 두고 논의가 있습니다.
두 단어가 남성 간 성행위의 수동적·능동적 역할을 각각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첫 번째 단어의 의미가 더 넓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고, 두 번째 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나 행동을 포함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적 관계가 오늘날의 성적 지향 범주와 달리 사회적 지위와 성적 역할에 따라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해석도 있고, 고대 라틴어 번역과 관련 문헌을 바탕으로 두 단어를 남성 간 성행위와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고대의 행위를 가리키는 표현과 현대의 성적 지향 또는 정체성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현대의 성적 정체성 범주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원문이 구체적인 성적 행위와 관련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 자체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울이 이 표현들을 그가 경계하는 행동들의 목록 안에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목록 전체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등장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과거에 관한 말입니다.
경고의 끝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전에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해졌고 의롭게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6:11 · 본디새김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할 사람들의 행동을 나열한 바울은, 곧바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일부가 과거에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보다 거룩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씻음을 받았습니다.
거룩해졌습니다.
의롭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그들의 최종적인 정체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을 하셨는지가 그들의 현재를 규정합니다.
「씻음을 받았다」는 표현은 세례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삶과 결별하고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된 일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거룩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이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관계와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만 세 표현을 반드시 시간순으로 진행되는 서로 다른 단계로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 표현들을 나란히 놓아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변화를 풍성하게 묘사합니다.
「의롭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은 앞의 「의롭지 않은 이들」과 대조됩니다. 그들은 한때 의롭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속이고 빼앗으며 살아가는 일이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도 분명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명령은 이전과 다르게 살아야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조건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새롭게 하신 사람들이 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형제들을 속이고 빼앗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새로운 정체성과 실제 삶 사이에 긴장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긴장을 부정하지 않고, 그들이 받은 은혜를 근거로 삶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이제 그는 그 변화가 몸과 성의 영역에서도 나타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세 동사 앞에 각각 「그러나」에 해당하는 알라가 반복됩니다. 한 번의 전환으로 끝내지 않고 세 번 강조하는 구조입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던진 두 가지 질문
「모든 것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롭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지배당하지 않겠습니다.고린도전서 6:12 · 본디새김
바울의 논증은 형제들 사이의 재산과 권리 문제에서, 자기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자유의 문제로 옮겨 갑니다.
두 번 반복되는 「모든 것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를 바울이 인용한 고린도 교인들의 구호로 이해하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원문에는 인용 부호가 없지만, 같은 문장이 반복되고 그 뒤에 바울의 반박이 이어진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다만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표현했던 말을 고린도 사람들이 확대하여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어서, 바울이 어느 부분까지 동의하고 어디서부터 반박하는지는 문맥을 통해 판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 구호가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지 않고,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유익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롭지는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면, 자신에게 자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유의 문제를 허락과 금지의 경계에만 가두지 않고, 그 행동이 무엇을 이루는지 묻습니다.
둘째는 지배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지배당하지 않겠습니다.」 바울은 이 표현으로 자유의 주장을 뒤집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절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면 정말 자유로운 사람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욕망에 점점 더 지배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가능성을 문제 삼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도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게 할 수 있어야 자유를 제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단순한 자기 통제력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는 몸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지배당하지 않겠습니다」로 옮긴 엑수시아스테소마이는 권세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며, 앞의 「허락되어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엑세스틴과 권한·권세라는 의미 영역에서 연결됩니다. 바울은 이 말놀이로 고린도 교인들의 권한 주장을 뒤집습니다.
몸은 음식을 위한 배처럼 사라지는 것인가?
「먹을 것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먹을 것을 위한 것입니다」
「먹을 것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먹을 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배도 먹을 것도 없애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이고, 주님은 몸을 위한 분이십니다.고린도전서 6:13 · 본디새김
음식과 위장은 서로 어울리는 관계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와 비슷한 논리를 성적 욕구에도 적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몸에 자연적인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충족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는 일도 자연스럽고 허락된 일이라는 식입니다.
이 구호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먹을 것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먹을 것을 위한 것입니다」까지만 그들의 말이고, 「하나님이 배도 먹을 것도 없애실 것입니다」는 바울의 반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두 문장 모두 고린도 교인들의 주장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은 먹을 것과 배가 결국 사라질 것이니 몸의 행위는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울이 이어서 부활을 언급하는 점이 중요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의 다음 선언은 분명합니다. 그는 몸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도 몸을 위한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몸은 주님께 속하지만, 주님께서는 몸을 하찮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영혼만을 위한 것이라면, 몸은 잠시 사용하다가 버리는 껍데기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몸으로 무엇을 하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혼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방향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몸을 위해 무엇을 하셨다는 것일까요? 바울은 다음 절에서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몸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주님을 일으키셨고 하나님의 힘으로 우리도 일으키실 것입니다.고린도전서 6:14 · 본디새김
바울은 몸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건강이나 자기 관리, 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일으켜지셨고, 우리는 장차 일으켜질 것입니다. 바울은 두 사건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연결합니다.
만약 몸이 결국 완전히 버려질 것이라면, 지금 몸으로 하는 일이 궁극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면, 몸은 단순히 사용하다가 없어지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포함된 존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몸을 더 자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현재의 몸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바꾸는지만 밝힙니다.
하나님이 장차 일으키실 몸을, 지금 아무 의미 없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져다가 다른 사람과 결합할 수 있는가?
몸은 이미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져다 창녀의 지체로 만들겠습니까? 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고린도전서 6:15 · 본디새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은 단지 마음이나 영혼만이 아닙니다.
몸도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앞의 「몸은 … 주님을 위한 것이고, 주님은 몸을 위한 분」이라는 선언이 여기서 구체화됩니다.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믿고 존경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몸이 성적 관계 속에 들어갈 때, 신체적 결합은 단순한 순간적 접촉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아니면 여러분은 창녀와 결합하는 이는 그 여자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6:16 · 본디새김
창세기 2:24의 본래 문맥에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결혼 관계가 설명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표현을 돈을 주고 이루어지는 성적 관계에도 적용합니다.
성적 결합이 사람이 마음속으로 그 행위에 부여하는 의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적 관계를 단순한 욕구의 충족이라고 여기고, 상대방과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으려는 뜻이 전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적 결합 자체가 몸과 관련된 의미 있는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창녀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법적·언약적 의미의 결혼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창세기의 결혼 언어로 성적 결합의 무게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그 관계를 가볍게 여기더라도, 몸이 실제로 하는 일까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7절에서 이 논증을 한층 깊게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에 성매매가 존재했다는 일반적 역사적 배경과 별개로, 바울이 염두에 둔 여성의 신분이나 처지, 해당 관계에서 강압 또는 착취가 있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성매매가 신분의 불평등과 노예제와 연결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행위를 단순히 대등한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선택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직접적인 논증은 그런 사회적 구조의 분석보다,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의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한 사람은 「한 영」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입니다.고린도전서 6:17 · 본디새김
16절의 「한 몸」과 17절의 「한 영」은 몸과 영을 서로 대립시키는 말일까요? 그렇게 이해하면 바울이 이미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한 15절과 충돌합니다. 이 대조는 몸은 나쁘고 영은 좋다는 식의 구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관계의 성격을 대조합니다. 성적 결합은 실제로 몸을 포함하는 결합이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주님과의 깊은 연합으로 묘사됩니다.
「한 영」이라는 표현을 성령과의 관계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주된 의미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실제적인 연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연합은 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사실을 단순한 종교적 관념으로 남겨 두지 않고, 몸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선택에까지 적용합니다. 이제 그가 왜 음행을 피하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몸 밖에 있는 죄와 자기 몸을 거스르는 죄
왜 바울은 「달아나십시오」라고 말하는가?
음행에서 달아나십시오. 사람이 저지르는 죄는 무엇이든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이는 자기 몸을 거슬러 죄를 짓습니다.고린도전서 6:18 · 본디새김
바울은 음행을 두고 계속 논쟁하거나, 얼마나 가까이 접근해도 괜찮은지 판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달아나라고 말합니다.
이 명령은 창세기 39장의 요셉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과 함께 자자고 요구했을 때 거절했고, 그 여자가 그의 옷을 붙잡자 옷을 남겨 두고 밖으로 달아났습니다(창세기 39:7–12). 바울이 그 장면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혹의 자리에서 빠져나오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왜 그런 행위가 몸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지 설명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모든 다른 죄는 몸 밖에 있는 것일까요? 술에 취하거나 다른 사람을 폭행하는 일도 몸과 관련되어 있고, 과도한 탐욕이 사람의 삶과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성적 죄만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으로 읽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 자신의 주장으로 읽는 것입니다. 바로 앞의 15–17절에서 성적 결합이 한 몸을 이루는 일과 관련된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성적 부도덕이 그리스도께 속한 몸을 다른 죄와 구별되는 방식으로 손상시킨다는 논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람이 저지르는 죄는 무엇이든 몸 밖에 있지만」을 고린도 교인들의 구호로 읽는 것입니다. 그들이 몸으로 하는 일은 영적인 삶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면, 바울이 그 말을 인용한 뒤 음행하는 사람은 자기 몸을 거슬러 죄를 짓는다고 반박하는 구조가 됩니다. 반면 구호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바울이 성적 죄의 독특한 성격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어느 해석이 옳은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바울은 음행을 몸과 무관한 사소한 행동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몸이기에, 그 몸으로 이루어지는 성적 결합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몸을 보호하기 위한 건강상의 조언이 아니라, 몸이 누구에게 속하는지에 관한 신학적인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은 마지막 두 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여러분의 몸은 거룩한 영의 성전입니다」
성전이 된 몸
아니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거룩한 영의 성전이고,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그 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고린도전서 6:19 · 본디새김
바울은 앞에서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 몸이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3장에서는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 곧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었습니다. 6장에서는 각자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설명을 거쳐, 몸이 성령의 성전이라는 선언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이 각 신자의 몸인지, 공동체 전체의 몸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직전의 문맥은 각각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성적 행동을 문제 삼았으므로 개인의 몸에 대한 적용이 강하게 드러나지만, 복수형인 「여러분」을 생각하면 공동체적 차원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두 측면은 서로 배제되지 않습니다. 각 신자는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고, 그 몸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공동체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몸으로 살아가는 삶도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 몸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 몸은 성령의 성전입니다.
바울은 몸이 더럽거나 악하기 때문에 성적 부도덕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몸의 가치가 낮아서 음행을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으로 거하실 만큼 몸을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는가?
19절 끝의 「여러분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는 앞의 「모든 것이 나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라는 주장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사용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자유를 부정하기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소유주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의 독자에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 결정권은 타인의 강압과 착취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을 다른 사람이 신자의 몸을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그 사람의 의사를 무시해도 된다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나 배우자, 다른 사람에게 신자의 몸을 소유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소속의 대상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값이 치러져 산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고린도전서 6:20 · 본디새김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노예를 사고파는 일이 존재했습니다. 누군가 값을 치르고 사람을 샀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독립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거래의 언어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다만 누구에게 값을 지불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탄에게 어떤 값을 지불하셨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일이 값없이 이루어진 사소한 변화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7:23에서도 바울은 값을 치르고 산 바 되었다는 표현을 쓰면서,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권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께 속함은 인간에게 새롭게 억압당하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욕망의 지배를 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넘겨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속한 분은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바울은 마지막에 한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 명령은 지금까지의 논증을 한곳에 모읍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성령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장차 일으키실 몸입니다.
값이 치러져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예배 시간에 찬양하거나 기도하는 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형제의 것을 빼앗는 일, 서로를 이기려고 다투는 일, 자유를 주장하면서 욕망에 지배당하는 일, 그리스도께 속한 몸을 성적 부도덕에 사용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으로 사람을 대하고, 몸으로 일하며, 몸으로 관계를 맺고, 몸으로 선택하는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이 장에서 「몸」과 「형제」는 어떻게 만나는가?
고린도전서 6장은 처음 읽을 때 형제들 사이의 소송과 성적 부도덕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권면이 이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함께 읽으면 바울은 한 가지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소송을 벌이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하고, 성적 부도덕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두 경우 모두 바울은 그 사람이 가진 권한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가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과 자기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묻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면서도 그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는 자유를 얻었고, 같은 이유로 자기 권리와 몸을 마음대로 쓰는 주인이 아닙니다. 그 자유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자신을 욕망에 내맡기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알고, 그분께 속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유입니다.
처음에 고린도 교인들은 법정으로 향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고 싶었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것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 몸이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법정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정당한 권리를 가졌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전에서는 그 장소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자기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몸이 누구의 것인지 대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셨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