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6장 · 교회 안의 문제

유월절 양과 아직 치우지 않은 누룩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성적 부도덕이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사실을 듣고 가장 먼저 문제 삼은 것은 그 남자의 행동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에 부풀어 있습니다.」(2절)

바울은 왜 그토록 심각한 죄 앞에서 먼저 교회의 감정을 문제 삼을까요? 그는 그들이 분노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강경한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애통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장의 중심에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잡히셨기 때문입니다」(7절)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성적 부도덕을 다루다가 왜 갑자기 유월절 양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다는 사실이 왜 교회 안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이유가 됩니까?

이 장은 교회가 죄를 얼마나 엄격하게 처벌해야 하는지에 관한 규정으로만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공동체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세 번 방향을 바꿉니다.

먼저 교회가 한 사람의 심각한 잘못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1–5절). 이어 누룩과 유월절의 그림을 통해 왜 그래야 하는지 밝힙니다(6–8절). 마지막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과 교회 밖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르게 대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9–13절).

이 흐름을 따라가면, 바울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는 데 열심을 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밖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책임져야 할 곳은 먼저 자기 안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의 근거는 교회가 세상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들을 위해 희생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65장 본문 읽기 →

죄보다 먼저 드러나는 공동체의 잘못된 반응

고린도전서 5:1–2 본문 →

「아버지의 아내」는 누구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매우 직접적으로 밝힙니다.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말이 두루 들립니다.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없는 그런 음행인데,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5:1 · 본디새김

바울은 「자기 어머니」라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그 남자의 친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다른 아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남자가 자기 아버지의 배우자에 해당하는 여성과 성적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바울이 이를 심각한 성적 부도덕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바울은 이 관계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겼을까요? 레위기 18:8은 아버지의 아내와 성적 관계를 맺는 일을 금지하고, 레위기 20:11은 그 위반을 심각한 죄로 다룹니다. 신명기 27:20도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사람을 저주받을 사람으로 선언합니다. 이 규정들은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성적 선택이 아니라, 가족의 관계와 경계,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지켜야 할 질서를 침범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의 일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심각한지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일을 저지른 사람에 관한 설명을 길게 이어 가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교회 전체를 향합니다.

문제는 그 남자뿐 아니라 교회의 태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에 부풀어 있습니다. 도리어 이런 일을 저지른 자가 여러분 가운데서 치워지도록 애통해야 하지 않았습니까?고린도전서 5:2 · 본디새김

「교만에 부풀어 있다」는 말은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표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서로를 비교하며,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를 자랑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교만이 교회 안의 심각한 잘못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고 지적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정말 그 남자의 행동 자체를 자랑하고 있었을까요? 어떤 해석에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로움이나 관용을 자랑하면서 이런 관계까지 허용했다고 보고, 자신들이 영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에 기존의 도덕적 금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제시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자랑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알고도 방치했다는 것은 문맥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까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들의 구체적인 동기를 설명하는 대신, 어떤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잘못을 발견한 공동체에 먼저 승리감이나 우월감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애통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잘못이 벌어졌고, 그 관계에 관련된 사람들의 삶이 손상되었으며, 공동체가 그 일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애통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슬퍼하는 감정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어서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을 공동체 가운데서 치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무게를 느끼며, 책임 있게 행동하는 태도입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 보일 수 있는 잘못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동체의 평판이나 편의를 위해 심각한 잘못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덮어 두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를 저지른 사람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확인하는 태도, 잘못을 다루는 일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는 태도입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애통은 두 태도 모두와 다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를 다루는 일을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기회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거룩함을 지키는 일의 출발점은 교만한 분노가 아니라 애통이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 사람의 법적인 관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아버지가 당시 살아 있었는지, 이혼하거나 사망한 상태였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 여성이 법적으로 혼인한 계모였는지, 아버지와 첩 또는 동거 관계에 있었던 여성이었는지도 논의되며, 당시 로마의 법과 관습에 비추어 후자의 가능성도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재구성이지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레위기 18장에서 성적 관계에 관한 금지 규정들은 친족 관계를 보호하는 큰 틀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없는」이라는 표현은 모든 이방 사회에서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통계적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도 근친관계에 관한 여러 금기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법적 금지와 사회적 평가는 관계의 형태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이 어떻게 구원을 위한 일이 되는가?

고린도전서 5:3–5 본문 →

멀리 떨어져 있는 사도가 내린 판단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몸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 곁에 있는 사람처럼 이 일을 이렇게 저지른 자에 대해 이미 다음과 같이 판단했습니다.고린도전서 5:3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에 있지 않지만, 그 문제를 보고받았고 사도로서 판단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몸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라는 말은 직접 고린도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 공동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들에게 주어진 자신의 사도적 책임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4장에서 바울은 때가 되기 전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이미 판단했다고 말합니다.

모순일까요?

두 장에서 다루는 판단의 대상이 다릅니다. 4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숨겨진 동기와 하나님 앞에서의 최종적인 평가를 성급하게 확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5장에서 문제 되는 것은 이미 공동체에 알려진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숨겨진 마음과 최종 운명을 판정할 권한이 없지만, 그렇다고 명백하게 드러난 해로운 행동까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구별은 뒤의 12–13절에서 더욱 중요해집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내 영이 모이고 우리 주 예수의 힘이 함께하는 자리에서,고린도전서 5:4 · 본디새김

이것은 한 개인의 사적인 복수나 감정적인 단절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질 공동체의 결정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판단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공동체의 모임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그 모임은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의 권위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 아래 모입니다.

누군가를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결정은 그 사람의 삶과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집단의 압력으로 가볍게 행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은 현대 교회의 구체적인 징계 절차를 모두 제공하지 않지만, 바울이 이 일을 사적인 보복이 아니라 주님의 권위 아래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책임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이 무너지게」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이 무너지게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날에 그 영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5: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이 무너지게」, 「그 영이 구원받게」라는 세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전체 문장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먼저 「사탄에게 넘겨준다」는 말은 13절에서 그 사람을 공동체 가운데서 치워 내라는 명령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제공하던 교제와 보호 밖에 놓인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영적 사건이 발생하는지, 사탄이 그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도록 허락받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육이 무너지게」는 읽기가 셋으로 갈립니다. 몸에 고통이나 질병 같은 파괴적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읽기, 죄에 지배된 육적인 삶이 무너진다는 읽기, 그리고 「육」과 「영」을 개인의 두 측면이 아니라 공동체의 육적인 행실과 영적인 생명으로 보는 읽기입니다. 앞의 두 읽기는 초점이 그 사람 개인에게 있고, 마지막 읽기는 공동체의 정화와 보존에 있습니다. 어느 읽기가 원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 조치는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수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조치의 목적을 명시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날에 그 영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멸망시키는 일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 문장이 그 사람의 최종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 조치가 지향하는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제외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바울이 요구하는 징계는 잘못한 사람을 향한 증오나 복수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가 자신의 잘못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과 사람의 회복을 바라는 일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심각한 성적 부도덕을 공공연하게 허용한다면 교회가 무엇을 옳다고 가르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지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회복을 바라는 일입니다. 그를 공동체에서 제외하라는 명령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영원히 부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두 목적은 서로 충돌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관계의 경계를 분명히 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세운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현대적 적용의 한계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본문은 누군가를 신체적으로 해치거나, 고통을 가하거나, 괴롭힘을 통해 회개시키라는 권한을 교회에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탄에게 넘긴다」는 표현을 그런 행위의 정당화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 관련된 여성의 상황과 동의 여부, 두 사람 사이의 권력관계는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그 여성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피해가 있었는지 등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적 학대나 강압, 착취가 의심되는 사건이라면 공동체의 내부 징계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하고, 필요한 경우 법적 절차를 밟는 일은 별도로 중요합니다.

바울이 이 단락에서 직접 다루는 것은 교회가 알려진 심각한 잘못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는 왜 그런 잘못을 방치하는 것이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되는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설명에 등장하는 것이 누룩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세계관에서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은 서로 대립하는 두 영역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무너지게」로 옮긴 말은 원문에서 파괴나 무너짐을 뜻합니다. 몸의 고통으로 보는 읽기는 성경에서 사탄의 활동과 신체적 고난이 연결되는 경우가 있고(욥기 2:7, 고린도후서 12:7),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징계와 신체적 고난을 연결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육적인 삶이 무너진다고 보는 읽기에서는,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일이 그가 자신의 죄와 그 결과를 직면하게 하여 회개하도록 하려는 조치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2:5–11에서 바울은 징계를 받은 사람에게 용서와 위로를 베풀고 사랑을 확증하라고 권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고린도전서 5장에 등장하는 동일 인물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두 사건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해석도 있지만 서로 다른 사건으로 보는 해석도 있으므로, 그 장면을 이 인물이 실제로 회개하고 복귀했다는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징계를 반드시 영구적인 배제와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편지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룩 없는 이들인 그대로 새 반죽 덩이가 되도록」

고린도전서 5:6–8 본문 →

누룩 조금이 온 반죽을 부풀립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좋지 않습니다. 누룩 조금이 온 반죽 덩이를 부풀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5:6 · 본디새김

바울은 한 사람의 죄에서 공동체 전체의 상태로 시선을 옮깁니다. 누룩은 작은 양으로도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특정한 한 사람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알고도 제대로 다루지 않는 공동체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공동체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뿐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바로잡는지를 통해 그 공동체의 가치관을 배웁니다. 공동체가 심각한 잘못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취급한다면, 그 태도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누룩의 의미는 문맥에서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33에서 누룩을 하나님 나라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장에서는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지는 특성을 통해, 교회 안에서 방치된 잘못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비유를 「나쁜 누룩을 치우라」는 교훈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누룩 없는 이들인 그대로 새 반죽 덩이가 되도록 묵은 누룩을 말끔히 치우십시오.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잡히셨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5:7 · 본디새김

새 반죽 덩이가 되라고 명령하면서, 이미 누룩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누룩을 치워야 하는데 어떻게 이미 누룩 없는 사람들일 수 있을까요?

이미 누룩 없는 사람들이 새 반죽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스스로를 정화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2).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에 어긋나는 행동이 공동체 안에 남아 있습니다. 바울의 명령은 정체성을 얻기 위한 조건이라기보다, 이미 주어진 정체성에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미 누룩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바울은 즉시 그 이유를 밝힙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잡히셨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이 5장 전체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누룩을 치워야 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공동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양과 누룩 없는 빵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기 전날 밤, 하나님은 각 집에서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이집트에 심판을 내리셨지만, 어린양의 피가 있는 집은 재앙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과 함께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절기가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12:15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첫날에 집에서 누룩을 치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에,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를 누룩 없는 반죽에 비유합니다. 먼저 유월절 양의 희생이 있고, 그다음에 그 희생을 통해 형성된 백성이 누룩 없는 빵으로 절기를 지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같은 순서가 적용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희생되셨으므로, 그분께 속한 공동체는 그 구원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가 충분히 깨끗해져야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얻어 내기 위한 대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새롭게 된 공동체가 살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구성원들의 도덕적인 성취로부터 시작된다면, 공동체는 자신들의 훌륭함을 자랑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함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부터 시작된다면, 공동체는 자신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은혜가 죄를 가볍게 여길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바로잡아야 할 가장 깊은 이유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으니 절기를 지킵시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이나 악함과 못됨의 누룩으로 절기를 지키지 말고 순수함과 진리의 누룩 없는 빵으로 지킵시다.고린도전서 5:8 · 본디새김

바울은 실제로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절차를 설명하지 않고, 어떤 것으로 절기를 지켜야 하는지 말합니다. 「절기를 지킵시다」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삶을 절기에 비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매년 유월절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지 명령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에 기초한 새로운 삶 전체를 절기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한 사람의 성적 부도덕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 와서는 「악함과 못됨」을 이야기합니다. 특정한 성적 잘못에서 공동체의 삶을 특징짓는 더 넓은 악으로 시야가 확장됩니다. 그 반대편의 순수함은 거짓과 뒤섞이지 않은 진실한 태도와 관련되고, 진리는 거짓이나 기만과 반대되는 참됨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2절의 애통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심각한 잘못을 덮어 두면서 겉으로만 화목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잘못한 사람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순수함과 진리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새롭게 한 공동체라면, 그 삶 역시 그 죽음에 합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습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12:34, 39에서는 이집트를 급하게 떠나느라 반죽을 부풀릴 시간이 없었던 일이 설명되며, 이후 누룩 없는 빵은 출애굽을 기억하는 절기와 깊이 연결됩니다. 바울이 출애굽기의 모든 세부 사항을 그리스도께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부르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주제적 유사성을 넘어서는 명시적인 유형론적 연결입니다. 7절에서 누룩의 비유와 유월절 양의 희생이 원문의 접속 표현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핵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앞선 명령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 「악함」과 「못됨」은 원문에서 의미가 겹치는 두 낱말이어서 각각을 전혀 다른 종류의 죄로 엄격하게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두 표현이 나란히 놓이면서 악한 태도와 행위의 무게를 더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5:9–11 본문 →

우리가 읽을 수 없는 바울의 이전 편지

나는 앞서 보낸 편지에서 음행하는 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썼습니다.고린도전서 5:9 · 본디새김

바울은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라고 부르는 편지가 실제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편지에 쓴 말의 의미를 다시 설명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거나, 적어도 바울이 그 명령의 범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음행하는 이들이나, 탐욕스러운 이들과 강탈하는 이들이나,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5:10 · 본디새김

바울은 바로 앞에서 교회 안의 심각한 성적 부도덕을 엄중하게 다루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려 한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거래하고, 이웃으로 지내며, 사회적 관계를 맺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교회가 가르치는 윤리적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곧 그들의 모든 행동을 승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목록에는 음행하는 사람뿐 아니라 탐욕스러운 사람, 강탈하는 사람,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등장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성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안에 존재하지만, 바울은 교회가 세상 전체의 도덕적 감독자가 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공동체의 거룩함은 세상 사람들과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누구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던 것일까요?

문제는 「형제라 불리는 이」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쓰는 것은, 형제라 불리는 이가 음행하는 이나 탐욕스러운 이나 우상을 섬기는 이나 남을 모욕하는 이나 술 취하는 이나 강탈하는 이라면 어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와는 함께 먹지도 마십시오.고린도전서 5:11 · 본디새김

형제라고 불리는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께 속해 있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공동체에 속한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의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삶을 지속하고, 공동체가 그것을 아무런 문제 없이 인정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 속했다는 고백과 실제로 살아가는 삶 사이의 관계가 흐려집니다. 바울은 그 모순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나열하는 여섯 부류를 보면, 그는 성적 부도덕을 심각하게 다루면서도 그것만을 유일한 죄인 것처럼 분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고 빼앗는 행동, 사람을 말로 모욕하는 행동도 공동체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교회는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면서, 경제적인 탐욕이나 권력을 이용한 착취, 다른 사람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구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탐욕과 강탈, 모욕 역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한 번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절차로 얼마나 오랫동안 공동체에서 제외해야 하는지까지 상세하게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다루는 것은 공동체에 알려져 있고 방치되고 있는 심각한 사례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신자의 모든 잘못을 조사해 즉각 관계를 끊는 일률적인 규칙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죄가 없었던 사람만 공동체에 남겨 두라는 것이라면 누구도 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와는 함께 먹지도 마십시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식사를 함께하는 일은 우정과 환대,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적 소속을 나타내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누구와 같은 식탁에 앉느냐는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명령은 공동체의 친교 관계에 실제적인 경계를 세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명령이 정확히 어떤 식사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일상적인 친교 식사까지 포함한다고 읽을 수 있고, 교회의 공동 식사와 예수님의 만찬에서의 참여를 특히 중요하게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울이 뒤의 11장에서 예수님의 만찬을 다루며 공동체가 함께 먹는 일의 의미를 깊이 설명하므로 예배 공동체의 식탁을 포함하여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 오직 성찬에만 한정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어느 읽기든 바울이 말하는 경계는 마음속 판단에 그치지 않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그 사람을 괴롭히거나, 생존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거나, 사회적으로 파괴하는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공동체적 경계와 사람에게 가해지는 가혹행위는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이 앞에서 밝힌 목적은 그 사람의 구원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말하려는 원칙을 두 개의 질문으로 압축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이전 편지는 내용 전체를 현재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 편지가 소실되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지만, 현재의 고린도후서 일부에 그 내용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부분이 실제로 그 편지에 해당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누구를 판단해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5:12–13 본문 →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바깥에 있는 이들을 판단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안에 있는 이들은 여러분이 판단하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5:12 · 본디새김

바울은 교회 안의 심각한 잘못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교회 밖의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까지 맡은 것은 아니라고 밝힙니다. 「안」과 「바깥」은 교회 건물 안팎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구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에게는 그 고백에 따르는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 사람이 공동체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책임 있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나 내부적인 약속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에게 바울은 교회의 내부 징계를 그대로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도덕적인 문제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말라거나,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불의에 관해 판단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금지가 아닙니다. 본문이 구별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내부적인 책임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행사하려는 종교 공동체의 권한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어떤 지도자가 더 훌륭한지 판단하고, 자기들이 가진 지혜를 자랑하는 일에는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잘못이 벌어졌을 때는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판단을 무조건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을 판단해야 하며 무엇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지 구별하라고 말합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바깥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지 않습니까? 「너희 자신 가운데서 그 악한 자를 치워 내라.」고린도전서 5:13 · 본디새김

교회는 세상 전체의 최종적인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심판 권한을 자신에게 넘겨받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종교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지만, 바울은 그런 태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몫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몫이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 안의 잘못을 다루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일에만 열심을 낸다면, 바울이 제시한 순서와 반대로 행동하는 셈입니다. 반대로 자기 공동체 안에 심각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세상 전체의 사람들과 관계를 끊으려 한다면, 그것 역시 바울이 명시적으로 부정한 방향입니다.

「너희 자신 가운데서 그 악한 자를 치워 내라」

바울은 마지막을 구약의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에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이 표현은 언약 공동체가 심각한 범죄를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와 연결되고, 일부 경우에는 사형을 포함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법적 처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법적 처벌을 고린도 교회가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 표현을 가져와 교회 공동체에서 그 사람을 제외하는 조치에 적용합니다. 공동체 안의 악을 제거해야 한다는 원칙을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의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인용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너희 자신 가운데서」입니다. 바울은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들 가운데서 그 사람을 치워 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책임져야 할 곳은 자기 공동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7:7, 19:19, 21:21, 22:21–24, 24:7 등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라는 공식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이 전통을 초기 교회 상황에 맞게 재적용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어떻게 공동체의 거룩함을 만드는가?

고린도전서 5:1–13 본문 →

교만과 애통, 묵은 누룩과 누룩 없는 반죽, 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이 장의 세 대조를 하나로 잇는 중심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왜 거룩해야 하는지 설명하면서 그들의 도덕적 우월함을 근거로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그는 심각한 죄 앞에서 먼저 교회의 교만을 문제 삼고 애통을 요구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면 심각한 잘못을 가볍게 여길 수 없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경멸하면서 자기들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죄를 가볍게 만드는 근거가 아닙니다. 동시에 죄인을 미워하고 파괴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근거도 아닙니다. 공동체를 보호하고, 잘못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필요한 경계를 세우되, 사람의 회복과 구원을 바라는 목적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용서와 회복을 바란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관계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함은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써 얻는 영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주신 새로운 삶을 공동체 안에서 진실하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이 보여 준 유월절의 장면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유월절 양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룩을 치우고 누룩 없는 빵으로 절기를 지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미 유월절 양이 희생되셨는데도 묵은 누룩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알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지만, 그 은혜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공동체 안에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희생되셨고, 이미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새로운 공동체답게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유월절 양은 이미 희생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희생으로 새롭게 된 사람들이 어떤 빵으로 절기를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 식탁 위에 악함과 못됨의 누룩이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공동체가 순수함과 진리의 누룩 없는 빵으로 절기를 지키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미 희생되신 유월절 양에 합당한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