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6장 · 교회 안의 문제
유월절 제물과 아직 치우지 않은 누룩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성적 부도덕이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부부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사실을 듣고 가장 먼저 문제 삼은 것은 그 남자의 행동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우쭐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슬퍼하며…」(2절)
바울은 왜 그토록 심각한 죄 앞에서 먼저 교회의 감정을 문제 삼을까요? 그는 그들이 분노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퍼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이런 말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제물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7절) 교회 안에서 일어난 성적 부도덕을 다루다가 왜 갑자기 유월절 제물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이 왜 교회 안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이유가 됩니까?
바울의 설명은 세 번 방향을 바꿉니다.
먼저 교회가 한 사람의 심각한 잘못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1–5절). 이어 누룩과 유월절의 그림을 통해 왜 그래야 하는지 밝힙니다(6–8절). 마지막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과 교회 밖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르게 대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9–13절).
바울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는 데 열심을 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밖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책임져야 할 곳은 먼저 자기 안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의 근거는 교회가 세상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들을 위해 희생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죄보다 먼저 드러나는 공동체의 잘못된 반응
「아버지의 아내」는 누구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매우 직접적으로 밝힙니다.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말이 널리 들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없는 그런 음행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부부처럼 산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5:1 · 두루새김
바울은 「자기 어머니」라고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그 남자의 친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다른 아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남자가 자기 아버지의 배우자에 해당하는 여성과 부부처럼 살고 있었고, 바울이 이를 심각한 성적 부도덕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바울은 이 관계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겼을까요? 레위기 18:8은 아버지의 아내와 성적 관계를 맺는 일을 금지하고, 레위기 20:11은 그 위반을 심각한 죄로 다룹니다. 신명기 27:20도 그런 사람을 저주받을 사람으로 선언합니다. 이 규정들은 사적인 성적 선택이 아니라 가족의 관계와 경계,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지켜야 할 질서를 침범하는 문제로 다룹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통계적 진술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안의 일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심각한지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일을 저지른 사람에 관한 설명을 길게 이어 가지 않습니다.
그는 곧바로 교회 전체를 향합니다.
문제는 그 남자뿐 아니라 교회의 태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우쭐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슬퍼하며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을 여러분 가운데서 내보냈어야 하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5:2 · 두루새김
「우쭐해져 있습니다」(φυσιόω)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한 태도를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서로를 비교하며,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를 자랑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교만이 교회 안의 심각한 잘못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정말 그 남자의 행동 자체를 자랑했을까요? 본문은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자랑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구체적인 동기를 설명하는 대신, 어떤 반응을 보였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슬퍼하며」
바울은 잘못을 발견한 공동체에 승리감이나 우월감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슬픔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잘못이 벌어졌고, 관련된 사람들의 삶이 손상되었고, 공동체가 그 일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슬픔은 감정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어서 그 사람을 공동체 가운데서 내보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슬픔은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무게를 느끼며, 책임 있게 행동하는 태도입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 보일 수 있는 잘못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동체의 평판이나 편의를 위해 심각한 잘못을 덮어 두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를 저지른 사람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확인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슬픔은 두 태도 모두와 다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를 다루는 일을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기회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 여성이 법적으로 혼인한 계모였는지, 아버지와 첩 또는 동거 관계에 있었던 여성이었는지, 아버지가 살아 있었는지, 이혼하거나 사망한 상태였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과 관습에 비추어 동거 관계였을 가능성도 제시되지만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레위기 18장의 금지 규정들은 친족 관계를 보호하는 큰 틀 안에 놓여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도 가까운 친족 사이의 성적 관계를 금하는 여러 관습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법적 금지와 사회적 평가는 관계의 형태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들의 자유로움이나 너그러움을 자랑하며, 영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에 기존의 도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제시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문제를 알고도 방치했다는 것은 문맥에서 확인되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까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이 어떻게 구원을 위한 일이 되는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도가 내린 판단
나는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이미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5:3 · 두루새김
바울은 고린도에 있지 않습니다.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어」라는 말은 신비한 영적 이동이 아니라, 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 공동체와 깊이 연결되어 사도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4장에서 바울은 때가 되기 전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이미 판단했다고 말합니다.
모순일까요?
두 장에서 다루는 판단의 대상이 다릅니다. 4장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의 숨겨진 동기와 하나님 앞에서의 최종적인 평가를 성급하게 확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5장에서 문제 되는 것은 이미 공동체에 알려진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숨겨진 마음과 최종 운명을 판정할 권한이 없지만, 명백하게 드러난 해로운 행동까지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모이고 내 영도 함께하며, 우리 주 예수의 능력이 함께하는 자리에서,고린도전서 5:4 · 두루새김
이것은 한 개인의 사적인 복수나 감정적인 단절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질 공동체의 결정입니다. 그 모임이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바울의 권위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체면을 지키거나 바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모이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 아래 모입니다. 누군가를 공동체에서 내보내는 결정은 그 사람의 삶과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므로, 개인의 감정이나 집단의 압력으로 가볍게 행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의 육이 멸망하게」
그런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의 육이 멸망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날에 그 영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5: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그 사람을 공동체 가운데서 내보내라고 명령합니다. 이 문맥을 고려하면 「사탄에게 넘겨주어」라는 말은 그 사람을 교회의 교제와 보호에서 제외하는 행위와 깊이 연결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영적 사건이 발생하는지, 사탄이 무엇을 하도록 허락받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육이 멸망하게」는 읽기가 갈립니다. 몸에 고통이나 질병 같은 파괴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읽기, 죄에 지배된 육적인 삶이 무너진다는 읽기, 그리고 「육」과 「영」을 공동체의 육적인 행실과 영적인 생명으로 보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이 조치의 초점이 그 사람의 고난인지, 회개인지, 공동체를 깨끗하게 하는 일인지가 달라집니다. 어느 읽기가 원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 조치가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그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주님의 날에 그 영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멸망시키는 일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이 문장이 그 사람의 최종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 조치가 이루려는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내보내지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그 방향은 그 사람의 영원한 파멸을 바라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과 사람의 회복을 바라는 일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심각한 성적 부도덕을 공공연하게 허용한다면 교회가 무엇을 옳다고 가르치는지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회복을 바라는 일입니다.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관계의 경계를 분명히 세워야 할 때가 있지만, 경계를 세운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교회의 징계를 반드시 영구적으로 내보내는 일과 같게 보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편지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누군가를 신체적으로 해치거나, 고통을 가하거나, 괴롭힘을 통해 회개시키라는 권한을 교회에 주지 않습니다. 「사탄에게 넘겨주어」라는 표현을 그런 행위의 정당화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 관련된 여성의 상황과 동의 여부, 두 사람 사이의 힘의 차이는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적 학대나 강압, 착취가 의심되는 사건이라면 공동체의 내부 징계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의 안전과 권리를 보호하고, 필요한 경우 법적 절차를 밟는 일은 별도로 중요합니다.
바울이 이 단락에서 직접 다루는 것은 교회가 알려진 심각한 잘못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는 왜 그것이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되는지 설명합니다.
그 설명에 등장하는 것이 누룩입니다.
조금 더 깊이
「멸망」(ὄλεθρος)으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파괴나 무너짐을 뜻합니다. 몸의 고난으로 보는 읽기는 성경에서 사탄의 활동과 신체적 고난이 연결되는 경우(욥기 2:7, 고린도후서 12:7)와,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징계와 신체적 고난을 연결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육적인 삶이 무너지는 것으로 보는 읽기에서는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일이 그가 자신의 죄와 그 결과를 마주하여 회개하도록 하려는 조치가 됩니다. 공동체의 행실과 생명으로 보는 읽기에서는 초점이 개인의 고난보다 공동체를 깨끗하게 하고 지키는 일에 놓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5–11에서 징계를 받은 사람에게 용서와 위로를 베풀고 사랑을 보여 주라고 권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고린도전서 5장의 인물과 같은 사람인지는 해석이 갈리므로, 그 장면을 이 인물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증거로 쓸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현대 교회의 구체적인 징계 절차를 모두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룩 없는 사람들이니, 묵은 누룩을 깨끗이 없애서 새 반죽이 되십시오」
누룩 조금이 반죽 전체를 부풀립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좋지 않습니다. 누룩 조금이 반죽 전체를 부풀린다는 것을 모르십니까?고린도전서 5:6 · 두루새김
바울은 한 사람의 죄에서 공동체 전체의 상태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한 사람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알고도 제대로 다루지 않는 공동체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공동체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뿐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바로잡는지를 통해 그 가치관을 배웁니다. 공동체가 심각한 잘못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취급한다면, 그 태도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퍼집니다. 누룩이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은 아니어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33에서 누룩을 하나님 나라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장에서는 반죽 전체에 퍼지는 특성이 비유의 초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비유를 나쁜 누룩을 없애라는 교훈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룩 없는 사람들이니, 묵은 누룩을 깨끗이 없애서 새 반죽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제물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5:7 · 두루새김
이미 누룩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새 반죽이 되라고 명령합니다. 아직 누룩을 없애야 하는데 어떻게 이미 누룩 없는 사람들일 수 있을까요?
이미 누룩 없는 사람들이 새 반죽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스스로를 깨끗하게 한 뒤에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2). 그런데 그 정체성에 어긋나는 행동이 공동체 안에 남아 있습니다. 바울의 명령은 정체성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가라는 요청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미 누룩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제물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누룩을 없애야 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공동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양과 누룩 없는 빵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12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기 전날 밤, 하나님은 각 집에서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양옆의 기둥과 위쪽의 가로대에 바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이집트에 심판을 내리셨지만, 어린양의 피가 있는 집은 재앙을 면했습니다.
유월절과 함께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명절이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12:15에서 하나님은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첫날에 집에서 누룩을 치우라고 명령하십니다. 12:34, 39에서는 이집트를 급하게 떠나느라 반죽을 부풀릴 시간이 없었던 일이 설명됩니다.
바울은 바로 이 배경을 가져와 그리스도를 유월절 제물로,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를 누룩 없는 반죽으로 비유합니다. 먼저 유월절 양의 희생이 있고, 그다음에 그 희생으로 이루어진 백성이 누룩 없는 빵으로 명절을 지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희생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속한 공동체는 그 구원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가 충분히 깨끗해져야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얻어 내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새롭게 된 공동체가 살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만일 교회의 거룩함이 구성원들의 도덕적인 성취로부터 시작된다면, 공동체는 자신들의 훌륭함을 자랑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은혜는 죄를 가볍게 여길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바로잡아야 할 가장 깊은 이유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으니 명절을 지킵시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이나 악함과 못됨이라는 누룩을 쓰지 말고, 순수함과 진실함이라는 누룩 없는 빵으로 명절을 지킵시다.고린도전서 5:8 · 두루새김
바울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절차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명절을 지킵시다」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기초한 새로운 삶 전체를 명절에 비유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한 사람의 성적 부도덕을 다루었는데, 8절에 와서는 「악함과 못됨」을 이야기합니다. 특정한 성적 잘못에서 공동체의 삶을 특징짓는 더 넓은 악으로 시야가 확장됩니다. 그 반대편에는 「순수함과 진실함」이 있습니다. 순수함은 거짓과 뒤섞이지 않은 태도와, 진실함은 거짓이나 속임수와 반대되는 참됨과 관련됩니다.
이것은 2절의 슬픔과 이어집니다. 잘못을 덮어 두면서 겉으로만 화목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잘못한 사람을 공격하면서 도덕적 우월함을 자랑하는 것도 순수함과 진실함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며, 새로운 공동체에 걸맞게 살아가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은 출애굽기의 모든 세부 사항을 그리스도께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유월절 양의 희생과 누룩을 치우는 명절의 관계를 가져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공동체의 새로운 삶을 설명합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월절 제물」로 부르므로, 이것은 주제가 비슷하다는 것을 넘어 앞선 사건을 그리스도의 사건과 분명하게 잇는 읽기입니다. 7절에서 누룩의 비유와 유월절 제물의 희생이 원문의 연결 표현으로 긴밀하게 이어진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8절의 「악함」과 「못됨」은 원문에서 의미가 겹치는 두 낱말로, 전혀 다른 종류의 죄로 엄격하게 나눌 필요 없이 나란히 놓여 악의 무게를 더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읽을 수 없는 바울의 이전 편지
나는 전에 보낸 편지에서 음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썼습니다.고린도전서 5:9 · 두루새김
바울은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라고 부르는 편지가 실제로 첫 번째 편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 이전 편지의 내용 전체는 현재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는 그 말의 뜻을 다시 설명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거나, 적어도 바울이 그 명령의 범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음행하는 사람들이나, 욕심이 많은 사람들과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5:10 · 두루새김
바울은 방금 교회 안의 심각한 음행을 엄중하게 다루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밝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거래하고, 이웃으로 지내며 살아갑니다.
목록에는 음행하는 사람뿐 아니라 욕심이 많은 사람,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등장합니다. 바울의 관심이 성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세상 전체의 도덕적 감독자가 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가 요구하는 거룩함은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끊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곧 그들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누구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던 것일까요?
문제는 「믿음의 형제자매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지금 내가 쓰는 말은 이렇습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라고 불리는 사람이 음행을 하거나 욕심이 많거나 우상을 섬기거나 남을 모욕하거나 술에 취해 살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다면, 그 사람과 어울리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마십시오.고린도전서 5:11 · 두루새김
결정적인 표현은 「믿음의 형제자매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공동체에 속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면서도 그 믿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삶을 계속하고, 공동체가 그것을 아무 문제 없이 인정한다면, 고백과 삶 사이의 관계가 흐려집니다.
바울은 음행을 심각하게 다루면서도 그것만을 유일한 죄인 것처럼 떼어 놓지 않습니다. 욕심과 모욕, 남의 것을 빼앗는 일도 함께 다룹니다. 교회는 성적인 문제에는 매우 엄격하면서, 돈을 향한 욕심이나 권력을 이용해 남의 것을 빼앗는 일, 공개적인 모욕에는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구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목록이 모든 신자의 모든 잘못을 조사해 즉각 관계를 끊는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누구도 공동체에 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다루는 것은 예수님께 속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심각한 잘못을 정상적인 삶의 방식처럼 계속하는 문제, 그리고 그 일을 공동체가 아무런 책임 없이 내버려 두는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마십시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식사를 함께하는 일은 우정과 손님을 반기는 마음,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누구와 같은 식탁에 앉느냐가 서로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먹지도 마십시오」는 공동체의 관계에 실제적인 경계를 세우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이 일상의 식사까지 포함하는지, 교회의 공동 식사와 예수님의 만찬을 특히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은 마음속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사람과의 친밀한 공동체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그 사람을 괴롭히거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거나, 사회적으로 무너뜨리는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앞에서 밝힌 목적은 그 사람의 구원이었고, 경계를 세우는 방식 역시 예수님의 복음과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이전 편지는 사라졌다고 보는 해석도 있고, 현재의 고린도후서 일부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어느 부분이 그 편지에 해당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식사에 관해서는, 바울이 11장에서 예수님의 만찬을 다루며 공동체가 함께 먹는 일의 의미를 깊이 설명하므로 이 구절에도 예배 공동체의 식탁을 포함하여 생각할 수 있지만, 오직 성찬에만 한정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 목록을 제시하면서도, 어떤 절차로 얼마나 오랫동안 공동체에서 내보내야 하는지까지 정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누구를 판단해야 하는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교회 안의 사람들은 여러분이 판단하고,고린도전서 5:12 · 두루새김
「교회 안」과 「교회 밖」은 건물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구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에게는 그 고백에 따르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교회 안의 책임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도덕적인 문제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말라거나,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불의에 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이 구별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내부의 책임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행사하려는 종교 공동체의 권한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어떤 지도자가 더 훌륭한지 판단하고, 자기들의 지혜를 자랑하는 일에는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잘못이 벌어졌을 때는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판단을 무조건 포기하라고 하지 않고, 무엇을 판단하고 무엇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지 구별하라고 말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지 않습니까?
교회 밖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지 않습니까? 「너희 가운데서 그 악한 사람을 내보내라.」고린도전서 5:13 · 두루새김
교회는 세상 전체의 최종적인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태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이 가지신 심판 권한을 넘겨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몫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몫이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 안의 잘못을 다루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잘못을 비난하는 일에만 열심을 낸다면, 바울이 제시한 순서와 반대로 행동하는 셈입니다. 반대로 세상 전체의 사람들과 관계를 끊으려 한다면, 그것 역시 바울이 분명하게 부정한 방향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그 악한 사람을 내보내라」
바울은 마지막을 구약의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에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악을 없애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 그 본래 문맥에는 일부 경우 사형을 포함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법적 처벌이 적혀 있지만, 바울은 그 처벌을 고린도 교회가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 표현을 가져와 공동체에서 그 사람을 내보내는 조치에 적용합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너희 가운데서」입니다. 바울은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을 모두 없애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들 가운데서 그 사람을 내보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책임져야 할 곳은 자기 공동체입니다. 그들이 이미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동체 안의 잘못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어떻게 공동체의 거룩함을 만드는가?
우쭐함과 슬픔, 묵은 누룩과 누룩 없는 반죽, 교회 안과 교회 밖이라는 이 장의 세 대조를 하나로 잇는 중심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왜 거룩해야 하는지 설명하면서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훌륭하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공동체는 심각한 잘못을 가볍게 여길 수 없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깔보면서 자기 의로움을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2절에서 바울이 우쭐함 대신 슬픔을 요구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죄를 가볍게 만드는 근거가 아닙니다. 동시에 죄인을 미워하고 무너뜨리는 일을 정당화하는 근거도 아닙니다. 용서와 회복을 바란다는 이유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관계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이제 바울이 보여 준 유월절의 장면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유월절 제물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룩을 없애고 누룩 없는 빵으로 명절을 지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미 유월절 제물이 죽임을 당하셨는데도 묵은 누룩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희생되셨고, 이미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으니, 이제 그 새로운 공동체답게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유월절 제물은 이미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희생으로 새롭게 된 사람들이 어떤 빵으로 명절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 식탁 위에 악함과 못됨이라는 누룩이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순수함과 진실함이라는 누룩 없는 빵으로 명절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미 죽임을 당하신 유월절 제물에 걸맞은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