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인사와 편 가르기

왕좌의 교인들과 구경거리가 된 사도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받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교사들이 있었고, 말과 지식도 넉넉했습니다. 서로 누구의 가르침이 더 나은지 평가할 만큼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이상한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없이 왕 노릇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칭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바울 자신의 모습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배고프고 목마르며, 제대로 옷을 입지 못하고, 주먹질을 당하고, 머물 곳 없이 떠돕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왕처럼 풍족하고 당당합니다. 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들은 굶주리고 매를 맞으며 떠돌아다닙니다.

누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일까요?

고린도 사람들의 기준이라면 풍성한 은사와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쪽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고난을 많이 겪는 사람이 무조건 더 거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묻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교회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부터 바꿉니다. 그런 다음 고린도 교인들과 사도들의 삶을 나란히 놓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자신을 자랑하지 말라고 가르치던 바울이 이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끝까지 따라가면 그 말이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64장 본문 읽기 →

살림꾼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4:1–5 본문 →

주인이 아니라 맡은 사람

바울은 앞에서 자신과 아볼로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교회가 그런 일꾼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말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고린도전서 4:1 · 두루새김

「일꾼」은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 일하는 아랫사람이나 돕는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 주인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맡아 관리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는 단순히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고대의 큰 집에서 이런 사람은 주인에게서 재산과 식량, 집안일 등을 맡아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상당한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자기 소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것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에게 맡겨진 것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바울은 2장에서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을 통해 드러났다고 설명했고, 그 중심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발견한 비밀 지식으로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내신 구원을 전하도록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일을 맡은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는지, 얼마나 훌륭한 연설을 하는지, 얼마나 유명한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주인이 맡긴 일을 충실하게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일을 맡은 사람은 믿음직한 사람으로 드러나야 합니다.고린도전서 4:2 · 두루새김

바울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 성공한 사람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직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낱말은 문맥에 따라 믿을 만한, 충실한, 맡은 일에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 지도자의 권위는 바로 여기서 그 성격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다룰 권리를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맡은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더욱 충실하고 책임 있게 다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정말 믿음직한 사람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왜 자기 자신도 판단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러분에게 판단받든 사람의 법정에서 판단받든, 나에게는 아주 작은 일입니다. 나 자신도 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4:3 · 두루새김

바울은 남의 평가뿐 아니라 자기 평가마저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사람의 법정」은 5절에서 주님께서 오실 때 이루어질 판단과 대조됩니다. 인간의 판단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의 평가를 끝까지 두려워하고 따라야 하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내 양심에 걸리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옳다는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고린도전서 4:4 · 두루새김

적어도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는 맡겨진 일을 불성실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따라 진지하게 행동하면서도 잘못할 수 있고, 옳다고 확신하면서도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양심에 걸리는 일이 없다는 것은 소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 판결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판단하실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들을 밝히시고, 사람들이 마음에 품은 뜻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 각 사람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4:5 · 두루새김

바울은 바로 다음 장에서 교회 안의 분명한 잘못을 판단하고 바로잡으라고 요구합니다(5:3–5, 12–13). 따라서 4:5를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인 금지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문맥에서 문제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꾼에 대해 인간이 내리는 성급하고 최종적인 평가, 특히 겉으로 드러난 말과 능력만으로 그 사람이 정말 충실한지 판정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설교와 영향력과 결과를 평가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의 깊은 동기를 완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겉으로는 훌륭해 보이는 일이 자기 명예를 위한 행동일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수고가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에 품은 뜻」까지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심판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칭찬을 언급합니다. 그날은 잘못을 드러내는 시간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충실함도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3장에서 건축자들이 자기 수고에 따라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지도자들의 최종적인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그리스도께 속하여 일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으로 보고, 주님께서 판단하실 몫을 주님께 남겨 두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의 법정」은 원문을 직역하면 「사람의 날」에 가깝습니다. 두루새김은 사람의 법정이나 심판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여 「사람의 법정」으로 옮겼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4:6–7 본문 →

바울은 왜 자신의 이름과 아볼로의 이름을 사용했을까?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해 나와 아볼로를 예로 들어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통해 「기록된 것을 넘어서지 마라」는 말을 배우고, 한 사람을 편들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며 우쭐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4:6 · 두루새김

「예로 들어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로 옮긴 그리스어 메타스케마티조(μετασχηματίζω)는 모습이나 형태를 바꾸거나 어떤 설명을 다른 대상에 적용한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실제로 존재했던 바울파와 아볼로파를 이야기하는지, 다른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면서 자신과 아볼로의 이름을 예로 사용한 것인지 두 가능성이 모두 논의됩니다. 1:12에 실제로 바울과 아볼로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은 첫 번째 읽기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는 말은 두 번째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어느 쪽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목적은 분명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도와 교사라도 사람들이 자랑하기 위한 깃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것을 넘어서지 마라」는 신약 해석에서 어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앞에서 인용한, 사람의 지혜와 자랑을 무너뜨리는 성경 말씀들(이사야 29:14, 예레미야 9:23–24, 욥기 5:13, 시편 94:11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알려진 어떤 격언이나 원칙을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도 있으며, 본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해석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목적은 바로 뒤에 분명합니다. 사람을 높이는 일을 자제하고, 서로를 깎아내리며 우쭐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쉽게 교만해질까요? 바울은 세 가지 질문으로 그 마음을 파고듭니다.

선물을 소유물처럼 자랑할 때

누가 여러분을 남보다 뛰어나게 만들었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린도전서 4:7 · 두루새김

첫 번째 질문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겨냥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은사,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를 근거로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 차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사람에게는 실제로 서로 다른 능력과 은사가 있고, 바울은 그런 차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그 사람 스스로 위대해졌음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결국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질문이 결정적입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받은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 선물을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는 근거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은혜는 자랑의 재료가 됩니다.

이제 문체가 갑자기 바뀝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날카로운 풍자를 시작합니다.

왕이 된 고린도 교인들, 사형수가 된 사도들

고린도전서 4:8–13 본문 →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없이 왕 노릇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왕 노릇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 노릇을 할 텐데 말입니다.고린도전서 4:8 · 두루새김

앞의 문맥을 생각하면 분명한 반어법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영적 능력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나 권면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바울은 그 태도를 과장하여 보여 줍니다.

되풀이되는 「벌써」가 열쇠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풍성한 은사를 가졌다는 사실을 비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태도를 풍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바울은 15장에서 그 구원이 완성될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모든 싸움이 끝나고 왕좌에 올라앉은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사도들도 함께 왕 노릇을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현재 모습은 왕좌와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사도들은 행렬의 맨 끝에 서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사도들을 사형을 앞둔 사람들처럼 맨 끝자리에 내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온 세상에, 천사들에게도 사람들에게도 구경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4:9 · 두루새김

왕좌에 앉아 있는 듯한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 뒤로 사형을 앞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사도들은 공개 처형을 앞둔 죄수처럼 맨 마지막에 등장해, 사람들뿐 아니라 천사들 앞에서도 구경거리가 됩니다. 그들의 수치는 온 세상 앞에 드러난 광경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기 때문에 이런 수치를 겪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그 자리에 내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지혜와 능력과 존경으로 영적인 지위를 확인하려던 고린도 교인들의 생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누가 더 하나님께 가까운지 직접 묻지 않습니다. 대신 두 집단을 나란히 놓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지만, 여러분은 슬기롭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롭습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존중받지만 우리는 업신여김을 받습니다.고린도전서 4:10 · 두루새김

어리석음과 슬기로움. 약함과 강함. 존중받음과 업신여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정말 더 지혜롭고 강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거울처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세상살이에 서툴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 때문에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반면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롭다고 자부합니다.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따르는 삶을 이렇게 다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십자가와 아무 상관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굶주리고 매 맞는 사람들의 손

우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배고프고 목마르며, 제대로 옷을 입지 못하고, 주먹질을 당하고, 머물 곳 없이 떠돕니다. 또 우리 손으로 고되게 일합니다. 모욕을 당하면 복을 빌어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아 냅니다.고린도전서 4:11–12 · 두루새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비유가 아닙니다. 자신의 몸으로 겪는 현실적인 고난입니다.

그 목록 가운데 「우리 손으로 고되게 일합니다」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8:3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함께 생업에 종사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겉으로 드러나는 지위와 능력으로 평가하던 고린도 사람들에게, 손으로 일하는 바울은 그들의 기준에 잘 맞지 않는 지도자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사도로서 하는 일의 중요한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목록은 겉으로 드러나는 고난에서 그 고난에 대응하는 태도로 넘어갑니다.

모욕을 당하면 복을 빌어 줍니다.

박해를 받으면 참아 냅니다.

헐뜯음을 당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사도들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악을 똑같은 악으로 되갚지 않습니다.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누가복음 6:27–28)과 같은 방향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의 묘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길과 어울립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으로 이루신 구원과 자신이 사도로서 겪는 고난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의 삶에도 그분의 낮아지심이 나타나야 한다고 봅니다.

헐뜯음을 당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쓸어 낸 쓰레기처럼, 모든 것에서 닦아 낸 때처럼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4:13 · 두루새김

「쓸어 낸 쓰레기」와 「닦아 낸 때」는 둘 다 더러운 것을 제거할 때 남는 찌꺼기나 오물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사람들이 버리고 싶어 하는 존재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바울의 풍자는 여기서 가장 낮은 곳에 도달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벌써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세상에서 쓸어 낸 쓰레기처럼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습을 사도로서 실패했다는 증거로 제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도의 현실로 이야기합니다.

고난이 아름답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존경과 성공이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깊이

「구경거리」에 해당하는 낱말은 구경하는 장소인 극장을 뜻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광경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표현을 고대 로마의 공개 처형이나 경기장의 구경거리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지만,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사나 행렬을 떠올렸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는 몸을 쓰는 노동을 낮게 평가하는 시각이 있었고, 특히 상류층에게 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문제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노동이 똑같이 천하게 여겨졌던 것은 아닙니다. 13절의 두 낱말을 고대에 더러움을 씻어 내는 의식에서 공동체를 위해 제거되는 희생물이나 다른 사람을 대신하는 대상과 연결하려는 해석도 있지만, 바울이 그런 특정 의식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왜 바울은 갑자기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고린도전서 4:14–17 본문 →

날카로운 풍자 뒤에 나타나는 아버지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날카롭게 풍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서 말투가 다시 바뀝니다.

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내 자녀인 여러분을 타이르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4:14 · 두루새김

앞의 풍자에는 분명히 상대방이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하려는 날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끝내 이루려는 목적은 아니라고 밝힙니다.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자기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을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

「타이르려는」은 생각을 바로잡도록 권하거나 경고하고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그저 위로하는 말도, 부끄러움을 주어 굴복시키려는 말도 아닙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돕는 말입니다.

돌보고 이끌어 주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다른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돌보고 이끌어 주는 사람이 만 명 있어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해 내가 여러분을 낳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4:15 · 두루새김

「돌보고 이끌어 주는 사람」은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아이를 돌보며 학교에 데려가고, 행동을 지켜보고, 바르게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만 명은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과장된 표현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 수 있지만, 처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아버지 역할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능력으로 새 생명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해」 그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주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이 시작될 때 그가 맡았던 역할과 그 때문에 갖게 된 깊은 책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의 비유와 아버지 비유가 서로를 보완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지만,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이유는 사랑과 책임 때문입니다.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린도전서 4:16 · 두루새김

앞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 이름을 내세워 자랑하는 일을 꾸짖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가장 높이 평가하라고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이 말 직전에 어떤 삶을 보여 주었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받고, 약하며, 배고프고, 주먹질을 당하고, 손으로 일하며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모욕을 당할 때 복을 빌어 주고, 헐뜯음을 당할 때 좋은 말로 응답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하는 11:1에서 더욱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본받는 일의 마지막 목적지는 바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디모데는 무엇을 일깨우러 오는가?

이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자녀이며 주님 안에서 믿음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여러분에게 다시 일깨워 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어디서나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그대로입니다.고린도전서 4:17 · 두루새김

2절에서 일을 맡은 사람에게 요구된 바로 그 특성, 「믿음직한 사람」이 디모데에게 다시 붙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얼마나 뛰어난 말을 하는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디모데가 일깨울 것을 바울의 「길」(ὁδός)이라고 표현하는데, 두루새김은 그 뜻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로 풀어 옮겼습니다. 몇 가지 가르침이 아니라 바울이 어떻게 살아가고, 가르치며, 교회를 섬기는지를 다시 기억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서나 모든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으로, 특정 도시나 집단의 자랑이 될 수 있는 특별한 비밀이 아닙니다.

디모데는 새로운 지도자 경쟁에 참여하러 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들었던 복음과 그 복음에 어울리는 삶을 다시 일깨우러 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4:18–21 본문 →

바울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4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분위기는 다시 엄해집니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여러분에게 가지 않을 줄 알고 우쭐해졌습니다.고린도전서 4:18 · 두루새김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의 방문 계획을 의심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곧 여러분에게 가겠습니다. 그리고 우쭐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고린도전서 4:19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의 방문 계획조차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 아래 둡니다. 그리고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은 2:4–5와 연결됩니다. 바울은 처음 고린도에 왔을 때 사람의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 성령과 능력이 드러나는 것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능력」을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만 제한할 근거는 없습니다. 앞에서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교만과 다툼,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과 어긋나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화려한 말과 대비되는 능력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실제로 그들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4:20 · 두루새김

말과 능력은 서로 반대되는 것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말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지금도 편지를 쓰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말만 있고 실제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나라에 관한 말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실제로 힘을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능력을 강한 지도력이나 사람들을 압도하는 힘으로 이해하면 본문을 거꾸로 읽는 셈이 됩니다. 약하고 업신여김을 받는 사도들이 모욕을 당할 때 복을 빌어 주고 헐뜯음을 당할 때 좋은 말로 응답하는 삶이야말로, 사람의 자랑과는 다른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물론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을 통해 사람을 믿게 하고, 공동체를 세우고,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일 전체와 관련됩니다. 지금 바울이 확인하려는 것은 그들의 교만한 말 뒤에 그 실제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매를 들고 갈까요,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갈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매를 들고 여러분에게 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가야 하겠습니까?고린도전서 4:21 · 두루새김

방문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고린도 교인들의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교만을 고집한다면 엄하게 바로잡아야 할 것이고, 잘못을 받아들이고 돌아선다면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매」를 문자 그대로 바울이 교인들의 몸을 때리겠다는 뜻으로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고대에 아이를 가르치는 장면에서 매는 엄한 징계와 바로잡음을 나타낼 수 있었고, 이 문맥에서도 사도로서의 엄한 꾸짖음과 징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바로 앞의 아버지 비유와 이어집니다.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은 잘못을 눈감아 주는 태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가능하다면 엄한 징계보다 사랑으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갈지 혼자 선언하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습니다. 그 질문에는 엄한 경고와 함께 그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남아 있습니다.

사도의 권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고린도전서 4:1–21 본문 →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고 말하고, 영적 아버지로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하며, 필요하다면 엄하게 바로잡겠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는 맡은 것을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없는 일꾼이고, 자신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권한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그 자신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도록 돕기 위해 권위를 행사합니다.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이 자기 자랑과 모순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가 본받으라고 내놓은 것은 자기 위대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낮아진 삶이기 때문입니다.

왕처럼 행동하던 고린도 교인들 앞에,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에서 쓸어 낸 쓰레기처럼 되었다고 말한 사도가 서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아직 매가 들려 있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편지를 보내어 그들이 어느 길을 선택할지 묻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