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12–26장 · 새 땅에서 지킬 규정
남겨야 할 이름과 지워야 할 기억
신명기 25장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모세는 그의 형제가 죽은 사람의 아내를 맞아 후손을 이어 주도록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래야 죽은 사람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는 정반대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려라. 잊지 마라.」 하나는 이름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을 지워 버리라는 명령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어떤 이름을 남겨야 하고, 다른 이름은 없애야 합니까?
이 규정들을 하나의 친절한 도덕 원칙으로 묶기는 어렵습니다. 죄인의 존엄을 지키려는 명령과 신체를 절단하는 형벌 사이에는 분명한 긴장이 있고, 죽은 형제의 이름을 남기라는 명령과 아말렉의 기억을 지우라는 명령 사이에도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신명기 25장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행사하는 권한과 책임을 살피다가, 마지막에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가한 폭력의 기억으로 나아갑니다.
마흔 대를 넘기지 말라 — 죄를 지은 사람도 형제다
25장은 재판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 재판을 받으러 오면, 재판관들은 그들을 재판해야 한다. 죄 없는 사람의 무죄를 밝히고, 죄 있는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야 한다.」신명기 25:1 · 두루새김
재판관은 사람의 삶 전체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제기된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유죄가 인정된 사람에게 매를 때리는 벌이 필요하다면, 2절은 죄에 맞는 횟수만큼 형벌을 집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관이 원하는 만큼 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위에 또 하나의 제한을 둡니다.
「마흔 대까지 때릴 수 있지만, 그보다 더 때려서는 안 된다. 너무 많이 때려 너희 동족이 너희 눈앞에서 업신여김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신명기 25:3 · 두루새김
마흔 대는 의무적으로 때려야 하는 횟수가 아니라 허용되는 최대치입니다. 적절한 횟수는 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마흔 대를 넘을 수 없습니다.
형벌의 목적이 사람을 업신여기는 데 있지 않다
이 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희 동족」입니다. 원문에서는 이 사람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1절에서 재판관은 그를 죄 있는 사람으로 판단했습니다. 2절에서는 형벌을 받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는 다시 「너희 동족」이라고 불립니다.
그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그를 공동체의 형제가 아닌 사람으로 바꾸지는 않습니다.
「업신여김을 받게」라는 표현은 단순히 몸에 상처가 생긴다는 뜻을 넘어, 지나친 형벌로 사람이 모욕과 경멸의 대상이 되는 일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매를 때릴 횟수를 재판관이 정하고, 그 앞에서 집행하도록 합니다. 형벌을 가하는 권한에도 감시와 제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판단하는 일과 죄인을 끝없이 모욕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이 규정을 현대의 인권 제도와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신체형 자체가 정당한지부터 문제로 제기됩니다. 공동체가 누군가의 죄를 처벌할 때에도 그 사람을 마음대로 취급할 권한까지 얻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곧바로 사람에 관한 재판에서 동물의 노동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타작하는 소의 입을 막지 말라 — 노동하는 짐승에게 허락된 것
「소가 타작할 때에는 입에 망을 씌우지 마라.」신명기 25:4 · 두루새김
곡식을 거둔 뒤에는 낟알을 줄기와 이삭에서 분리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소를 이용해 타작마당의 곡식을 밟게 하거나 타작 도구를 끌게 할 수 있었습니다.
소는 곡식 사이를 걸으며 일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소의 입에 망을 씌우면 소는 자기 주변에 있는 곡식을 먹지 못합니다.
일하는 짐승이 그 일과 관련된 먹을거리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도록 하는 규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의 입에 망을 씌우는 것은 곡식의 주인에게 유리할 수 있습니다. 타작 과정에서 소가 먹는 곡식까지 모두 자기 것으로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주인의 이익을 위해 짐승의 입을 막는 행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앞의 재판 규정과 어떤 관계인가
두 규정을 일부러 한 쌍으로 나란히 놓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란히 읽을 때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처벌을 제한하는 법 다음에 동물의 노동을 다루는 법이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앞의 규정은 형벌을 집행하는 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에 제한을 둡니다. 다음 규정은 가축을 소유하고 일하게 하는 사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에 제한을 둡니다.
소는 사람이 거두려는 곡식 사이에서 일합니다.
그리고 그 입은 막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 바울은 신명기 25:4를 직접 인용합니다. 고린도전서 9:9–14에서 바울은 사역하는 사람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소가 타작할 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규정을 인용합니다. 원래의 법은 타작하는 소에 관한 명령입니다. 바울은 그 법에서 일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된 생활의 지원을 받는 원칙을 읽어 내고, 그것을 사역자의 권리에 적용합니다.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 주라 — 살아 있는 사람이 지는 뜻밖의 의무
5절에서는 새로운 가족 문제가 등장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들 없이 죽으면, 죽은 사람의 아내는 집안 밖의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죽은 남편의 형제는 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자기 아내로 맞아야 한다. 그렇게 그 여자에게 남편의 형제로서 할 도리를 다해야 한다.」신명기 25:5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아들이 없다는 사실은 단순히 자녀가 없다는 개인적 슬픔을 넘어 가족의 계보와 상속을 이어 가는 문제와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흔히 형사취수혼 또는 계대혼이라고 부릅니다. 남편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때 그 형제가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집안을 이어 주는 관습입니다. 두루새김은 이 의무를 「남편의 형제로서 할 도리를 다해야 한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여기서 형제는 반드시 죽은 사람의 형을 뜻하지 않습니다. 형이나 동생 어느 쪽도 가능합니다.
또한 「함께 살다가」라는 조건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형제들이 같은 집에 살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한 가족의 토지와 생활 기반을 공유하는 관계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구체적인 거주 형태를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모든 형제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적용되는 결혼 의무로 넓혀서는 안 됩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이름을 이어 갈 수 있는가
「그 여자가 낳는 맏아들은 죽은 남편의 이름을 이어야 한다. 그래야 죽은 사람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는다.」신명기 25:6 · 두루새김
이름은 단순히 사람을 부르는 말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속한 집안과 계보, 그 사람의 기억과 사회적 자리를 나타냅니다. 죽은 남자의 이름을 이어 준다는 것은 후손이 그 사람의 이름과 집안을 이어 가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을 반드시 아이에게 죽은 남편과 똑같은 개인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형제는 자신의 결혼 관계와 가족을 이루는 일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죽은 형제의 집안을 이어 주는 책임이 있습니다. 남편을 잃은 여자에게도 새로운 결혼 관계를 통해 가족 안에서 살아갈 길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을 여성의 경제적 보호만을 위해 만들어진 규정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목적은 죽은 남자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성에게는 어떤 선택권이 있었는가
남편을 잃은 여자는 그 결혼을 원합니까?
본문은 그 여자가 집안 밖의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과부에게 결혼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는 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 단락에서는 오히려 그 여자가 성문에 있는 장로들에게 나가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법적 절차를 시작하고, 거부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주체로 등장합니다.
과부의 결혼 선택은 제한되어 있지만, 정해진 의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 여자는 공동체의 장로들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습니다.
벗겨진 샌들 —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우지 않는 자에게 남는 이름
7절에서는 남편의 형제가 의무를 다하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 여자는 성문에 있는 장로들에게 나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제 남편의 형제가 이스라엘에서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 주기를 거절합니다. 제게 남편의 형제로서 할 도리를 다하려 하지 않습니다.』」신명기 25:7 · 두루새김
이처럼 문제는 개인적인 결혼 거절을 넘어 가족과 공동체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일로 제기됩니다. 장로들은 그를 불러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가 끝까지 결혼을 거절한다면 강제로 결혼시키는 절차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 여자는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다가가 그의 발에서 샌들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자기 형제의 집안을 이어 주지 않는 남자는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신명기 25:9 · 두루새김
이 행위는 공개적인 수치의 의식입니다. 그가 죽은 형제의 집안을 이어 주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름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붙는 새로운 이름
「그의 집안은 이스라엘에서 샌들이 벗겨진 사람의 집안이라고 불릴 것이다.」신명기 25:10 · 두루새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 주려 하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자기 집안의 이름에 불명예를 남깁니다. 그가 죽은 형제의 집안을 이어 주는 일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8장과의 연결
유다의 아들 에르가 죽자, 유다는 다른 아들 오난에게 형의 아내 다말과 관계를 맺고 형의 후손을 이어 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오난은 태어날 후손이 자기의 것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형의 후손을 이어 주는 일을 거부합니다(창세기 38:8–10).
오난의 행동은 단순히 특정한 성적 행위 자체가 따로 문제가 되었다기보다, 형의 후손을 이어 주라는 의무를 일부러 피한 행동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신명기 25장은 이와 관련된 가족의 의무를 법의 형태로 규정합니다. 다만 창세기의 사건과 신명기의 절차를 모든 세부 사항에서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신명기의 성문 의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룻기의 샌들은 같은 의식인가
룻기에서 보아스와 먼저 권리를 가진 친족이 거래를 확정할 때 샌들을 벗는 행위가 나타납니다(룻기 4:7–8). 그곳에서는 토지와 관련된 권리를 넘기는 일과 친족의 의무가 함께 다루어집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죽은 말론의 형제가 아니며, 룻기에는 신명기 25장의 침 뱉는 의식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룻기 4장을 신명기 25장의 형제 계대혼 규정이 그대로 실행된 사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대신 두 본문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남기는 일과 가족의 재산 및 결혼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룻기 4:10에서 보아스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 그의 형제들과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목적을 밝힙니다.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오벳은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룻기 4:17–22).
조금 더 깊이
9절에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한다」는 표현도 해석상 약간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베파나브는 그의 얼굴에 또는 그의 앞에서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얼굴에 침을 뱉는 행동인지, 그의 면전에서 침을 뱉는 의식인지 세부적인 수행 방식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공개적인 수치를 나타낸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남편을 구하려던 여자의 손 — 보호하려는 의도와 가혹한 처벌 사이
11절과 12절은 이 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규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 남자가 싸우고 있습니다. 그중 한 남자의 아내가 남편을 구하려고 다가옵니다. 그는 손을 뻗어 남편을 때리는 남자의 은밀한 곳을 움켜잡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 여자의 손을 잘라 버려라. 불쌍히 여기지 마라.」신명기 25:12 · 두루새김
이 규정은 앞의 법들과 나란히 읽을 때 더욱 충격적입니다. 3절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은 남자를 마흔 대 넘게 때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남편을 구하려고 싸움에 개입한 여자의 손을 자르라고 합니다.
이 두 규정을 하나의 온화한 보호 원칙으로 조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여자의 동기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11절은 여자가 남편을 구하려고 다가왔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런데 남편을 구하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그가 사용한 특정한 행동을 금지합니다. 다른 남자의 은밀한 곳을 움켜잡았다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손바닥을 자른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인가
따라서 원문의 직접적인 표현은 여자의 손바닥 또는 손을 자르라는 것입니다. 이를 돈으로 배상하라는 뜻으로 읽는 랍비 전통과, 음부의 털을 깎으라는 뜻으로 읽는 낱말 해석도 있습니다. 이들은 처벌의 방식이나 낱말의 뜻을 달리 이해합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라」라는 말은 사적인 보복이 아니라 법적으로 정해진 처벌을 엄격하게 집행하라는 명령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형벌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정당하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규정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의 존엄을 보호하려는 법적 제한과 다른 사람의 신체를 절단하는 처벌이 같은 장 안에 존재합니다.
이 긴장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 법을 현대적인 정당방위 규정과 같다고 볼 수 없으며, 남편을 구하려는 여성에게 손을 자르는 형벌이 정당하다고 오늘날의 독자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성경 본문에 나오지 않는 세부적인 동기나 피해 상황을 가정하여 형벌의 가혹함을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신명기를 깊이 읽는다는 것은 이러한 어려운 구절을 지나치게 부드러운 의미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을 정확히 확인하고, 그것이 남기는 신학적·윤리적 질문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식기가 생식 능력과 관련된 부위이므로, 이 법이 사람의 생식 능력을 해칠 수 있는 공격을 중대하게 다룬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실제로 생식 능력이 손상되었는지, 부상을 입었는지를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규정이 불임을 초래한 경우에만 적용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행위를 확정적으로 복원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면 그대로 신체 절단을 명령하는 규정으로 읽는 것이 기본적인 출발점입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저울추 — 시장에서 드러나는 의와 불의
13절과 14절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싸움도 없고, 형벌도 없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의 주머니와 집에 있는 물건이 등장합니다.
「같은 무게를 나타내는 저울추를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로 주머니에 넣어 두지 마라.」신명기 25:13 · 두루새김
「한 에파를 재는 그릇도 큰 것과 작은 것 두 가지로 집에 두지 마라.」신명기 25:14 · 두루새김
오늘날처럼 모든 물건에 일정한 무게와 가격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는 저울추와 부피를 재는 그릇이 거래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은이나 다른 물품을 무게로 거래할 때는 저울추를 사용했습니다. 곡식처럼 부피로 거래하는 물품에는 에파 같은 양의 단위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장사하는 사람이 서로 크기가 다른 두 종류의 저울추나 그릇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같은 한 단위라고 말하면서도 거래 상황에 따라 실제 양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정확한」 저울추와 「올바른」 재판
15절은 금지에서 적극적인 명령으로 바뀝니다.
「온전하고 정확한 저울추를 갖추고, 온전하고 정확한 에파 그릇을 갖추어라. 그래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신명기 25:15 · 두루새김
1절에서 재판관이 죄 없는 사람의 「무죄를 밝히고」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와 15절에서 「정확한」(צֶדֶק)으로 옮긴 말은 같은 히브리어 어근 차다크에서 나왔습니다. 1절에서는 재판에서 정당하게 판결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15절에서는 저울추와 에파 그릇이 올바른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재판관이 법정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야 하듯, 장사하는 사람도 시장에서 정확한 저울을 사용해야 합니다.
정의는 법정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곡식의 양을 재는 그릇에도 정의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과 상대방을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는 상인은 서로 다른 일을 합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판단이나 기준을 비틀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작은 차이가 만들어 내는 부당한 이익
예를 들어 어떤 상인이 곡식을 살 때에는 더 큰 그릇을 사용하고, 팔 때에는 더 작은 그릇을 사용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살 때에는 같은 한 에파의 값으로 더 많은 곡식을 받고, 팔 때에는 같은 한 에파의 값으로 더 적은 곡식을 줄 수 있습니다. 한 번의 거래에서는 차이가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래가 반복되면 그 차이는 상인에게 이익이 되고 상대방에게 손실이 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울추를 실제로 잘못 사용하는 행동만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속임수를 가능하게 하는 서로 다른 도구를 갖고 있는 것 자체도 금지한다는 점입니다. 거래 상대방이 보지 못하는 곳에 속임수에 쓸 도구를 감추어 두고 필요할 때 사용하는 행동을 막으려는 규정입니다.
부정한 저울을 왜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는 이런 일을 하는 모든 사람, 곧 불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기 때문이다.」신명기 25:16 · 두루새김
원문에서 「역겨워하시기 때문이다」(תּוֹעֵבַה)라는 표현은 신명기의 우상숭배나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여러 행동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장에서 거래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에 사용됩니다. 부정한 저울은 단순히 장사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편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불의입니다.
사람은 시장에서 저울을 조작하는 행동을 종교생활과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렇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라면 거래의 기준도 올바르게 유지해야 합니다.
올바른 저울과 오래 사는 날
15절은 올바른 저울추를 사용해야 하는 이유에 또 하나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래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이 약속을 정직하게 장사하면 개인의 수명이 반드시 늘어난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명기에서 땅에서 오래 살아간다는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이스라엘이 계속 살아가는 일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지속적인 삶이 정직한 거래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땅에서 오래 살아가려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작은 저울추 하나가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거래 방식은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실제로 저울추나 에파 그릇을 사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쪽에는 유리하고 다른 쪽에는 불리한 기준을 감추어 사용하는 문제가 여전히 발생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도구를 그대로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거래하는 사람들이 같은 기준 아래에서 정당하게 대우받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기억하라 — 왜 뒤처진 사람들을 공격한 일이 잊혀서는 안 되는가
17절에서 모세는 갑자기 이집트 탈출 당시의 사건을 꺼냅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길에서 아말렉이 너희에게 한 일을 기억하여라.」신명기 25:17 · 두루새김
앞에서는 저울추와 에파 그릇을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공격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 전환을 단순히 관련 없는 법률 조항이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말렉이 저지른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의 규정들과 함께 생각해 볼 지점이 있습니다.
「너희가 지치고 기운이 없을 때, 아말렉은 길에서 너희를 만나 너희 뒤로 처진 약한 사람들을 모두 뒤에서 공격했다.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신명기 25:18 · 두루새김
여기서 핵심은 아말렉이 이스라엘과 싸웠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아말렉이 누구를, 어떤 상황에서 공격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후미를 공격했다는 말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광야를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이동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행렬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는 일이 낯선 전략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 행동을 단순히 영리한 군사 전략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행동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문맥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지치고 뒤처진 사람들을 공격한 행동 뒤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공격 방식 자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와 관련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20:11에서 아브라함이 한 말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랄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어서 사람들이 자기 아내 때문에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7장은 무엇을 더 알려 주는가
아말렉과의 전쟁은 출애굽기 17:8–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말렉이 르비딤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여호수아가 사람들을 이끌고 싸웁니다.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듭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우세해집니다. 아론과 훌은 지친 모세의 손을 붙잡아 줍니다. 마침내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물리칩니다.
출애굽기 17장은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이스라엘의 승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 신명기 25장은 아말렉이 공격한 대상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관심의 규모는 개인에서 민족으로 커졌지만, 상대방이 약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너희 뒤로 처진 약한 사람들을 모두 뒤에서 공격했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행렬의 맨 뒤를 겨냥한 공격을 묘사합니다. 원문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라는 부분은 주어가 분명하게 다시 등장하지 않으므로 문장 연결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아말렉의 행동을 서술하고 있다는 문맥에 따라, 이 말은 아말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평가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라 — 잊지 말라는 명령이 남기는 긴장
마지막 절에서 모세는 아말렉에 관한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너희에게 몫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그분이 너희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시면,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려라. 잊지 마라.」신명기 25:19 · 두루새김
왜 안식을 얻은 뒤인가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은 지치고 기운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이 편히 쉬게 될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이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원수들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따라서 마지막 명령은 광야에서 약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이 즉시 복수하라는 식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땅을 주시고 편히 쉬게 하시는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지만 이 시점을 정해 놓았다는 사실만으로 명령의 가혹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편히 쉬게 된 뒤에 왜 아말렉의 기억을 없애야 합니까?
기억을 지우라는 말의 의미
놀랍게도 두 구절에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죽은 형제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 아말렉에 대한 기억은 하늘 아래에서 지워져야 합니다.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우라는 말은 단지 아말렉을 존경하지 말거나 그들의 잘못을 역사에서 비판하라는 뜻으로 줄여 읽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7:14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기억을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지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후 사무엘상 15:2–3에서는 아말렉을 공격하고 그들에게 속한 사람과 가축까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5:19의 표현은 후대 성경의 전개에서 아말렉이라는 집단을 없애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사무엘상 15장의 모든 구체적인 명령이 이미 신명기 25:19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신명기는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우라고 명령하지만, 그 실행 방식에 관한 세부 사항을 이 절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폭력에 대한 응답
약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공격한 폭력을 꾸짖는 명령이 어떻게 한 민족 집단을 없애는 일과 연결될 수 있습니까? 그 집단의 후손들까지 과거의 행동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집니까?
신명기 25장은 이 질문들에 대한 일반적인 윤리 이론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아말렉의 공격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행동으로 규정하고, 이스라엘에게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우라고 명령합니다. 그 명령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가리키고 하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만, 집단 전체를 없애는 방식의 도덕적 어려움까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현대 사회에서 특정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고 없애는 보편적인 명령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기억을 지워 버려라」는 말을 단순히 마음속의 악한 생각을 없애라는 영적 비유로만 바꾸어 읽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본문이 실제로 다루는 집단적 폭력과 심판의 문제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 명령의 가혹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폭력의 허가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본문을 책임 있게 읽기 위해 필요한 구별입니다.
지워 버리되 잊지 말라
기억을 지워 버리라고 하면서, 그 일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우라는 명령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명령은 직접적으로 논리적 모순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글의 표현으로는 강한 긴장을 남깁니다.
아말렉의 흔적은 지워야 합니다. 하지만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과 그것을 지우라는 명령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개인적인 감정만이 아닙니다. 공동체가 어떤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사건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결론 — 행렬의 맨 뒤에 있던 사람들
이 장은 누가 죄를 지었는지, 누구의 이름이 남아야 하는지, 무엇이 정확한 저울인지 묻다가 마지막에는 누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공격했는지 기억하도록 합니다. 죽은 형제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말렉에 대한 기억은 지워져야 합니다. 아말렉이 지치고 뒤처진 사람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마지막에 이스라엘을 다시 광야의 길로 데려갑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지쳐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운이 없어 행렬의 뒤로 처졌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을 아말렉이 공격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그 기억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승리한 군대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행렬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에 남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25장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가리킵니다.
지치고 기운이 없어 뒤로 처진 약한 사람들.
아말렉이 바로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