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29장
이 장의 자리 · 25–36장 · 이삭과 야곱
사랑받지 못한 여자를 보신 하나님
창세기 29장은 사랑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야곱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납니다. 그를 보자마자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치우고, 양과 염소에게 물을 먹입니다.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일곱 해를 일하지만, 그 시간이 며칠처럼 느껴질 만큼 그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결혼식 다음 날 아침, 야곱의 곁에 있는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얻기 위해 일했지만, 라반의 속임수로 사랑하지 않은 여자와 먼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두 자매를 아내로 맞아들이지만,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미움받는 레아의 처지를 보십니다.
우물가에서 시작된 새로운 만남
야곱은 동쪽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향합니다.
앞 장에서 그는 낯선 장소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나 목적지로 나아갑니다.
그가 도착한 곳에는 들판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양과 염소 세 무리가 누워 있었고, 우물 입구는 큰 돌로 덮여 있었습니다.
가축 떼가 모두 그곳에 모이면, 목자들은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치우고 양과 염소에게 물을 먹이곤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돌을 우물 입구의 제자리에 다시 놓았습니다.창세기 29:3 · 두루새김
우물 입구에 돌을 놓는 것은 물을 보호하고 접근을 관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곳에서 모든 떼가 모여야 했던 구체적인 이유나 규칙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있는 목자들에게 말을 겁니다. 그들은 하란에서 왔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라반을 알고 있었고, 마침 그의 딸 라헬이 양과 염소를 데리고 오고 있다고 알려 줍니다.
야곱은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으니 가축에게 물을 먹인 뒤 다시 풀을 뜯게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모든 떼가 모이고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치우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라헬이 도착하자 야곱은 직접 움직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외삼촌의 양과 염소를 보자, 다가가 우물 입구의 돌을 굴려 치웠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양과 염소에게 물을 먹였습니다.창세기 29:10 · 두루새김
본문은 그 순간 야곱의 속마음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소개하면서 라헬과 외삼촌 라반의 가축이라는 사실을 반복합니다.
야곱은 마침내 자신이 찾아온 친척과 연결되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오랫동안 찾아온 목적지에 거의 도달했다는 안도감과 기쁨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뒤이어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도 그런 읽기와 잘 어울립니다.
이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여행했던 창세기 24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에도 먼 길을 떠난 사람이 우물가에서 미래의 배우자가 될 여자를 만났습니다. 리브가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아브라함의 종과 낙타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24:15–20).
이번에는 역할이 다릅니다.
창세기 24장에서 리브가는 낯선 여행자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창세기 29장에서는 야곱이 라헬의 가축에게 물을 먹이며 호의를 베풉니다.
한편으로 우물은 가축에게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곳은 야곱이 친척을 만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앞선 장에서 야곱이 낯선 곳의 돌 하나를 세워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억했다면, 이번 장에서는 우물의 돌을 굴려 치운 행동이 새로운 인간관계의 시작과 연결됩니다.
입맞춤과 눈물 — 마침내 친족을 만나다
야곱은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창세기 29:11 · 두루새김
야곱이 왜 울었는지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 길을 무사히 와서 친척을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집을 떠난 뒤의 긴장과 외로움이 풀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라헬을 만난 기쁨도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라헬이 아버지에게 달려가 소식을 전하자 라반도 야곱을 만나러 달려옵니다.
라반은 누이의 아들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맞으러 달려갔습니다. 야곱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 뒤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이 모든 일을 이야기했습니다.창세기 29:13 · 두루새김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에게서 받은 선물을 가족에게 보여 주었을 때 라반이 달려 나왔던 것처럼(24:29–31), 이번에도 라반이 친척의 방문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옵니다. 그러나 이번 장에서는 야곱이 값비싼 선물이나 재물을 가지고 왔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두 이야기의 차이를 통해 라반의 동기를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정말 나와 한 핏줄이구나.」 야곱은 라반과 함께 한 달 동안 지냈습니다.창세기 29:14 · 두루새김
「나와 한 핏줄」이라는 표현은 서로 깊이 연결된 친척이라는 뜻입니다. 원문에서는 뼈와 살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창세기 2:23에서도 남자는 여자에 관하여 자기 뼈와 살이라고 말합니다. 두 문맥은 다르지만,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가까운 관계와 결속을 나타낸다는 점은 같습니다.
드디어 길 위의 나그네에게 머물 곳이 생겼습니다. 친척도 만났고, 자신을 반겨 주는 집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라반은 새로운 이야기를 꺼냅니다.
가족 사이의 환대가 이제 일과 대가의 문제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입맞춤 장면은 흔히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의 낭만적인 사랑으로 읽힙니다. 고대의 가족과 친척 사이에서 입맞춤은 반가움과 친밀함을 나타내는 인사였습니다. 조금 뒤 라반도 야곱을 맞으며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29:13). 따라서 11절의 입맞춤을 반드시 연인 사이의 낭만적인 행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곱 해가 며칠처럼 느껴진 사랑
라반은 야곱에게 말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내 친척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받지 않고 나를 위해 일해야 하겠느냐? 품삯으로 무엇을 받을지 말해 보아라.」창세기 29:15 · 두루새김
겉으로 보면 공정한 제안입니다.
라반은 자신이 대가를 주겠다고 먼저 말한 사람이지만, 나중에는 야곱이 기대한 대가를 약속대로 주지 않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두 사람을 소개하면서 외모를 비교합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습니다. 라헬은 몸매와 생김새가 아름다웠습니다.창세기 29:17 · 두루새김
여기서 레아의 눈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라코트(רַךְ)는 「부드러운」, 「연약한」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표현을 레아의 시력이 나빴다거나 외모에 결함이 있었다는 뜻으로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어만으로 그렇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눈매를 묘사하는 긍정적인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라반에게 말했습니다. 「외삼촌의 작은딸 라헬을 아내로 맞는 대가로, 외삼촌을 위해 7년 동안 일하겠어요.」창세기 29:18 · 두루새김
당시 결혼에는 신랑 쪽이 신부의 가족에게 재산이나 일의 형태로 대가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제안은 단순히 라헬을 얻기 위해 무작정 일하겠다는 개인적 결심이 아니라, 결혼에 필요한 대가를 일로 마련하겠다는 성격을 지닙니다.
물론 이것이 라헬을 물건처럼 소유한다는 뜻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설명하는 것은 당시 가족 사이에서 결혼을 의논하고 정하는 방식입니다.
라헬 자신은 이 거래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만, 라헬이 야곱을 사랑했는지, 그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이 장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레아의 결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딸은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지만, 실제로 결혼을 결정하는 대화에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라반이 말했습니다. 「그 아이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보다 너와 결혼시키는 것이 낫겠다. 나와 함께 지내거라.」창세기 29:19 · 두루새김
여기서 라반은 라헬을 야곱과 결혼시키겠다고 직접적이고 분명한 계약 문장으로 말하기보다, 다른 남자보다 야곱과 결혼시키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라반이 처음부터 속임수를 계획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야곱은 자신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이해하고, 그 대가로 일곱 해를 일합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려고 7년 동안 일했습니다.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7년이 며칠처럼 느껴졌습니다.창세기 29:20 · 두루새김
그에게 일곱 해 동안 일하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축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분을 빌려 속임수를 사용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일합니다.
이제 일곱 해가 지났습니다.
야곱은 약속된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 기대를 뒤집습니다.
아침이 되어 보니, 레아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야곱은 일곱 해를 다 채웠습니다. 라반은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풉니다. 이제 결혼이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라반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야곱에게 데려다줍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옵니다.
아침이 되어 보니 그 여자는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무슨 일을 하신 거예요? 제가 라헬과 결혼하려고 외삼촌을 위해 일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저를 속이셨어요?」창세기 29:25 · 두루새김
여기서 독자는 앞서 야곱이 아버지를 속였던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때 야곱은 형 에서의 옷을 입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나아갔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누구에게 축복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야곱 자신이 누구와 결혼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27장에서는 야곱이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9장에서는 야곱이 속임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볼 수 없다는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이번에는 라반이 야곱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벌을 주셨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라반의 속임수가 하나님이 직접 계획하신 형벌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의 구조가 두 사건을 나란히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한 속임수와 닮은 일을 이제 피해자의 자리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 속임을 당한 사람이 되어 「왜 저를 속이셨어요?」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은 정당합니다. 라반은 자신이 야곱에게 기대하게 만든 약속과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야곱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야곱을 단순히 악한 사람에서 선한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잡한 한 인간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가했던 것과 닮은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결혼 의식의 복장이나 관습이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레아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거나 야곱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 큰딸과 작은딸의 뒤바뀐 자리
라반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맏딸보다 작은딸을 먼저 결혼시키지 않는다.」창세기 29:26 · 두루새김
이삭의 집에서는 작은아들이 큰아들보다 먼저 축복을 받았습니다. 라반의 집에서는 큰딸이 작은딸보다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합니다. 물론 두 상황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아들들의 축복과 장자권이 문제였고, 여기서는 딸들의 결혼 순서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큰사람과 작은사람의 순서가 뒤집히거나 강조되는 구조는 독자가 놓치기 어려운 문학적 연결입니다.
그가 맏딸의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야곱이 처음 라헬과 결혼하기를 원했을 때 그 사실을 알려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곱 해 동안 일을 시킨 뒤, 이미 레아와의 결혼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라반의 말은 관습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가 야곱을 속였다는 사실을 없애 주지 않습니다.
야곱은 다시 일곱 해를 기다렸는가?
「레아의 결혼 잔치 기간인 일주일을 채워라. 그러면 우리가 라헬도 네 아내로 주겠다. 그 대신 나를 위해 7년을 더 일하여라.」창세기 29:27 · 두루새김
본문은 이어서 야곱이 레아의 결혼 잔치 기간인 일주일을 채웠고, 라반이 라헬도 야곱과 결혼시켰으며, 그다음 야곱이 또 일곱 해를 일했다고 기록합니다(29:28–30). 따라서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처음 일곱 해를 일하고, 다시 일곱 해를 다 일한 뒤에야 라헬과 결혼했다고 읽으면 순서가 달라집니다.
라반의 속임수는 야곱만을 곤란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레아는 자신을 원하지 않았던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라헬은 야곱이 자신을 위해 일곱 해를 기다렸는데도, 언니가 먼저 그와 결혼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두 여자가 라반의 계획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그 계획에 동의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 갈등은 단순히 두 여자의 질투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앞서 두 자매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되도록 만든 아버지의 속임수와 결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사랑은 두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야곱은 라헬과도 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그는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고, 라반을 위해 7년을 더 일했습니다.창세기 29:30 · 두루새김
우리가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까지 자동으로 바르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사랑이 진실했다는 사실과 레아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라반의 「우리 고장에서는」이라는 말은 단순한 지역 관습 설명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시 결혼에서 맏딸이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관습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하란 전체에 반드시 그런 법이 있었음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확인되는 것은 라반이 그 관습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제시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셨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고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창세기 29:31 · 두루새김
이 한 절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야곱이 라헬을 보았을 때 그는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시고 행동하십니다.
히브리어 세누아(שָׂנֵא)는 미움받는 상태를 가리키는 강한 표현입니다. 바로 앞 절의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고」라는 상대적인 비교와는 다른 말입니다.
물론 히브리어에서 사랑과 미움이 대조될 때, 미움이 언제나 적극적인 적대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선택받고 다른 하나가 밀려나는 관계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레아의 상황을 단순히 남편에게 조금 덜 사랑받는 정도로 가볍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서 레아는 계속해서 남편의 사랑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는 아들을 낳고도 자신이 남편에게 가까이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처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레아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라반의 속임수를 직접 심판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레아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십니다.
원문에서는 이를 「태를 열었다」(פָּתַח)고 표현합니다. 두루새김은 그 뜻을 풀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앞서 나온,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사라와 리브가도 자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상황입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사랑을 받는 아내였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레아는 자녀를 낳지만 남편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합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받지만 자녀를 낳지 못합니다.
이 대조를 하나님의 상벌로 너무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레아가 아이를 낳았으므로 라헬보다 더 의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벌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에서 밀려난 사람의 처지를 보셨고, 그 사람을 통해 야곱의 후손이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나 좋아하는 대상에 따라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 상황 속에서 이어졌다는 사실은 라반의 행동을 옳은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잘못된 행동 속에서도 일하신다는 사실은, 그 행동이 옳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잘못에 가로막혀 끝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레아를 주어로 삼아 그가 임신하고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며, 먼저 여호와야훼께서 레아의 처지를 보셨다고 밝힙니다.
레아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름 없는 수단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신 사람이며, 하나님을 향해 말하는 사람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 네 이름에 담긴 레아의 변화
창세기 29장의 마지막 부분은 네 아들의 탄생을 기록합니다.
매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레아가 한 말을 기록하고, 그 말과 아이의 이름을 연결합니다. 그 이름들은 레아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 —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구나」
레아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내 괴로움을 보셨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구나.」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9:32 · 두루새김
르우벤이라는 이름은 「보라, 아들이다」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본문은 특별히 하나님이 보셨다는 레아의 말과 그 이름을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보셨다는 사실이 이제 레아 자신의 고백이 됩니다.
레아에게 아들의 탄생은 기쁜 일이지만, 그 기쁨은 아직 남편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을 품에 안으며 야곱이 이제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그 기대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아들을 낳았을 때도 레아는 여전히 자신이 미움받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 — 「여호와야훼께서 내가 미움받는다는 것을 들으셔서」
레아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내가 미움받는다는 것을 들으셔서 내게 이 아들도 주셨구나.」 레아는 아이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습니다.창세기 29:33 · 두루새김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듣다」와 연결됩니다. 레아는 단순히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이름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증언하지만, 그 이름을 짓는 어머니의 말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현실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레아가 원하는 모든 관계가 즉시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셋째 아들 레위 — 「이번에는 남편이 나와 가까워지겠구나」
레아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했습니다. 「내가 남편에게 아들을 셋이나 낳아 주었으니, 이번에는 남편이 나와 가까워지겠구나.」 그래서 그 아이는 레위라고 불렸습니다.창세기 29:34 · 두루새김
레위라는 이름은 「붙다」, 「연결되다」와 소리로 연결됩니다. 그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남편과의 관계가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당시 가족 안에서 아들을 낳는 일은 여성의 위치와 안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여성의 삶에서 똑같이 작용했다거나, 자녀를 많이 낳으면 반드시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기뻐하는 마음과 그 선물을 통해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는 기대가 함께 존재합니다. 이것은 레아의 신앙이 부족하다는 단순한 평가보다, 그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넷째 아들이 태어나면서 레아의 말이 달라집니다.
넷째 아들 유다 — 「이번에는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다」
레아는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그 뒤로 레아는 한동안 아이를 낳지 않았습니다.창세기 29:35 · 두루새김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하다」, 「감사하다」와 소리로 이어집니다. 레아는 여기서도 「이번에는」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아들을 낳을 때에도 그는 「이번에는」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기대는 남편을 향했습니다.
문장의 중심이 바뀝니다.
레아의 말에서 처음으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는 기대가 앞에 나오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중심이 됩니다. 레아가 이제 남편의 사랑을 완전히 포기했다거나,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0장에서는 레아와 라헬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레아 역시 자신의 처지를 두고 다시 말을 합니다.
「한동안 아이를 낳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은 레아가 영원히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뒤에 다시 아이를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30:17–21). 여기서는 네 아들의 탄생을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마무리합니다.
조금 더 깊이
34절의 히브리어는 앞에서 레아가 말했다는 여성 주어를 사용한 뒤, 이름을 지었다는 동사는 남성 단수형으로 기록합니다. 따라서 야곱이 이름을 지었다고 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주어가 분명히 적혀 있지 않으므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49:8–12에서 야곱은 유다를 향해 형제들의 찬양과 다스리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후 다윗 왕가도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룻기 4:18–22).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계보에서도 유다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마태복음 1:2–3). 이것은 뒤에 기록된 성경에서 이어지는 연결이며, 창세기 29장 자체가 레아에게 그 모든 미래를 알려 주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다」
사랑받는 라헬을 따라 시작된 이야기가, 마지막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행동을 알아보고, 자신이 받은 선물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네 아들의 이름은 그 목소리를 다음 세대에 남깁니다.
레아는 아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이 자신의 괴로움을 보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을 품에 안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를 찬양하겠다.」
그의 결혼생활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레아는 자신의 아들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남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