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잘못된 가르침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진리와 삶
디도서는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라는 지시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크레타에 남겨 둔 디도에게 도시마다 장로들을 세우라고 명하고, 그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데 편지를 찬찬히 읽어 보면, 지도자의 자격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약속하신 생명을 말하고, 그 약속을 정하신 때에 선포로 드러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지도자의 자격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처음과 끝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분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놓인 장로의 자격은 단순한 교회 운영 지침이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맡겨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을 맡은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장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을 맡아 돌보는 감독」이라고 부릅니다(1:7). 그런데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여러 집안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1:11). 원문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집안 살림을 맡은 사람에 비유됩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집을 돌보도록 부름받고, 다른 쪽은 사람들의 집을 무너뜨립니다.
디도서 1장은 진리와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교회의 가장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보여 줍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
바울은 왜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하는가
나는 하나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입니다. 내가 사도로 맡은 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믿음을 돕고,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맞는 진리를 알도록 돕는 것입니다.디도서 1:1 · 두루새김
이 인사는 디도서 전체의 방향을 정해 줍니다.
「하나님의 종」은 단순히 어떤 일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에게 속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스스로를 낮추는 동시에 자신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힙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은 그의 소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표현은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권위를 지니는 까닭은 자신이 독립적인 권력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다른 분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가 세우라고 명하는 지도자 역시 자기 뜻을 밀어붙이는 지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에게도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맡은 일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맞는 진리」를 알도록 돕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단순히 옳은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진리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맞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진리를 바르게 안다는 사람의 삶이 그 진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성품의 결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할 이유가 됩니다.
1장의 마지막에서 거짓 교사들이 바로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는가
이 일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이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디도서 1:2 · 두루새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지금 복음의 선포를 통해 알려지고 있지만, 그 약속의 시작은 인간이 시간을 헤아릴 수 있는 역사보다 앞서 있습니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는 시간의 아주 먼 과거를 가리키는 표현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막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신 그 약속은 누구에게 하신 것입니까? 본문은 약속의 상대방을 밝히지 않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약속이 누구에게 처음 전달되었는지가 아니라 그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 특별합니다.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인간의 약속에는 언제나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약속한 사람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약속을 지킬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은 인간의 확신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망은 불확실한 미래를 그저 좋게 바라보는 마음이 아닙니다.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기다리지만, 그것을 약속하신 분이 거짓말하지 않으시기에 신뢰할 수 있는 기다림입니다.
영원한 약속은 어떻게 역사 속에 들어왔는가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선포를 통해 자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 구원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디도서 1:3 · 두루새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자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역사 속으로 들어옵니다. 「선포」는 선포하는 행위뿐 아니라 선포된 내용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장대한 하나님의 역사 끝에 등장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맡겨진 구체적인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사람을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십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사도직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사용하는 권리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말씀을 충실하게 전해야 할 책임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도 자신이 만들어 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보다 앞서 주어진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과 디도의 관계는 무엇에 기초하는가
같은 믿음을 나누는 나의 참된 자녀 디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디도서 1:4 · 두루새김
디도는 바울이 낳은 자녀가 아닙니다. 바울이 그를 자녀로 부르는 근거는 「같은 믿음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바울은 사도이고 디도는 그에게 지시를 받는 동역자입니다. 그러나 그 역할의 차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두 사람이 같은 믿음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높은 인간적 신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도로서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사에는 두 호칭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3절에서는 「우리 구원자 하나님」, 4절에서는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바울이 선포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서로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바깥에 계신 분이 아니라, 그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심에 계신 분입니다.
디도가 크레타에서 감당해야 할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고, 지도자를 세우며, 잘못된 교사들에게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을 시작하라고 명령하기 전에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그 모든 일의 출발점은 디도의 능력이나 결단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원문은 사도직과 믿음, 진리를 아는 것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합니다. 바울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음과 진리를 아는 마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읽기가 가능하며, 그 믿음과 진리에 맞는 사도직이라는 의미도 논의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의 직무가 공동체의 믿음과 진리를 아는 일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절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특정한 상대와 어떤 대화를 나누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민수기 23:19는 하나님을 사람처럼 거짓말하거나 약속을 뒤집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는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복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며, 디도서는 그와 주제적으로 연결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적용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2:1–3은 디도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갔고, 그리스 사람인 그가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이 사실은 디도서가 할례와 관련된 잘못된 가르침을 문제 삼는 장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 편지의 반대자들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루어진 사람들과 동일한 집단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림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바로잡으라는 명령
내가 디도를 크레타에 남겨 둔 이유는 아직 부족한 것을 바로잡고, 내가 지시한 대로 도시마다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도서 1:5 · 두루새김
크레타의 교회들에는 여전히 정리하고 갖추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끌 지도자들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모든 일을 직접 통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각 도시에 책임을 맡을 사람들을 세우라고 합니다. 복음이 바울이나 디도 한 사람의 활동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이 각 공동체 안에서 계속 가르쳐지고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시마다」라는 표현은 그 사역의 구체성도 보여 줍니다. 복음은 실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갈등하고, 배우고, 서로의 삶을 돌보는 공동체 안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장로입니다.
왜 지도자의 자격은 그의 가정에서 시작되는가
장로로 세울 사람은 나무랄 데가 없고, 한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이어야 합니다. 자녀들도 믿는 사람이어야 하며, 제멋대로 산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반항하지 않아야 합니다.디도서 1:6 · 두루새김
바울은 설교 능력이나 성경 지식부터 말하지 않습니다. 나무랄 데 없는 삶, 배우자와의 관계, 자녀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당시 가정은 오늘날의 핵가족보다 넓은 사회적 단위일 수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배우자와 자녀뿐 아니라 다른 친족, 그 집에 속해 일하는 사람들, 때로는 그 집을 통해 생계를 이어 가는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집에서 드러나는 삶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책임을 감당하는지를 보여 주는 자리였습니다.
다만 이것을 가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나무랄 데가 없고」는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가 그 사람의 성품과 행동에 관하여 중대한 비난을 제기할 만한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은 직역하면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뜻으로, 배우자에게 충실한 사람이라는 윤리적 표현으로도, 재혼이나 여러 혼인 관계에 관한 제한으로도 읽힙니다. 이 표현만으로 모든 혼인 상황에 대한 세부 규정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지도자의 친밀한 관계와 가정생활에서 충실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자녀들이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표현도 두 가지로 읽힙니다. 원문의 피스타(πιστός)는 믿음을 지닌다는 뜻으로도, 충실하고 믿음직하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바로 뒤에 제멋대로 사는 것과 반항이 언급된다는 점은 자녀들의 실제 행동을 살펴야 한다는 읽기를 뒷받침하고, 목회서신에서 믿음을 뜻하는 다른 쓰임들은 신앙 자체를 요구한다는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본문은 어느 읽기만을 논쟁의 여지 없이 확정할 만큼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자녀가 신앙을 떠나는 모든 경우를 무조건 부모의 실패로 판정하거나, 반대로 자녀의 신앙과 행동을 지도자의 자격과 전혀 관계없는 일로 처리하는 것은 모두 본문의 긴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은 지도자의 삶이 공동체 앞에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가르침과 사적인 삶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서는 안 됩니다.
장로는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 돌보는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고집만 내세우거나 쉽게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술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폭력을 쓰거나 부끄러운 방법으로 돈을 벌려 해서도 안 됩니다.디도서 1:7 · 두루새김
여기서 바울은 갑자기 「장로」 대신 「감독」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7절은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6절의 자격을 설명하므로, 이 문맥에서는 장로로 세울 사람의 책임을 감독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것만으로 후대 교회의 모든 직분 체계와 그 발전 과정까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 돌보는」으로 풀어 옮긴 말은 원문에서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로, 집안의 살림이나 재산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집을 소유한 사람과 그 집을 관리하는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교회는 지도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가 맡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권한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이나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사용할 권리가 없습니다. 바울이 바로 다음에 자기 고집과 분노와 폭력과 돈에 대한 욕심을 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목록은 모두 권한을 잘못 사용하는 방식과 연결될 수 있는 성향들입니다.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만 옳다고 여깁니다.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다룰 때 자기 감정을 앞세웁니다. 폭력을 쓰는 사람은 관계에서 힘을 수단으로 삼고, 부끄러운 방법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은 맡겨진 책임을 사적인 이익을 얻는 기회로 바꿉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맡는다면, 그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사람들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권한을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는 권력처럼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에게 사람을 맡겼을 때 그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겠는가입니다.
지도자의 선함은 다른 사람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선한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중하게 판단하고 바르게 살며 하나님께 충실하고, 자신의 욕심과 행동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디도서 1:8 · 두루새김
7절이 피해야 할 성향을 말했다면, 8절은 갖추어야 할 성품을 말합니다. 자기 뜻을 앞세우고 자기 이익을 탐하는 사람과 달리,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공간과 자원을 다른 사람에게 열어 줍니다. 집안 살림을 맡은 사람이라는 비유로 보면, 그가 맡은 집은 자기만 편안하게 지내기 위한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집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돌보는 장소여야 합니다.
선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단지 나쁜 행동을 피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좋은 것을 기뻐하고 추구합니다. 신중하게 판단하고 자신의 욕심과 행동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과 관련되고, 바르게 살며 하나님께 충실한 것은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장로가 먼저 남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추라고 하지 않고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았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 아래 두어야 할 더 큰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 자격은 말씀을 붙드는 것인가
배운 가르침에 맞는 믿을 만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격려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잘못도 드러낼 수 있습니다.디도서 1:9 · 두루새김
여기서 비로소 지도자의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앞의 자격들이 중요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핀 성품들이 무엇을 위해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라는 말은 믿을 만한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놓지 않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나 개인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배운 가르침에 맞는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장로에게 두 가지 일을 요구합니다. 바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자라도록 돕는 것과 사람들을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가르침을 바로잡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집을 돌보는 일에 속합니다.
「바른 가르침」(ὑγιαίνω)으로 옮긴 표현은 본래 건강한 상태에 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단지 논리적으로 흠이 없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을 건강하게 세우는 가르침입니다.
크레타에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말과 정반대의 말들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크레타 사역에 대해 본문은 그 공동체들이 정확히 언제 세워졌고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바울이 크레타를 지나가는 항해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여행에서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그 항해를 여기서 언급하는 크레타 사역과 곧바로 같은 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목회서신의 저자 문제에는 전통적인 바울 저작설과 후대에 바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저자가 썼다는 견해가 있으며, 디도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때 이 차이를 고려해야 합니다. 7절에서는 5절의 복수형 장로들과 달리 단수형 감독이 쓰였지만, 적어도 디도서 1장에서 두 명칭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르침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반항하며 헛된 말을 늘어놓고 사람들을 속이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할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을 가르치며 여러 집안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디도서 1:10–11 · 두루새김
앞에서 길게 설명한 장로의 자격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인물상이 아니었습니다. 크레타의 공동체에는 실제로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분별하고 바로잡을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반항하며」(ἀνυπότακτος)라는 표현은 6절의 「반항하지 않아야 합니다」와 원문에서도 같은 계열의 말입니다. 6절에서는 지도자로 세워질 사람의 집안이 제멋대로인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10절에서는 정작 공동체 안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반항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자신의 삶과 집안을 책임 있게 돌보는 사람이, 다른 쪽에는 가르침의 권위를 행사하면서도 자신은 올바른 질서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유대적 종교 요소가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모든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그 가운데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며 공동체를 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14–15절을 통해 일부 짐작할 수 있지만, 하나의 완전한 교리 체계로 재구성할 만큼 정보가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7절에서 감독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관리인이었습니다. 11절의 잘못된 교사들은 「여러 집안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두 표현이 완전히 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11절의 집안은 실제 가정이나 가정 단위의 신앙 공동체를 포함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대조는 분명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맡겨진 사람들의 삶을 세웁니다. 잘못된 교사는 사람들의 삶을 흔들고 무너뜨립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가르칩니다. 가르침이 사람을 위한 섬김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에 같은 요구가 들어 있었던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는 그들이 가르쳐서는 안 될 내용을 퍼뜨리는 일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강한 명령입니다. 이를 곧바로 폭력이나 강제로 침묵시키는 일을 허용하는 지시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9절에서 바울이 요구한 대응은 믿을 만한 말씀을 붙들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그 단호함 자체가 지도자의 고집이나 폭력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러한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을 권한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사람에게 맡겨집니다.
거짓말쟁이들의 땅에서 진리를 말한다는 것
바울은 왜 크레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는가
크레타 사람 가운데 한 사람, 곧 그들 자신의 예언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이며, 악한 짐승이며, 게으른 먹보들이다.」디도서 1:12 · 두루새김
디도서 1장에서 가장 불편한 구절입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라고 말한 사람 자신도 크레타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논리학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독자들에게 익숙했을 수 있는 크레타 사람들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를 인용하여 공동체가 겪고 있는 도덕적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 사람들 전체를 거짓말쟁이, 악한 짐승, 게으른 먹보로 묘사하는 것은 민족적·지역적 고정관념을 담은 공격적인 말입니다. 본문에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실제 고대 크레타 사람들 전체가 그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바울은 다음 절에서 이 증언이 사실이라고 말하므로, 이 거친 판단을 없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실제로 집단 전체를 강하게 비난하며 그것을 크레타 공동체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다만 그 표현의 목적과 적용 범위를 살피지 않은 채 모든 크레타 사람의 본성에 관한 객관적인 판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습니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크레타의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는 평가 아래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진실하심에서 나오지만, 그 말씀이 선포되는 세상에는 거짓된 말과 속이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거짓말쟁이라는 평판을 가진 사회에서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을까요?
엄하게 꾸짖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증언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이 바로 서도록 엄하게 꾸짖으십시오. 그들이 유대 사람들의 꾸며 낸 이야기나 진리에서 돌아선 사람들의 명령에 마음을 쏟지 않게 하십시오.디도서 1:13–14 · 두루새김
「믿음이 바로 서도록」이라는 짧은 말이 꾸짖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꾸짖음은 상대방을 이기거나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에서 돌아서서 믿음이 바로 서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9절의 「바른 가르침」과 13절의 「믿음이 바로 서도록」에는 원문에서 같은 건강의 이미지가 가르침과 믿음에 각각 적용됩니다. 바른 가르침은 교리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린 사람들이 다시 건강한 믿음으로 돌아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몸에 병이 생겼을 때 올바른 진단이 필요한 이유는 환자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침을 분별하는 일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죄인으로 몰아가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놓치면 지도자의 단호함은 쉽게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심으로 변합니다. 바울이 지도자의 자격에서 자기 고집과 분노를 경계했던 이유도 여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유대 사람들의 꾸며 낸 이야기」와 「진리에서 돌아선 사람들의 명령」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진리 대신 다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규정에 더 큰 권위를 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전하는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가르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진리에서 떠나 있습니다.
처음에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맞는 진리」를 알도록 돕는 일을 말했습니다. 이제 진리에서 돌아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규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르침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멀어지고, 사람을 통제하는 규정으로 변질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인용은 고대 크레타 출신 인물 에피메니데스와 연결되어 왔고,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고대 시인 칼리마코스의 작품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고대 문헌에서 전해진 내용과 후대에 기록된 출처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인용문 전체가 정확히 어느 작품에서 나왔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은 흔히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연결되어 논의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곧바로 완전한 논리적 모순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거짓말쟁이’를 모든 말이 예외 없이 거짓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역설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함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말의 뜻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러워지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과 양심까지 더러워져 있습니다.디도서 1:1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앞뒤 흐름에서 떼어 내면 모든 행동이 허용된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앞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적 명령과 잘못된 가르침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 흐름에서 15절은 무엇이 깨끗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깨끗함의 문제를 뒤집어 놓습니다.
문제는 어떤 음식을 먹거나 무엇을 만졌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마음과 양심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더러운지 잘 판단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믿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양심 자체가 더러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익, 잘못된 가르침에 오래 영향을 받으면 판단 자체가 비뚤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규칙을 지키는지 엄격하게 판단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탐욕과 거짓말에는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깨끗함을 판정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정작 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생각과 양심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규칙이 전혀 필요 없다는 주장도, 각 사람이 자기 양심에 옳다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양심조차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끊임없이 점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깨끗함을 결정하는 최종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
디도서 1장은 다음의 고발로 마무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역겹고 불순종하며, 어떤 선한 일에도 알맞지 않은 사람들입니다.디도서 1:16 · 두루새김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맞는 진리」를 알도록 돕는 일을 말했습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을 아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앎이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고백과 하나님을 대하는 실제 태도가 따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불순종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깨끗한지 가르치면서, 자신의 생각과 양심은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권위를 주장하면서, 부끄러운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고 사람들의 집안을 무너뜨립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장로가 「선한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명했습니다(1:8).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떤 선한 일에도 알맞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두 집단의 차이는 결국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일을 행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 표현은 뒤에서 디도서가 선한 일을 거듭 강조하게 되는 방향을 미리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선언했고, 그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 구원자」로 고백하는 믿음 안에서 받아들여집니다. 선한 일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그분의 진리를 알고 믿는 삶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갖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에 놓입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거짓된 삶과 계속 어울릴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유대교의 율법에는 음식과 몸의 상태, 예배와 관련된 정결 규정이 있었고, 이는 레위기 11–15장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를 처음부터 뜻없는 인간의 규칙이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이 규정들은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디도서가 문제 삼는 것은 사람들이 종교적 규정에 기대어 자신을 깨끗하다고 여기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크레타 공동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규정이 강요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14절의 유대적 요소와 15절의 깨끗함에 관한 말을 연결하면 음식이나 종교 의식의 정결에 관한 규정이 문제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널리 제시되는 해석이지만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7:1–23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밖에서 들어가는 것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에 있다고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전통을 앞세우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막 7:6–13). 디도서 1:14–15는 마가복음 7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두 본문은 인간의 규정과 마음속의 깨끗함을 대조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디도서 1장이 보여 주는 복음과 공동체의 관계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서 시작한 1장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거짓되게 사는 사람들로 끝납니다. 그 사이에서 교회의 지도력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에서 출발하고, 그분의 말씀을 충실하게 맡아 돌보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구원자의 말씀을 맡은 사람입니다.
바울에게는 사도의 권위가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디도에게는 장로를 세우고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었지만, 그 또한 바울과 같은 믿음을 나누는 자녀였습니다. 장로들에게는 공동체를 가르칠 권한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맡아 돌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맡은 책임 때문에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삶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서로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이 질문은 공식적인 직분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사람, 가정에서 책임을 맡은 사람, 다른 이들의 신뢰를 받는 사람에게도 본문은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맡은 사람입니까?
1장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다른 모습의 사람도 있습니다.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선한 것을 사랑하고, 자신의 욕심과 행동을 다스리며, 믿을 만한 말씀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 그 집을 맡긴 분의 뜻에 따라 돌봅니다. 크레타의 여러 도시에 그러한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이 바울이 디도에게 남긴 명령이었습니다.
거짓된 말이 사람들의 집안을 무너뜨리는 곳에서,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 사람들이 다시 집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