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잘못된 가르침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진리와 삶

디도서는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라는 지시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크레타에 남겨 둔 디도에게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라고 명하고, 그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데 편지를 찬찬히 읽어 보면, 지도자의 자격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에 약속하신 생명을 말씀하고, 그 약속을 알맞은 때에 선포로 드러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지도자의 자격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처음과 끝이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분인데, 그분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놓인 장로의 자격은 단순한 교회 운영 지침이 아닙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맡겨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을 맡은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장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이」라고 부릅니다(1:7). 그런데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여러 집안을 통째로 뒤엎습니다」(1:11).

한쪽은 하나님의 집을 돌보도록 부름받고, 다른 쪽은 사람들의 집을 무너뜨립니다.

이 대조를 발견하면 디도서 1장의 여러 권면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누구에게 권한을 줄 것인가의 문제는 곧 누구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맡길 것인가의 문제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는 그 가르침이 사람들의 삶에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의 문제입니다.

디도서 1장은 진리와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교회의 가장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

디도서 1:1–4 본문 →

바울은 왜 자신을 하나님의 노예라고 소개하는가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노예이며 하나님께서 뽑으신 이들의 믿음에, 그리고 경건에 부합하는 진리를 아는 것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입니다.디도서 1:1 · 본디새김

이 인사는 디도서 전체의 방향을 정해 줍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의 노예」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어떤 일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에게 속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스스로를 낮추는 동시에 자신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힙니다.

바울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소유하신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곧이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노예라는 표현은 그의 소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표현은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드러냅니다. 이 둘은 대조되는 신분이 아니라 서로를 설명하는 신분입니다. 바울이 권위를 지니는 까닭은 자신이 독립적인 권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분의 권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뒤에서 장로의 자격을 설명할 때 중요해집니다.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노예라면, 그가 세우라고 명하는 지도자 역시 자기 뜻을 관철하는 지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에게도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자신의 사도됨을 「하나님께서 뽑으신 이들의 믿음」과 「경건에 부합하는 진리를 아는 것」에 연결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단순히 옳은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경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삶과 부합합니다.

따라서 진리를 바르게 안다는 사람의 삶이 그 진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인격적 결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할 이유가 됩니다.

1장의 마지막에서 거짓 교사들이 바로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는가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더욱 먼 시간의 지평에 놓습니다.

이 사도됨은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바탕을 둡니다. 그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디도서 1:2 · 본디새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지금 복음의 선포를 통해 알려지고 있지만, 그 약속의 시작은 인간이 시간을 헤아릴 수 있는 역사보다 앞서 있습니다. 「영원한 때 전에」는 시간의 아주 먼 과거를 가리키는 표현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막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자연스러운 질문이 따라옵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은 누구에게 하신 것입니까?

본문은 약속의 상대방을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특정한 상대와 어떤 대화를 나누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약속이 누구에게 처음 전달되었는지가 아니라, 그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식어가 특별합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이 참되다고 말하지 않고, 그분이 거짓을 말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민수기 23:19는 하나님을 사람처럼 거짓말하거나 약속을 번복하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는 발람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복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며, 디도서는 그와 주제적으로 연결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적용합니다.

인간의 약속에는 약속한 사람의 마음이 변하거나 지킬 능력이 부족할 수 있는 불확실성이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은 인간의 확신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망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약속하신 분이 거짓이 없으시기에 신뢰할 수 있는 기다림입니다.

영원한 약속은 어떻게 역사 속에 들어왔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알맞은 때에 자신의 말씀을 선포로써 드러내셨습니다. 그 선포는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름 아닌 나에게 맡겨졌습니다.디도서 1:3 · 본디새김

2절과 3절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룹니다. 영원한 때 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이, 알맞은 때에 자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역사 속으로 들어옵니다.

「선포」는 선포하는 행위뿐 아니라 선포된 내용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장대한 하나님의 역사 끝에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에게」 맡겨진 구체적인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사람을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십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사도직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사용하는 권리가 아니라, 맡겨진 말씀을 충실하게 전해야 할 책임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도 자신이 만들어 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보다 앞서 주어진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과 디도의 관계는 무엇에 기초하는가

우리가 함께 지닌 믿음에 비추어 참된 자녀인 디도에게 나 바울이 이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디도서 1:4 · 본디새김

디도는 바울의 육신의 자녀가 아닙니다. 바울이 그를 자녀로 부르는 근거는 「우리가 함께 지닌 믿음」입니다.

바울은 사도이고 디도는 그에게 지시를 받는 동역자입니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역할의 차이가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두 사람이 같은 믿음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더 높은 인간적 신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도로서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이며, 디도 역시 바울과 함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인사의 마지막에는 두 호칭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3절에서는 「우리 구원자 하나님」, 4절에서는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바울이 선포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이 서로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바깥에 계신 분이 아니라, 그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심에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도에게 일을 시작하라고 명령하기 전에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디도가 크레타에서 감당해야 할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고, 지도자를 세우며, 잘못된 교사들에게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출발점은 디도의 능력이나 결단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바로 그 은혜가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그리스어 문장은 사도직과 믿음, 진리를 아는 것의 관계를 비교적 압축적으로 표현합니다. 바울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음과 진리의 인식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읽기가 가능하며, 그 믿음과 진리에 부합하는 사도직이라는 의미도 논의됩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의 직무가 공동체의 믿음과 진리를 아는 일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한편 갈라디아서 2:1–3은 디도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갔고, 그리스 사람인 그가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이 사실은 뒤에서 디도서가 할례와 관련된 잘못된 가르침을 문제 삼는 장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 편지의 반대자들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루어진 사람들과 동일한 집단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림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디도서 1:5–9 본문 →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바로잡으라는 명령

그대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바로잡고,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그대로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도록 나는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두었습니다.디도서 1:5 · 본디새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바로잡고」라는 말은 크레타의 교회들에 여전히 정비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그 공동체들이 정확히 언제 세워졌고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알려 주지 않지만, 서술 자체는 분명합니다. 크레타의 신앙 공동체에는 믿음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끌 지도자들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를 바로잡는 첫 번째 방법으로 장로들을 세우라고 합니다. 디도에게 모든 일을 직접 통제하라고 하지 않고, 각 성읍에 책임을 맡을 사람들을 세우라고 합니다. 복음이 바울이나 디도 한 사람의 활동에만 의존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이 각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가르쳐지고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읍마다」라는 표현은 그 사역의 구체성도 보여 줍니다. 복음은 추상적인 사상으로만 남을 수 없습니다. 실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갈등하고, 배우고, 서로의 삶을 돌보는 공동체 안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장로입니다.

왜 지도자의 자격은 그의 가정에서 시작되는가

세울 사람은 나무랄 데가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믿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자녀들은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되고, 반항적이어서도 안 됩니다.디도서 1:6 · 본디새김

바울은 설교 능력이나 성경 지식부터 말하지 않습니다. 나무랄 데 없는 삶, 배우자와의 관계, 자녀의 삶을 먼저 살핍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 가정은 오늘날의 핵가족보다 넓은 사회적 단위일 수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배우자와 자녀뿐 아니라 다른 친족, 종속된 사람들, 때로는 그 집의 생계에 연결된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집에서 드러나는 삶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책임을 감당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다만 이것을 가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나무랄 데가 없다」는 표현도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가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에 관하여 중대한 비난을 제기할 만한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 역시 해석상 논의가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스어 미아스 귀나이코스 아네르를 직역하면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배우자에게 신실한 사람이라는 윤리적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재혼이나 복수의 혼인 관계에 관한 제한으로 읽기도 합니다. 이 표현만으로 모든 혼인 상황에 대한 세부 규정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지도자의 친밀한 관계와 가정생활에서 신실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믿는 자녀」라는 표현에도 번역상 갈림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피스타(πιστός)는 믿음을 지닌다는 뜻으로도, 신실하고 믿음직하다는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바로 뒤에 방탕과 반항이 언급된다는 점은 자녀들이 신뢰할 만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읽기를 뒷받침하고, 목회서신에서 믿음을 뜻하는 용례들은 자녀들의 그리스도인 신앙 자체를 요구한다는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본문은 어느 읽기만을 논쟁의 여지 없이 확정할 만큼 상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자녀가 신앙을 떠나는 모든 경우를 무조건 부모의 실패로 판정하는 것도, 자녀의 신앙과 행실을 지도자의 자격과 전혀 관계없는 일로 처리하는 것도 본문의 긴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은 지도자의 삶이 공동체 앞에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공적인 가르침과 사적인 삶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서는 안 됩니다.

장로는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입니다

7절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이로서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독선적이지 않고, 쉽게 화내지 않고, 술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고,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디도서 1:7 · 본디새김

5절에서는 복수형인 장로들이 등장하고, 7절에서는 단수형인 감독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7절은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6절의 자격을 설명하므로, 이 문맥에서는 장로로 세울 사람의 책임을 감독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디도서 1장에서 두 명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지만, 이것만으로 후대 교회의 모든 직제와 그 발전 과정까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감독이라는 명칭에 덧붙인 「하나님의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말은 집안의 살림이나 재산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집을 소유한 사람과 그 집을 관리하는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교회는 지도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가 맡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권한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나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사용할 권리가 없고, 맡겨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이 바로 다음에 독선과 분노와 폭력과 탐욕을 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목록은 지도자의 개인적인 결점을 무작위로 열거한 것이 아니라, 모두 권한을 잘못 사용하는 방식과 연결될 수 있는 성향들입니다.

독선적인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합니다. 쉽게 분노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다룰 때 자기 감정을 앞세웁니다. 폭력적인 사람은 관계에서 힘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부정한 이득을 탐하는 사람은 맡겨진 책임을 사적인 이익을 얻는 기회로 바꿉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맡는다면, 자신이 돌보아야 할 사람들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권한을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는 권력처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도자의 능력에 앞서 그의 성품을 살핍니다.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에게 사람을 맡겼을 때 그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겠는가입니다.

지도자의 선함은 다른 사람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7절이 피해야 할 성향을 말했다면, 8절은 갖추어야 할 성품을 말합니다.

오히려 손님을 잘 맞이하고, 선한 것을 사랑하고, 분별이 있고, 의롭고, 거룩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디도서 1:8 · 본디새김

먼저 등장하는 덕목은 손님을 잘 맞이하는 태도입니다. 자기 뜻을 앞세우고 자기 이익을 탐하는 사람과 달리, 손님을 환대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공간과 자원을 다른 사람에게 열어 줍니다. 장로가 하나님의 살림을 맡은 사람이라면, 그가 맡은 집은 자기만의 안락함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받아들이고 돌보는 장소여야 합니다.

뒤따르는 덕목들도 그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단지 악행을 피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좋은 것을 기뻐하고 추구합니다. 분별력과 절제는 자신을 다스리는 능력과 관련되고, 의로움과 거룩함은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장로에게 남을 다스리는 능력보다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권위를 행사할 사람은 먼저 자기 욕망과 분노에 끌려다니지 않아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1절의 「하나님의 노예」와 7절의 「하나님의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이」가 만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았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 아래 두어야 할 더 큰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 자격은 말씀을 붙드는 것인가

건전한 가르침으로 권하고 말로 맞서는 이들을 논박할 수 있도록, 가르침에 부합하는 믿음직한 말씀을 붙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디도서 1:9 · 본디새김

여기서 비로소 지도자의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앞의 자격들이 중요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놓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에서 살핀 성품들이 무엇을 위해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붙드는」이라는 말은 잠시 기억하거나 필요할 때 이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말씀에 지속적으로 밀착하여 그것을 놓지 않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나 개인적인 통찰이 아니라 「가르침에 부합하는 믿음직한 말씀」이며, 이 말씀이 지도자의 신앙과 가르침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바울은 장로에게 두 가지 일을 요구합니다. 건전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권하는 일과, 그 가르침에 맞서는 사람들을 논박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자라도록 돕는 것과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가르침을 바로잡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집을 돌보는 일에 속하는, 같은 책임의 두 측면입니다.

「건전한」(ὑγιαίνω)으로 옮긴 말은 본래 건강한 상태에 있다는 의미를 지니며, 여기서는 가르침에 적용되었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단지 논리적으로 흠이 없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을 건강하게 세우는 가르침입니다.

바로 다음 단락에서 바울은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설명합니다. 크레타에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말과 정반대의 말들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27장에는 바울이 크레타를 지나가는 항해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여행에서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그 항해를 5절이 언급하는 크레타 사역과 곧바로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목회서신의 저자 문제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전통적인 바울 저작설과 후대 바울 전승을 계승한 저자의 작품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디도서의 역사적 배경을 재구성할 때 이 차이를 고려해야 합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르침

디도서 1:10–11 본문 →

반항적이며 헛된 말을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할례받은 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을 가르치며 여러 집안을 통째로 뒤엎습니다.디도서 1:10–11 · 본디새김

10절은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앞 내용과 이어집니다. 앞에서 길게 설명한 장로의 자격은 현실과 무관한 이상적인 인물상이 아닙니다. 크레타의 공동체에는 실제로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분별하고 바로잡을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신학적인 견해 차이가 아닙니다.

「반항적」(ἀνυπότακτος)이라는 표현은 6절에서 장로의 자녀에게 사용된 것과 같은 계열의 그리스어 낱말입니다. 6절에서는 지도자로 세워질 사람의 집안이 무질서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10절에서는 정작 공동체 안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반항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자신의 삶과 집안을 책임 있게 돌보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는 가르침이라는 권위를 행사하면서도 자신은 올바른 질서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례받은 이들」은 이 문제에 유대적 종교 요소가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모든 유대인이나 할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그 가운데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며 공동체를 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14–15절을 통해 일부 짐작할 수 있지만, 완전한 교리 체계로 재구성할 만큼 정보가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일으키는 결과입니다. 7절의 감독은 하나님의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11절의 잘못된 교사들은 집안을 무너뜨리는 사람입니다. 두 구절의 ‘집’이 완전히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7절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관리인이라는 비유이며, 11절은 실제 가정이나 가정 단위의 신앙 공동체를 포함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좋은 지도자는 맡겨진 사람들의 삶을 세우고, 잘못된 교사는 사람들의 삶을 흔들고 무너뜨린다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얽혀 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이득을 얻으려고」 가르칩니다. 가르침이 사람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돈이나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에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라는 요구가 들어 있었던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표현은 그들이 가르쳐서는 안 될 내용을 퍼뜨리는 일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강한 명령입니다. 이를 곧바로 물리적인 폭력이나 강제적 침묵을 허용하는 지시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앞서 9절에서 바울이 지도자에게 요구한 대응은 믿음직한 말씀을 붙들고 반대자들을 논박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의 단호함은 진리를 보호하는 책임에서 비롯되지만, 그 단호함 자체가 지도자의 독선이나 폭력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러한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을 권한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사람에게 맡겨집니다.

거짓말쟁이들의 땅에서 진리를 말한다는 것

디도서 1:12–14 본문 →

바울은 왜 크레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는가

크레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곧 그들 자신의 예언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게으른 배들이다.」디도서 1: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고대 크레타 출신 인물 에피메니데스와 연결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역설이 생깁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라고 말한 사람 자신도 크레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흔히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연결되어 논의되지만, 바울은 여기서 논리학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의 독자들에게 익숙했을 수 있는 크레타 사람들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를 인용하여 공동체가 직면한 도덕적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에는 오늘날 독자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어려움도 있습니다. 특정 지역 사람들 전체를 거짓말쟁이, 악한 짐승, 게으른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은 민족적·지역적 고정관념을 담은 공격적인 언어입니다. 본문에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실제 고대 크레타 사람들 전체가 그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바울은 다음 절에서 이 증언이 참이라고 말하므로, 이 구절의 거친 판단을 없었던 것처럼 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실제로 강한 집단적 비난을 사용하고 그것을 크레타 공동체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다만 그 표현의 목적과 적용 범위를 살피지 않은 채 모든 크레타 사람의 본성에 관한 객관적인 판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학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크레타의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는 평가 아래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진실하심에서 나오지만, 그 말씀이 선포되는 세상에는 거짓된 말과 속이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현실 속에서 디도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남는 질문은 거짓말쟁이라는 평판을 가진 사회에서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답은 곧이어 등장합니다.

매섭게 책망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증언은 참됩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을 매섭게 책망하십시오. 그들이 믿음에 있어 건전한 상태로 유대 사람들의 꾸며 낸 이야기에도, 진리에서 등을 돌린 사람들의 계명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지내도록 말입니다.디도서 1:13–14 · 본디새김

바울은 매섭게 책망하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에 있어 건전한 상태로」라는 짧은 목적절이 책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책망은 상대방을 이기거나 굴복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에서 돌아서서 믿음에 있어 건강한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기서 9절의 「건전한 가르침」이 다시 떠오릅니다. 9절에서는 지도자가 건전한 가르침으로 권하고 논박할 수 있어야 했고, 13절에서는 그 책망을 받는 사람들이 믿음에 있어 건전해지는 것이 목표입니다. 같은 건강의 이미지가 가르침과 믿음에 각각 적용됩니다.

바른 가르침은 단지 교리적 오류를 찾아내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몸에 병이 생겼을 때 올바른 진단이 필요한 이유가 환자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듯, 교회에서 가르침을 분별하는 일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정죄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지도자의 단호함은 쉽게 지배욕으로 변합니다. 바울이 지도자의 자격에서 독선과 분노를 경계했던 이유도 여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유대 사람들의 꾸며 낸 이야기」와 「진리에서 등을 돌린 사람들의 계명」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진리 대신 다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규정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 계명을 만들어 내거나 전하는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가르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진리에서 떠나 있습니다. 처음에 바울은 「경건에 부합하는 진리를 아는 것」을 말했는데, 이제 진리에서 돌아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규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르침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멀어지고, 사람을 통제하는 규정으로 변질됩니다.

이 문제가 다음 절의 정결에 관한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크레타 사람들은 언제나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고대 시인 칼리마코스의 작품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디도서의 인용문 전체가 정확히 어느 작품에서 나왔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대 문헌의 전승과 후대의 출처 표기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엄밀하게 말하면 이 문장이 곧바로 완전한 논리적 모순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거짓말쟁이’를 모든 발언이 예외 없이 거짓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역설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함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디도서 1:15–16 본문 →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말의 뜻

깨끗한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러워진 데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도 양심도 더러워져 있습니다.디도서 1:1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문맥에서 떼어 내면 쉽게 오해될 수 있습니다. 「깨끗한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라는 말을 모든 행동이 허용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조차 순수한 마음으로 행하면 깨끗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적 계명과 잘못된 가르침을 문제 삼은 흐름에서, 15절은 정결을 판단하는 기준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율법에는 음식과 신체 상태, 예배와 관련된 정결 규정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1–15장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규정들은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처음부터 무의미한 인간적 규칙이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디도서가 문제 삼는 상황은 사람들이 종교적 규정에 의존하여 자신을 깨끗하다고 여기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규정이 크레타 공동체에서 강요되고 있었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14절의 유대적 요소와 15절의 정결 언어를 연결하면 음식이나 의식적 정결에 관한 규정이 문제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널리 제시되는 해석이지만 본문만으로 그 내용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정결의 문제를 뒤집어 놓습니다.

문제는 어떤 음식을 먹거나 무엇을 만졌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마음과 양심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더러운지 잘 판단한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의 양심을 신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양심 자체가 더러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욕망과 이해관계, 잘못된 가르침에 오래 노출되면 그 판단 자체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종교적 열심은 그러한 왜곡을 감추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규칙을 지키는지 엄격하게 판단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탐욕과 거짓말에는 관대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정결을 판정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규칙이 전혀 필요 없다는 주장도, 각 사람이 자기 양심에 옳다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양심조차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끊임없이 점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정결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디도서 1장은 다음의 고발로 마무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밝혀 말하지만,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합니다. 가증스럽고 불순종하며 어떤 선한 일에도 적합하지 않은 이들입니다.디도서 1:16 · 본디새김

바울은 1절에서 「경건에 부합하는 진리를 아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을 아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그 앎이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일반적인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고백과 하나님께 대한 실제적인 태도가 분리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불순종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깨끗한지 가르치면서, 자신의 마음과 양심은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권위를 주장하면서, 부정한 이득을 추구하고 사람들의 집안을 무너뜨립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놓인 「어떤 선한 일에도 적합하지 않은」이라는 표현은 8절과 맞물립니다. 바울은 장로가 「선한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했습니다. 두 집단의 차이는 결국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일을 행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 표현은 뒤에서 디도서가 선한 일을 거듭 강조하게 되는 방향을 미리 보여 주지만, 여기서는 먼저 잘못된 교사들의 실제적인 실패를 고발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구원의 소망은 인간의 선행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되며, 그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 구원자」로 고백하는 믿음 안에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대체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그분의 진리를 알고 믿는 삶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갖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에 놓입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거짓된 삶과 계속 화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7:1–23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에 관한 논쟁 가운데,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단순히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에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특히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전통을 앞세우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막 7:6–13). 디도서 1:14–15는 마가복음 7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두 본문은 인간의 규정과 내면의 정결을 대조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적 연결을 보여 줍니다.

디도서 1장이 보여 주는 복음과 공동체의 관계

디도서 1:1–16 본문 →

1장 전체를 돌아보면 세 장면이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그 말씀을 바울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말씀을 맡을 장로들은 자신의 뜻을 내세우는 지배자가 아니라 맡겨진 사람들을 돌보는 관리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이 서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노예였고, 디도는 같은 믿음을 지닌 자녀였으며, 장로들은 하나님의 살림을 맡은 관리인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맡은 책임 때문에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구원자의 말씀을 맡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기 때문에 삶이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믿기 때문에 그 믿음에 어울리는 삶이 중요합니다. 말씀과 삶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서로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1장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다른 모습의 사람도 있습니다. 손님을 맞아들이고, 선한 것을 사랑하고, 자신을 절제하며, 믿음직한 말씀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고, 그 집을 맡긴 분의 뜻에 따라 돌봅니다. 크레타의 여러 성읍에 그러한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이 바울이 디도에게 남긴 명령이었습니다.

거짓된 말이 사람들의 집안을 뒤엎는 곳에서,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 사람들이 다시 집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디도서 1장이 그리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