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처지에 따른 당부
우리를 가르치고 자기 백성으로 삼는 은혜
디도서 2장을 읽으면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구성이 나타납니다.
늙은 남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늙은 여자들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젊은 여자들은 가정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젊은 남자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심지어 노예들은 주인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세세하게 지시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일상적인 권면들이 이어지다가 11절에 이르면 갑자기 시야가 크게 넓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말이 아니라, 앞에서 길게 나열한 권면들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늙은 남자가 절제해야 하는 이유, 젊은 여자가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디도가 자신의 가르침에 온전함을 보여야 하는 이유, 노예가 신실하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모두 이 한 문장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은혜와 명령을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은혜는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이고, 명령은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은혜 자체가 우리를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의 목적은 14절에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셨」고, 그것은 「좋은 일에 열심인 자기 소유의 백성」을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디도서 2장에서 선한 삶은 복음에 덧붙인 부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목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아주 평범한 하루를 보여 줍니다. 말과 행동, 가정과 인간관계, 일터에서의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다가 그 평범한 하루의 배후에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께서 계시며,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소망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디도서 2장은 평범한 삶을 영원한 구원의 이야기 속에 놓습니다.
건전한 가르침은 어떤 사람을 만드는가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그런데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걸맞은 것을 말하십시오.디도서 2:1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 장과 직접 연결됩니다.
디도서 1장에서는 잘못된 교사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디도에게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건전한 가르침을 말하십시오」라고만 하지 않고, 「건전한 가르침에 걸맞은 것을 말하십시오」라고 합니다.
‘걸맞다’는 말은 어떤 대상의 성격이나 위치에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옷이 어떤 자리에 어울린다고 말하듯이, 사람의 행동에도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진리에 어울리는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그것에 걸맞은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복음을 대체하지 않으면서 복음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제부터 설명하려는 것은 복음과 별개로 존재하는 예절이나 사회생활의 지혜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믿음은 자라야 한다
늙은 남자들은 정신이 맑고, 존경할 만하고, 분별 있고, 믿음과 사랑과 견딤에서 건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디도서 2:2 · 본디새김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는 1장에서 교회의 직임을 가리켰던 ‘장로들’과 구별되는 표현입니다. 문맥상 이 구절은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이 든 남자들 일반을 대상으로 합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정신의 맑음과 존경받을 만한 태도, 분별력입니다. 그리고 뒤에 세 가지가 놓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익숙한 덕목이지만, 여기서 바울은 소망 대신 견딤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이 든 사람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요구입니다.
나이가 들면 삶의 경험은 많아지지만, 그 경험이 언제나 사랑과 인내를 깊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겪은 실망은 사람을 냉소적으로 만들 수 있고, 반복해서 겪은 갈등은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믿음의 건강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이 든 사람들에게 과거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의 믿음은 건강한가? 사랑은 살아 있는가? 어려움을 견디는 힘은 남아 있는가?
「견딤」은 고통을 아무 말 없이 참는 것보다 넓은 말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고 계속 굳게 서 있는 인내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기대하는 노년은 그저 점잖고 조용하게 지내는 노년이 아니라, 믿음을 잃지 않고 사랑을 식히지 않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하게 살아가는 노년입니다.
나이가 많아지는 것과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나이는 시간이 주지만, 믿음의 성숙은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이제 바울은 나이 든 여자들에게 시선을 옮깁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역할이 더해집니다.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
거룩함은 몸가짐에서도 드러나는가
늙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몸가짐이 거룩한 사람다워야 하고, 헐뜯지 않고, 과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디도서 2:3 · 본디새김
「마찬가지로」라는 말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두 집단 모두 신앙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몸가짐이 거룩한 사람다워야」 한다는 말은 거룩한 것에 어울리는, 성스러운 자리에 걸맞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을 단순히 옷차림이 단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거룩함은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만 필요한 태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평소의 행동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두 가지 행동이 언급됩니다. 헐뜯는 것은 다른 사람에 관한 말로 그 사람의 평판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말은 사람을 세우기도 하지만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과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라는 표현은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는 경고를 넘어, 어떤 욕망이나 습관에 지배당하는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무엇인가에 붙들려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좋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약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언제나 공식적인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만 맡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는 나이 든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 가르침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고 배운 분별과 신실함을 다른 세대에게 전해 주는 일입니다. 바울은 나이 든 여자들을 수동적인 신앙생활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형성하는 교사로 부릅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리하여 그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분별을 가르쳐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며, 분별 있고, 순결하고, 집안일을 돌보고, 선하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이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디도서 2:4–5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당시의 사회적 환경과 복음이 만나는 복잡한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가르치라고 한 첫 번째 내용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가족이라는 제도를 유지하는 것만 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사랑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전에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랑은 뒤따르는 분별, 순결, 선함과 함께 놓여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많이 해 주는 일만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좋은 것을 분별하고 신실하게 행동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특별히 젊은 여자들에게 집안일을 돌보고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했을까요?
당시의 가정 질서와 오늘의 독자 사이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가정이 사회질서를 구성하는 중요한 단위였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일정한 위계 안에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약의 여러 편지에 등장하는 이러한 생활 규정은 흔히 ‘가정 규범’이라고 불립니다. 골로새서 3:18–4:1과 에베소서 5:21–6:9도 비슷한 형식을 보여 줍니다.
5절의 마지막 목적절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는 바울이 당시 사회가 교회의 가정생활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무책임하게 행동한다고 비난받는다면, 사람들이 복음 자체를 공격할 구실로 삼을 수 있다는 염려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시의 모든 가부장적 질서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라는 선언으로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본문은 당시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논의를 펼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질서의 모든 요소를 시대와 무관한 절대적인 규범으로 제시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이라는 명령은 본문에 실제로 있습니다. 이를 지워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거나 학대할 권리를 가졌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도 본문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바울은 남편이 아내에게 행사할 권한이나 그 한계를 설명하지 않으며, 모든 여성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거나 가정 밖에서 어떤 역할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돌보고」 역시 가정의 삶을 책임 있게 살피라는 긍정적인 권면이지, 여성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의 경계를 규정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이러한 구절을 오늘날에 적용하려면, 고대 사회의 가정 질서와 본문이 그 안에서 추구하는 신앙적 목적을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디도서가 강조하는 것은 복음 때문에 가정의 삶이 무책임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젊은 여자들을 직접 가르치라고 디도에게만 지시하지 않고, 나이 든 여자들이 그들을 가르치도록 합니다. 공동체의 신앙은 한 명의 지도자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는 방식으로만 형성되지 않고, 세대 사이에서 삶을 나누며 더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분별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방식으로도 형성됩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가르치고 돌보는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젊은 남자들에게는 왜 한 가지만 말하는가
젊은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분별을 지키라고 권하십시오.디도서 2:6 · 본디새김
늙은 남자들과 여자들, 젊은 여자들에게는 여러 덕목을 나열했던 바울이 젊은 남자들에게는 단 한 가지를 직접 요구합니다.
분별입니다.
이 한 가지는 이어지는 디도에 대한 권면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2장 전체에서 분별이라는 말이 되풀이된다는 점도 보아야 합니다. 늙은 남자들은 분별 있어야 하고(2:2), 나이 든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분별을 가르쳐야 하며(2:4), 젊은 여자들은 분별 있어야 하고(2:5), 젊은 남자들은 분별을 지켜야 합니다(2:6).
사람마다 사회적 위치와 책임이 다르지만,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에 무작정 이끌리지 않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 판단하며 그에 맞게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12절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거기서는 특정 연령이나 성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분별 있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각각의 집단에 요구되던 태도가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는 삶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면들은 결국 하나의 공통된 신앙적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디도 자신이 가르침의 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모든 일에 그대 자신을 좋은 일의 본으로 내놓아야 합니다. 가르침에서는 온전함과 품위를 보이고, 나무랄 데 없는 건전한 말을 해야 합니다. 맞서는 이가 우리를 두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도서 2:7–8 · 본디새김
디도는 젊은 남자들을 가르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본」은 다른 사람이 따라 볼 수 있는 본보기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배우지만,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면서도 배웁니다. 특히 분별력은 설명만으로 전수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말을 아껴야 하는지, 자신의 이익과 다른 사람의 유익이 충돌할 때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 어떤 태도로 대응해야 하는지는 실제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디도가 분별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무분별하게 행동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의 삶이 자신의 가르침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의 가르침과 삶이 함께 선한 방향을 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르침에서는 온전함과 품위」를 보이라는 말은,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사람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진리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진지하고 신뢰할 만한 태도로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반대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맞서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들이 비난할 만한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가르침이 진실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하는 사람의 행실 때문에 그 가르침의 신뢰가 무너지는 일은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평판을 관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삶이 복음에 관하여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는 사람이 자기 삶으로 그 말을 부정한다면, 듣는 사람에게 그 말은 신뢰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권면을 확장합니다. 그들을 복음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노예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돋보이게 한다는 역설
노예들은 모든 일에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고, 기쁘게 해 주고, 거슬러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빼돌리지 말고, 도리어 선한 믿음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가르침을 모든 일에 돋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도서 2:9–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오늘날 독자에게 심각한 윤리적 질문을 일으킵니다.
바울은 왜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말할까요? 왜 노예제 자체를 비판하거나 주인들에게 노예를 해방하라고 명령하지 않을까요?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읽으려면 이 불편함을 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노예제는 오늘날의 고용관계와 달랐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권 아래 있었고, 자유롭게 고용관계를 끝내거나 자신의 노동 조건을 결정할 권리를 일반적으로 갖지 못했습니다. 노예의 생활과 처지는 매우 다양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인과 구별되는 법적·사회적 지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디도서 2:9–10은 그러한 제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행동 지침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예제 폐지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이 없습니다. 이 사실은 분명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이 노예제를 즉각 폐지하는 선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실제 문면보다 앞서 나가는 해석입니다. 반대로 이 구절을 근거로 노예제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당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본문의 권면을 제도 전체에 대한 영원한 승인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와 노예제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오늘날의 직장 상사와 직원 관계에 그대로 대응시키는 것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대상은 자유롭게 계약을 맺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입니다.
노예도 복음을 아름답게 드러낼 수 있는가
10절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노예들이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가르침을 모든 일에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돋보이게 하다」는 꾸미거나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뜻으로, 무엇인가를 정돈하여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는 의미도 지닙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공식적으로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도 아닌,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노예들의 행동과 연결합니다. 노예의 성실함과 신실함도 복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믿음을 남김없이 드러내」라는 표현은 문맥상 신뢰할 만한 태도나 성실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피스티스(πίστις)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 아니라 신실함과 신뢰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앞의 「빼돌리지 말고」와 연결하면, 물건이나 돈을 몰래 가져가지 않고 맡은 일에서 신뢰할 만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실한 행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더 훌륭한 신앙의 증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낮은 지위에 놓였다고 복음을 드러낼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권면이 노예제의 부당함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한계 역시 남아 있습니다. 이 긴장을 무리하게 해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디도서가 노예의 구체적인 삶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신앙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과, 노예제라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또한 이 구절을 현대의 착취나 폭력을 참고 받아들이라는 명령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는 적용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빛 아래 놓습니다. 그들은 노예라는 신분으로 구원의 이야기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가르친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은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디도서 2:11 · 본디새김
여기서 디도서 2장의 중심부에 이릅니다.
11절은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앞의 모든 권면을 설명합니다. 늙은 남자들과 여자들, 젊은 여자들과 남자들, 디도 자신과 노예들까지,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복음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관한 정보를 제시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선언합니다. 「나타났다」(그리스어 에페파네(ἐπιφαίνω))는 말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 드러난 구원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스스로 발견한 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본문은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셨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11절의 은혜의 나타남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한 호의나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사건에서 그 실제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에게」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앞에서는 사람들을 나이와 성별, 사회적 지위에 따라 구분했지만, 이제 바울은 그 모든 구분을 가로지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의미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어 문장의 「모든 사람에게」를 은혜의 나타남과 연결하는 읽기도 가능하며, 구원을 가져다주는 은혜의 보편적인 범위를 강조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하나님의 구원 은혜가 특정한 사회적 계층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강조는 분명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와 자유인은 법적으로 전혀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노예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책임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은혜 아래 놓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이제 그들을 가르칩니다.
은혜는 어떻게 사람을 가르치는가
그 은혜가 우리를 가르쳐 바로잡아, 우리가 불경건과 세상의 욕망을 거부하고 이 시대에 분별 있게, 의롭게, 경건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디도서 2:12 · 본디새김
바울은 은혜가 우리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르쳐 바로잡아」는 가르치고 훈련하며, 필요할 때는 바로잡는 일을 뜻합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교육보다 넓은, 사람을 일정한 방향으로 형성하고 성장시키는 교육입니다. 본문은 은혜를 그런 일을 하는 주체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흔히 잘못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용서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은혜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잘못을 용서해 준 뒤 사람이 이전과 똑같이 살도록 내버려 두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훈련합니다.
이것은 은혜가 실은 율법처럼 행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출발점이 다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서 은혜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나타났기에 우리는 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은혜는 먼저 거부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불경건은 종교적 의식을 소홀히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분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욕망 역시 인간의 모든 소망이나 기쁨을 부정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사람을 끌고 가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절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분별 있게, 의롭게, 경건하게」. 분별 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바르게 판단하고 다스리는 것과, 의롭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존중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만 세 단어가 각각 하나의 관계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며, 서로 겹치면서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바울은 은혜가 훗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살아가는 시대에 그렇게 살도록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해서 세상에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불경건과 잘못된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고, 사람들은 불완전한 사회질서 속에서 살아갑니다.
은혜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다음에야 작용하는 힘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현재의 삶을 말하면서도 현재에만 시선을 고정하지 않습니다.
나타난 은혜와 나타날 영광 사이에서
복된 소망을, 곧 크신 하나님과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디도서 2:13 · 본디새김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나타났습니다. 13절에서는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두 구절에는 나타남을 뜻하는 같은 어근이 쓰입니다. 11절의 에페파네와 13절의 에피파네이아입니다. 앞에서는 이미 일어난 나타남을, 뒤에서는 앞으로 기다리는 나타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두 나타남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구원 사건을 기억하기만 하는 사람들도, 미래의 구원만 바라보며 현재를 무의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과거에 나타난 은혜가 현재의 삶을 가르치고, 미래에 나타날 영광에 대한 소망이 그 삶의 방향을 잡아 줍니다. 「기다리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태도가 아닙니다. 소망은 현재의 책임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감당하도록 이끕니다.
「크신 하나님과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13절에는 중요한 번역상 쟁점이 있습니다. 한국어로 읽으면 ‘크신 하나님’과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대상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투 메갈루 테우 카이 소테로스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에서 「크신 하나님」과 「구원자」는 하나의 관사 아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이러한 구문은 두 칭호가 동일한 인물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강하게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님을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며 구원자」라고 부르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문법적으로 유력합니다.
반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구별하여 읽는 견해도 역사적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는 디도서의 다른 구절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여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1:4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이 2:13에서도 반드시 두 대상을 가리켜야 한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아닙니다.
따라서 두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되 문법적 무게가 같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관사 구조와 바로 뒤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14절을 고려하면, 13절이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구원자라는 두 칭호를 함께 붙이는 읽기가 더 설득력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만 묘사하지 않는, 매우 높은 그리스도론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분이라고 덧붙입니다.
영광의 주님과 자신을 내어 주신 구원자가 같은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문은 하나의 관사 아래 연결된 두 칭호가 동일한 인물을 가리키는 규칙과 관련하여 설명됩니다.
자신을 내주셔서 자기 백성을 만드신 예수님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온갖 불법에서 몸값을 치러 건져 내시고, 좋은 일에 열심인 자기 소유의 백성을 자기를 위하여 깨끗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디도서 2:14 · 본디새김
디도서 2장의 모든 권면은 결국 이 구절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어떤 물건이나 가르침이나 도움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바울은 그 결과를 두 가지 동사로 설명합니다. 우리를 건져 내시는 것과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에서 건져 내시는가
‘몸값을 치러 건져 내다’는 표현에는 대가를 치러 해방한다는 속량의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구약의 출애굽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셨고, 출애굽기 6:6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속량은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입니다.
디도서 2:14는 그 속량의 언어를 예수님의 자기 내어줌에 적용하면서, 「온갖 불법」에서 우리를 구출하신다고 말합니다. 나쁜 결과를 피하거나 형벌을 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인간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몸값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지급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속량이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값을 지불하셨다는 식의 구체적인 거래 장면을 이 구절에 덧붙여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명시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셨고, 그 목적이 우리를 불법에서 건져 내시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는가
「자기 소유의 백성」은 특별히 소유한 백성, 자신에게 속한 백성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19: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가운데 자신의 특별한 소유가 되는 백성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신 뒤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공로로 자유를 얻은 백성이 아닙니다. 출애굽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디도서 2:14도 같은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을 내주시고, 그 내어주심을 통해 사람들을 불법에서 건져 내시며, 그들을 자신에게 속한 백성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소유하신다는 선언만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여 자신과 특별한 관계 안으로 불러들이신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단지 죄를 짓지 않는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늙은 남자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견딤에서 건강한 사람이 되라고 했고, 나이 든 여자들에게는 좋은 것을 가르치라고 했으며, 디도에게는 좋은 일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을 설명하면서 「좋은 일에 열심인」 백성을 말합니다. 앞부분에서 요구된 삶의 여러 모습이 예수님의 구원 목적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악을 행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좋은 일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잘못된 욕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까지 변화시키는 일을 향합니다. 12절에서 은혜가 가르치는 삶이 왜 가능한지,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지를 14절이 설명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예수님께 속할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주셔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백성답게 좋은 일을 행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내어줌이 먼저이고, 선한 삶은 그 구원에 걸맞은 열매입니다.
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가
바울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나열된 많은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결정합니다.
사람에게는 분명히 책임이 있습니다. 잘못된 욕망을 거절해야 하고, 분별 있게 살아야 하며, 좋은 일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의 근본적인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주시고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좋은 일에 열심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후자는 전자에서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몸값을 치러 건져 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뤼트로오는 대가를 치러 해방하거나 구해 낸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갈라디아서 1:4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현재의 악한 시대에서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자기 소유의 백성」(라온 페리우시온)은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킬 때 사용된 표현과 직접 연결되며, 신명기 7:6과 14:2, 26:18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출애굽 전통을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적용한 신학적 연결입니다. 디도서가 출애굽기 19:5의 문장을 직접 인용한다고 말하기보다, 그곳의 특별한 소유 백성이라는 언약적 표현을 받아 사용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내용을 말하고 권하고 책망하십시오
이 내용들을 말하고 권하고 잘못을 밝혀 책망하십시오. 명령할 권한을 온전히 행사하며 그리하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디도서 2:15 · 본디새김
디도서 2장은 처음과 비슷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1절의 「건전한 가르침에 걸맞은 것을 말하십시오」와 이 마지막 명령 사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디도가 말해야 할 「이 내용들」은 행동 규칙만이 아니라, 그 규칙을 가능하게 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구원도 포함합니다.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고 명령만 하면 신앙은 쉽게 도덕적 부담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그 은혜가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는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개념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둘을 함께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편지의 문맥에서 디도의 권위는 그의 인격적 우월성이나 사회적 신분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권하며,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을 책임을 지닙니다. 권한을 온전히 행사한다는 것은 자기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에 관하여 맡겨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역시 디도가 남들에게 무조건적인 존경을 강제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3인칭 금지 명령으로, 디도의 가르침과 권면이 경멸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를 나타내지만,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관철하라는 별도의 명령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 권위의 성격은 이미 본문에서 규정되었습니다. 디도는 좋은 일의 본이 되어야 하고, 온전함과 품위를 갖추어 가르쳐야 하며, 나무랄 데 없는 건전한 말을 해야 합니다. 그가 가르쳐야 할 복음의 중심에는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께서 계시므로, 그 권위의 행사 역시 예수님의 자기 내어줌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가르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왜 선하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인정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서도, 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선한 삶은 복음의 신뢰를 드러낼 수 있지만, 그 가장 깊은 근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은혜가 먼저 우리를 구원하고,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가르쳐 변화시킵니다. 그 은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삶의 형태로 만들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놓여 있었지만, 자신의 신실함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해진 노예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자유가 충분하지 않았고, 당시의 사회질서는 그의 존엄과 권리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삶조차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서 제외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그 은혜가 가르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서로 다른 나이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완전하지 않고, 각자의 삶에는 책임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은혜 아래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그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들로 내버려 두지 않고, 예수님께 속한 백성으로, 좋은 일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들로 빚어 갑니다.
이미 나타난 은혜가, 아직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오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