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여행 계획과 인사

구원받은 우리가 선한 일에 앞장서는 이유

디도서 3장에는 얼핏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문장이 있습니다.

1절은 사람들에게 「온갖 선한 일에 채비를 갖추고」 살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5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이 의에 맞게 행한 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비를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이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좋은 일에 앞장서는 데 마음을 쓰라고 말하고, 14절에서는 그들이 좋은 일에 앞장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다시 강조합니다.

선한 일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면서, 왜 바울은 선한 일을 이토록 중요하게 여길까요?

이 질문을 풀어 주는 열쇠는 3장 한가운데 놓인 짧은 선언, 「그러나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친절과 사람 사랑이 나타났을 때에」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어리석었고, 불순종했고, 욕망의 노예였으며, 서로 미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선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것은 구원받을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제출하는 실적이 아닙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자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의 문제입니다.

디도서 3장은 바로 이 관계를 밝힙니다. 더 나아가 편지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토록 강조한 선한 일이 어떤 모습인지 뜻밖의 장면을 통해 보여 줍니다. 여행하는 동역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부족함 없이 마련해 주라는 부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장대한 문장과 여행자의 부족한 물품을 채워 주라는 일상적인 부탁이 같은 장에 들어 있습니다.

그 둘은 우연히 나란히 놓인 것이 아닙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03장 본문 읽기 →

모든 사람에게 온유를 드러내라는 명령

디도서 3:1–2 본문 →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들을 다시 일깨우십시오. 다스리는 자리와 권세에 복종하고 말을 듣고, 온갖 선한 일에 채비를 갖추고, 아무도 모독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너그럽고,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를 드러내 보이라는 것입니다.디도서 3:1–2 · 본디새김

「다시 일깨우십시오」는 전혀 새로운 사실을 처음 가르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알아야 할 것을 잊지 않고 실제 삶에서 행하도록 상기시키라는 말입니다.

먼저 다스리는 자리와 권세에 복종하고 말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시야가 교회 밖으로 넓어집니다. 앞 장에서는 신앙 공동체 안의 여러 사람과 가정의 삶을 살폈다면, 이제는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와 공적 권위에 대한 태도가 등장합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속했다는 이유로 세상의 권력과 완전히 무관하게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공동체의 질서와 법, 일상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불필요하게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거나 권위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디도서 3:1을 모든 통치자의 모든 명령에 예외 없이 복종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통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를 제시하지만, 권력자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충돌하는 명령을 내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직접 논의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에서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라는 사도행전 5:29의 원칙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의 실제적인 요구를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책임을 면제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권위에 복종하라는 명령 바로 뒤에 「온갖 선한 일에 채비를 갖추고」라고 덧붙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삶은 단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채비를 갖추고」라는 표현은 기회가 생겼을 때 행동할 수 있는 준비 상태를 나타냅니다. 선한 일이 필요할 때 비로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 바울은 아무도 모독하지 말라고 하는가

「모독하다」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뿐 아니라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행위에도 쓰이는 말입니다. 디도서 3:2에서는 사람이 그 대상입니다. 이것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지시보다 넓은 요구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를 거칠게 비난하거나 그의 인격 전체를 깎아내리기 쉽습니다. 심지어 옳은 주장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모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디도서는 이미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을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다툼을 즐기지 않는 사람,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권리를 고집하기보다 너그럽게 대하는 사람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교회 안의 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사회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온유하게 대하기보다 경멸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뜻밖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우리도 한때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한 권면이 「우리」의 이야기로 바뀐다

디도서 3:3 본문 →

우리도 한때는 어리석고, 말을 듣지 않고, 속아 헤매고, 온갖 욕망과 쾌락에 노예 노릇을 하고, 나쁜 마음과 시기 속에 지내고, 미움을 살 만하고, 서로 미워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디도서 3:3 · 본디새김

1절에서는 「그들을 다시 일깨우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디도가 가르쳐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우리도 한때는」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밖에 세워 둔 채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왜 아무도 모독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 모든 사람에게 온유를 보여야 합니까? 우리가 본래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리석었고 불순종했으며 속아 헤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의 삶을 여러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판단과 행동의 문제가 나옵니다. 어리석었고, 말을 듣지 않았고, 속아 헤맸습니다. 다음에는 무엇이 우리를 지배했는지가 나옵니다.

노예 노릇을 한다는 표현은 자유를 잃고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때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욕망을 좇아 사는 사람이 오히려 욕망의 종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욕망이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까지 행동하게 만든다면, 그는 욕망을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그것에 이끌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언급된 실제 노예 신분과는 다른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고대 노예들의 사회적 처지를 인간 내면의 욕망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바울이 종속과 지배의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내적 상태를 설명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서로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불순종에서 시작한 묘사는 관계의 파괴로 끝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인간의 과거를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자신도 한때 그런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 기억은 잘못된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고 자신이 본래 더 우월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어렵습니다.

3절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서로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4절의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그 순간에 구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사랑이 나타났을 때

디도서 3:4–5 본문 →

미워하던 인간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

그러나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친절과 사람 사랑이 나타났을 때에, 그분은 우리 자신이 의에 맞게 행한 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비를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거룩한 영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 그리하셨습니다.디도서 3:4–5 · 본디새김

3절과 4절 사이에는 아주 작은 접속사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서로 미워했습니다. 그런 인간에게 바울은 심판이나 형벌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친절과 사람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사람 사랑」은 인간을 향한 사랑이나 인자한 태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드물게 쓰이는데, 사도행전 28:2에도 등장합니다. 배가 난파된 후 바울 일행이 멜리테섬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고 날씨가 추웠는데 섬사람들이 불을 피워 그들을 맞아들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예사롭지 않은 친절」을 베풀었다고 기록하는데, 그때 쓰인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물론 디도서가 사도행전의 그 사건을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사람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추위에 떠는 낯선 사람들에게 불을 피워 주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디도서에서 하나님의 사람 사랑 역시 단순히 인간에게 호감을 느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은 서로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은 욕망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인간은 속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절을 드러내셨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된 뒤에 시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게 살아가던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온유를 보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을 이미 갖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의에 맞게 행한 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바울은 우리가 아무 선한 일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 처지였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조차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근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바울이 악행만을 문제 삼았다면,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들을 구원의 근거로 내세울 여지를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가능성도 차단합니다.

문장은 인간의 의로운 일에는 「근거해서가 아니라」를, 하나님께는 「자신의 자비를 따라」를 대어 놓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자비를 구원의 두 가지 협력적인 근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에서 제외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그 자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1절에서 왜 온갖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라고 명했습니까?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어떻게 구원했는지 설명합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면 선한 일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도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는 인간의 의로운 일에 대해서는 「행위로부터」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그분의 자비를 따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두 근거를 대조합니다.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거룩한 영의 새롭게 하심

디도서 3:5–6 본문 →

그분은 우리 자신이 의에 맞게 행한 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비를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거룩한 영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 그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영을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넉넉히 쏟아 부으셨습니다.디도서 3:5–6 · 본디새김

여기에는 세 가지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씻음은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이미지이고, 다시 태어남은 이전의 삶과 구별되는 새로운 시작을, 새롭게 하심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구원을 단순히 과거의 죄를 용서받는 사건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삶에 새로운 시작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태어남」은 새로운 출생이나 재생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단순히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고 말하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고 말할까요? 행동을 고친다는 것은 이미 살아가던 사람이 자신의 일부 행동을 수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은 사람에게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인간의 문제가 몇 가지 나쁜 습관에만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앞에서 그는 사람이 어리석음과 불순종과 욕망의 종살이 속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행동 지침 이상, 곧 하나님의 구원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삶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모두 잃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방금 「우리도 한때는」이라고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더 이상 그 과거의 지배 아래에서 자신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씻음은 세례를 가리키는가

「다시 태어남의 씻음」에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많은 해석자들은 이 표현이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떠올리게 한다고 보지만, 세례와 거룩한 영의 역사가 어떤 관계인지는 전통마다 다르게 이해합니다. 또 문장의 연결도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거룩한 영의 새롭게 하심」으로도, 「다시 태어남과 새롭게 하심의 씻음」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본문이 강조하는 중심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 사람을 구원하시며, 그 구원은 씻음과 새로운 출생, 거룩한 영의 새롭게 하심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씻으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을 얼마나 주셨는가

6절에서는 씻음의 이미지가 쏟아 부음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영을 주셨다고 말하지 않고 「넉넉히 쏟아 부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한적이고 인색한 공급과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아껴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거룩한 영이 하나의 구원 사건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그 구원은 거룩한 영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이루어지며, 하나님께서는 그 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 주셨습니다. 후대의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본문들을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읽어 왔습니다. 다만 디도서 3:4–6 자체가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선한 일의 문제를 풀어 줍니다. 우리가 선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본래 충분한 도덕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영을 통해 새로운 삶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시 태어남」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마태복음 19:28과 디도서 3:5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때의 새로운 질서, 곧 세상의 갱신을 말하고, 디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 적용됩니다. 두 본문을 하나의 뜻으로 단순화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전의 상태를 새롭게 하신다는 주제는 서로 연결됩니다. 씻음에 관해서는, 세례에서 쓰이는 물이 씻음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초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세례가 새로운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세례와 관련된 표현으로 읽는 것이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전통은 세례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은혜의 실제적인 수단으로 이해하고, 다른 전통은 세례가 거룩한 영께서 이루시는 내적 씻음과 새로운 출생을 나타내는 표지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본문에는 세례라는 명사가 직접 등장하지 않으므로, 씻음이라는 표현만으로 물을 사용하는 행위와 거룩한 영의 역사 사이의 관계를 모두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문장 연결에서 첫 번째 읽기는 씻음과 새롭게 하심을 연결된 두 표현으로 드러내고, 두 번째 읽기는 하나의 씻음에 다시 태어남과 새롭게 하심이라는 의미를 함께 부여합니다. 그리스어의 격과 접속 구조만으로 한쪽을 결정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 36:25–27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더럽혀지고 흩어진 이스라엘에게 맑은 물을 뿌려 깨끗하게 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며,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휘가 모두 일치하지는 않으므로 직접 인용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영을 통해 새롭게 하신다는 구속사적 연결은 살펴볼 만합니다. 「쏟아 붓다」는 사도행전 2:17–18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 곧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도행전 2:33에서 베드로는 높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약속된 거룩한 영을 받아 부어 주셨다고 선포합니다. 디도서가 오순절 사건을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두 본문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거룩한 영의 부어 주심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상속받은 생명

디도서 3:7 본문 →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도서 3:7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은 구원의 목적을 말합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어」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수동형 표현으로,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이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5절의 선언과 직접 연결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사람이 도덕적으로 개선되었다는 의미로만 이해하면 본문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게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을 말합니다.

물론 5절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과 이 의롭게 됨은 서로 무관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뜻을 반복하지도 않습니다. 의롭게 됨은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관계와 지위를 강조하고, 새롭게 하심은 거룩한 영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삶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죄인을 도덕적으로 훈련하여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와 은혜로 그를 받아들이시고, 새롭게 하시며, 상속자로 세우십니다.

상속자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상속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재산을 구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상속 관계에 따라 어떤 것을 받을 사람입니다. 인간 사회의 상속에는 여러 법적 조건과 예외가 있지만, 바울이 이 표현을 쓰는 핵심은 구원의 미래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약속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소망은 아직 완전히 소유하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고 의롭게 된 사람이지만, 동시에 아직 기다려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유업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가 욕망과 쾌락에 노예 노릇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는 우리가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욕망에 붙들려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삶의 조건이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관계 안으로 받아들이셨는지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욕망에 종속된 삶만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구원의 선언을 마친 뒤 다시 선한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말은 처음과 다르게 들립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이미 받음과 아직 기다림의 긴장은 로마서 8:16–25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라고 말하면서도,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기다린다고 설명합니다.

좋은 일에 앞장서라는 명령의 진짜 자리

디도서 3:8 본문 →

믿음직한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이것들을 두고 힘주어 말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어 온 이들이 좋은 일에 앞장서는 데 마음을 쓰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좋고 사람들에게 유익합니다.디도서 3:8 · 본디새김

「믿음직한 말」은 목회서신에서 특별한 진술을 강조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바로 앞의 4–7절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선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어디서부터를 정형화된 신앙 고백으로 보아야 하는지까지 본문이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단순히 기억하라고 하지 않고, 디도에게 힘주어 말하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서 3장 첫머리의 역설이 풀립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근거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선한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 진술을 모순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비로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충분히 가르칠수록 사람들이 선한 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일에 앞장서는 데」라는 번역은 선한 일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선한 일을 피할 수 없는 의무처럼 여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일에 마음을 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왜 선한 일에 앞장서야 합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것들은 좋고 사람들에게 유익합니다」에서 「이것들」이 구원의 가르침을 가리키는지, 그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선한 일을 포함하는지에는 약간의 해석상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흐름에서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은 사람들을 좋은 일에 힘쓰게 하며, 그러한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누군가가 종교적인 문제에 관해 매우 열심히 논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일까요?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그 일이 실제로 유익한가를 물으라는 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앞장서다」(προΐστημι)로 옮긴 동사는 앞에 서다, 책임을 맡다, 어떤 일에 힘쓰다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은혜와 선한 일의 이 관계는 에베소서 2:8–10과도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보여 줍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유익한 일과 헛된 일

디도서 3:9–11 본문 →

모든 신학적 논쟁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와 다툼과 율법을 두고 벌이는 싸움은 피하십시오. 그것들은 이로울 것이 없고 헛되기 때문입니다.디도서 3:9 · 본디새김

8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과 그에 따른 좋은 일이 유익하다고 했고, 9절에서는 어리석은 논쟁과 다툼이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논쟁이 지적으로 흥미로운지, 논리가 정교한지,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습니다. 그 논쟁이 어떤 유익을 만들어 내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든 신학적 질문과 토론을 금지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의 문제를, 고린도전서에서는 부활과 은사와 예배의 질서를 길게 논증합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어리석고 무익한 논쟁입니다.

「족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구약의 족보와 인물에 관한 사변적인 해석, 유대적 전승과 관련된 논쟁 등이 가능한 배경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본문은 그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논의가 율법을 둘러싼 싸움과 결합되어 공동체를 소모적인 갈등으로 이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모든 논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논리적 무기를 더 갖추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논쟁에서는 아예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주장에는 반드시 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화는 진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상대방을 꺾기 위한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논쟁을 계속할수록 공동체가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세우고 실제적인 유익을 주는 일에 힘쓰고, 끝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갈라서기를 부추기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갈라서기를 부추기는 사람은 한 번 타이르고 두 번째로도 타이른 뒤에 물리치십시오.디도서 3:10 · 본디새김

9절에서는 논쟁을 피하라고 했고, 10절에서는 그 논쟁을 계속 일으키며 공동체를 갈라놓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여기서 쓰인 그리스어 하이레티코스(αἱρετικός)는 영어의 ‘heretic’, 곧 이단자라는 말과 어원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곧바로 후대 교회에서 체계화된 ‘이단’이라는 개념을 가져오면 본문의 초점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그의 행동이 공동체를 갈라놓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 사람을 즉시 쫓아내라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을 먼저 알려 주고, 계속해서 공동체를 해친다면 다시 타일러야 합니다. 그렇게 한 뒤에도 분열을 일으키는 행동이 이어질 때 그와의 관계에 경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끝없이 공동체를 흔들 기회를 주라고 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대화나 권면 없이 그를 배제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두 번의 타이름이 먼저입니다.

여기서 정당한 문제 제기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분열을 구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도자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기존의 가르침에 질문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갈라서기를 부추기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반복되는 권면에도 공동체를 갈라놓는 행동을 지속하는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이 구별이 사라지면 공동체를 보호하라는 명령이 오히려 정당한 질문과 비판을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바울이 요구한 온유와 너그러움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스스로 정죄를 자초한 채」라는 말의 의미

그대는 그런 사람이 비뚤어져 있고, 스스로 정죄를 자초한 채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디도서 3:11 · 본디새김

「스스로 정죄를 자초한 채」는 스스로 정죄받을 근거를 만들어 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비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절의 문맥에서는 반복적인 권면을 받고도 잘못된 행동을 계속함으로써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아무런 경고도 받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을 지적받고도 그 행동을 계속합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경계는 단순히 불편한 사람을 멀리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잘못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공동체를 보호하는 조치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2절과 10절 사이의 긴장이 이해됩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온유를 드러내라고 명하면서도, 분열을 지속하는 사람에게는 관계의 경계를 세우라고 합니다.

온유함은 모든 행동을 허용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단호함은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모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타이름이 먼저 오는 순서는 마태복음 18:15–17에서 예수님께서 공동체 안의 죄를 다루는 과정을 설명하신 것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두 본문이 제시하는 절차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여행 계획이 보여 주는 것

디도서 3:12–14 본문 →

왜 바울은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가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그대에게 보내거든 니고볼리로 나에게 오기를 힘쓰십시오. 내가 거기서 겨울을 나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디도서 3:12 · 본디새김

여기서 편지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구원과 자비, 거룩한 영, 의롭게 됨과 영원한 생명, 공동체의 갈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현실적인 여행 계획이 등장합니다.

디도는 크레타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면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하기에, 바울은 아데마나 두기고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려고 계획합니다. 그는 동역자들이 계속해서 이동하며 공동체를 돌볼 수 있도록 실제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역은 말만으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이동해야 했고,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며, 그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도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곧 다음 구절의 주제가 됩니다.

세나와 아볼로에게 모자란 것이 없도록

법에 밝은 세나와 아볼로를 힘써 도와 보내십시오.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하나도 없도록 말입니다.디도서 3:13 · 본디새김

바울은 이들의 신학적 능력이나 사역의 성과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소박한 부탁을 합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필요한 물품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지만, 이동을 위한 실제적인 지원을 뜻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선한 일에 앞장서라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끝에서 그가 실제로 요청하는 선한 일 가운데 하나는 여행하는 동역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논증에서 현실의 삶으로 잠시 벗어난 장면이 아닙니다. 앞에서 설명한 신학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좋은 일에 앞장서기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람들도 꼭 필요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 좋은 일에 앞장서기를 배워야 합니다. 열매 없는 이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도서 3:14 · 본디새김

13절의 여행 준비는 단순한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일에 앞장서다」는 8절과 같은 그리스어 동사입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좋은 일에 앞장서도록 가르치라고 했고, 14절에서는 그 좋은 일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채우는 일입니다.

「꼭 필요한 것들」은 현실적인 필요를 가리킵니다. 누군가의 여행을 위한 물품과 비용일 수도 있고, 다른 실제적인 결핍일 수도 있습니다. 세나와 아볼로의 여행 지원이 바로 앞에 놓여 있으므로 그것이 중요한 사례임은 분명하지만, 이 원칙을 그 두 사람에 대한 지원에만 제한할 이유는 없습니다.

바울은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선한 일에 앞장서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기 쉽고, 가진 것을 나누려면 관심을 기울이고 때로는 계획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열매 없는 이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추상적인 종교적 성취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열매를 이야기할 때 눈에 띄는 업적이나 특별한 능력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디도서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의 결핍을 채우는 일을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데마에 관해서는 이 구절 외에 신약이 알려 주는 정보가 없습니다. 반면 두기고는 에베소서 6:21–22와 골로새서 4:7–9에서 편지를 전달하고 공동체의 사정을 전하는 신실한 동역자로 소개됩니다. 니고볼리는 여러 도시가 같은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리스 서부 에피로스 지역의 니고볼리가 유력한 후보로 제시되지만, 편지 자체에는 구체적인 지리적 설명이 없습니다. 세나가 유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는지, 그리스·로마 사회의 법률을 다루는 사람이었는지는 그리스어 표현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 18:24–28과 고린도전서 3장 등에서 성경에 밝고 능력 있게 가르치는 사람으로 소개되며, 디도서의 아볼로도 그와 동일한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마지막 인사에 담긴 공동체의 모습

디도서 3:15 본문 →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이가 그대에게 문안합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디도서 3:15 · 본디새김

디도서는 짧은 인사로 끝납니다.

편지의 대부분에서 바울은 디도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가르치고, 그대가 권하고, 그대가 책망하라는 명령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은혜의 인사는 디도 혼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어에서도 마지막 대명사는 복수형입니다. 이 편지가 디도가 돌보는 공동체 전체와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디도에게 문안하고, 디도는 크레타에서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진 사람들이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의 안부를 전합니다.

신앙 공동체는 각 지역에 고립된 집단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동하고, 서로의 소식을 전하며,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공동체를 향해 마지막으로 은혜를 빕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시작된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계속됩니다.

맺으며 — 모자란 것이 없도록

디도서 3:1–15 본문 →

디도서 3장에서 선한 일은 처음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로, 중간에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으로, 마지막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로 등장합니다. 이 세 진술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구원의 근거이고, 선한 일은 그 은혜가 사람의 삶에서 만들어 내는 열매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한때는」이라고 기억하는 공동체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쉽게 경멸하지 않고, 그 온유를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돕는 행동으로 이어 갑니다.

디도서 3장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세나와 아볼로를 힘써 도와 보내라고 부탁합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께서 자비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영을 넉넉히 쏟아 부으시고,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로 세우셨다는 깊은 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선언 뒤에 이어지는 일은 길을 떠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는 평범한 일입니다.

그 자비를 받은 사람들이 이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모자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채우기 위해 마음을 쓰고, 그가 자신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값을 갚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자비가 삶에 맺는 열매입니다.

그 은혜 아래에서 한 사람은 길을 떠나고, 다른 사람은 그를 돕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대신하여 공동체를 돌보고, 또 다른 사람은 필요한 것을 채워 줍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사람들이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