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여행 계획과 인사

구원받은 우리가 선한 일에 앞장서는 이유

디도서 3장에는 얼핏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문장이 있습니다.

1절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라고 하십시오」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5절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고도 바울은 8절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선한 일에 앞장서는 데 마음을 쓰라고 말하고, 14절에서 그들이 선한 일에 앞장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다시 강조합니다.

선한 일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면서, 왜 바울은 선한 일을 이토록 중요하게 여길까요?

이 질문을 풀어 주는 열쇠는 3장 한가운데 놓인 짧은 선언, 「그러나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친절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타났을 때」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그 일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어리석었고, 불순종했고, 욕심의 노예였으며, 서로 미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선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것은 구원받을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제출하는 실적이 아닙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자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의 문제입니다. 편지의 마지막에 이르면 바울은 그 선한 일이 어떤 모습인지 뜻밖의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여행에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도록 도와주라는 부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장대한 문장과 여행자의 부족한 물품을 채워 주라는 일상적인 부탁이 같은 장에 들어 있습니다.

그 둘은 우연히 나란히 놓인 것이 아닙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103장 본문 읽기 →

모든 사람에게 온화한 태도를 보이라는 명령

디도서 3:1–2 본문 →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람들에게 다시 일깨워 주십시오. 다스리는 이들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의 말을 따르며,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라고 하십시오. 또 아무도 헐뜯지 말고, 싸우지 말며, 너그럽게 행동하고,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온화한 태도를 보이라고 하십시오.디도서 3:1–2 · 두루새김

「다시 일깨워 주십시오」는 전혀 새로운 사실을 처음 가르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알아야 할 것을 잊지 않고 실제 삶에서 행하도록 다시 생각나게 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다스리는 이들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 시야가 교회 밖으로 넓어집니다. 앞 장에서는 신앙 공동체 안의 여러 사람과 가정의 삶을 살폈다면, 이제는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와 공적 권위에 대한 태도가 등장합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속했다는 이유로 세상의 권력과 완전히 무관하게 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불필요하게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거나 권위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통치 권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다루는 로마서 13:1–7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디도서 3:1을 모든 통치자의 모든 명령에 예외 없이 복종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권력자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충돌하는 명령을 내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직접 논의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에서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도행전 5:29의 원칙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책임을 면제받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권위에 복종하라는 명령 바로 뒤에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라고 하십시오」라고 덧붙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삶은 단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준비를 갖추라고」(ἕτοιμος)라는 표현은 기회가 생겼을 때 행동할 수 있는 준비 상태를 나타냅니다. 선한 일이 필요할 때 비로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후의 권면은 그러한 준비가 어떤 태도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왜 바울은 아무도 헐뜯지 말라고 하는가

「헐뜯지 말고」(βλασφημέω)로 옮긴 말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뿐 아니라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행위에도 쓰이는 말이며, 여기서는 사람이 그 대상입니다. 사람은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를 거칠게 비난하거나 그의 인격 전체를 깎아내리기 쉽습니다. 심지어 옳은 주장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모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디도서는 이미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을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도 싸움을 즐기지 않는 사람,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의 권리를 고집하기보다 너그럽게 대하는 사람을 그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에게」입니다. 교회 안의 친한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사회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도 그 대상에 포함됩니다.

이런 요구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잘못된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온화하게 대하기보다 업신여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뜻밖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우리도 한때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향한 권면이 「우리」의 이야기로 바뀐다

디도서 3:3 본문 →

우리도 한때는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속아서 헤매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욕심과 즐거움의 노예로 살았고, 악한 마음을 품고 남이 잘되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지냈습니다. 우리는 미움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었고, 서로 미워했습니다.디도서 3:3 · 두루새김

1절에서는 「사람들에게 다시 일깨워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디도가 가르쳐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는 「우리도 한때는」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밖에 세워 둔 채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왜 아무도 헐뜯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온화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우리가 본래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리석었고 불순종했으며 속아서 헤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의 삶을 여러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판단과 행동의 문제가 나옵니다. 어리석었고, 말을 듣지 않았고, 속아서 헤맸습니다. 다음에는 무엇이 우리를 지배했는지가 나옵니다.

「노예로 살았고」라는 표현은 자유를 잃고 무엇인가에 매여 있다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때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사람의 선택을 이끌고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까지 행동하게 만든다면, 그는 욕심을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그것에 이끌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언급된 실제 노예 신분과는 다른 비유적인 표현으로, 고대 노예들의 사회적 처지를 인간 내면의 욕심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관계가 무너집니다. 서로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불순종에서 시작한 묘사는 관계의 파괴로 끝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볼 때 자신도 한때 그런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 기억은 잘못된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잘못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이 본래 더 우월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어렵습니다.

3절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서로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4절의 첫머리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그 순간에 구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타났을 때

디도서 3:4–5 본문 →

미워하던 인간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보여 주셨는가

그러나 우리 구원자 하나님의 친절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타났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씻음과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을 통해 그렇게 하셨습니다.디도서 3:4–5 · 두루새김

3절과 4절 사이에는 아주 작은 접속사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심판이나 형벌을 먼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친절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호감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은 서로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은 욕심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인간은 속아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절을 드러내셨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된 뒤에 시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게 살아가던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온화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럴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바울은 우리가 아무 선한 일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 처지였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조차 구원을 얻는 근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악한 행동만을 문제 삼았다면,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들을 구원의 근거로 내세울 여지를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가능성도 차단합니다.

원문은 인간의 의로운 일에 대해서는 「행위로부터」(ἔργον),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의 자비를 따라」(ἔλεος)라는 표현을 씁니다. 바울은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자비를 구원에 함께 기여하는 두 근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에서 제외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그 자리에 놓습니다.

그렇다면 1절에서 왜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라고 명했습니까?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어떻게 구원했는지 설명합니다. 그 과정을 따라가면 선한 일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도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을 향한 사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필란트로피아로, 인간을 향한 사랑이나 따뜻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뜻합니다. 이 말은 신약에서 드물게 쓰이는데, 사도행전 28:2에도 나옵니다. 바울 일행이 배가 난파된 뒤 멜리테섬에 닿았을 때, 비가 내리고 추운 날 섬사람들이 불을 피워 그들을 맞아들인 친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디도서가 그 사건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행전에서 이 사랑이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을 맞아들이는 행동으로 나타나듯, 디도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씻음과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

디도서 3:5–6 본문 →

그분께서는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씻음과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을 통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성령을 넉넉히 부어 주셨습니다.디도서 3:5–6 · 두루새김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식에는 세 가지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씻음은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이미지이고, 다시 태어남은 이전의 삶과 구별되는 새로운 시작이며, 새롭게 하시는 일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과거의 죄를 용서받는 사건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삶에 새로운 시작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왜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고 말하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고 말할까요? 행동을 고친다는 것은 이미 살아가던 사람이 자신의 일부 행동을 수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은 사람에게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욕심의 노예로 살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행동 지침 이상, 곧 하나님의 구원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삶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모두 잃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방금 「우리도 한때는」이라고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더 이상 그 과거의 지배 아래에서 자신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씻음은 세례를 가리키는가

「다시 태어나게 하는 씻음」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뜻할까요?

많은 해석자들은 이 표현이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떠올리게 한다고 봅니다. 세례의 물은 씻음의 이미지를 드러내며, 초기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는 예수님께 속한 새로운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전통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전통은 세례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은혜의 실제적인 수단으로 이해하고, 다른 전통은 세례가 성령께서 이루시는 내적 씻음과 새로운 출생을 나타내는 표지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본문에는 세례라는 명사가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씻음이라는 표현만으로 물을 사용하는 행위와 성령께서 하시는 일 사이의 관계를 모두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문장의 연결 방식도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도, 「다시 태어남과 새롭게 하심의 씻음」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이든 중심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 사람을 구원하시며, 그 구원은 씻음과 새로운 출생,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로 설명됩니다.

사람이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씻으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얼마나 주셨는가

6절에서 씻음의 이미지는 부어 주심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넉넉히 부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쏟아 붓는다는 뜻의 이 말은 제한적이고 인색한 공급과 대조됩니다. 인간의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아껴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그 구원은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일을 통해 이루어지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예수님을 통해 부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 성령이 하나의 구원 사건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후대의 기독교 신학은 이런 본문들을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한 근거로 읽어 왔지만, 디도서 3:4–6 자체가 후대의 삼위일체 교리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선한 일의 문제를 풀어 줍니다. 우리가 선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본래 충분한 도덕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을 통해 새로운 삶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시 태어남을 뜻하는 말은 신약에서 마태복음 19:28과 디도서 3:5에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때 세상이 새롭게 되는 폭넓은 의미로, 디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 쓰입니다. 두 본문을 하나의 뜻으로 단순화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전의 상태를 새롭게 하신다는 주제는 이어집니다. 「씻음」의 두 읽기 가운데 첫째는 씻음과 새롭게 하심을 연결된 두 표현으로 드러내고, 둘째는 하나의 씻음에 다시 태어남과 새롭게 하심이라는 의미를 함께 부여합니다. 그리스어의 격과 접속 구조만으로 한쪽을 결정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 36:25–27에서 하나님께서는 맑은 물을 뿌려 이스라엘을 깨끗하게 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며, 자신의 영을 그들 안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본래 문맥은 흩어진 이스라엘의 회복이고 말이 모두 일치하지는 않으므로 직접 인용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영으로 새롭게 하신다는 연결은 살펴볼 만합니다. 「부어 주셨다」는 사도행전 2:17–18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 그리고 높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약속된 성령을 받아 부어 주셨다는 사도행전 2:33을 떠올리게 합니다. 디도서가 오순절 사건을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두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과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일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상속받은 생명

디도서 3:7 본문 →

이는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도서 3:7 · 두루새김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아」는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이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5절의 선언과 직접 연결됩니다. 이것을 사람이 도덕적으로 개선되었다는 의미로만 이해하면 중요한 측면을 놓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과 삶의 변화는 서로 무관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뜻을 반복하지도 않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관계와 지위를 강조하고, 새롭게 하시는 일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삶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도덕적으로 훈련하여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시는 데 그치지 않고, 자비와 은혜로 그를 받아들이시고, 새롭게 하시며, 상속자로 세우십니다.

상속자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상속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재산을 구입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속 관계에 따라 어떤 것을 받을 사람입니다. 인간 사회의 상속에는 여러 법적 조건과 예외가 있지만, 바울이 이 표현을 쓰는 핵심은 구원의 미래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상속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소망은 아직 완전히 소유하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고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아직 기다려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8:16–25에서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라고 부르면서도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긴장입니다.

3절에서 우리는 욕심과 즐거움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7절에서 우리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삶의 조건이 좋아졌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관계 안으로 받아들이셨는지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욕심에 매인 삶만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구원의 선언을 마친 뒤 다시 선한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말은 처음과 다르게 들립니다.

좋은 일에 앞장서라는 명령의 진짜 자리

디도서 3:8 본문 →

앞에서 한 말은 믿을 만합니다. 나는 디도가 이 내용들을 확신 있게 강조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선한 일에 앞장서는 데 마음을 쓰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좋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다.디도서 3:8 · 두루새김

「앞에서 한 말은 믿을 만합니다」는 목회서신에서 특별한 진술을 강조할 때 쓰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4–7절의 구원 선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어디서부터를 정해진 형식의 신앙 고백으로 보아야 하는지까지 본문이 밝히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암송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도에게 확신 있게 강조하라고 합니다.

바로 여기서 3장 첫머리의 역설이 풀립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근거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선한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 진술을 모순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비로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충분히 가르칠수록 사람들이 선한 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장서는 데」(προΐστημι)로 옮긴 말은 앞에 서다, 책임을 맡다, 어떤 일에 힘쓰다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피할 수 없는 의무처럼 여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일에 마음을 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고, 그분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그 은혜를 삶으로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런 것들은 좋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다」에서 「이런 것들」이 구원의 가르침을 가리키는지, 그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선한 일을 포함하는지에는 약간의 해석상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흐름에서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구원에 관한 가르침은 사람들을 선한 일에 힘쓰게 하며, 그러한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문제에 관해 매우 열심히 논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일까요?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아주 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일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은혜와 선한 일의 이 관계는 에베소서 2:8–10과도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보여 줍니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유익한 일과 헛된 일

디도서 3:9–11 본문 →

모든 신학적 논쟁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를 따지는 일, 다툼과 율법을 둘러싼 싸움은 피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헛되기 때문입니다.디도서 3:9 · 두루새김

8절은 도움이 되는 일을, 9절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말합니다. 바울은 논쟁이 지적으로 흥미로운지, 논리가 정교한지,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습니다. 그 논쟁이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묻습니다.

이것을 모든 신학적 질문과 토론을 금지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에서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의 문제를, 고린도전서에서 부활과 은사와 예배의 질서를 깊이 다룹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어리석고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논쟁입니다.

「족보를 따지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그러한 논의가 율법을 둘러싼 싸움과 결합되어 공동체를 힘만 소모하는 갈등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상대를 이길 논리적 무기를 더 갖추라고 하지 않고, 어떤 논쟁에서는 아예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주장에는 답해야 할 때가 있지만, 어떤 대화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꺾기 위한 싸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세우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끝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갈라서기를 부추기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사람은 한 번, 두 번 경고한 뒤에는 멀리하십시오.디도서 3:10 · 두루새김

여기서 쓰인 그리스어 하이레티코스(αἱρετικός)는 영어의 ‘heretic’, 곧 이단자라는 말과 어원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곧바로 후대 교회에서 체계화된 ‘이단’이라는 개념을 가져오면 초점이 흐려집니다. 바울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그의 행동이 공동체에 편을 가르고 갈라놓는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을 즉시 쫓아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려 주고, 계속 공동체를 해친다면 다시 경고합니다. 그렇게 한 뒤에도 분열이 이어질 때 그와의 관계에 경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는 책임과 잘못된 사람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는 책임이 함께 있습니다.

두 번의 경고가 먼저입니다.

정당한 문제 제기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분열은 구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도자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기존의 가르침에 질문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반복되는 경고에도 공동체를 갈라놓는 행동을 지속하는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이 구별이 사라지면 공동체를 보호하라는 명령이 오히려 정당한 질문과 비판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며, 그것은 바울이 요구한 온화한 태도와 너그러움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기 행동으로 스스로 유죄임을 드러내고」라는 말의 의미

디도는 그런 사람이 비뚤어져 죄를 짓고 있으며, 자기 행동으로 스스로 유죄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디도서 3:11 · 두루새김

「스스로 유죄임을 드러내고」(αὐτοκατάκριτος)로 옮긴 말은 스스로 유죄 판정을 받을 근거를 만들어 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비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복적인 경고를 받고도 잘못된 행동을 계속함으로써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경계는 불편한 사람을 멀리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잘못을 지속하는 상황에서 공동체를 보호하는 조치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모든 사람에게 온화하라는 2절과 경계를 세우라는 10절 사이의 긴장이 이해됩니다.

온화함은 모든 행동을 허용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단호함은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모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족보를 따지는 일」의 배경으로는 구약의 족보와 인물에 관해 추측을 펼치는 해석, 유대 전통으로 전해진 이야기와 관련된 논쟁 등이 제시되어 왔지만, 본문은 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경고 뒤에 경계를 세우는 순서는 마태복음 18:15–17에서 예수님께서 공동체 안의 죄를 다루는 과정을 설명하신 것과 주제적으로 연결되지만, 두 본문이 제시하는 절차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여행 계획이 보여 주는 것

디도서 3:12–14 본문 →

왜 바울은 여행 이야기를 꺼내는가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디도에게 보내거든, 나를 만나러 니고볼리로 서둘러 오십시오. 내가 그곳에서 겨울을 나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디도서 3:12 · 두루새김

여기서 편지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구원과 자비, 성령, 의롭다고 인정받음과 영원한 생명, 공동체의 갈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아주 현실적인 여행 계획이 등장합니다. 디도는 크레타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면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아데마나 두기고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려고 계획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말만으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이동해야 했고,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며, 그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도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곧 다음 구절의 주제가 됩니다.

세나와 아볼로에게 모자란 것이 없도록

법에 밝은 세나와 아볼로가 여행에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도록 힘껏 도와 보내십시오.디도서 3:13 · 두루새김

바울은 이들의 신학적 능력이나 사역의 성과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도록 준비하라는, 아주 소박한 부탁을 합니다. 본문은 물품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지만, 이동을 위한 실제적인 지원을 뜻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선한 일에 앞장서라고 거듭 말한 바울이 편지 끝에서 실제로 요청하는 선한 일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에서 현실의 삶으로 잠시 벗어난 장면이 아니라, 앞의 신학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사용합니다.

「우리와 함께 믿는 사람들도」 좋은 일에 앞장서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와 함께 믿는 사람들도 꼭 필요한 것을 채워 주기 위해 선한 일에 앞장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열매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도서 3:14 · 두루새김

13절의 여행 준비는 개인적인 부탁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선한 일에 앞장서는 법」에 쓰인 동사는 8절의 「선한 일에 앞장서는 데」에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 8절이 선한 일에 앞장서도록 가르치라고 했다면, 14절은 그 선한 일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채우는 일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현실적인 필요를 가리킵니다. 바로 앞의 세나와 아볼로의 여행 지원이 중요한 사례이지만, 이 원칙을 그 두 사람에게만 제한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기 쉽고, 가진 것을 나누려면 관심을 기울이고 때로는 계획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열매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추상적인 종교적 성취나 눈에 띄는 업적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문맥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삶이 열매 있는 삶과 연결됩니다.

조금 더 깊이

아데마에 관해서는 이 구절 외에 신약이 알려 주는 정보가 없습니다. 두기고는 에베소서 6:21–22와 골로새서 4:7–9에서 편지를 전달하고 공동체의 사정을 전하는 믿음직한 동역자로 소개됩니다. 니고볼리는 여러 도시가 같은 이름을 썼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확정할 수 없으며, 그리스 서부 에피로스 지역의 니고볼리가 유력한 후보로 제시됩니다. 세나가 유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는지 그리스·로마 사회의 법률을 다루는 사람이었는지는 그리스어 표현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아볼로는 사도행전 18:24–28과 고린도전서 3장 등에서 성경에 밝고 능력 있게 가르치는 사람으로 소개되며, 디도서의 아볼로도 그와 같은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마지막 인사에 담긴 공동체의 모습

디도서 3:15 본문 →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디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디도서 3:15 · 두루새김

편지의 대부분에서 바울은 디도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은혜의 인사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지며, 그리스어에서도 마지막 대명사는 복수형입니다. 이 편지가 디도의 개인적인 사역만이 아니라 그가 돌보는 공동체 전체와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디도에게 안부를 전하고, 디도는 크레타에서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는 각 지역에 고립된 집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동하고 서로의 소식을 전하며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시작된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계속됩니다.

맺으며 — 모자란 것이 없도록

디도서 3:1–15 본문 →

디도서 3장에서 선한 일은 세 자리에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할 준비를 갖춰야 할 일로, 중간에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으로, 마지막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앞장서야 할 일로 나타납니다. 이 세 진술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구원의 근거이고, 선한 일은 그 은혜가 사람의 삶에서 만들어 내는 열매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한때는」이라는 고백 때문에, 이 공동체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을 쉽게 경멸하지 않습니다. 처음의 온화함은 마지막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디도서 3장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세나와 아볼로를 힘껏 도와 보내라고 부탁합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고, 성령을 넉넉히 부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상속자로 세우셨다는 깊은 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선언 뒤에 이어지는 일은 놀랍도록 평범합니다.

길을 떠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값을 갚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자비가 삶에 맺는 열매입니다.

그 은혜 아래에서 한 사람은 길을 떠나고, 다른 사람은 그를 돕습니다. 누군가는 그를 대신하여 공동체를 돌보고, 또 다른 사람은 필요한 것을 채워 줍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사람들이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