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3–16장 · 예루살렘으로 온 궤
모두가 옳다고 여긴 길이 멈추다
역대상 13장은 좋은 계획이 어떻게 비극으로 끝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궤를 다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심으로 모시려는 것입니다. 그는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지도자들과 의논합니다. 온 회중의 동의를 얻고, 멀리 떨어져 사는 형제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까지 부르려고 합니다.
계획은 훌륭해 보입니다.
왜 하나님을 찾으려는 좋은 계획이, 온 백성이 동의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는데도 중단되었을까요?
좋은 계획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3장은 다윗이 지도자들과 의논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다윗은 천인대와 백인대 지휘관들을 비롯한 모든 지도자와 의논했다.역대상 13:1 · 본디새김
천인대와 백인대 지휘관들은 군사 조직의 지도자들입니다. 다윗은 이들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이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힙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했다. 「너희가 좋게 여기고 이 일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들과, 그들과 함께 목초지가 딸린 성읍들에 사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두루 전갈을 보내자. 그들이 우리에게 모이게 하자.」역대상 13:2 · 본디새김
다윗은 두 가지를 함께 말합니다. 백성들이 좋게 여기는가, 그리고 이 일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온 것인가. 다윗은 백성의 뜻을 존중하면서 하나님의 뜻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온 회중은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모든 백성의 눈에 그 일이 옳게 보였기 때문이다.역대상 13:4 · 본디새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여호와야훼에게서 나온 것인지는 어떻게 확인되었을까요?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궤를 옮기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예언자를 통해 허락하셨다는 기록도 없고, 구체적인 운반 방법을 여호와야훼께 물었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다만 1–4절이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사람들과의 의논과 그들의 동의입니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판단한 일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지도자들과 상의하고 여러 사람의 뜻을 모은 것은 이 본문에서 비판받는 행동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공동체의 동의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울 시대에 찾지 않았던 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 옮겨 오자. 우리가 사울 시대에는 그 궤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역대상 13:3 · 본디새김
하나님의 궤는 이스라엘과 여호와야훼의 언약을 상징하는 성물입니다. 궤 안에는 언약의 증거가 놓였고, 그 위의 속죄판과 그룹들 사이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모세를 만나 말씀하신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출애굽기 25:10–22). 그러므로 궤를 되찾으려는 계획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공동체의 중심에 다시 두려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의 역대상 10:14에서 사울이 여호와야훼께 응답을 구하지 않았다고 평가할 때도 ‘찾다(דָּרַשׁ)’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13:3에서는 사울 시대에 하나님의 궤를 찾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두 구절은 서로 다른 대상을 언급하지만, 하나님을 찾는 일과 관련된 동일한 동사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13:3의 히브리어에는 또 하나의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찾지 않았다’의 목적어에 해당하는 대명사는 문맥상 궤를 가리킬 수도 있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바로 앞에 나온 하나님의 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으면, 10장의 사울에 대한 평가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다윗이 과거의 소홀함을 바로잡으려 한다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다만 ‘사울 시대에는 찾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에 누구도 궤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는 절대적인 역사적 진술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이전 시대의 전반적인 소홀함을 돌아보는 다윗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궤를 다시 찾는 과정에서 정작 무엇을 놓쳤는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모였지만, 궤는 어떻게 옮겨졌는가
5절은 다윗의 계획이 얼마나 큰 규모로 실행되었는지 보여 줍니다.
다윗은 기럇여아림에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고 이집트의 시홀에서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았다.역대상 13:5 · 본디새김
시홀은 이집트 방면의 남쪽 경계와 관련된 지리적 표현이며, 하맛 어귀는 북쪽 경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시홀이 구체적으로 어느 물줄기를 가리키는지, 하맛 어귀를 지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 둘지는 해석에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지점의 정확한 위치보다, 남쪽에서 북쪽까지 이스라엘의 넓은 영역을 나타낸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다윗이 여러 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으로 세워진 일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제 왕으로서 그가 처음 추진하는 중요한 공동체적 사업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는 일입니다.
왜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는가
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물게 된 배경은 사무엘상 4–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여호와야훼의 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습니다(사무엘상 4:10–11).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자신들의 신전에 두었을 때 다곤의 신상이 쓰러지는 일이 일어났고, 궤가 옮겨지는 지역들에는 재앙이 닥쳤습니다(사무엘상 5장).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궤는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져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었습니다(사무엘상 7:1–2).
다윗은 이 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여기서 궤의 이동은 단순한 장소 변경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새로 형성된 왕국의 중심지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징하는 궤를 두려는 것입니다.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여호와야훼
다윗과 온 이스라엘은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으로 올라갔다. 그룹들 위에 앉아 있는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궤, 곧 그 이름이 불리는 궤를 그곳에서 올려 오려는 것이었다.역대상 13:6 · 본디새김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시다는 표현은 왕좌에 앉은 통치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5:18–22에 따르면 궤의 속죄판 위에는 두 그룹이 마주 보는 형태로 놓였고, 여호와야훼는 그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야훼의 왕적 통치와 임재를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궤는 여호와야훼의 언약과 임재에 특별히 연결된 성물입니다. 이스라엘이 궤를 옮긴다고 해서 하나님 자신을 사람의 뜻대로 옮기거나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 이름이 불리는 궤’라는 표현에도 약간의 문법적 여지가 있습니다. 이름이 불리는 대상이 궤인지,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인지 분명히 나누기 어렵습니다. 이 궤는 여호와야훼의 이름과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특별한 성물입니다.
새 수레가 왜 문제가 되었는가
사람들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어 옮겼다. 웃사와 아히오가 수레를 몰았다.역대상 13:7 · 본디새김
사무엘상 6:7–12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낼 때 새 수레를 사용했습니다. 두 사건이 같은 운반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이나 그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방법을 의식적으로 모방했다고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25:12–15에 따르면 궤에는 운반용 채가 있었고, 그 채를 궤에 끼워 두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민수기 4:15에서는 그핫 자손이 성소의 거룩한 기구들을 운반하도록 정해져 있었으며, 거룩한 물건을 직접 만져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민수기 7:9에서는 그핫 자손에게 수레를 주지 않은 이유가 설명됩니다. 그들은 거룩한 물건들을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는 정해진 책임자와 방식이 있었습니다.
새 수레를 사용하는 방법은 보기에는 정성스럽고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정에 부합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흥겹게 뛰놀며, 노래를 부르고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심벌즈와 나팔을 연주했다.역대상 13:8 · 본디새김
본문은 그들의 기쁨이 거짓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다음 장면이 더욱 충격적입니다.
웃사는 왜 죽었는가
행렬은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릅니다.
그들이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웃사가 궤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소들이 비틀거렸기 때문이다.역대상 13:9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웃사를 향해 타올랐다. 여호와야훼는 웃사가 궤에 손을 뻗은 일로 그를 쳤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역대상 13:10 · 본디새김
웃사의 행동은 궤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소들이 비틀거렸다면 수레에 실린 궤가 흔들렸을 것입니다. 웃사는 궤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손을 뻗은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마음으로 행동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순간적으로 반응한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 민수기 4:15의 규정이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거룩한 물건들을 운반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직접 만지면 죽을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아무나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구별된 성물이었으며, 궤를 가까이하고 운반하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규정을 안다고 해서 사건에 관한 모든 질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운반 방식을 결정한 다윗과 지도자들이 아니라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까? 웃사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책임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가 순간적으로 궤를 붙잡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본문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인가, 공동체의 잘못인가
이 지점에서 역대상 15:13은 중요한 해석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처음에 레위 사람들이 궤를 메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여호와야훼를 찾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치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사건의 원인을 웃사 개인에게만 돌리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처음부터 궤를 옮기는 일을 올바른 방식으로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본문은 웃사가 궤에 손을 뻗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행동을 불러온 운반 과정 전체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뒤의 이야기에서 밝힙니다. 웃사가 전적으로 무고했고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를 죽이셨다고 단정하는 것도, 웃사의 죽음이 그의 숨겨진 악한 의도 때문에 당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눈앞에서 마지막 행동을 한 사람만 바라보면, 그 행동이 발생하도록 만든 공동체의 결정과 준비를 놓칠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는 목표를 제시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 정당한지도 살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역대상 13장은 왕권에 관한 앞 장들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워졌습니다. 그는 백성을 이끄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는 그의 지도 아래 있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다윗의 개인적인 악의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일을 주도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열심과 좋은 의도만으로 그가 내린 모든 결정이 정당해질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샤므투(שָׁמַט)는 놓치거나 떨어뜨리는 행위와 관련된 동사로, 이 문맥에서 소들이 비틀거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소들이 무언가를 떨어뜨릴 듯 움직였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물리적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웃사가 궤에 손을 뻗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분노와 다윗의 분노
웃사가 죽자 다윗이 반응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웃사를 덮쳐 쳤기 때문에 다윗은 화가 났다. 그는 그곳을 베레스웃사라고 불렀다. 그곳은 오늘날까지 그 이름으로 불린다.역대상 13:11 · 본디새김
다윗이 먼저 회개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향해 분노했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화를 낸 것인지, 웃사가 죽은 사태 자체에 분노한 것인지, 계획이 중단된 것에 대한 분노까지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윗을 무조건 하나님께 반항한 사람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고, 그의 분노를 전적으로 거룩한 의분으로 정당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분노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베레스웃사라는 이름에 남은 사건
다윗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널리 퍼뜨려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습니다. 그 사건은 베레스웃사라는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다윗이 계획한 큰 행렬은 여기에서 멈추었습니다.
기쁨이 두려움으로 바뀌다
그날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게 가져올 수 있겠는가?」역대상 13:12 · 본디새김
기쁨, 분노, 두려움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 빠르게 이어집니다. 이 변화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바라보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했고, 자신이 그 궤를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과 마주했습니다.
아직 다윗은 궤를 가져오는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계획을 중단합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동의를 얻어 궤를 옮기기 시작했지만, 여호와야훼의 거룩함 앞에서 그 계획을 계속 밀어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주인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에서는 여호와야훼의 분노가 웃사를 향해 타올랐다고 기록합니다. 11절에서는 다윗이 화가 났다고 기록합니다. 같은 표현이 서로 다른 주어와 함께 연이어 등장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웃사를 덮쳐 치셨다는 표현과 베레스웃사라는 지명이 같은 어근으로 연결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곳곳에 있는 형제들에게 두루 전갈을 보내자고 말했습니다. 2절에서는 소식을 널리 퍼뜨리는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11절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갑작스럽게 덮쳐 치시는 사건을 나타냅니다. 두 구절이 의도적으로 하나의 말놀이를 이루도록 배치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같은 어근이 이야기의 시작과 위기에서 매우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궤가 두려운 물건이라면, 왜 오벳에돔은 복을 받았는가
다윗은 결정을 바꿉니다.
다윗은 그 궤를 자신에게, 곧 다윗성으로 옮겨 오지 않았다. 대신 그 궤를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돌려 옮겼다.역대상 13:13 · 본디새김
하나님의 궤는 오벳에돔의 집에서 그의 집안과 함께 석 달 동안 머물렀다. 여호와야훼는 오벳에돔의 집안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에 복을 주었다.역대상 13:14 · 본디새김
거룩함은 위험하기만 한 것인가
웃사의 죽음만 읽으면 하나님의 궤는 가까이하면 안 되는 위험한 물건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14절은 그런 단순한 이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웃사의 죽음은 그 거룩함을 대하는 방식의 엄중함을 보여 줍니다. 오벳에돔의 집에 임한 복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사람에게 오직 죽음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의 거룩함은 그분의 백성에게 복의 근원이면서도, 동시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현실입니다.
출애굽기 19:10–13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실 때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했고, 정해진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가까이 오신 목적은 그들을 무조건 멀리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언약을 맺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출애굽기 19:4–6).
레위기 9장에서도 비슷한 양면이 드러납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고, 여호와야훼 앞에서 나온 불이 제단 위의 제물을 사릅니다(레위기 9:23–24). 백성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엎드립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에서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야훼께서 명령하지 않은 불을 바쳤다가 죽는 사건이 기록됩니다(레위기 10:1–3).
이러한 본문들은 하나님이 때로는 은혜로우시다가 때로는 변덕스럽게 위험한 분이 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일이 얼마나 거룩하고 중대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오벳에돔이 어떤 특별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역대상 13장은 그가 궤를 어떻게 맞이했는지, 어떤 예배를 드렸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 경건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임재가 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오벳에돔을 ‘가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주요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을 블레셋의 가드 출신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드림몬과 같은 다른 지명과 관련된 출신 표현으로 볼 가능성도 있습니다. 역대상 15–16장에는 오벳에돔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전 봉사자가 등장하며, 역대상 26:4–8에는 오벳에돔의 자손들이 문지기 직무와 관련하여 기록됩니다. 이들이 모두 동일 인물과 그 직계 가족을 가리키는지,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역대상 13장의 오벳에돔을 이방인이라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반드시 레위 사람이라고 확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맺음 — 다윗성으로 가지 못한 궤
하나님의 궤를 가져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계획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뜻과 질서 아래로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윗과 백성에게는 좋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관련된 규정이 충분히 존중되지 않았습니다.
역대상 13장의 구체적인 규정은 이스라엘의 성막과 언약궤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공동체의 모든 절차나 관습을 하나님의 언약궤 운반 규정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직접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주신 말씀과 명령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든 관습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성읍으로 가져올 수 없었지만, 여호와야훼께서는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장대한 행렬은 멈추었고, 음악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다윗성이 아닌 한 집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집에서 석 달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은 복을 받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