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인사와 편 가르기

십자가 앞에서 사라지는 자랑

고린도 교회에는 좋은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고, 아볼로에게 성경을 배웠으며, 베드로의 이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과 지식에 풍성했고, 하나님에게서 여러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교회가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훌륭한 교사에게 배웠는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가 서로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는 누가 옳은지부터 가리지 않습니다. 교사들의 능력을 비교하지도 않고, 교회 조직을 어떻게 개편해야 할지 제안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느닷없이 십자가 이야기를 꺼냅니다.

교회의 분열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높이고, 능력 있는 사람을 따르며, 자랑할 만한 이름을 자기 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에는 그 모든 평가 기준을 뒤집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럽고 무력하다고 여겼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이 이미 믿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교회,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

고린도전서 1:1–9 본문 →

문제 많은 교회를 향한 뜻밖의 인사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도라는 사실보다 먼저 밝히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사도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며, 자기 능력으로 사도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이름을 올린 소스데네는 「형제」라고 불립니다.

이어서 수신인을 부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진 이들,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그리고 곳곳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아울러 이 편지를 씁니다. 그분은 그들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고린도전서 1:2 · 본디새김

편지를 계속 읽으면 이 교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교인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있고, 성적 부도덕이 문제가 되며, 서로 소송을 벌이고, 주님의 만찬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욕을 당합니다.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일에도 무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교회를 향해 「거룩해진 이들」, 「성도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이 사람들이 이미 도덕적으로 완전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행실을 먼저 평가한 뒤 성도라는 자격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관계를 먼저 선언합니다.

이것은 이후의 책망을 약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삶도 그 관계에 합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이지만, 고린도의 소유는 아닙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이지만 바울의 소유도 아니고, 아볼로가 가르쳤다고 해서 아볼로의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지도자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얻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분열 문제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곧이어 수신인의 범위를 「곳곳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로 넓힙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만의 문제와 독특한 상황을 가진 지역 공동체이지만, 그들이 부르는 주님의 이름은 그들만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한 도시나 집단에 독점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곧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편지의 첫머리부터 그들의 시선을 모든 사람이 함께 부르는 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바울은 왜 이 교회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4절부터 9절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모든 면에서, 곧 모든 말과 모든 앎에서 넉넉해진 까닭입니다.고린도전서 1:5 · 본디새김

뒤에 나올 문제들을 생각하면 조금 의아하게 들립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의 말과 지식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은근하게 비꼬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감사의 문맥 전체를 단순한 반어법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은사가 없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은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느냐에 있었습니다. 말을 잘하는 능력도, 지식도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인데, 그것을 자신을 높이는 근거로 바꿔 버린다면 선물의 의미가 뒤집힙니다. 받았다는 사실은 잊고 자신이 소유했다는 사실만 남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감사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그들 가운데 굳게 세워졌다는 데서(1:6),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나심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 은혜의 선물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데로(1:7), 그리고 그분이 그들을 끝까지 굳게 세워 주실 것이라는 데로(1:8) 나아갑니다. 6절의 「굳게 세워진」(βεβαιόω)과 8절의 「굳게 세워 주시어」에는 「확고하게 하다」라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입니다. 이미 그들 가운데 확립된 복음의 증언과 앞으로 그들을 끝까지 지켜 줄 약속이 같은 낱말로 이어집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풍성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주신 분이 끝까지 그들을 붙드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풍성함은 완성의 증거가 아니며, 그 풍성함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감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습니다.

하나님은 미더우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통해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관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고린도전서 1:9 · 본디새김

「함께 나누는 관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친밀한 교제를 뜻할 수도 있지만, 무엇인가에 함께 참여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관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종교적 경험을 쌓아 온 사람들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와 관계를 나누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여야 하는 이유는 서로 마음이 잘 맞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한 분의 그리스도와 관계를 나누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8:17에도 소스데네라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1:2의 마지막 표현은 원문의 문법상 두 가지 연결이 가능합니다. 「그들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주님」으로 읽을 수도 있고, 앞의 「곳」과 연결하여 그들과 우리의 모든 곳을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첫 번째 읽기를 택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고린도 교회를 더 넓은 신앙 공동체와 연결한다는 문맥상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가 나뉘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10–17 본문 →

사람들이 그리스도보다 자기 편을 먼저 말하기 시작할 때

10절에서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갈라짐이 없으며,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이어지라는 것입니다.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이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다툼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이 정보의 출처를 밝힐 만큼 구체적인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2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사도행전 18:1–11).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 능통했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8:24–28).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 이름입니다.

그렇다고 바울, 아볼로, 게바가 실제로 서로 경쟁하는 지도자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3장에서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일꾼들로 설명합니다. 교사들이 서로 적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교사들의 이름으로 자신을 구별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호인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는 해석이 갈리는 대목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자신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집단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앞의 세 구호와 달리 이것은 바울 자신의 반박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더라도 바울이 겨냥하는 문제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해할 때조차 서로를 구별하고 자기 위치를 높이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세 가지 질문으로 무너뜨립니다.

세 가지 질문으로 무너지는 파벌의 논리

그리스도가 나뉘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고린도전서 1:13 · 본디새김

첫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 자신을 향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여러 집단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들이 속한 그리스도마저 나누어 가질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십자가를 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을 가르쳤으며, 아버지처럼 돌보았습니다(4:15). 그러나 그는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사건의 중심에 바울은 없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세례를 향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행위인데,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나 자신을 가르친 사람을 자기 정체성의 근거처럼 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질문은 이 관계를 다시 바로잡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에 속합니까?

바울은 자기가 세례를 준 사람들의 수가 적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보와 가이오의 이름을 이야기했다가 스데바나의 집안사람들에게도 세례를 주었다고 덧붙이고, 그 밖에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정리된 명단 대신 기억나는 사람들을 말하다가 추가로 떠올리는, 뜻밖에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 자체가 논증에 잘 어울립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손으로 세례를 준 사람이 몇 명인지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말의 지혜로 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7 · 본디새김

이 말이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세례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고, 뒤에서도 세례를 신앙 공동체의 중요한 현실로 다룹니다(12:13). 여기서의 대조는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의 우선순위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려고 보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제 교회의 분열 문제에서 말의 지혜와 십자가의 관계로 논의를 옮깁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솜씨와 지혜를 평가하고, 그 사람의 이름으로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평가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복음 선포자가 자신의 화려한 말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면, 사람들은 선포자의 능력에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탄이 복음의 중심을 밀어낸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바울은 뛰어난 언변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능력이 십자가보다 앞에 서는 것을 경계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이 자신의 뛰어남을 과시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 도시였고,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신분과 명예, 영향력 있는 인물과의 관계가 사회적 지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문화가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 평가와 집단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교회 안의 구체적인 파벌 구조를 그대로 재구성할 자료는 부족합니다.

세상이 어리석다고 부른 곳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

고린도전서 1:18–25 본문 →

십자가가 왜 어리석게 보이는가?

그도 그럴 것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멸망해 가는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힘입니다.고린도전서 1:18 · 본디새김

십자가에 두 가지 다른 성질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평가 기준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고, 장신구나 예술 작품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의 십자가형은 로마 세계에서 극심한 고통과 공개적인 수치를 동반하는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권력에 완전히 굴복당한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세상이 힘을 행사하는 모습을 통해 능력을 알아본다면, 십자가는 능력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이 존경받는 사람의 명예를 통해 가치를 판단한다면,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곳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불편함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꾸미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 사건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멸망해 가는 이들」과 「구원받는 우리」는 현재 진행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누가 더 지적으로 뛰어난가를 구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인 십자가 앞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꺼냅니다.

이미 이사야가 말했던 지혜의 붕괴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혜로운 이들의 지혜를 없애고 슬기로운 이들의 슬기를 무효로 만들겠다.」고린도전서 1:19 · 본디새김

이사야 29:14에서 가져온 말씀입니다. 이사야 29장에는 하나님을 입술로는 공경하면서 마음은 멀리 떠난 백성,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에게 숨길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이사야 29:13–16). 문제는 그들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지혜와 계획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역사적 상황과 바울이 마주한 고린도의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지혜를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바울이 보기에 십자가는 이사야의 말씀이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난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어리석다고 판단한 사건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이가 어디 있습니까? 서기관이 어디 있습니까? 이 시대의 논객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까?고린도전서 1:20 · 본디새김

지혜로운 사람, 성경과 율법에 밝은 서기관, 논쟁에 능한 사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지식과 판단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지적 활동이 모두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이 지금 성경을 인용하고 논증을 펼치며, 지혜를 사용하여 지혜의 한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을 지식이나 학문에 대한 단순한 반대로 읽으면 바울의 의도를 놓치게 됩니다.

문제는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선포의 어리석음」을 택하셨을까?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은 선포의 어리석음으로 믿는 이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1 · 본디새김

「선포」로 옮긴 그리스어 케뤼그마(κήρυγμα)는 선포하는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선포되는 내용, 곧 선포된 메시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1:23에서 자신들이 선포하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밝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은 하나님이 어리석게 말하는 방식을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이해할 수 없게 말해야 더 영적인 것이 아니며, 성경을 깊이 연구하거나 지혜롭게 설명하는 일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설명이 있어도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 사람들은 표징들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고,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고 이방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고린도전서 1:22–23 · 본디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때때로 놀라운 능력의 사건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의 권력을 꺾으셨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기대하면서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는 표징을 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철학과 수사학의 전통이 있었고, 논증의 정교함과 설득력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 사람이 표징만 요구했고 모든 그리스 사람이 철학적 지혜만 추구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서로 다른 문화적 기대를 대표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양쪽의 기대를 모두 거스르십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구원자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치시기는커녕 적들의 손에 붙잡혀 처형되셨다는 사실이 걸림돌이 됩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인 죽음을 맞으신 분을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든 그리스 사람에게든, 하나님의 힘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말입니다.고린도전서 1:24 · 본디새김

바울은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표징을,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더 정교한 철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는 단순히 인간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나 더 영리한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하셨는지에서 드러난 지혜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힘과 명예를 통해 구원을 기대하던 자리에서, 고난과 수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들보다 힘세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5 · 본디새김

하나님에게 실제로 어리석음이나 무능력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평가 기준에서 어리석고 약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지혜와 힘을 뛰어넘는다는 역설입니다. 사람들은 힘센 구원자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시선을 십자가에서 그들 자신에게로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1:22–23에서 나무에 매달린 자와 하나님의 저주가 연결된다는 점도 유대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는 역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바로 그 말씀을 십자가에 적용합니다.

하나님은 왜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을까?

고린도전서 1:26–29 본문 →

「여러분이 받은 그 부르심을 보십시오」

26절은 논증의 새로운 전환점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그 부르심을 보십시오. 육을 따라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고, 힘 있는 이가 많지 않고, 높은 신분으로 태어난 이가 많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26 · 본디새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세상의 평가 기준을 뒤집는다는 증거를 멀리서 찾지 말고, 고린도 교인들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더 뛰어난 지도자를 따르는지, 누가 더 많은 지식과 은사를 가졌는지 따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처음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돌아보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많지 않습니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전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로만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는 가정에 교인들을 모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회적·경제적 형편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을 구원의 자격으로 삼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로운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어 힘센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의 미천한 것들과 업신여김을 받는 것들, 곧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 있는 것들을 무력하게 하려 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7–28 · 본디새김

이 반복에서 문장의 주어는 한결같이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약한 사람들의 탁월함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거나 낮은 신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더 선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없는 것들」은 세상의 평가 속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강렬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앞서 등장한 십자가의 역설과 닮았습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무력하고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지혜롭지 못하고 약하고 미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부르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물론 십자가의 구원과 교인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똑같은 사건은 아닙니다. 다만 양쪽 모두에서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행동이 대조됩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밝힙니다.

육을 지닌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9 · 본디새김

여기서 비로소 1장의 여러 이야기들이 한곳으로 모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의 이름을 자랑했습니다. 말과 지식과 은사를 통해 자기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방식 자체가 그런 자랑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그들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반드시 복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믿고,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고, 은사를 사용하면서도 분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복음의 내용을 고백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져올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기준을 십자가에서 뒤집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고린도전서 1:30–31 본문 →

지혜는 이제 무엇을 뜻하는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에게서 온 지혜가 되셨고, 의와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30 · 본디새김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일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께 이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에게서 온 지혜」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다는 말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지혜로운 생각 몇 가지를 배운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그분 자신과 그분이 이루신 일이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냅니다.

그다음 의와 거룩함과 속량에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리스어 문장에서는 「지혜」가 뒤의 세 표현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인지, 네 표현 모두가 나란히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의와 거룩함과 속량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 능력으로 획득하여 자랑할 수 있는 성취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연결됩니다.

「의」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관계와 신분을 얻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별되는 일과 관련되며, 1장 2절에서 이미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다고 불렸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속량」은 값을 치르고 풀어 주는 일과 관련된 표현으로, 구원과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말과 지식과 은사를 바라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 모든 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자랑할지 바꾸라는 것이다

「자랑하는 이는 주 안에서 자랑하여라」라고 적혀 있는 그대로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 · 본디새김

예레미야 9:23–24를 압축해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에서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 지혜를, 용사가 자기 힘을, 부자가 자기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사람이 자랑할 것은 땅에서 인애와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아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지혜를 자랑하고,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사회적 신분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레미야의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연결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자신의 탁월함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랑이라는 행위 자체를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말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자랑의 대상을 바꾸라고 합니다.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야 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을 높이기 위해 다른 집단과 차이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자랑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사람이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추기 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랑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낮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도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은 로마서 3:21–26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고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일을 설명하며, 로마서 3:24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속량을 말합니다. 1:30의 거룩함 역시 1:2에서처럼 그들의 현재 행실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뜻합니다.

십자가는 교회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고린도전서 1:1–31 본문 →

1장 내내 되풀이되는 낱말은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도이고(1:1), 고린도 교인들은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며(1:2),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나누는 관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9).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시고(1:24), 바울은 그들 자신이 받은 부르심을 돌아보라고 권합니다(1:26). 교회의 출발점은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한 선택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분열 문제를 십자가에서부터 풀어 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이 사람에게 붙이는 명예와 수치의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덜 중요한 지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지식과 은사를 가졌다고 다른 사람 위에 설 권리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약해지는 일을 그 자체로 미화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을 의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지위와 성취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 다른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그들 앞에서 바울은 누구의 이름이 더 훌륭한지 판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이라는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그는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 앞에서 자기 이름마저 뒤로 물리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교사도, 지혜도, 은사도, 사회적 지위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부른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드러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