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인사와 편 가르기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처음 찾아갔을 때의 자신을 「약함 가운데, 두려움 가운데, 몹시 떨면서」 함께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장의 마지막에서 그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치겠느냐?」라는 오래된 질문에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두 문장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던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두 문장을 이어 줍니까?
지혜로운 사람이 오랜 연구와 수련 끝에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자기 지혜를 내세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알게 된 것은 인간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통해 그것들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사람들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판단을 뒤집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정말 하나님의 지혜라면, 세상의 통치자들도 알아보지 못한 그 지혜를 고린도 교인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성령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역할은 단순히 신비한 체험을 제공하거나 특별한 지식을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셨는지 알게 하십니다.
이 장의 흐름도 그 방향을 따라갑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이야기합니다(1–5절). 이어 그 복음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합니다(6–9절). 그런 다음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가 성령을 통해 어떻게 드러나고 전달되는지 밝힙니다(10–13절). 마지막에는 그 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를 살피며, 그리스도의 마음에 관한 선언으로 마무리합니다(14–16절).
떨고 있던 사람이 전한 복음
바울은 왜 자신의 약함을 이야기합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던 때를 회상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 하나님의 신비를 전하면서 뛰어난 말이나 지혜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고린도전서 2: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세상의 약하고 미천한 것들을 택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나도」라는 말로 이제 자기 자신을 그 이야기 안으로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약한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 자신도 약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에게 지식이나 언변이 부족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편지들을 읽어 보면 구약성경을 폭넓게 이해하고, 복잡한 논증을 세우며, 상대방의 주장을 치밀하게 반박하는 능력이 드러납니다.
핵심은 「내세우지 않았습니다」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솜씨와 지적 능력을 복음의 권위를 세우는 근거로 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2 · 본디새김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오해하기 쉬운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생애나 부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고린도전서만 보아도 바울은 주님의 만찬과 예수님의 죽음(11:23–26), 부활(15장), 사랑(13장), 교회의 삶에 대해 폭넓게 가르칩니다.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정했다」는 것은 지식의 범위를 십자가라는 한 사건에만 제한하겠다는 뜻이라기보다, 자신이 전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중심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 두겠다는 선언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라고 덧붙여 예수님의 정체성을 십자가와 연결합니다.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 그분의 수치스러운 죽음은 뒤로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죽음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중심이라고 밝힙니다. 이는 설교의 주제를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 바울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것인지도 결정합니다.
약함은 연출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약함 가운데, 두려움 가운데, 몹시 떨면서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고린도전서 2:3 · 본디새김
「약함」, 「두려움」, 「몹시 떨면서」라는 표현은 바울의 선교 활동을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생각하는 독자에게 의외로 다가옵니다. 그는 자신을 항상 확신에 차 있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누구 앞에서도 당당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부러 약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한 현실 속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지 않는 사도의 모습은 그가 전하는 복음과 어울립니다. 반대로 바울이 자신의 위엄과 뛰어난 능력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려 했다면,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보다 바울 자신이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가능성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나의 말과 나의 선포는 지혜의 설득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영과 힘의 증명으로 한 것이었습니다.고린도전서 2:4 · 본디새김
「증명」은 어떤 주장이나 사실을 입증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사람의 지혜로운 설득이 아니라 영과 힘의 증명이 있었다는 대조를 만듭니다.
그 증명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기적과 표징을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믿게 되고 변화되는 성령의 역사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표징과 능력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전자를 배제할 수 없지만, 이 구절만으로 구체적인 기적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2:5 · 본디새김
이것이 첫 단락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설교자였는지 기억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혜에 대한 감탄으로 시작된 믿음은 그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알고 신뢰하는 믿음은 선포자의 명성과 구별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과 아볼로의 이름을 내세워 서로를 구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처음 고린도에 왔을 때 무엇을 원했는지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바울이라는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믿음의 기초를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연설은 중요한 능력이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수사학 전통에서는 연설의 구성과 설득력, 연설자의 기량을 높이 평가했고, 1절의 바울의 말은 이런 문화적 배경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의 모든 수사학이나 설득 기술을 바울이 거부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 사도행전 18:9–10에는 주님께서 고린도에 있던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말하라고 격려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기록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두려움을 경험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지만, 3절의 두려움이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박해의 위협 때문일 수도 있고, 사명의 무게 때문일 수도 있으며, 몸의 연약함까지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들도 알아보지 못한 지혜
「그런데 우리는 다 자란 이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합니다」
6절은 예상 밖의 전환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자란 이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합니다. 그 지혜는 이 시대의 것도 아니고 이 시대 통치자들, 곧 없어져 가는 이들의 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2:6 · 본디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사람의 지혜를 내세우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도 지혜를 말한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지혜 자체를 거절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 자란 이들」은 문맥에 따라 완전한 사람들, 성숙한 사람들, 충분히 자란 사람들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일반 신자에게는 단순한 복음을 전하고, 높은 수준에 오른 소수에게는 별도의 비밀 지식을 전한다는 말일까요?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바로 다음 장의 내용이 걸립니다.
고린도전서 3:1–3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영에 속한 사람들처럼 말할 수 없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말하듯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이 사실은 「다 자란 이들」이 단순히 지식이 많거나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성숙함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 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과 관련됩니다.
바울은 지혜를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이 시대의 통치자들이 가지고 있고, 이 시대와 함께 사라져 가는 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현재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없어져 가는 이들」이라 부르며 영원한 권위의 소유자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힘과 지혜는 현재의 시대에 속해 있고, 그 시대와 함께 지나갑니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신비 안에서 말합니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던 것이고, 하나님이 시대들이 있기 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2:7 · 본디새김
이 시대의 통치자들은 없어져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은 시대들이 있기 전부터 그분의 뜻 안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새롭게 드러난 것이지만, 하나님에게 갑작스럽게 떠오른 계획은 아닙니다.
감추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신비」는 이 문맥에서 인간이 스스로 알아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드러내신 비밀을 가리킵니다. 7절의 「감추어져 있던」과 10절의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를 함께 읽으면,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하는 지식이 아니라 이제 성령을 통해 알려진 지혜입니다. 2:1의 「하나님의 신비」도 이 흐름과 연결됩니다.
7절에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렸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해 지혜를 미리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바울이 거절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지혜와 힘과 지위로 얻으려는 영광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이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별 볼 일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영광을 주시려 하십니다. 그 영광은 인간이 스스로 획득하는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면서 받는 선물입니다.
그들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시대 통치자들 가운데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알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8 · 본디새김
사람의 눈에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패배한 사람으로 보이십니다. 권력자들은 그분을 심판하고 처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분이 영광의 주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님을 처형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처형하는 분이 누구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이 시대의 지혜가 가진 결정적인 한계입니다. 단지 지식이 부족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평가했고,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이 이루고 계신 일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 통치자들」을 십자가형에 관여한 인간 권력자로 읽든, 그 배후의 악한 영적 권세로 읽든, 바울의 핵심 주장은 같습니다. 이 시대의 권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도 귀도 알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이 준비하셨습니다
도리어 적혀 있는 대로입니다. 「눈이 보지 못했고 귀가 듣지 못했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것들이다.」고린도전서 2: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사람이 죽은 뒤에 들어갈 천국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때 인용됩니다. 하나님이 장차 완성하실 구원을 생각하면서 읽을 수도 있지만, 장래의 천국에만 한정하면 바울이 설명하려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영을 통해 그것들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신비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알아내지 못했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제 성령을 통해 알려졌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9절의 인용은 이사야 64:4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그 본래 문맥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어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그 주제를 십자가와 성령의 계시라는 새로운 문맥에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구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바울은 이제 성령이 누구신지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2:1의 「하나님의 신비」에는 실제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로 읽는 사본들과 「하나님에 관한 증언」으로 읽는 사본들이 있으며, 어느 읽기가 원문인지를 두고 본문비평상 논의가 있습니다. 이 번역은 전자를 택했지만, 어느 쪽이든 바울이 전한 내용의 중심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8절의 「이 시대 통치자들」을 두고도 해석이 갈립니다. 첫 번째 읽기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관여한 인간의 정치·종교 권력자들을 가리킨다는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표현이 역사적 처형을 직접 가리킨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두 번째 읽기는 인간의 통치자들 배후에 있는 악한 영적 권세를 가리킨다는 것으로, 바울이 다른 곳에서 악한 영적 권세들을 말하고 이 구절에서도 단순한 인간적 무지보다 넓은 차원의 대립을 다룬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두 차원을 함께 포함한다고 보는 읽기도 있으며, 본문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9절의 인용은 현재 남아 있는 히브리어 본문이나 칠십인역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사야의 여러 표현을 결합한 인용인지, 다른 전승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이사야 64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셔서 자신들을 위해 행동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예언자는 하나님 외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이처럼 행동하는 신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살피는 영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영을 통해 그것들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영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 살피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10 · 본디새김
9절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고 말한 것을, 10절에서는 하나님이 드러내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 아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살피다」는 자세히 살펴보거나 탐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나님에 관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다가 조사하여 알아낸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것들에까지 접근하여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일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 말고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알고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고린도전서 2:11 · 본디새김
어떤 사람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마음속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다른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깊은 일은 하나님의 영이 아십니다.
이 비유가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존재하는 방식까지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성령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해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속뜻을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패배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도록 말입니다.고린도전서 2:12 · 본디새김
바울은 성령을 받은 목적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특별한 능력을 얻거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을 알도록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식과 영적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시는 것의 중심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자기 자신을 더욱 자랑하게 된다면, 그는 지금 무엇을 알아 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여기서 참된 앎은 자랑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많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셨고, 이제 그 일을 알도록 자신의 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알게 하실 뿐 아니라 말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영에 속한 것을 영에 속한 것과 견주면서, 그것들을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이 아니라 영이 가르친 말로 이야기합니다.고린도전서 2:13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드러내셨고, 우리가 성령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계시가 선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13절의 마지막 표현은 세 방향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영에 속한 것들을 영에 속한 것들과 견주거나 연결한다는 읽기(이 번역의 선택), 영에 속한 것들을 영에 속한 사람들에게 설명한다는 읽기, 영에 속한 내용을 영에 속한 말로 설명한다는 읽기입니다. 한 가지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이 갈림이 13절 전체의 흐름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구원을 알아낸 뒤 자기 능력으로 전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알게 되는 일과 그것을 선포하는 일 모두가 성령의 역사에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설교가 아무런 인간적 사고나 언어 활동 없이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실제로 생각하고, 설명하고, 논증합니다. 다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근원을 자기 지혜에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났고 사람들이 그것을 선포한다면, 누구나 그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 마지막 표현의 원문은 프뉴마티코이스 프뉴마티카 슁크리논테스입니다. 앞의 낱말이 「영에 속한 것들」과 「영에 속한 사람들」 양쪽으로 읽힐 수 있고, 동사도 「견주다·연결하다」와 「설명하다」를 함께 뜻할 수 있어서, 원문의 문법과 동사의 의미가 세 가지 읽기를 모두 허용합니다.
왜 같은 복음이 누구에게는 어리석고 누구에게는 지혜롭습니까?
「목숨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목숨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것들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알 수 없는데, 그것들이 영으로 따져 물음을 받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14 · 본디새김
「목숨에 속한 사람」(ψυχικός)은 목숨·생명·혼을 뜻하는 낱말에서 나온 형용사로 만든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바울이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나누어, 몸에 속한 것은 나쁘고 영에 속한 것은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읽으면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의 몸에 관한 설명도 오해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목숨에 속한 몸」과 「영에 속한 몸」을 대조하지만, 부활 후에는 몸이 사라지고 영혼만 남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2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드러내신 것을 어떤 사람이 받아들이고 알아볼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목숨에 속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반면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드러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공부를 적게 한 사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서로 대립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는 같은 복음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어리석다고 판단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받아들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차이는 인간의 지적 우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드러내신 것을 받아들이는가에 있습니다.
「따져 묻다」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는 이유
14절과 15절에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세 번 등장합니다. 이 말은 자세히 조사하고, 심문하고, 검토하거나 분별한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고, 이 번역은 그 반복을 「따져 묻다」로 살렸습니다.
영에 속한 이는 모든 것을 따져 묻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따져 물음을 받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2:15 · 본디새김
영적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일까요? 자신의 판단은 언제나 정확하며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바울의 편지 전체와 충돌합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 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시기와 다툼을 책망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의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예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분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14:29). 그러므로 「모든 것을 따져 묻는다」를 무오류의 판단 능력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문맥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된 사람은 세상의 평가 기준에 매이지 않고 그 사건의 의미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따져 물음을 받지 않습니다」도 영에 속한 사람은 누구의 비판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성령이 드러내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그 지혜에 근거한 판단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영에 속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면책권을 부여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의 지혜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람의 말과 능력을 평가하는 일에 익숙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 평가 기준 자체를 성령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다시 검토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인간의 모든 판단을 뛰어넘는 존재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판단 기준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누구도 알 수 없었던 마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치겠느냐?」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2:16 · 본디새김
이것은 이사야 40:13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은 바벨론 유배와 회복의 전망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고,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처럼 강력한 제국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정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요?
이사야는 하나님을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헤아리시고, 하늘의 크기를 재시며, 땅의 먼지를 되로 달 수 있는 분으로 묘사합니다(이사야 40:12).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영을 헤아릴 수 있으며,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어 그분을 가르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혜를 빌려 세상을 창조하거나 구원을 계획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사람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스스로 알아낼 수 없다고 말해 왔습니다. 이사야의 질문은 그 사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대답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말 뒤에 찾아온 반전
그런데 바울은 그 질문 뒤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하나님이 알 수 없는 분이라는 말과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까?
바울은 10절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스스로 헤아려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들을 알도록 그분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원래 문맥에서 「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야훼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인용하고 곧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일과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그만큼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셨는지 알고 싶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 표현의 초점은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일도 신약의 다른 본문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지혜의 인식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정보의 전달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말과 지식에서도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자랑하고, 서로를 비교하고, 지도자들의 이름을 내세워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신데,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지혜가 중요하게 여기는 힘과 능력과 명예를 기준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의 판단을 바꾸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더욱 구체적인 질문이 됩니다. 바울은 그 지혜를 받았다고 여기는 고린도 사람들의 시기와 다툼을 다시 문제 삼을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0:13의 히브리어 본문에 있는 「여호와야훼의 영」을 칠십인역은 「주의 마음」으로 옮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6에서 이 표현을 따라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떻게 사람에게 이릅니까?
고린도전서 2장은 바울이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문장의 중심에 하나님과 성령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지혜를 미리 정하셨고,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아시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인간이 스스로 높이 올라가서 획득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주신 지혜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는 자랑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넓혀 가는 것은 중요하고, 바울 역시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장은 그 지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묻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우월함을 확인하려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처음에 자신이 고린도에서 얼마나 약하고 두려웠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앞세웠습니다. 그렇게 두려움 가운데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 이제 이사야의 오래된 질문,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치겠느냐?」를 꺼냅니다.
그 물음 앞에서 인간의 지혜는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끝난 자리에서, 약함과 두려움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던 사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남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올라가 그분의 마음을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