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인사와 편 가르기
하나님의 밭, 건물, 성전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자랑했습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이든 아볼로든 게바든 …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이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바울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세 가지 그림을 보여 줍니다. 먼저 교회를 밭에 비유합니다.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다음에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합니다. 여러 사람이 건물을 세우지만, 터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마지막에는 그 건물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으로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각각의 그림이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과 지도자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밭을 통해 그들은 누가 생명을 자라게 하는지 알게 됩니다. 건물을 통해 누가 터를 놓았고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성전을 통해서는 자신들이 얼마나 거룩하고 소중한 공동체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그림에 공통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능력으로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만든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위에 세우시고, 자신의 영으로 거하시는 공동체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바울이 왜 교회의 분열을 그토록 심각하게 여기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젖먹이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들에게 하듯」
바울은 앞 장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린도 교인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도 영에 속한 이들에게 말하듯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육으로 된 이들에게 하듯,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들에게 하듯 말했습니다.고린도전서 3:1 · 본디새김
그들은 말과 지식에서 풍성했고,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뛰어난 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그들을 젖먹이에 비유합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 밖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로 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님께 속하게 된 것과, 그 은혜에 합당하게 성숙한 삶을 사는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고 음식은 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직 받을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받을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3:2 · 본디새김
젖과 음식의 비유는 고대 사회에서도 교육이나 성장의 단계를 설명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익숙한 이미지였습니다. 젖먹이는 아직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성장해야 다른 음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젖은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단순한 복음이고, 음식은 그보다 더 고급스럽고 복잡한 교리일까요? 본문은 젖과 음식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특별한 고급 교리의 목록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도 음식을 받을 수 없는 이유를 바로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여러분이 아직 육에 속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샘과 다툼이 있는 터에, 여러분이 육에 속한 이들이고 사람이 하는 대로 걷는 것이 아닙니까?고린도전서 3:3 · 본디새김
바울은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이유를 성경 지식의 부족에서 찾지 않습니다. 어려운 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지도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시샘과 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는 어려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미 받은 가르침에 합당하게 서로를 대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이 젖과 음식을 순전히 행동의 차이로만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삶의 태도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자신들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육으로 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
1절에서는 「육으로 된 이들」이라고 하고, 3절에서는 「육에 속한 이들」이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도 서로 다른 형용사가 쓰였는데, 두 낱말을 구별하는 해석과 사실상 같은 뜻으로 보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문장의 흐름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왔을 때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미숙했습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미숙합니다. 그 증거는 바로 시샘과 다툼입니다.
여기서 「육」을 인간의 육체 자체가 악하다는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어긋나는 인간적인 행동 방식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는 4절에서 그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다른 이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할 때, 여러분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고린도전서 3:4 · 본디새김
이 질문에는 뼈아픈 반전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더 뛰어난 영적 지도자에게 속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자랑이 그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하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는지, 얼마나 정확한 신학을 알고 있는지, 얼마나 깊은 영적 경험을 했는지를 통해 성숙함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자랑 자체가 성숙하지 못한 태도에서 나올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낮추고 자신을 높인다면, 아직 복음이 자신의 관계를 충분히 변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들이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들, 곧 바울과 아볼로가 실제로 누구인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사르키노스는 기본적으로 살로 이루어진, 육으로 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반면 3절의 사르키코스는 문맥에 따라 육의 성격을 띠거나 육의 방식에 지배되는 모습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두 단어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고, 이 문맥에서는 사실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반드시 두 종류의 신자를 엄격하게 구별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
바울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볼로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대로 섬기는 이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통해 믿게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3:5 · 본디새김
바울은 아볼로가 누구이며 바울이 누구인지 묻는 대신, 그들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도자들의 이름을 자기 집단의 표지로 삼았지만, 바울은 지도자들의 역할을 묻습니다.
그들은 「섬기는 이들」입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일꾼, 시중드는 사람, 어떤 일을 맡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훗날 교회의 직분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중심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인들이 믿게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그들을 교회의 주인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신 대로」라는 말은, 맡겨진 역할이 다르고 그 역할을 수행할 능력도 예수님에게서 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바울은 첫 번째 그림을 보여 줍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 자라게 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3:6 · 본디새김
생명은 어느 사람에게서 왔습니까?
이 비유는 사도행전의 기록과도 어울립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먼저 복음을 전했고(사도행전 18:1–11), 이후 아볼로가 고린도에 와서 믿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18:27–28).
심는 사람은 씨앗을 뿌립니다. 물 주는 사람은 이미 심긴 것이 자랄 수 있도록 돌봅니다. 어느 하나도 불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씨앗 안에 생명을 만들어 넣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둘 중 누가 식물을 자라게 합니까? 바울은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바울은 인간이 감당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그 사역의 근본적인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교회의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고, 아볼로가 그 성장을 완성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일에 쓰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선언은 더욱 단호합니다.
그러므로 심는 이도 물 주는 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중요합니다.고린도전서 3:7 · 본디새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닙니다」를 사람들의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각각의 사람이 자기 수고에 따라 삯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과 성장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고 볼 때,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님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역자를 필요 없게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높이거나 낮추는 태도 모두가 잘못되었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다면 그 수고를 감사하게 여길 수 있지만, 그 지도자가 신앙의 생명을 창조한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지도자가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수고가 무가치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이지만, 각각의 수고는 남습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하나이지만, 저마다 자기 수고에 따라 자기 삯을 받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8 · 본디새김
원문의 「하나」(εἷς)는 중성형입니다.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둘이 하나의 일에 속해 있음을 나타냅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하나인지는 문장이 직접 규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뜻, 서로 대립하는 경쟁자가 아니라는 뜻,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뜻 등이 문맥상 연결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두 사람의 차이를 없애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역할도 다르고 수고도 각각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경쟁의 근거가 아니라 한 가지 일을 위한 다양한 섬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9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모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고 하나님의 건물입니다.고린도전서 3:9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하나님의」라는 말이 세 번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건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관심을 사람들이 누구에게 속하는지에서, 모든 것이 누구에게 속하는지로 옮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도, 하나님께 속한 동료 일꾼들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원문은 문법상 두 읽기를 허용합니다. 다만 이어지는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건물」과 앞의 6–7절을 고려하면,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바울이나 아볼로에게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다시 선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밭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이제 바울은 밭에서 건물로 그림을 바꿉니다. 밭의 비유에서는 성장의 근원을 이야기했습니다. 건물의 비유에서는 그 성장이 어떤 터 위에서, 어떤 재료로 이루어지는지를 묻게 됩니다.
건물을 세우는 사람들은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이미 놓인 터는 바꿀 수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나는 지혜로운 건축 책임자로서 터를 놓았고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웁니다. 그러나 저마다 자기가 어떻게 그 위에 세우는지 살펴볼 일입니다.고린도전서 3:10 · 본디새김
「건축 책임자」(ἀρχιτέκτων)로 옮긴 말은 건축을 계획하고 지도하는 책임자나 숙련된 건축가를 가리킵니다. 오늘날의 설계 전문 건축가만을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처음 복음을 전한 자신의 역할을 건물의 터를 놓은 일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지혜가 자기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앞 단락의 원칙과 같습니다. 바울이 맡은 일은 중요하지만,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놓은 터는 무엇입니까?
이미 놓인 터 외에는 다른 터를 아무도 놓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린도전서 3:11 · 본디새김
건물에는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고,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공사합니다. 그러나 모든 건물이 의지하는 터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바울의 인격 위에 세워진 것도, 아볼로의 뛰어난 가르침 위에 세워진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교회의 처음 시작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아니라, 이후에 이루어지는 모든 건축이 의지해야 할 터이십니다. 터를 놓은 뒤에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지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곧바로 다른 건축자들을 향해 「저마다 자기가 어떻게 그 위에 세우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하고 경고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유명한 건축자인가가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세우고 있는가입니다.
금과 은과 값진 돌, 그리고 목재와 마른 풀과 짚
누가 그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값진 돌이나 목재나 마른 풀이나 짚으로 세우면, 저마다의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불 가운데 드러나는 그날이 그것을 밝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일이 어떠한지를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12–13 · 본디새김
바울은 여섯 가지 재료를 나열합니다.
금, 은, 값진 돌.
목재, 마른 풀, 짚.
어떤 것은 불에도 견디지만, 어떤 것은 불에 쉽게 타 버립니다. 그런데 이 재료들을 구체적으로 무엇에 비유했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금은 올바른 교리이고, 은은 선행이며, 값진 돌은 기도라고 각각 대응시킬 근거는 없습니다. 목재와 짚을 특정한 죄의 종류에 연결하는 것도 본문을 지나치게 구체화하는 해석입니다.
여기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읽기에서는 건축 재료를 교회 지도자들이 행하는 사역의 내용과 질로 이해합니다. 그들의 가르침과 사역이 예수님이라는 터에 얼마나 합당한지가 평가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그 재료들이 사역을 통해 세워지는 사람들, 곧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 경우 건축자의 일은 단순히 가르침을 전달하는 활동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일입니다.
어느 읽기든 건축의 대상이 고린도 교회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사역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어떻게 세우고 있는지가 중요하고, 그 일의 참된 가치는 지금 당장 사람들의 평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불은 건물의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건축 현장에 불이라는 이미지를 가져옵니다. 금과 은과 값진 돌은 불 가운데서도 남지만, 목재와 풀과 짚은 타 버립니다. 불은 건축물이 실제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이 됩니다.
여기서 「그날」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고린도전서 1:8에서 바울이 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과도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지도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았는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얼마나 훌륭한 연설을 하는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지 살펴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감탄했던 건물이 불 앞에서는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화려해 보이지 않는 수고가 그날에도 남을 수 있습니다.
13절의 「가려낼」은 시험하거나 검증하여 어떤 것이 참되고 합당한지 확인한다는 의미입니다. 불은 단순히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파괴의 이미지가 아니라, 무엇이 견딜 수 있는 것인지 드러내는 검증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가지 결과를 말합니다.
누구든 자기가 그 위에 세운 일이 남으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14 · 본디새김
누구든 자기 일이 타 버리면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다만 불 속을 지나듯이 말입니다.고린도전서 3:15 · 본디새김
일이 타 버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바울은 그 자신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세운 모든 일이 무가치했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그가 손해를 본다고 말하고, 그의 구원을 「불 속을 지나듯이」라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이 표현의 중심은 건축자의 사역이 실패하더라도 그 사람의 구원과 사역의 평가가 반드시 동일한 결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은 후대의 연옥 교리와 연결되어 읽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의 초점은 죽은 사람의 정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불이 직접 시험하는 대상은 건축자의 「일」이며, 이 구절을 우선적으로 사역에 대한 종말론적 검증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터 위에 세웠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터 위에 무엇을 세웠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더욱 엄중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 건물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제야 밝혀집니다
여러분이 함께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3:16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의 건축 비유가 절정에 이릅니다.
지금까지 그는 교회를 건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건물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건축자들은 그저 편리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세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얼마나 신중하게 해야 하겠습니까?
16절의 「여러분」(σύ)은 그리스어에서 복수형이고 「성전」(ναός)은 단수형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각자가 하나씩 별도의 성전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6:19에서 신자의 몸을 성전으로 말하는 문맥과 구별해야 합니다. 3장에서 성전의 일차적인 대상은 공동체 전체입니다.
그것도 서로 갈라지고 다투고 있는 그 사람들 모두가 함께 하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무거운 책임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훌륭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성전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으로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에 그들은 거룩한 공동체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동체를 해치는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전을 무너뜨리는 사람을 하나님이 무너뜨리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뜨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고, 여러분이 바로 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3:17 · 본디새김
이 경고는 앞의 건축 비유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15절에서는 어떤 건축자의 일이 타 버리더라도 그 자신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건축을 잘못한 사람과 성전 자체를 무너뜨리는 사람을 같은 결과 아래 놓지 않습니다.
17절에서는 손상시키다, 파괴하다, 망가뜨리다 등의 뜻을 가진 같은 동사가 두 번 등장합니다. 성전을 무너뜨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무너뜨리십니다. 바울은 같은 낱말을 되풀이하여 행위와 그 결과를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뜨리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 문맥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교회의 분열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내세워 서로를 구별하고 다투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더 훌륭한 가르침을 따르려는 신앙의 열심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다툼이 하나님의 성전을 손상시키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친목 단체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으로 거하시는 공동체를 해치고 있습니다.
물론 17절의 경고를 모든 의견 차이나 갈등에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자신도 교회 안의 문제를 분별하고, 잘못된 가르침과 행위를 책망하며, 필요한 경우 판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를 자기 자랑과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 파괴하는 일입니다.
교회의 가치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로, 또는 누가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인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그 공동체의 거룩함을 결정합니다. 따라서 교회를 해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 공동체를 함부로 대하는 일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놀라운 정체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은 자기 집단의 우월함을 자랑할 이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성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나오스는 성전 전체의 넓은 구역을 가리키는 말과 구별하여, 특히 신이 거하는 성소를 가리킬 수 있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 기도에서 하나님이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에도 다 담기지 않는 분임을 고백하면서도, 이 성전을 향한 기도를 들으시기를 간구했습니다(열왕기상 8:27–30). 성전은 하나님을 건물 안에 가두는 장소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또 17절의 경고는 예레미야 7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성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면서 불의한 삶을 계속하는 유다 백성을 책망하십니다. 예레미야의 본래 문맥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잘못된 신뢰와 언약에 대한 불순종을 다룹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인간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
바울이 다시 지혜의 문제로 돌아오는 이유
16–17절에서 성전의 거룩함을 강조한 바울은 갑자기 지혜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시대의 기준으로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긴다면, 지혜로운 이가 되도록 어리석은 이가 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3:1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세상의 지혜가 십자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교회 안에서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문제가 단순히 지혜가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어떤 지도자의 가르침이 더 뛰어난지 평가하며 자기 판단을 신뢰했고,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선택이 더 훌륭하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런 자신감이 오히려 자기기만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이가 되도록 어리석은 이가 될 일입니다」라는 말은 생각하기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내신 지혜를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지적인 능력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지혜가 하나님이 드러내신 진리 앞에서도 수정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그의 꾀로 붙잡으시는 하나님
바울은 두 개의 구약 본문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음인 까닭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분은 지혜로운 이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고린도전서 3:19 · 본디새김
이것은 욥기 5:13에서 가져온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은 욥이 아니라 그의 친구 엘리바스입니다. 그 말 자체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관한 타당한 통찰을 담고 있을 수 있지만, 욥기 전체에서 엘리바스의 발언은 무조건 옳은 가르침으로 승인되지 않습니다. 욥기 42:7에서 하나님은 엘리바스와 그의 친구들이 하나님에 관해 올바르게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엘리바스의 말을 인용했을까요? 어떤 인물의 말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가 말한 모든 문장이 반드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엘리바스가 욥의 고난을 해석한 방식을 승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꾀를 무너뜨리실 수 있다는 진술을 자신의 논증에 가져온 것입니다. 구약의 한 문장을 사용하면서도 그 문장이 등장한 이야기 전체를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인용은 시편 94:11에서 나옵니다.
또 적혀 있습니다. 「주께서는 지혜로운 이들의 생각이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고린도전서 3:20 · 본디새김
시편 94편은 악한 사람들의 폭력과 불의를 고발하면서,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보고 계시는지를 묻는 사람들의 생각을 반박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까지 모두 아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는 사람의 생각이 헛되다는 사실이 강조되는데, 바울은 이를 자신의 논증에 맞게 「지혜로운 이들의 생각」이라는 형태로 인용합니다.
두 인용을 나란히 놓으면,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꾀를 무너뜨리시고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헛된지 아십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를 평가하며 자랑하는 지혜가,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3장의 마지막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 결론은 단순히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금지로 끝나지 않고, 그들에게 모든 것이 이미 주어졌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울은 소속 관계를 거꾸로 뒤집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들을 내세워 자랑하지 말 일입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3:21 · 본디새김
바울이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권했다면, 그 이유로 사람이 얼마나 부족하고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강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앞서 등장했던 파벌의 구호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아볼로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게바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지도자에게 속했는지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기 위해 주어진 사람들임을 밝힙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사에게서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왜 다른 교사를 거부하거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갈라질 이유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한 지도자의 이름에 자신을 가두면서, 하나님이 교회 전체를 위해 주신 것을 스스로 좁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왜 삶과 죽음까지 이야기할까요?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이든 아볼로든 게바든, 세상이든 삶이든 죽음이든, 지금 있는 것이든 앞으로 올 것이든,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22 · 본디새김
바울, 아볼로, 게바라는 사람들의 이름 다음에 범위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두고 다투던 문제를, 세상과 시간과 죽음까지 포함하는 넓은 관계 속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를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거나 마음대로 지배할 권리를 받았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소유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유익을 누린다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죽음은 보통 사람을 소유하는 힘처럼 여겨집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죽음을 피하거나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음마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을 궁극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방향으로 이 말을 이해하게 합니다. 이 해석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되는데, 그곳에서 바울은 죽음이 마지막 원수로서 무너질 것이라고 말합니다(15:26). 다만 여기서는 죽음에 대한 상세한 설명보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넓어진 지위를 강조합니다.
세상도, 삶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그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바깥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최종적인 권세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바울은 마지막 문장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십니다.고린도전서 3:23 · 본디새김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이 문장이 3장 전체의 마지막 열쇠입니다.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를 포함한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이십니다. 지도자들이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지만, 여러분은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십니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어떤 존재론적 관계를 가지시는지 상세하게 규정하려는 문장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바울의 관심은 교회와 예수님,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속해 있고, 바로 그 관계 때문에 더 이상 특정한 인간 지도자의 이름으로 자신을 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지도자의 소유도, 사역자의 능력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주인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섬기는 일꾼이고, 교인들은 지도자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지도자에게 자신의 신앙과 정체성을 넘겨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다는 것
고린도전서 3장은 교회 안의 시샘과 다툼을 지적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문제를 단순히 사람들의 성격이나 관계 기술의 문제로 다루지 않고, 고린도 교회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고 다투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자라게 하시고, 예수님 위에 세우시며, 자신의 영으로 거하시는 공동체를 자기 자랑의 대상으로 삼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어떤 이상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 내는 완벽한 공동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전히 시샘했고, 다투었으며, 자기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 준 다음, 그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다시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터가 되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 위에 함께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기에 서로 다른 일꾼들의 수고가 경쟁이 아니라 섬김이 됩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그들은 누구의 이름을 내세워야 자신이 더 뛰어난 사람으로 보일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심는 사람일 뿐이고, 아볼로는 물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세워지고 있는 건물의 터는 바울도 아볼로도 아닙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 위에 세워지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 편인지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그들을 섬기도록 주어진 일꾼들입니다. 그 모든 이름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십니다.」
그렇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의 이름을 높이던 자리에서, 그들이 함께 속한 한 분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