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인사와 편 가르기

십자가 앞에서 사라지는 자랑

고린도 교회에는 좋은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고, 아볼로에게 성경을 배웠으며, 베드로의 이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과 지식에 풍성했고, 하나님에게서 여러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교회가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훌륭한 교사에게 배웠는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가 서로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는 누가 옳은지부터 가리지 않습니다. 교사들의 능력을 비교하지도 않고, 교회 조직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제안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느닷없이 십자가 이야기를 꺼냅니다.

교회의 분열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높이고, 능력 있는 사람을 따르며, 자랑할 만한 이름을 자기 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에는 그 모든 평가 기준을 뒤집는 사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럽고 무력하다고 여겼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믿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교회, 이미 거룩해진 사람들

고린도전서 1:1–9 본문 →

문제 많은 교회를 향한 뜻밖의 인사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이름을 올린 소스데네는 「형제」라고 불립니다. 바울은 자기 능력으로 사도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짧은 소개는 편지 후반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어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 어디서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도 보냅니다. 그분은 그들과 우리의 주님이십니다.고린도전서 1:2 · 두루새김

편지를 계속 읽으면 이 교회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교인들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있고, 성적으로 잘못된 행동이 문제가 되며, 서로 소송을 벌이고, 주님의 만찬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욕을 당합니다.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일에도 질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교회를 향해 「거룩하게 되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이 사람들이 이미 도덕적으로 완전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행실을 먼저 평가한 뒤 성도라는 자격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 이미 주어진 관계를 먼저 선언합니다.

이것은 이후의 책망을 약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책망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삶도 그 관계에 걸맞아야 합니다.

편지 첫머리의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이지만, 고린도의 소유는 아닙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이지만, 바울의 소유도 아닙니다. 아볼로가 가르쳤다고 해서 아볼로의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지도자의 이름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뒤에 등장할 분열 문제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곧이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범위를 「어디서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으로 넓힙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만의 문제와 독특한 상황을 가진 지역 공동체이지만, 그들이 부르는 주님의 이름은 그들만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한 도시나 집단에 독점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곧 「나는 바울 편이야」, 「나는 아볼로 편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편지의 첫머리부터 그들의 시선을 모든 사람이 함께 부르는 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바울은 왜 이 교회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4절부터 9절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분 안에서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풍성해졌습니다. 말하는 일과 아는 일 모두에서 그렇습니다.고린도전서 1:5 · 두루새김

뒤에 나올 문제들을 생각하면 조금 의아하게 들립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의 말과 지식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은근하게 비꼬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감사의 문맥 전체를 단순히 반대 뜻으로 하는 말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은사가 없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은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느냐에 있었습니다.

말을 잘하는 능력도, 지식도, 다른 은사들도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을 높이는 근거로 바꿔 버린다면, 선물의 의미가 뒤집힙니다. 받았다는 사실은 잊고 자신이 소유했다는 사실만 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굳게 자리 잡았다고 말하고(1:6),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며 어떤 은혜의 선물도 부족함 없이 누린다고 말한 뒤(1:7), 그분이 그들을 끝까지 굳게 세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1:8). 6절의 「굳게 자리 잡아」(βεβαιόω)와 8절의 「굳게 세워 주셔서」에는 원문에서 「확고하게 하다」라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입니다. 이미 그들 가운데 굳게 자리 잡은 복음의 증언과 앞으로 그들을 끝까지 지켜 줄 약속이 같은 낱말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풍성한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주신 분이 끝까지 그들을 붙드신다는 사실입니다. 은사는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현재의 풍성함은 완성의 증거가 아닙니다.

바울은 감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관계에 들어왔습니다.고린도전서 1:9 · 두루새김

「함께하는 관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친밀한 사귐을 뜻할 수도 있지만, 무엇인가에 함께 참여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관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각자 따로 종교적 경험을 쌓아 온 사람들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관계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여야 하는 이유는 서로 마음이 잘 맞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한 분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관계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 사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8:17에도 소스데네라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 1:2의 마지막 표현은 원문의 문법상 두 가지 연결이 가능합니다. 「그분은 그들과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로 읽을 수도 있고, 앞에서 장소를 가리키는 말과 연결하여 그들과 우리의 모든 곳을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첫 번째 읽기를 택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고린도 교회를 더 넓은 신앙 공동체와 연결한다는 문맥상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 편으로 나뉘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10–17 본문 →

사람들이 그리스도보다 자기 편을 먼저 말하기 시작할 때

10절에서 편지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탁합니다. 모두 같은 말을 하며, 편을 갈라 나뉘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글로에 쪽 사람들이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다툼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이 정보의 출처를 밝힐 만큼 구체적인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내 말은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울 편이야」, 「나는 아볼로 편이야」, 「나는 게바 편이야」, 「나는 그리스도 편이야」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2 · 두루새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사도행전 18:1–11).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을 잘 알았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8:24–28).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 이름입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가 실제로 서로 경쟁하는 지도자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3장에서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일꾼들로 설명합니다. 교사들이 서로 적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교사들의 이름으로 자신을 구별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호인 「나는 그리스도 편이야」는 해석이 갈리는 대목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자신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집단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앞의 세 구호와 달리, 이 말은 바울 자신의 반박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더라도 바울이 겨냥하는 문제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이해할 때조차 서로를 구별하고 자기 위치를 높이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세 가지 질문으로 무너뜨립니다.

세 가지 질문으로 무너지는 파벌의 논리

그리스도께서 여러 편으로 나뉘셨습니까?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바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고린도전서 1:13 · 두루새김

첫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 자신을 향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여러 집단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들이 속한 그리스도마저 나누어 가질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십자가를 향합니다. 이 질문은 훨씬 날카롭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을 가르쳤으며, 아버지처럼 돌보았습니다(4:15).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사건의 중심에 바울은 없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세례를 향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 자신을 가르친 사람이 누구인지를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근거처럼 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질문은 이 관계를 다시 바로잡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에 속합니까?

바울은 자기가 세례를 준 사람들의 수가 적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보와 가이오의 이름을 이야기했다가 스데바나의 집안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주었다고 덧붙이고, 그 밖에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완벽하게 정리된 명단 대신 기억나는 사람들을 말하다가 추가로 떠올리는, 뜻밖에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이 모습 자체가 그의 설명에 잘 어울립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손으로 세례를 준 사람이 몇 명인지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세례를 주라는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말솜씨에 기대어 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7 · 두루새김

이 말이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세례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고, 뒤에서도 세례를 신앙 공동체의 중요한 현실로 다룹니다(12:13). 여기서의 대조는 바울에게 맡겨진 일 가운데 무엇이 먼저냐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려고 보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제 교회의 분열 문제에서 지혜로운 말솜씨와 십자가의 관계로 논의를 옮깁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말솜씨와 지혜를 평가하고, 그 사람의 이름으로 자신을 구별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평가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화려한 말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능력에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탄이 복음의 중심을 밀어낸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바울은 뛰어난 말솜씨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능력이 십자가보다 앞에 서는 것을 경계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이 자신의 뛰어남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는 로마의 식민 도시였고,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신분과 명예, 영향력 있는 인물과의 관계가 사회적 지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문화가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 평가와 집단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교회 안의 구체적인 파벌 구조를 그대로 되살려 그릴 자료는 부족합니다.

세상이 어리석다고 부른 곳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

고린도전서 1:18–25 본문 →

십자가가 왜 어리석게 보이는가?

지혜로운 말솜씨에 기대지 않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멸망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말로 들리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린도전서 1:18 · 두루새김

똑같은 십자가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판단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에 두 가지 다른 성질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평가 기준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고, 장신구나 예술 작품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의 십자가형은 로마 세계에서 극심한 고통과 공개적인 수치를 동반하는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권력에 완전히 굴복당한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이시라고 전합니다.

세상이 힘을 행사하는 모습을 통해 능력을 알아본다면, 십자가는 능력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이 존경받는 사람의 명예를 통해 가치를 판단한다면,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곳입니다. 바울은 그 불편함을 제거하지도, 십자가를 그럴듯하게 꾸미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 사건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멸망해 가는 사람들」과 「구원받는 우리」는 현재 진행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누가 더 지적으로 뛰어난가를 구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인 십자가 앞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꺼냅니다.

이미 이사야가 말했던 지혜의 붕괴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를 없애고, 슬기로운 사람들의 슬기를 쓸모없게 만들겠다.」고린도전서 1:19 · 두루새김

이것은 이사야 29:14에서 가져온 말씀입니다. 이사야 29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과 회복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입술로는 공경하면서 마음은 멀리 떠난 백성,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에게 숨길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이사야 29:13–16). 문제는 그들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지혜와 계획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역사적 상황과 바울이 마주한 고린도의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지혜를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바울이 보기에 십자가는 이사야의 말씀이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난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어리석다고 판단한 사건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율법학자는 어디 있습니까? 이 시대의 토론가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까?고린도전서 1:20 · 두루새김

지혜로운 사람, 성경과 율법에 밝은 율법학자, 논쟁에 능한 토론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지식과 판단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이 지금 성경을 인용하고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를 사용하여 지혜의 한계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대목을 지식이나 학문에 대한 단순한 반대로 읽으면 바울의 의도를 놓치게 됩니다.

문제는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는 소식」을 택하셨을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리석게 여기는 소식을 전하게 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1 · 두루새김

여기서 어리석게 여겨지는 것은 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하는 「소식」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입니다(1:23). 따라서 바울의 말은 하나님이 어리석게 말하는 방식을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소식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이해할 수 없게 말해야 더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거나 지혜롭게 설명하는 일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설명이 있어도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시고,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십니다.고린도전서 1:22–23 · 두루새김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때때로 놀라운 능력의 사건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이집트의 권력을 꺾으셨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기대하면서 표징을 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편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는 철학과 말로 설득하는 기술을 연구하는 전통이 있었고, 논리의 치밀함과 설득력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가 존재했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 사람이 표징만 요구했고 모든 그리스 사람이 철학적 지혜만 추구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서로 다른 문화적 기대를 대표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양쪽의 기대를 모두 거스르십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구원자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치시기는커녕 적들의 손에 붙잡혀 처형되셨다는 사실이 걸림돌이 됩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인 죽음을 맞으신 분을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고린도전서 1:24 · 두루새김

바울은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표징을,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더 치밀한 철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는 단순히 인간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나 더 영리한 계획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하셨는지에서 드러난 지혜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힘과 명예를 통해 구원을 기대하던 자리에서, 고난과 수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그 역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5 · 두루새김

하나님에게 실제로 어리석음이나 무능력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평가 기준에서 어리석고 약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지혜와 힘을 뛰어넘는다는 역설입니다.

사람들은 힘센 구원자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시선을 십자가에서 그들 자신에게로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21절의 「소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케뤼그마는 선포하는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선포되는 내용, 곧 전하는 소식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1:23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전하는지 분명히 밝히기 때문에 이 문맥에서는 특히 그 내용이 중요하고, 두루새김도 「소식」으로 옮겼습니다. 또 23절의 「걸림돌」을 이해하는 데에는 신명기 21:22–23에서 나무에 매달린 사람과 하나님의 저주가 연결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바로 그 말씀을 십자가에 적용합니다.

하나님은 왜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을까?

고린도전서 1:26–29 본문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26절은 논의가 새롭게 방향을 바꾸는 지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사람의 기준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많지 않고, 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으며, 지위가 높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26 · 두루새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세상의 평가 기준을 뒤집는다는 증거를 멀리서 찾지 말고, 고린도 교인들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더 뛰어난 지도자를 따르는지, 누가 더 많은 지식과 은사를 가졌는지 따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처음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돌아보게 합니다.

「많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이 열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전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로만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는 가정에 교인들을 모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회적·경제적 형편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을 구원의 자격으로 삼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습니다. 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보잘것없고 업신여김을 받는 것들, 곧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셔서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힘없게 만들려 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7–28 · 두루새김

이 반복에서 문장의 주어는 한결같이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약한 사람들의 뛰어남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거나 낮은 신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더 선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평가 속에서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강렬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앞서 등장한 십자가의 역설과 닮았습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무력하고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지혜롭지 못하고 약하고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부르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원과 교인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똑같은 사건은 아니지만, 양쪽 모두에서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행동이 대조됩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밝힙니다.

이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9 · 두루새김

여기서 비로소 1장의 여러 이야기들이 한곳으로 모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의 이름을 자랑했고, 말과 지식과 은사를 통해 자기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방식 자체가 그런 자랑을 무너뜨립니다.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그들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반드시 복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믿고,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고, 은사를 사용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기준을 십자가에서 뒤집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일치는 서로 양보하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요청보다 깊습니다. 자기 자랑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가 교회의 분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방식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

고린도전서 1:30–31 본문 →

지혜는 이제 무엇을 뜻하는가?

바울은 마지막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논의를 한 문장에 모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가 되셨으며,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30 · 두루새김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일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께 이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이십니다. 바울은 이 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고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지혜로운 생각 몇 가지를 배운다는 뜻을 넘어, 그분 자신과 그분이 이루신 일이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에는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문장에서는 「지혜」가 뒤의 세 표현을 아우르는 말인지, 네 표현 모두가 나란히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 능력으로 얻어 자랑할 수 있는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연결됩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관계와 신분을 얻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구별되는 일과 관련되며, 1장 2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고 불렸던 것처럼 그들의 현재 행실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관계와 정체성을 뜻합니다. 「속량」은 값을 치르고 풀어 주는 일과 관련된 표현으로, 구원과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다고만 말하지 않고, 우리의 지혜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된 독립적인 성취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바라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그 모든 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자랑할지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여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 · 두루새김

이것은 예레미야 9:23–24를 압축해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 지혜를, 용사가 자기 힘을, 부자가 자기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사람이 자랑할 것은 땅에서 한결같은 사랑과 정의와 올바름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아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지혜를 자랑하고,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사회적 신분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래전부터 그런 자랑의 한계를 지적하던 예레미야의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연결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자신의 뛰어남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랑이라는 행위 자체를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말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자랑의 대상을 바꾸라고 합니다.

자기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야 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을 높이기 위해 다른 집단과 차이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자랑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 사람이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추기 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랑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낮추지 않고, 다른 사람도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보게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교회의 분열 문제를 십자가에서부터 풀어 가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은 로마서 3:21–26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시고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일을 설명하며, 로마서 3:24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속량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교회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

고린도전서 1:1–31 본문 →

고린도전서 1장에는 「부르심」이 거듭 나옵니다.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도이고(1:1), 고린도 교인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며(1:2),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아들과 함께하는 관계에 들어왔습니다(1:9).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시고(1:24),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그들 자신을 살펴보라고 권합니다(1:26). 교회의 출발점은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한 선택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이 사람에게 붙이는 명예와 수치의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덜 중요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훌륭한 지식과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 위에 설 권리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약해지는 일을 그 자체로 아름답게 여기거나 능력 있는 사람을 의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지위와 성취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 다른 이름을 내세웠습니다. 「나는 바울 편이야」, 「나는 아볼로 편이야」, 「나는 게바 편이야」.

그들 앞에서 바울은 누구의 이름이 더 훌륭한지 판정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이라는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바울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 질문 앞에서는 바울의 이름마저 더 이상 자랑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부른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드러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