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예배와 은사

다섯 마디의 말이 나은 이유

온 교회가 영적인 말로 가득 차 있는데, 처음 들어온 사람은 그들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을 전하자,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첫 번째 모임에는 신비로운 말이 넘칩니다. 그러나 처음 들어온 사람은 그 말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그 모임은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라기보다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자리입니다.

두 번째 모임에서는 사람들이 예언합니다. 그 말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고,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참으로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계신다」 하고 고백합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주신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가보다 그 능력을 통해 다른 사람이 무엇을 듣고 이해하며 경험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여러 혀로 말하는 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고린도 신자들보다 혀로 더 많이 말한다고 밝히고, 예언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혀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어떤 은혜의 선물이 참되고 어떤 선물이 거짓인가 하는 단순한 구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선물조차 공동체 안에서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이 모든 은혜의 선물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14장에서는 그 사랑이 실제 예배의 자리에서 어떤 판단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의 논증은 하나의 낱말을 반복하면서 나아갑니다.

‘세우다.’

예언은 교회를 세웁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다른 사람을 세우지 못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 가진 선물을 나눌 때도 모든 것은 세우는 일을 위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일하신다는 사실은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말을 절제할 수 있는 근거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영적인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들의 모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주신 말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해야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지를 묻는 장입니다.

읽는 시간 38분소단락 814장 본문 읽기 →

하나님께 말하는 것과 사람을 세우는 것

고린도전서 14:1–5 본문 →

사랑을 뒤쫓으십시오

사랑을 뒤쫓으십시오. 그리고 영에 속한 것들을 사모하되 예언하기를 더욱 사모하십시오.고린도전서 14:1 · 본디새김

바울은 앞장에서 사랑을 가장 큰 것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랑을 ‘뒤쫓으라’고 명령합니다. 원문의 동사는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뒤따르는 행동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가만히 앉아 사랑이라는 감정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은혜의 선물들을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것과 영의 선물을 사모하는 것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바울은 둘 다 명령합니다. 다만 그 선물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는 특히 예언하기를 더욱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예언이 더 신비롭기 때문일까요? 바울은 곧바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누구에게 향하는가

혀로 말하는 이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신비를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4:2 · 본디새김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은 사람에게 전달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그 말을 무의미한 가짜 소리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관련된 진실한 영적 활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 말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혀가 인간의 외국어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발화였는지는 해석이 갈리지만, 바울이 이 장에서 분명하게 다루는 것은 언어의 종류보다 듣는 사람이 그 말의 의미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언이 더 큰 이유

그러나 예언하는 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세우고 권하고 위로하는 말을 합니다.고린도전서 14:3 · 본디새김

세움과 권함과 위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듣는 사람을 향합니다. 여기서 예언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능력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예언의 말이 현재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언을 높이 평가하는 바울의 기준은 예언하는 사람의 특별한 지위가 아닙니다. 그 말을 통해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혀로 말하는 이는 자기를 세우지만 예언하는 이는 교회를 세웁니다.고린도전서 14:4 · 본디새김

두 경우 모두 같은 동사 ‘세운다’가 사용됩니다. 차이는 누구를 세우느냐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세우는 일이 언제나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혀로 말하는 일 자체를 금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모임에서는 판단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모임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세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 혀로 말하기를 바라지만 예언하기를 더욱 바랍니다. 예언하는 이가 혀로 말하는 이보다 큽니다. 다만 교회가 세움을 받도록 혀로 말하는 이가 풀어 옮기는 경우는 예외입니다.고린도전서 14:5 · 본디새김

「다만 … 풀어 옮기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혀로 하는 말을 풀어 옮겨 공동체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말 역시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언과 혀의 차이는 고정된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모임에서 그 말이 어떤 유익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기능의 차이입니다.

‘크다’는 표현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언하는 사람이 더 큰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더 사랑받거나 더 성숙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이 공동체 전체에 더 직접적인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은혜의 선물을 가지라는 경쟁을 다시 시작한 것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그 경쟁의 기준을 바꾸고 있습니다. 어느 선물이 더 놀라운가가 아니라, 어느 방식이 교회를 더 잘 세우는가를 묻습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아무도」는 고린도에서 실제로 모든 사람이 어떤 혀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보편적인 진술이라기보다, 풀어 옮기는 사람이 없는 모임에서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5절과 13절에서 바울이 그 말을 풀어 옮길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만으로 고린도 신자들이 말한 혀가 반드시 인간의 외국어였는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발화였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여러 지역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현상이 등장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풀어 옮기는 문제가 중심을 이룹니다. 그 두 현상이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피리와 거문고와 전쟁 나팔

고린도전서 14:6–12 본문 →

소리가 있다고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내가 혀로 말하며 여러분에게 간다면, 드러내 보임이나 앎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으로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는 한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이로움을 주겠습니까?고린도전서 14:6 · 본디새김

바울은 이번에는 사도인 자기 자신을 예로 듭니다. 그가 실제로 영적인 말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듣는 사람들이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유익이 없습니다. 그는 그 질문을 던진 뒤 악기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생명 없는 것들도 소리를 내는데, 피리든 거문고든 그 소리에 구별을 두지 않으면 피리로 불리는 것이나 거문고로 연주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고린도전서 14:7 · 본디새김

악기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지만, 그 소리에도 차이와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소리가 음악으로 이해되려면 높낮이와 길이, 음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소리 자체의 존재와 그 소리가 전달하는 의미를 구별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말은 어떠하겠습니까? 바울은 이어서 더욱 긴박한 상황을 제시합니다.

또렷하지 않은 나팔 소리

그도 그럴 것이 나팔이 또렷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 채비를 하겠습니까?고린도전서 14:8 · 본디새김

이번에는 음악 감상이 아니라 전쟁입니다.

나팔은 군대에 신호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가 불분명하면 군인들은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팔이 아무리 크고 우렁찬 소리를 내도 전달해야 할 정보가 분명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는 단순히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지 못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필요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그와 같아서, 혀로 알아들을 만한 말을 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여러분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4:9 · 본디새김

여기서 「혀로」라는 표현이 특별합니다. 원문의 글로사(γλῶσσα)는 앞에서 여러 갈래의 혀를 말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낱말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말을 만들어 내는 신체 기관인 혀라는 의미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영적인 혀를 논의하다가 사람의 입안에 있는 혀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혀가 어떤 특별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가보다, 그 혀를 통해 전달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뜻이 듣는 사람에게 도달하지 않는다면 허공에 대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바울은 그 말이 얼마나 신비로운가보다 그 말이 얼마나 이해되는가를 묻습니다.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다

이를테면 세상에 소리의 갈래가 이토록 많고 뜻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모르면 나는 말하는 이에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고 말하는 이도 나에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고린도전서 14:10–11 · 본디새김

11절의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 쓰인 원문의 낱말은 본래 그리스어를 이해할 수 없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문맥에 따라 문화적 멸시의 뉘앙스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외국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상대방에게 낯선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의사소통의 단절은 한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한 성령께 속한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 모임 안에서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12장에서 설명한 한 몸의 관계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한 몸의 지체들이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말이 전달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영의 여러 나타남을 사모하는 이들이니, 교회를 세우는 데 풍성해지도록 힘쓰십시오.고린도전서 14:12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의 열심을 부정하지 않고, 그 열심이 향해야 할 방향을 다시 제시합니다. 은혜의 선물을 추구하는 열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열심의 결과를 공동체에서 찾습니다.

다른 사람이 배우고 있습니까? 권면과 위로를 받고 있습니까? 그 말의 의미를 함께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들이 영적인 열심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멘' 할 수 있는 기도

고린도전서 14:13–19 본문 →

영으로 기도하지만 지성에는 열매가 없다

그러므로 혀로 말하는 이는 자기가 풀어 옮길 수 있도록 기도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13 · 본디새김

바울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무조건 금지하는 대신, 그 말이 이해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영적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유익한 방향으로 이끄는 일입니다.

내가 혀로 기도하면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내 지성은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4:14 · 본디새김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는 일을 인정하면서도, 지성이 열매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지성’은 생각하고 이해하며 판단하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내 지성은 열매가 없습니다」라는 말은 두 가지로 읽힙니다. 한 해석은 혀로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으며, 14절의 ‘내 지성’이라는 표현이 그 근거가 됩니다. 다른 해석은 그 기도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지성이 공동체를 위해 유익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뜻으로 보며, 16–17절에서 다른 사람이 세움을 받지 못한다고 설명하는 문맥이 그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영적 기도는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해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해할 수 없는 기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공동체의 모임이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지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노래하고 지성으로도 노래하겠습니다.고린도전서 14:15 · 본디새김

바울은 영과 지성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지 않습니다. 영을 강조하면서 지성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영과 지성이 함께 참여하는 기도와 노래를 말합니다. 영적인 활동이 반드시 이해와 판단을 배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지성의 참여가 필요합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한 사람의 짧은 응답을 통해 보여 줍니다.

‘아멘’이라는 한마디가 드러내는 것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영으로 송축할 때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이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대의 감사에 어떻게 「아멘」 하겠습니까?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가 알지 못하는데 말입니다.고린도전서 14:16 · 본디새김

한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기도는 진실하고 훌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듣는 사람은 뜻을 알지 못합니다.

‘아멘’은 단순히 기도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닙니다. 기도나 선언에 대한 동의와 확증의 응답, 들은 말에 참여하는 응답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진실하게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이 그 기도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듣는 사람이 그 감사에 동참하는 것은 서로 구별되지만, 공동체의 예배에서는 둘 다 중요합니다.

그대가 감사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다른 이는 세워지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4:17 · 본디새김

문제는 감사의 진정성이 아니라, 그 감사가 공동체의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 경건을 폄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경건의 진정성이 공동체의 유익을 자동으로 보장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은 단순히 설교나 예배 순서의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는 장이 아닙니다. 아멘이라고 응답할 수 없는 사람의 자리를 고려하여, 다른 사람이 예배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다섯 마디와 만 마디

나는 여러분 모두보다 혀로 더 많이 말하는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혀로 만 마디를 말하기보다, 다른 이들도 가르치려고 내 지성으로 다섯 마디를 말하고 싶습니다.고린도전서 14:18–19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모일 때의 선택은 다릅니다.

만 마디보다 다섯 마디.

다섯 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이해되어 가르침이 된다면, 그 짧은 말이 만 마디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보다 낫습니다. 말의 가치가 양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리에서 소리가 많이 난다고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팔을 오래 분다고 필요한 명령이 전달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한다고 듣는 사람이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에게 혀로 말하는 일이 감사할 만한 선물이라 해도, 그는 모든 상황에서 그 선물을 최대한 사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고 배울 수 있도록 자신의 말하기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경험을 공동체의 유익에 맞게 사용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선택을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성숙한 판단의 문제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아멘은 확실함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어근과 연결되며, 기도나 선언에 대한 동의와 확증의 응답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명기 27장에서 백성은 언약의 저주가 선포될 때 아멘이라고 응답하고, 역대상 16:36에서도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다른 혀는 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는가

고린도전서 14:20–25 본문 →

생각하는 데서는 어른이 되십시오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서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도리어 악에는 젖먹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서는 다 자란 이가 되십시오.고린도전서 14:20 · 본디새김

고린도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자신들의 특별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성숙한 판단을 요구합니다.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는 것과 그 현상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같은 일이 아니고, 영적으로 특별한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도 다릅니다.

악에 익숙해지거나 능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판단하는 일에서는 성숙해야 합니다. 영의 선물을 귀하게 여긴다는 이유로 생각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선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더욱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성숙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심판의 표징이 되었던 때

율법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가 다른 혀를 가진 이들을 통하여, 다른 이들의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하겠다. 그래도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린도전서 14:21 · 본디새김

이것은 이사야 28:11–12를 바울이 인용하고 재구성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적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 인용은 예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모세오경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경을 넓게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28장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예언자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낯선 입술과 다른 언어를 통해 말씀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경고하셨을 때 듣지 않던 백성이, 이제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의 말과 마주하게 되는 심판의 상황입니다.

그 낯선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백성에게 심판의 표징이 됩니다.

이것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충격적인 비교였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혀를 영적인 능력의 특별한 표시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듣게 되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언제나 축복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2절과 23–25절은 왜 반대로 보이는가

그러므로 여러 혀는 믿는 이들에게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표징이 되고, 예언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가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표징이 됩니다.고린도전서 14:22 · 본디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니 온 교회가 한자리에 모여 다 혀로 말하는데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 들어오면, 그들이 여러분더러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고린도전서 14:23 · 본디새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징이라던 혀가,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는커녕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미쳤다고 판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다 예언하는데 믿지 않는 이나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이가 들어오면, 모든 이가 그를 책망하고 모든 이가 그를 따져 묻습니다.고린도전서 14:24 · 본디새김

예언은 믿는 사람을 위한 표징이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 예언을 듣고 변화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22절의 원칙과 23–25절의 사례가 왜 반대로 보입니까?

해석은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22절의 ‘표징’을 부정적인 심판의 표징으로 읽는 해석, 22절과 23–25절의 ‘믿지 않는 사람’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인 사람들로 구별하는 해석, 22절을 그 활동이 가진 기능에 관한 진술로 보고 23–25절을 그 기능이 실제 모임에서 나타나는 사례로 읽는 해석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혀와 예언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여기서 어느 해석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사례들을 통해 무엇을 보여 주려 하는지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말이 많이 들린다고 해서 그 모임에 하나님의 임재가 효과적으로 증언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는 말로 전달될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숨은 것이 드러나다

그 마음의 숨은 것들이 드러나고, 그래서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참으로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계신다」 하고 알리며 하나님께 절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4:25 · 본디새김

그가 들은 말은 편안하고 기분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책망을 받고, 자신이 감추고 있던 사실과 마주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그를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그는 예언자의 개인적 능력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특별한 능력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전달된 말을 통해 하나님의 진실을 마주했기 때문에 엎드립니다.

앞의 장면에서는 사람들이 혀로 말했지만 방문객에게는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말이 그 사람의 마음에 도달했고, 그는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이 두 장면 사이에서 바울의 논증이 완성됩니다. 영의 선물이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 선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신다는 사실은 구별됩니다. 바울은 두 번째를 위해 첫 번째가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28장의 낯선 말을 앗시리아의 침략과 연결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사야 당시의 정치적·군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역사적 배경입니다. 또 28:9–13에 나타나는 반복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히브리어 표현을 지도자들의 조롱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를 재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지만, 히브리어 자체의 의미가 논쟁적인 구절이므로 하나의 해석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22절에 관한 세 해석의 근거는 이렇습니다. 첫째 해석은 이사야 28장의 낯선 말이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심판의 표징이 되었듯, 고린도의 이해할 수 없는 혀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표징일 수 있다고 보며, 23절에서 그들이 모임을 미쳤다고 평가하는 모습을 앞의 인용과 연결합니다. 둘째 해석은 2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을, 23–25절에서는 아직 복음을 충분히 듣지 못한 방문객을 염두에 둔다고 봅니다. 셋째 해석에는 표징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여러 변형이 있습니다. 특히 예언이 믿는 사람을 위한 표징이라는 말과 예언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이 회심하는 모습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25절의 장면을 사람의 비밀을 초자연적으로 알아내어 공개하는 행동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예언의 말이 책망과 분별을 가져와 듣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모습을 설명하며, 그 과정에 어떤 형태의 특별한 계시가 포함될 수 있는지는 본문만으로 완전히 확정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계신다」는 고백은 이사야 45:14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다른 민족들이 인정하는 장면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바울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이라면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26–33 본문 →

모두가 가진 것을 가져오는 모임

형제 여러분, 그러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모일 때 저마다 지닌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노래를 지니고 어떤 이는 가르침을 지니고 어떤 이는 드러내 보임을 지니고 어떤 이는 혀로 하는 말을 지니고 어떤 이는 풀어 옮김을 지닙니다. 모든 것이 세우는 일을 위해 이루어질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2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초기 고린도 공동체의 모임을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한 사람만 모든 활동을 담당하는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당시 모든 교회가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예배했다는 증거나 예배 순서의 완전한 규정은 아닙니다. 바울의 관심은 그들이 가져온 것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세우는 일을 위해 이루어질 일입니다.」 이 문장은 앞의 긴 논의를 하나의 실제적인 원칙으로 압축합니다. 누군가에게 노래나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반드시 지금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지는 말이라도 공동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칙은 말하는 사람에게 절제를 요구합니다.

혀로 말하는 사람에게도 잠잠할 때가 있다

누가 혀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로 말하고, 한 사람이 풀어 옮길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27 · 본디새김

이런 제한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실 수 있는 능력이 적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면 각 사람의 말을 구별하기 어렵고, 풀어 옮기는 사람이 없다면 말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하는 사람이 가진 선물의 진정성만 확인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선물이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풀어 옮기는 이가 없으면 그는 교회에서는 잠잠할 일입니다. 대신 자기에게도 하나님께도 말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28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가진 사람이라도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말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영적인 활동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동체 전체를 향해 이해되지 않는 말을 계속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말해야 한다는 의무를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잠잠함이 그 선물을 더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식이 됩니다.

예언자도 자기 차례를 양보해야 한다

예언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가려 살필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29 · 본디새김

예언에 관한 지침에서도 같은 원칙이 나타납니다. ‘가려 살핀다’는 구별하고 분별하며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는 앞에서 주님의 만찬을 논의하면서 ‘그 몸을 분별한다’고 말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게서 받은 말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말이 아무런 검토 없이 공동체 전체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예언을 귀하게 여기지만, 예언자의 말이 검토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분별합니까? 본문은 「다른 이들」이라고만 말하며, 그들이 다른 예언자들인지 공동체의 구성원들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바울이 구체적인 심사 절차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 형태의 교회 제도를 여기서 바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말도 공동체의 분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앉아 있는 다른 이가 드러내 보임을 받거든 먼저 말하던 이는 잠잠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30 · 본디새김

바울의 질서는 발언권을 가진 사람이 자기 말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원칙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는 질서입니다. 이 잠잠함은 말할 능력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차례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다양한 은혜의 선물들을 하나의 몸에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했던 사실과도 어울립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선물이 집중되어 있지 않다면, 한 사람의 말이 공동체의 모임 전체를 독점해서도 안 됩니다.

예언자들의 영들은 예언자들에게 복종합니다

여러분이 다 한 사람씩 차례로 예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배우고 다 권함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4:31 · 본디새김

이 구절에는 ‘다’라는 말이 두 방향으로 반복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모임에서 예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예언자 두세 사람이 말하도록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중심은 예언의 기회가 질서 있게 주어지고, 그 결과 공동체가 함께 배우고 권면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영들은 예언자들에게 복종합니다.고린도전서 14:32 · 본디새김

바울은 예언자가 영적인 활동에 참여할 때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순서와 때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내세워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하나님의 성품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이들의 모든 교회에서 그러하듯이,고린도전서 14:33 · 본디새김

이 절은 앞의 모든 지침을 이해하는 중심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예배가 효율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무질서’는 혼란이나 소요, 안정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말이며, 바울은 공동체가 그런 혼란에 빠지는 일을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평화’를 소음이 전혀 없는 상태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이 노래하고 가르치고 예언하며 혀로 말하는 일을 인정했고, 모든 사람을 침묵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들으며 함께 세워질 수 있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은 매우 어려운 명령을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32절의 ‘복종합니다’는 복종하거나 아래에 놓이는 관계를 나타냅니다. ‘예언자들의 영들’이 예언자 개인의 영적 활동을 뜻하는지, 예언을 일으키는 영적 작용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여자들은 잠잠할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4:34–35 본문 →

앞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던 여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이들의 모든 교회에서 그러하듯이,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할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율법도 말하듯이 복종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33–34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가장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입니다.

어려움은 단순히 오늘날의 독자가 이 명령을 낯설게 느낀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같은 편지의 다른 본문과 실제로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5에서 바울은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를 언급하며, 그 활동 자체를 금하지 않고 그때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의했습니다.

두 본문은 어떻게 함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는 단순한 문법 해석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본의 전승, 바울이 다루는 상황, 여성의 말하기와 예언의 관계,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먼저 확인해야 할 사본상의 문제

14:34–35는 주요 사본 전통에서 위치가 달라지는 부분입니다. 파피루스 46호와 바티칸 사본을 비롯한 많은 사본에서는 이 두 절이 지금의 위치인 33절 뒤에 놓이지만, 일부 서방 계열 사본에서는 40절 뒤에 놓입니다. 현재 알려진 그리스어 사본들이 이 두 절을 아예 빼고 있다는 증거는 없으며, 문제는 주로 위치의 차이에 있습니다.

이 위치의 차이를 근거로, 누군가가 여백에 적어 놓은 후대의 주석을 필사자들이 본문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 전해졌다는 견해가 제시됩니다. 반면 모든 주요 사본 전통에 두 절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원래 바울의 말이었지만 필사자들이 문맥에 맞추어 위치를 옮겼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두 절을 현재 위치에 두는 것은 주요 비평본문 전통을 따르는 편집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실만으로 모든 본문비평상의 논쟁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원래 말이라면 무엇을 금지하는가

이 구절을 바울의 원래 말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의미는 크게 셋으로 갈립니다. 예언을 공개적으로 가려 살피는 과정의 특정한 발언이나 질문을 제한한다는 읽기, 여성의 공적 발언에 더 넓은 제한을 둔다는 읽기, 34–35절을 고린도 신자들의 주장으로 보고 36절에서 바울이 그 주장을 반박한다는 읽기입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느냐에 따라 이 구절은 특정한 상황의 지침이 되기도 하고, 넓은 금지가 되기도 하며, 바울이 문제 삼는 고린도 사람들의 태도가 되기도 합니다.

문법적 문제도 있습니다. 34절의 ‘여자들’에 해당하는 귀나이케스(γυνή)는 여자들과 아내들이라는 두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35절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라고 하는 것은 이 구절이 특별히 기혼 여성들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을 높이지만, 34절의 표현만으로 그 범위를 기혼 여성에게만 한정한다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율법도 말하듯이」라는 표현도 문제를 남깁니다. 바울은 구약의 어떤 구절을 가리키는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나 창세기 3:16의 남녀 관계를 배경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지만, 모세의 율법에 여자는 교회 모임에서 일체 말해서는 안 된다는 직접적인 명령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구약의 특정한 규정이 여성의 모든 공적 발언을 금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해석의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몇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첫째, 14:34–35는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본문에 있는 말이므로 의미를 약화하거나 없는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같은 편지의 11:5에서는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활동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두 본문 사이의 긴장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셋째, 14장에서 바울은 잠잠하라는 명령을 여러 사람에게 사용합니다. 28절에서는 풀어 옮기는 사람이 없는 혀로 말하는 이에게, 30절에서는 먼저 말하던 예언자에게 잠잠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34절의 침묵이 특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말하기의 제한일 가능성을 고려하게 합니다. 그러나 34–35절에서는 그 제한의 범위가 훨씬 넓게 표현되어 있으므로, 세 경우가 반드시 완전히 같은 의미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넷째, 35절의 직접적인 문맥에는 배우고자 하는 질문과 남편에게 물어보는 일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함께 고려하면, 바울이 모든 여성의 모든 예배 발언을 언제나 금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제시했다고 쉽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오직 예배 중 소란스럽게 질문하는 여성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 구절은 그 한계를 인정한 채 읽어야 합니다.

바울의 논증 전체에서 분명한 것은 공동체의 모임이 누군가의 자기표현이나 무질서한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배우고 권면받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칙만으로 34–35절의 모든 해석상 어려움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설명하지 않는 상황을 임의로 만들어 그 긴장을 지워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이 두 절이 29절에서 예언의 말을 가려 살피라고 명령한 뒤 이어지는 부분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35절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습니다. 이 경우 여자들이 예언하거나 기도하는 일 자체가 제한된 것은 아닙니다. 둘째 읽기는 11장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다시 설명해야 합니다. 11장의 기도와 예언이 반드시 전체 교회 모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보거나, 두 장이 서로 다른 유형의 모임을 다룬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지만, 11장이 구체적으로 사적인 모임만을 가리킨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이 해결책 역시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셋째 읽기에서 바울은 여자들에게 침묵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구를 주장하는 고린도 사람들의 태도를 문제 삼는 셈이지만, 원문에는 이 두 절이 인용문임을 표시하는 명시적인 장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해석도 가능한 제안이지 확정된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만 이르렀습니까

고린도전서 14:36–40 본문 →

고린도 교회가 말씀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만 이르렀습니까?고린도전서 14:36 · 본디새김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 신자들이 만들어 낸 것도, 그들만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이 질문이 바로 앞의 여성에 관한 명령에 대한 반박인지, 고린도 공동체 전체의 독자적인 판단과 무질서한 예배에 대한 비판인지는 앞서 살펴본 해석의 차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의 자기중심성을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됩니다.

그들은 영에 속한 활동을 풍성하게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자신들만의 권위와 판단을 절대화하는 근거가 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들보다 먼저 있었으며, 자기들보다 훨씬 넓은 공동체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영적인 경험이 풍성하다는 사실은 그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주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기를 예언자나 영에 속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적는 것이 주님의 명령임을 인정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37 · 본디새김

12:1에서 바울은 영에 속한 것들을 두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자기를 예언자나 영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자신의 영적 지위를 내세워 사도적 가르침을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적 권위가 개인적 취향이나 고린도 사람들과의 권력 경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예언자의 말도 분별되어야 한다고 했던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영적인 경험을 아무런 판단 없이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주되심과 사도적 가르침을 공동체의 판단 기준으로 세웁니다.

인정하지 않는 이는 인정받지 못한다

누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인정받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4:38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은 원문에서 앎과 관련된 동사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대 비평 본문에서는 두 번째 동사가 수동형이지만, 일부 사본 전통에서는 ‘알지 못하게 내버려 두어라’는 명령형으로 읽어 번역의 어조가 달라집니다. 수동형으로 읽으면 누가 그를 인정하지 않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와 공동체 안에서 참된 영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가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실제로 그러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사도적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영적인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공동체 안에서 무제한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혀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예언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혀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고린도전서 14:39 · 본디새김

이 두 명령은 서로 균형을 이룹니다. 예언이 공동체를 세우는 데 더 직접적인 유익을 준다는 결론이 혀로 말하는 은혜의 선물을 전면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그 선물을 감사히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영적인 활동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해서 그 모든 활동을 억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이 영적인 활동이라고 해서 아무런 제한 없이 허용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두 태도를 모두 거부합니다.

다만 모든 것이 품위 있게 질서에 따라 이루어질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40 · 본디새김

「품위 있게」는 단순히 엄숙하고 장중하게 보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적절하고 마땅한 방식으로 행동하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질서에 따라」 역시 미리 정해진 예배 순서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지키라는 뜻으로 제한할 수 없습니다. 앞의 문맥에서 그 질서는 공동체가 함께 말하고 듣고 이해하기 위한 질서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차례를 지킵니다.

다른 사람이 드러내 보임을 받으면 자리를 양보합니다.

풀어 옮기는 사람이 없으면 공동체를 향해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도 분별을 받습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명령은 은혜의 선물을 억누르라는 결론이 아닙니다. 은혜의 선물이 공동체의 유익으로 이어지게 하라는 결론입니다.

조금 더 깊이

37절의 「주님의 명령」은 ‘명령’이라는 낱말을 포함하는 본문을 따릅니다. 일부 사본에는 그 낱말이 없이 「주님의 것입니다」에 해당하는 표현만 있어, 그 읽기에서는 바울의 가르침이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앞의 읽기에서는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는 점이 명시됩니다. 둘 사이에 표현상의 차이는 있지만 논증의 중심은 가깝습니다. 38절은 고린도전서 8:3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라고 말한 것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두 구절이 반드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7절이 세우는 예수님의 주되심은 고린도전서 앞부분과도 이어집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선포하면서 인간의 지혜와 화려한 말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고, 12:3에서는 거룩한 영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고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을 떠나 인간의 특별한 능력만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만찬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셨다고 전했습니다. 그런 주님을 고백하는 공동체에서 영적인 말이 다른 사람의 필요와 이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기표현의 도구가 된다면, 그 말의 사용 방식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주님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울이 14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길게 논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에서 전한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에 관한 가르침은 왜 은혜의 선물이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신학적 근거가 됩니다.

'아멘' 할 수 있는 사람

고린도전서 14:1–40 본문 →

고린도전서 14장의 처음에는 하나님께 신비를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실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아멘이라고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능력의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것만으로 그 능력의 사용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였을 때는 그 말이 누구에게 전달되는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배우는지, 그 말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므로, 바울이 말하는 질서는 단순한 운영상의 편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공동체의 모임에서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내용을 듣기 좋게 바꾸거나 왜곡하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전달되도록 말하는 방식을 조정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표현했습니까, 아니면 상대방이 알아야 할 것을 실제로 전달했습니까?

이제 장의 마지막에서 다시 그 모임을 떠올려 봅시다. 어떤 사람에게는 노래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여러 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말을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습니다.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어서, 누군가는 배우고 누군가는 권면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할 말이 생기면 먼저 말하던 사람은 잠잠해집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선물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선물을 사용하는 방향은 같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믿지 않는 한 사람이 그 모임에 들어옵니다. 그들의 말은 그에게 단순히 특별한 소리로 들리지 않고, 자신이 이해하고 응답할 수 있는 말로 다가옵니다. 마침내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계신다」.

영적인 모임은 말하는 사람이 주목받는 자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보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그 일이 가능하도록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절제하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필요할 때는 잠잠히 기다립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큰 소리를 내는 사람보다, 함께 아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남기며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