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예배와 은사

모든 것을 알아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모든 신비를 알고, 산을 옮길 만큼 믿음이 있으며, 자기 재산과 몸까지 내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말씀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낭독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성품을 설명할 때 인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장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바울의 말이 생각보다 훨씬 날카롭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하기 전에, 사랑이 없으면 무엇이 무너지는지부터 이야기합니다.

놀라운 언어 능력이 있어도 소음이 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지식과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모든 재산과 몸까지 내어 주어도 아무 유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능력과 성취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바울은 앞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선물을 주셨으며,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훨씬 더 나은 길을 보여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그 길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을 새로운 은혜의 선물 목록에 추가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예언이나 지식보다 더 강력한 초자연적 능력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먼저 모든 은혜의 선물을 사랑이 없는 상태에 놓아 보고, 그 결과를 보여 줍니다.

이 장은 세 번의 움직임으로 전개됩니다. 1–3절에서는 사랑이 없는 사람의 모든 성취가 무너집니다. 4–7절에서는 사랑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드러납니다. 8–13절에서는 인간이 자랑하는 지식과 예언의 한계가 밝혀지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의 지속성이 강조됩니다.

처음에는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할 수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에는 인간이 얼마나 조금 알고 있는지 고백합니다.

그 사이에 사랑이 놓여 있습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813장 본문 읽기 →

모든 것을 가져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고린도전서 13:1–3 본문 →

천사의 혀로 말해도

내가 사람의 혀와 천사의 혀로 말한다 해도 사랑을 지니지 않으면 나는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된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을 가정적인 상황에 놓습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천사의 언어를 모두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을 가능한 한 극단적인 수준까지 확대하는 수사적 가정을 사용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언어의 정체보다 언어 능력의 극대화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의 말이 효과가 없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자신이 소리를 내는 금속 악기가 됩니다.

말은 들립니다.

소리는 큽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리 놀라운 말이라도 결국 울림만 남을 수 있습니다. 말은 원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인데, 사랑이 없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의 능력만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그때 말은 관계를 세우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소리가 됩니다.

바울은 언어 능력의 수준을 묻기 전에 그 언어가 사랑을 담고 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지식과 믿음을 극한까지 끌어올립니다.

모든 신비를 알고 모든 믿음을 가져도

내가 예언을 지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앎을 알고 있다 해도, 산들을 옮길 만큼 모든 믿음을 지녔다 해도, 사랑을 지니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2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는 「모든」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모든 신비.

모든 앎.

모든 믿음.

바울은 지식이 조금 부족한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신비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산을 옮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은 마태복음 17:20과 마가복음 11:23에서도 믿음의 놀라운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쓰인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이 이룬 일이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실제로 예언할 수 있고, 지식이 있으며, 놀라운 믿음까지 지녔다고 가정합니다. 그런데도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은혜의 선물과 그 선물을 가진 사람의 가치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해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선물을 사랑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는 신비나 앎이나 믿음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자랑하면서 사랑이 없는 사람의 영적 성취가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능력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 어느 것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3절에서 그는 더욱 뜻밖의 사례를 제시합니다.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 남들을 먹여 준다 해도, 내가 자랑하려고 내 몸까지 내준다 해도, 사랑을 지니지 않으면 나는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합니다.고린도전서 13:3 · 본디새김

앞의 두 절에서는 특별한 영적 능력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재산의 일부를 기부하는 경우가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 사람들을 먹이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합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동인데도, 바울은 거기에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 자체가 언제나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높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재산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필요보다 도움을 주는 자신의 위대함에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생겼다는 사실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곧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내가 자랑하려고 내 몸까지 내준다 해도」입니다. 이 대목은 사본에 따라 ‘자랑하려고’와 ‘불에 타도록’으로 갈리는데, 이 본문은 ‘자랑하려고’를 따릅니다. 이 읽기를 따르면 바울의 논증은 한층 날카로워집니다.

사람은 자신의 몸까지 내어 주면서도 자신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희생의 크기만으로 그 사람의 사랑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서로 다른 세 가지 결론을 사용합니다.

| 가진 능력과 행동 | 사랑이 없을 때 | | --- | --- | | 사람과 천사의 혀로 말함 |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됨 | | 모든 지식과 믿음을 지님 | 아무것도 아님 | | 모든 재산과 몸을 내어 줌 |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함 |

처음에는 그 사람의 말이 소음처럼 변합니다. 다음에는 그 사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됩니다.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얻는 유익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언어와 지식과 믿음과 헌신을 차례로 극대화하면서도, 사랑이 없다는 조건 하나로 그 모든 성취를 무너뜨립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합니까? 바울은 그 질문에 추상적인 정의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된 것입니다」(게고나)는 ‘되어 있다’는 결과적 상태를 나타내는 완료형으로, 능력의 결핍이 아니라 그 능력만 남았을 때의 존재 상태를 강조합니다. ‘천사의 혀’가 실제로 어떤 형태의 언어인지 바울은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천사들이 독립적인 언어를 사용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3절은 일부 초기 사본에 카우케소마이, 곧 ‘내가 자랑하려고’가 전해지고, 다른 사본들에는 몸을 불태우도록 내준다는 의미의 카우데소마이 또는 유사한 형태가 전해집니다. 파피루스 46호(P46)와 시나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은 ‘자랑하려고’를 뒷받침합니다. ‘불에 타도록’을 따르면 자기 몸까지 희생하는 극단적인 헌신조차 사랑이 없으면 무익할 수 있다는 점이, ‘자랑하려고’를 따르면 자기희생처럼 보이는 행동 안에도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3절은 예수님의 자기 내어 주심과도 이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18–25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선포했고, 빌립보서 2:5–8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신 일을, 로마서 5:6–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합니다. 이 본문들은 13장에서 직접 인용되지 않으며, 바울이 사랑의 모든 성품을 예수님의 생애에서 하나씩 인용하고 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몸까지 내어 주면서도 자랑할 수 있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희생의 크기가 아니라, 그 희생이 누구를 향하고 무엇을 이루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은 무엇을 하는가

고린도전서 13:4–6 본문 →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을 베푼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을 베풉니다. 사랑은 시샘하지 않습니다. 뽐내지 않습니다. 부풀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3:4 · 본디새김

바울은 사랑을 아름다운 감정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이 대목을 이루는 표현들은 동사들입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오래 참음은 성급하게 분노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 때문에 불편하거나 화가 날 수 있지만, 성급하게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친절을 베푼다고 말합니다. 오래 참는 것만으로 사랑이 완성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참는 것과 그 사람에게 실제로 선을 베푸는 것은 구별됩니다.

사랑은 나쁜 행동을 자제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행합니다.

시샘하지 않고 부풀지 않는다

바울은 사랑이 하는 두 가지 긍정적인 행동을 말한 뒤, 사랑이 하지 않는 행동들을 길게 열거합니다. 그 첫 번째가 시샘이며,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은혜의 선물 논쟁과 직접 연결됩니다. 앞장에서 바울은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샘은 그 반대로,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지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뽐내지 않습니다. 부풀지 않습니다」는 반대 방향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시샘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바라보면서, 뽐냄과 부풀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바라보면서 생깁니다. 한쪽은 자신에게 없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한쪽은 자신에게 있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낮게 여깁니다. 그러나 둘 다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 결정합니다.

‘부풀다’는 고린도전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8:1에서 앎이 사람을 부풀린다고 말했는데, 이제 사랑은 부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식이 사람을 크게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13:4의 ‘부풀지 않는다’는 고린도 공동체가 자신들의 영적 성취를 평가하는 방식을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사랑은 내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증명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자기 것을 구하지 않는 사랑

꼴사납게 굴지 않고 자기 것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나쁜 것을 셈해 두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3:5 · 본디새김

앞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자기 이익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찾으라고 권면했습니다(10:24). 여기서 그는 그것을 사랑의 성품으로 설명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필요를 돌보거나 정당한 권리를 지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도에게 생활의 필요를 지원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변호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자기 이익을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 언제나 앞세우는 태도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식탁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만찬을 먼저 먹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몫을 챙겼지만, 다른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자신에게 음식이 있다는 사실만 생각하지 않고, 함께 식사하는 사람에게도 먹을 것이 있는지 살핍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미덕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식탁에서 실제로 드러나야 하는 행동입니다.

「나쁜 것을 셈해 두지 않습니다」의 ‘셈하다’는 계산하거나 기록하고 헤아리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잘못을 장부에 기록하듯 계속 계산하지 않습니다.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잘못을 자신의 분노와 보복을 정당화하는 자료로 계속 쌓아 두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어떠한 책임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사랑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다음 절과 충돌합니다. 상대방에게 복수하기 위해 잘못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은 보복의 장부를 작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린도전서 13: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사랑에 관한 오해를 막아 줍니다.

우리는 때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며, 갈등을 피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과 진리를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사랑이 없을 수는 있지만, 사랑은 오히려 진리가 드러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그가 불의한 일을 하는 것을 방관하거나, 그가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잘못을 눈감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관심은 상대방이 당장 자신을 좋아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에도 있습니다.

바울은 5장에서 공동체 안의 심각한 잘못을 방치하는 일을 꾸짖었습니다. 동시에 8–10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양심을 해치지 않도록 자유를 절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두 요구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3장의 사랑을 언제나 부드럽게 말하고 누구에게도 불편한 질문을 하지 않는 성격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때로 오래 참습니다.

때로 친절을 베풉니다.

그리고 때로 불의를 거부합니다.

그 모든 행동을 관통하는 것은 상대방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향한 관심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오래 참다’(마크로튀메이)는 오래 참거나 성급하게 분노하지 않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오래 참음과 친절은 출애굽기 34:6에서 여호와야훼께서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사랑과 신실함이 풍성하신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고백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오래 참음과 자비로운 행동이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깊이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인간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내는 이상적인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통해 이미 알려진 사랑의 모습과 어울립니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 모든 것을 믿는다

고린도전서 13:7 본문 →

모든 것을 감수하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소망하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린도전서 13:7 · 본디새김

여기서 다시 「모든」이라는 말이 반복되며 1–3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에서는 모든 신비와 모든 앎, 모든 믿음, 모든 재산과 몸을 내어 주는 일이 등장했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처음의 ‘모든’은 인간이 가진 능력과 성취의 극한을 가리켰습니다. 이제의 ‘모든’은 사랑이 사람과 상황을 대하는 지속적인 태도를 가리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끝까지 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네 표현을 문자적으로 무제한 적용하면 곤란한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사랑이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말하는 모든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반복적으로 해를 끼치는 사람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사랑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표현은 다른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고 불신하는 태도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사랑은 가능한 한 상대방을 신뢰하려 하고, 그 사람이 변화하고 회복될 가능성을 성급하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동사 「감수하고」(στέγω)는 ‘견디다’로도 ‘덮다, 보호하다’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의 「모든 것을 견딥니다」와 함께 읽으면, 다른 사람을 쉽게 포기하거나 그의 잘못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어려움을 받아 내는 태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견딘다는 말은 학대나 착취, 폭력을 무기한 허용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사랑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6절의 기준은 여전히 유효하며,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멈추게 하거나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이 사랑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처럼 강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사랑의 끈질긴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곧바로 관계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실패가 마지막 모습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좋은 결과를 소망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이 지속성을 더 넓은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딘다는 사실에서, 사랑 자체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첫 번째 동사 스테게이는 ‘견디다’, ‘감수하다’라는 의미와 함께 ‘덮다’, ‘보호하다’라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 제시된 본문은 「감수하고」로 옮겼고, ‘모든 것을 덮어 준다’ 또는 ‘모든 것을 보호한다’로 옮길 수 있는 이유도 이 단어의 의미 범위 때문입니다. 어느 의미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 뉘앙스가 생깁니다.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3:8–10 본문 →

놀라운 은혜의 선물에도 끝이 있다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언이라면 없어질 것이고, 혀라면 그칠 것이며, 앎이라면 없어질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8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은혜의 선물이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 선물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πίπτω)는 ‘떨어지다’, ‘넘어지다’라는 동사로, 사랑이 무너지거나 실패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예언과 앎이 나쁘거나 불필요한 선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장에서 바울은 영께서 여러 선물을 뜻하시는 대로 나누어 주신다고 말했고, 예언과 앎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선물들의 근원이 아니라 그 역할의 한계를 말합니다. 이 점은 9절에서 밝혀집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3:9 · 본디새김

앞장에서 여러 은혜의 선물을 열거했던 바울이 이제 그 선물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분적으로 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가르치는 바울 자신도 그 한계 밖에 서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전한 복음이 거짓이라거나,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불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알지만 아직 완전하게 아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언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일 수 있지만, 현재의 예언 활동은 아직 완전한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사랑은 계속 남고 이러한 선물들은 없어집니까? 바울은 10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질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0 · 본디새김

‘온전한 것’은 완전한, 성숙한, 목적에 이른이라는 의미 범위를 가진 말입니다. 현재의 앎과 예언은 부분적이지만, 온전한 것이 오면 그 부분적인 역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온전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한 해석은 예수님의 오심과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미래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며, 12절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본다는 표현이 지금의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앎과 장차 이루어질 직접적이고 온전한 앎을 대비한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다른 해석은 교회가 더 성숙한 상태에 이르거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가 완성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며, 일부 은사중지론적 해석에서는 신약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는 것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는 시점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12절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함’과 ‘온전히 앎’을 단순히 문서의 완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의 논증을 따라가면, 12절에서 현재의 앎과 미래의 앎이 매우 강하게 대조되므로 ‘온전한 것’은 한 개인이 더 성숙해지는 정도보다 훨씬 결정적인 전환을 가리킨다고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전환의 세부 과정이나 각 은혜의 선물이 언제 사라지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8절에서 예언과 앎은 ‘없어질 것’, 혀는 ‘그칠 것’이라고 한 동사의 차이를 근거로, 혀의 은사가 반드시 먼저 끝난다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시간표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은혜의 선물들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반면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 은혜의 선물보다 더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온전함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뜻밖의 장면을 꺼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의 것이 필요한 때와 필요하지 않은 때

고린도전서 13:11 본문 →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어린아이의 것들을 버렸습니다.고린도전서 13:11 · 본디새김

바울은 갑자기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서전적 회상이 아닙니다. 그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통해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그 성장 단계에 알맞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의 방식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예언과 앎은 지금 필요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부분적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더 온전한 상태가 오면 이전의 방식은 자신의 역할을 마치게 됩니다. 바울은 어린 시절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의 언어와 생각은 그 시기에 실제로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어떤 선물이 지금 귀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영원히 같은 형태로 필요하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선물이 참되게 귀하더라도, 그 선물이 담당하는 역할에는 목적과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현재 상태는 어린아이와 어떻게 닮았을까요? 바울은 다음 절에서 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거울입니다.

지금은 거울로 수수께끼처럼 보지만

고린도전서 13:12 본문 →

고린도 사람이 손에 들었을 거울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수수께끼처럼 보지만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만 알지만 그때는 내가 온전히 알려진 그대로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2 · 본디새김

당시 거울은 오늘날의 유리 거울과 같지 않았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청동이나 다른 금속을 연마하여 반사면으로 만든 거울을 사용했고, 고린도의 독자들도 이러한 금속 거울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잘 만든 금속 거울도 상을 비추지만, 거울 속의 모습은 대상 자체가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그 차이를 사용합니다.

‘수수께끼’는 쉽게 풀리지 않는 표현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현재의 앎을 해상도가 낮은 영상처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실제로 보지만 그 의미와 실상을 온전히 파악하지는 못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이 언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직접 말씀하셨다는 민수기 12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에게는 예언과 지식이라는 은혜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며, 그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신자가 아직 완전한 인식에 이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식을 자랑하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역시 아직 거울로 보는 사람이며, 이미 모든 것을 직접 마주하여 본 사람처럼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알지만 아직 부분적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참된 앎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 알려진 그대로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은 같은 절 끝에서 「지금은 내가 부분만 알지만 그때는 내가 온전히 알려진 그대로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지금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이미 알려진 것, 두 종류의 앎이 마주 놓입니다.

원문은 누가 바울을 온전히 아는지 직접 이름을 적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를 아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고린도전서 8:3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라고 말했고, 갈라디아서 4:9에서도 하나님을 알게 된 것과 하나님께 알려진 것을 연결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인간이 장차 하나님과 동일한 정도의 전지성을 갖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지금의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앎과는 다른 온전한 관계적 인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앎보다 하나님의 앎이 앞섭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완전히 파악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며, 그 관계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의 전체 모습도 온전히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바울이 말한 오래 참음과 친절, 시샘하지 않음과 자기 것을 구하지 않음은 완전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 보여 주는 우월한 태도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이 현재의 부분적인 앎을 넘어 계속 남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수수께끼처럼’은 엔 아이니그마티로, 아이니그마는 수수께끼나 쉽게 풀리지 않는 표현을 가리킵니다. 민수기 12:6–8에서 여호와야훼는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환상과 꿈으로 말씀하시지만, 모세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분명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고 하시며, 그리스어 민수기 12:8에는 ‘수수께끼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거울과 수수께끼가 현재의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하나님 인식을 나타내며, ‘얼굴과 얼굴’이 민수기 12:8과 신명기 34:10의 모세 전승에 연결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모세는 다른 예언자들보다 특별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인물인데,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 신자들의 현재 상태를 여전히 부분적인 앎의 단계에 놓습니다. 한편 바울이 반드시 낡거나 표면이 손상된 거울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리고 가장 큰 것

고린도전서 13:13 본문 →

이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셋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셋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13:13 · 본디새김

바울은 긴 논증을 세 단어로 마무리합니다.

이 세 가지는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도 함께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에서는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5:8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구원의 소망이 함께 나타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결합은 바울의 신앙 이해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이 가장 크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가지 해석은 사랑이 가장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바울은 앞에서 예언과 앎이 사라지지만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 해석에는 믿음과 소망이 장차 온전함이 이루어진 뒤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고린도전서 13:13 자체는 그 문제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해석은 그 이유를 가치와 목적의 관점에서 찾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와, 소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태도와,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과 관련됩니다. 앞에서 사랑이 없다면 가장 놀라운 은혜의 선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니, 사랑이 가장 크다는 말은 다른 선물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두 설명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에서」 가장 큰지 구체적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세 가지 가운데 사랑이 가장 크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바울은 믿음과 소망을 버리고 사랑만 남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셋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우월성이 믿음과 소망의 불필요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요소들로 함께 제시됩니다.

조금 더 깊이

믿음과 소망의 현재적 형태가 장차 온전한 상태에서 같은 형태로 지속되는지, 아니면 장차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는 성격을 지니므로 그 역할이 변화하는지는 열린 질문입니다. 로마서 8:24–25에서는 소망이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일과 연결되고, 고린도후서 5:7에서는 현재의 삶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면 — 거울 앞에 선 사람

고린도전서 13:1–13 본문 →

고린도전서 13장은 놀라운 소리로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혀와 천사의 혀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누구보다 뛰어날 수 있었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 소리는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와 같았습니다. 이제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물건을 손에 든 사람처럼 이야기합니다. 거울에는 무엇인가 비치지만,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왜 사랑을 예언이나 지식, 믿음과 같은 은혜의 선물 목록에 추가하지 않았을까요?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다를 수 있고, 바울은 모든 사람이 같은 선물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상태를 정당화해 주는 은혜의 선물은 없습니다. 어떤 선물을 지녔든 그 사람의 행동은 사랑이라는 기준 앞에 놓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받은 선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을 은혜와 분리된 인간의 독립적인 도덕적 성취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에게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 곧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일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부분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며, 바울 자신도 그 상태를 벗어나 있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을 잘못 이해할 수 있고,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과 친절, 시샘하지 않음과 부풀지 않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진리를 대신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진리 전체를 이미 소유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도입니다.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고, 하나님의 지혜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만 알지만」. 장의 처음에 상상했던 사람은 모든 신비와 모든 앎을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의 바울은 자신이 부분적으로 안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울로 수수께끼처럼 보는 지금에도 필요합니다.

아직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을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리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온전한 것이 오지 않았어도 다른 사람을 위해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장의 끝에서 거울을 깨뜨리거나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 거울을 통해 보지만, 그것이 마지막 모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 단어를 남깁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지금에도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해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