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예배와 은사
모든 것을 알아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모든 비밀을 알고, 산을 옮길 만큼 믿음이 있으며, 자기 재산과 몸까지 내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말씀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낭독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성품을 설명할 때 인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장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바울의 말이 생각보다 훨씬 날카롭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하기 전에, 사랑이 없으면 무엇이 무너지는지부터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다른 좋은 성품보다 조금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능력과 이룬 일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바울은 앞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선물을 주셨으며,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훨씬 더 나은 길을 보여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그 길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을 새로운 은혜의 선물 목록에 추가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예언이나 지식보다 더 강력한 초자연적 능력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먼저 모든 은혜의 선물을 사랑이 없는 상태에 놓아 보고, 그 결과를 보여 줍니다.
이 장은 세 번의 움직임으로 전개됩니다. 1–3절에서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 이룬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4–7절에서는 사랑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드러납니다. 8–13절에서는 인간이 자랑하는 지식과 예언의 한계가 밝혀지고, 그 한계를 넘어서도 사랑은 계속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처음에는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할 수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에는 인간이 얼마나 조금 알고 있는지 고백합니다.
그 사이에 사랑이 놓여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천사의 말로 말해도
내가 사람의 말뿐 아니라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심벌즈가 된 셈입니다.고린도전서 13:1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을 가정적인 상황에 놓습니다. 실제로 천사의 말을 모두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말하기 능력을 가진 경우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이 실제로 어떤 형태의 언어인지 바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 말이 어떤 언어인지보다 언어 능력이 얼마나 놀라울 수 있는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그 사람의 말이 효과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자신이 소리를 내는 금속 악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원문은 ‘되어 있다’는 결과적 상태를 나타내는 완료형이며, 두루새김은 이를 「된 셈입니다」(γίνομαι)로 옮겼습니다.
말은 들립니다.
소리는 큽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리 놀라운 말이라도 결국 울림만 남을 수 있습니다. 말은 원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의 능력만 두드러지고, 말은 관계를 세우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소리가 됩니다.
바울은 언어 능력의 수준을 묻기 전에 그 언어가 사랑을 담고 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지식과 믿음을 극한까지 끌어올립니다.
모든 비밀을 알고 온전한 믿음을 가져도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을 갖추었다 해도, 산들을 옮길 만큼 온전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2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믿음에도 같은 ‘모든’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온전한 믿음」으로 옮겼습니다.
모든 비밀.
모든 지식.
온전한 믿음.
바울은 지식이 조금 부족한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비밀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산들을 옮길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예언할 수 있고, 지식이 있으며, 놀라운 믿음까지 지녔습니다.
그런데도 결론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입니다.
바울은 은혜의 선물과 그 선물을 가진 사람의 가치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해도,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선물을 사랑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바울은 비밀이나 지식이나 믿음 자체가 가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가졌다고 자랑하면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이룬 일이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한 사람의 신앙이 깊다고 판단합니까? 얼마나 많이 아는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말하는지, 얼마나 대담하게 믿음을 표현하는지입니까? 바울은 이러한 능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산을 옮기는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17:20과 마가복음 11:23에서 산을 옮기는 이미지는 믿음의 놀라운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3절에서 그는 더욱 뜻밖의 사례를 제시합니다.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 사람들을 먹인다 해도, 내가 자랑하려고 내 몸까지 내어 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3:3 · 두루새김
이제 바울은 특별한 영적 능력이 아니라 매우 선한 행동을 이야기합니다.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 사람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행동에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이 언제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높이거나 인정받기 위해 재산을 나눌 수도 있고, 도움을 받는 사람의 필요보다 도움을 주는 자신의 위대함에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생겼더라도, 그 행동이 곧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다음 표현은 그 차이를 더 날카롭게 만듭니다. 「내가 자랑하려고 내 몸까지 내어 준다 해도」. 이 부분에는 중요한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초기 사본에는 ‘내가 자랑하려고’라는 읽기가, 다른 사본들에는 몸을 ‘불태우도록’ 내준다는 읽기가 전해집니다. 두루새김은 파피루스 46호(P46)와 시나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이 뒷받침하는 앞의 읽기를 따랐습니다.
‘불에 타도록 내어 준다’는 읽기에서는 자기 몸까지 희생하는 극단적인 헌신조차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을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자랑하려고 내어 준다’는 읽기에서는 자기희생처럼 보이는 행동 안에도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선명해집니다.
사람은 자신의 몸까지 내어 주면서도 자신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희생의 크기만으로 그 사람의 사랑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서로 다른 세 가지 결론을 사용합니다.
| 가진 능력과 행동 | 사랑이 없을 때 | | --- | --- | | 사람의 말뿐 아니라 천사의 말까지 함 |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심벌즈가 된 셈임 | | 모든 지식과 온전한 믿음을 지님 | 아무것도 아님 | | 가진 것을 모두 나누고 몸까지 내어 줌 | 내게 아무 유익이 없음 |
처음에는 그 사람의 말이 소음처럼 변합니다. 다음에는 그 사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됩니다.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얻는 유익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언어와 지식과 믿음과 헌신을 차례로 극대화하면서도, 사랑이 없다는 조건 하나로 그 모든 성취를 무너뜨립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은 예수님의 자기 내어 주심과 대조해 읽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5–8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신 일을 설명하고, 로마서 5:6–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합니다. 이 두 본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직접 인용되지 않으며, 바울은 이 장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몸을 내어 주면서도 자랑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다른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희생의 크기가 아니라, 그 희생이 누구를 향하고 무엇을 이루는가가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18–25에서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선포한 것도 사람이 자랑하는 능력과 지혜의 기준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이 장과 어울립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합니까? 바울은 추상적인 정의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 보여 줍니다.
사랑은 무엇을 하는가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을 베푼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을 베풉니다. 사랑은 시샘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우쭐대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3:4 · 두루새김
바울은 사랑을 아름다운 감정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이 대목을 이루는 표현들은 동사들입니다.
첫 번째는 오래 참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 때문에 불편하거나 화가 날 수 있지만, 성급하게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보복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친절을 베푼다고 덧붙입니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참는 것과 그 사람에게 실제로 선을 베푸는 것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쁜 행동을 자제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행합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34:6에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쉽게 화를 내지 않으시고 사랑과 신실함이 풍성하신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오래 참음과 자비로운 행동이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깊이 관련된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로 연결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이상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시샘하지 않고 우쭐대지 않는다
바울은 사랑이 하는 두 가지 긍정적인 행동을 말한 뒤, 사랑이 하지 않는 행동들을 길게 늘어놓습니다. 그 첫 번째가 시샘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은혜의 선물 논쟁과 직접 연결됩니다. 앞장에서 바울은 몸의 한 부분이 영광을 받으면 모든 부분이 함께 기뻐한다고 말했는데, 시샘은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지는 태도입니다.
이어지는 「자랑하지 않으며, 우쭐대지 않습니다」는 반대 방향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시샘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바라보면서 생깁니다.
자랑과 우쭐댐은 자신이 가진 것을 바라보면서 생깁니다.
한쪽은 자신에게 없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한쪽은 자신에게 있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낮게 여깁니다. 그러나 둘 다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 결정합니다.
「우쭐대지 않습니다」(φυσιόω)로 옮긴 원문의 말은 ‘부풀다’라는 뜻으로, 고린도전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8:1에서 지식이 사람을 부풀린다고 말했는데, 이제 사랑은 부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식이 사람을 크게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증명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화를 내지 않고, 남이 한 잘못을 마음에 쌓아 두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3:5 · 두루새김
앞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자기 이익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찾으라고 권면했습니다(10:24). 여기서 그는 그것을 사랑의 성품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바울은 사도에게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문제 되는 것은 자기 필요를 돌보는 일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 언제나 앞세우는 태도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식탁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저녁 식사를 먼저 먹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몫을 챙겼지만, 다른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자신에게 음식이 있다는 사실만 생각하지 않고, 함께 식사하는 사람에게도 먹을 것이 있는지 살핍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좋은 성품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식탁에서 실제로 드러나야 하는 행동입니다.
「남이 한 잘못을 마음에 쌓아 두지 않습니다」(λογίζομαι)의 원문은 계산하거나 기록하고 헤아리는 행위를 나타낼 수 있으며, 두루새김은 그 뜻을 풀어 옮겼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잘못을 장부에 기록하듯 계속 계산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자신의 분노와 보복을 정당화하는 자료로 쌓아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어떠한 책임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다음 절과 충돌합니다. 바울은 곧 사랑이 옳지 않은 일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보복의 장부를 작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지우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옳지 않은 일을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린도전서 13:6 · 두루새김
우리는 때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며, 갈등을 피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과 진리를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또 그가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눈감아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관심은 상대방이 당장 자신을 좋아하는가에만 있지 않고, 그 사람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에도 있습니다.
바울은 5장에서 공동체 안의 심각한 잘못을 내버려 두는 일을 꾸짖었습니다. 동시에 8–10장에서는 다른 사람의 양심을 해치지 않도록 자유를 절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두 요구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때로 오래 참습니다.
때로 친절을 베풉니다.
그리고 때로 옳지 않은 일을 거부합니다.
그 모든 행동에 흐르는 것은 상대방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향한 관심입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는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에 희망을 품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린도전서 13:7 · 두루새김
여기서 다시 「모든」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1–3절에서는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 가진 것을 모두 나누는 일이 등장했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처음의 ‘모든’은 인간이 가진 능력과 이룬 일이 얼마나 대단할 수 있는지를 가리켰습니다. 이제의 ‘모든’은 사랑이 사람과 상황을 대하는 꾸준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끝까지 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네 표현을 글자 그대로 아무 제한 없이 적용하면 곤란한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사랑이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모든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까? 바울은 바로 앞에서 사랑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다른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는 태도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사랑은 가능한 한 상대방을 믿으려 하고, 그 사람이 변화하고 회복될 가능성을 성급하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는 말은 학대나 착취, 폭력을 끝없이 허용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옳지 않은 일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6절의 기준은 여전히 적용되며,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멈추게 하거나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이 사랑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처럼 강한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이 끈질기게 계속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관계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의 실패가 마지막 모습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좋은 결과에 희망을 품고, 어려움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기분이 좋을 때 나타나는 호의가 아니라, 어려운 상황을 통과하면서도 상대방의 유익을 향하는 꾸준한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첫 번째 동사 스테게이는 ‘견디다’, ‘감수하다’라는 의미와 함께 ‘덮다’, ‘보호하다’라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참고」로 옮겼고, ‘모든 것을 덮어 준다’로 옮길 수 있는 이유도 이 단어의 뜻의 범위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다시 「모든 것을 견딥니다」라고 말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처음의 ‘참음’에는 다른 사람을 쉽게 포기하거나 그의 잘못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어려움을 받아 내는 태도가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딘다는 사실에서, 사랑 자체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로 나아갑니다.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놀라운 은혜의 선물에도 끝이 있다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사라질 것이고, 방언은 그칠 것이며, 지식은 사라질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8 · 두루새김
앞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은혜의 선물이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 선물들이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πίπτω)는 ‘떨어지다’, ‘넘어지다’라는 동사로, 사랑이 무너지거나 실패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언과 지식이 나쁘거나 필요 없는 선물인 것은 아닙니다. 앞장에서 바울은 영께서 여러 선물을 뜻하시는 대로 나누어 주신다고 말했고, 예언과 지식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선물들이 맡는 역할에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부만 알고 일부만 예언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3:9 · 두루새김
앞장에서 여러 은혜의 선물을 나열했던 바울이 이제 그 선물의 한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한계 밖에 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부만 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가르치는 바울 자신도 현재의 부분적인 앎에 포함됩니다.
그렇다고 그가 전한 복음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일부만 안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알지만 아직 완전하게 아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언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일 수 있지만, 아직 완전한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사랑은 계속 남고 이러한 선물들은 사라집니까? 바울은 10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0 · 두루새김
「온전한 것」(τέλειος)으로 옮긴 원문은 완전한, 성숙한, 목적에 이른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현재의 앎과 예언은 부분적이지만, 온전한 것이 오면 그 부분적인 역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온전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여기에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해석은 예수님의 오심과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미래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12절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본다는 표현이 지금의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앎과 앞으로 이루어질 직접적이고 온전한 앎을 대비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해석은 교회가 더 성숙한 상태에 이르거나 계시가 완성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며, 일부 은사중지론적 해석은 신약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는 것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정경이 완성되는 시점을 밝히지 않으며, 12절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함’과 ‘온전히 앎’을 문서의 완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설명을 따라가면, 「온전한 것」은 한 개인이 더 성숙해지는 정도보다 훨씬 결정적인 변화를 가리킨다고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각 은혜의 선물이 언제 사라지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8절에서 예언과 지식은 「사라질 것」(καταργέω), 방언은 「그칠 것」(παύω)이라고 한 동사의 차이를 근거로 방언이 반드시 먼저 끝난다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시간표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은혜의 선물들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반면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 은혜의 선물보다 더 화려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온전함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뜻밖의 장면을 꺼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의 것이 필요한 때와 필요하지 않은 때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뒤에는 어린아이 때의 방식을 버렸습니다.고린도전서 13:11 · 두루새김
바울은 갑자기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 나이와 성장 단계에 알맞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의 방식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어린 시절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의 말과 생각은 그 시기에 실제로 필요했지만, 어른이 된 뒤에도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언과 지식도 지금 필요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더 온전한 상태가 오면 이전의 방식은 자신의 역할을 마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어떤 선물이 지금 귀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영원히 같은 형태로 필요하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바울은 다음 절에서 또 하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거울입니다.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고린도 사람이 손에 들었을 거울
지금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듯 희미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일부만 알지만,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신 것처럼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2 · 두루새김
당시 거울은 오늘날의 유리 거울과 같지 않았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청동이나 다른 금속을 갈고 닦아 만든 거울을 사용했습니다. 잘 만든 금속 거울도 모습을 비추지만, 거울 속의 모습은 대상 자체가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그 차이를 사용합니다.
두루새김이 「희미하게」로 옮긴 자리는 원문에서 ‘수수께끼처럼’이라는 뜻의 엔 아이니그마티(αἴνιγμα)입니다. 바울은 현재의 앎을 선명하지 않은 영상처럼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보지만 그 의미와 실제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에게는 예언과 지식이라는 은혜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신자가 아직 완전한 앎에 이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식을 자랑하던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 수는 있지만, 그 사람 역시 아직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듯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알지만 아직 일부만 압니다. 그러므로 참된 앎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신 것처럼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같은 절에서는 두 종류의 앎이 마주 놓입니다.
지금 내가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아시는 것.
원문은 누가 바울을 온전히 아는지 직접 이름을 적지 않지만, 문맥상 하나님이 그를 아신다는 의미가 자연스러워 두루새김은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신 것처럼」으로 옮겼습니다. 고린도전서 8:3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표현은 사람이 앞으로 하나님과 똑같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의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앎과는 달리, 온전한 관계 안에서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알려진 사람이며, 그 관계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한 뒤에야 시작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아직 일부만 아는 상태에서도 사랑은 가능하며, 또 필요합니다.
사랑은 완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보여 주는 우월한 태도가 아닙니다. 일부만 아는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표현에는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민수기 12:6–8에서 하나님은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환상과 꿈으로 말씀하시지만, 모세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분명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고 하시며, 그리스어 민수기 12:8에는 ‘수수께끼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13:12의 거울과 수수께끼 표현이 현재의 간접적인 하나님에 대한 앎을 나타내고, 「얼굴과 얼굴」이 민수기 12:8과 신명기 34:10에 전해지는 모세의 이야기와 연결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9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것과 하나님께 알려진 것을 연결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리고 가장 큰 것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가 남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고린도전서 13:13 · 두루새김
바울은 긴 설명을 세 단어로 마무리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도 함께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에서는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희망의 인내가, 5:8에서도 믿음과 사랑과 구원의 희망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이 가장 크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해석은 사랑이 가장 오래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예언과 지식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해석은 가치와 목적의 관점에서 찾습니다. 앞에서 바울이 사랑이 없다면 가장 놀라운 은혜의 선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니, 사랑은 다른 선물들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두 설명은 반드시 서로 맞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에서」 가장 큰지 구체적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세 가지 가운데 사랑이 가장 크다는 사실입니다.
또 바울은 믿음과 희망을 버리고 사랑만 남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 가지가 남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이 믿음과 희망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믿음과 희망은 온전함이 이루어진 뒤에도 같은 형태로 이어질까요? 로마서 8:24–25에서는 희망이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일과 연결되고, 고린도후서 5:7에서는 현재의 삶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 본문들을 생각하면 믿음과 희망의 현재 모습이 달라질 수 있지만, 고린도전서 13:13 자체는 그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
우리는 일부만 압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의 지식을 다른 사람보다 더 믿는 사람도 아직 일부만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 자신도 그 상태를 벗어나 있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을 잘못 이해할 수 있고, 내린 판단에 아직 모든 사실이 담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오래 참음과 친절, 시샘하지 않음과 우쭐대지 않음은 일부만 아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행동들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진리를 대신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진리 전체를 이미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왜 사랑을 은혜의 선물 목록에 추가하지 않았을까요?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다를 수 있고, 바울은 모든 사람이 같은 선물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상태를 정당화해 주는 은혜의 선물은 없습니다. 사랑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받은 선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보여 주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이루는 도덕적 성취인 것은 아닙니다. 바울에게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구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놀라운 소리로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말뿐 아니라 천사의 말까지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 소리는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심벌즈와 같았습니다.
이제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물건을 손에 든 사람처럼 이야기합니다.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는 무엇인가 비치지만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고, 하나님의 지혜에 관해 가르친 사도가 「지금은 내가 일부만 알지만」이라고 고백합니다. 처음의 사람은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을 갖추었습니다. 마지막의 바울은 자신이 일부만 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거울을 깨뜨리거나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듯 보지만, 그것이 마지막 모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일부만 압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분적인 앎의 자리에서도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을 베풀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지금에도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해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